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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유산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송태욱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6월
평점 :
엄마가 싫어? 이런 물음을 던지며 앞으로 한 달, 두 달, 그렇게 오래 산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죽지 않는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집 안은 온통 솜먼지투성이고 빨랫거리도 계속해서 쌓였다. 이마와 목덜미에 난 흰머리를 해나로 염색할 시간도 없이 이미 피로로 몽롱한 채 살고 있는데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젊은 여자와 동거하는 남편이 있고, 그 남편과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엄마, 대체 언제쯤 죽어줄 거야? 마음속에서 소리쳤을 뿐이지 실제로 소리내서 외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p.256
엄마의 죽음이 바로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왜 엄마가 죽지 않을까. 대체 언제쯤 죽어줄 거야..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 딸이라니... 이들 모녀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대 일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미즈무라 미나에의 장편소설 <어머니의 유산>을 읽었다. 미즈무라 미나에의 작품은 아주 오래 전에 <필담>과 <본격소설>이 국내에 소개되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십오년 여만에 신작이 국내에 출간되어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실버타운에서 얼마를 돌려받을 수 있는지를 따져보는 자매의 통화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실버타운의 반환표와 장례식장의 견적서가 놓여 있는 책상 앞에서 언니와 여동생은 엄마가 남긴 돈을 계산해 보는 중이다. 어머니가 마침내 죽었다는 흥분, 어머니로부터 해바오디었다는 기쁨을 만끽하는 자매의 대화는 담백하지만, 어딘가 서늘하다. 어머니에게 휘둘리는 사이에 살아갈 욕망이 눈에 띄게 시들었고, 월경도 불규칙해지는 등 건강도 나빠진데다, 동생인 미쓰키는 남편과의 문제도 있었다. 대학의 안식년 휴가를 얻어 베트남에 머물고 있는 남편이 미쓰키보다 젊은 여자와 연애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거다. 그렇게 미쓰키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이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런대로 좋은 환경에서 자랐고, 파리 유학도 다녀왔으며, 남편은 대학교수이고, 자신도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그런대로 괜찮은 삶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늙어서 무거운 짐이 되었을 때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지 않을 수 있는 딸은 행복하다. 아무리 좋은 어머니를 가져도 수많은 딸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는 순간쯤은 찾아오는 게 아닐까... 게다가 딸은 그저 어머니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 아니다. 늙음의 끔찍함을 가까이서 직접 보는 고통 - 앞으로의 자기 모습을 코앞에서 보는 정신적인 고통에서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게 아닐까. 젊을 때는 추상적으로밖에 알지 못했던 ‘늙음’이 두뇌와 전신을 덮칠 뿐만 아니라 후각, 시각, 청각, 미각, 촉각 모두를 덮치는 것이 또렷하게 보인다. 그것을 향해 살아갈 뿐인 인생인 것인가. p.491
상류사회를 열망했던 어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사치를 좋아했다. 게다가 서구의 귀족 문화를 동경하며 저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기를 꿈꿨고, 그러한 욕망은 딸에게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어머니의 욕망을 그대로 투영한 삶을 충실히 살아온 언니,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소설처럼 살길 바랐던 외할머니, 그 속에서 이들과는 다르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미쓰키였지만, 그녀의 삶 또한 그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쓰라가 삼대는 평생 꿈을 꾸며 살아간다. 아름다운 것에 집착하고 고상하고 향기로운 세계를 부나방처럼 좇는다. 분수도, 만족도 모른다. 딸들은 아버지에게 지독한 아내였던 어머니를 싫어했지만, 병실에 갇힌 어머니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이 끝장났다는 불행에 미쳐 날뛰는 어머니를 보살피고, 받아주는 것 또한 수월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남자를 만나고, 늙고 병든 아버지를 병원에 처넣었던 어머니를 어떤 자식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서로에 대한 원망을 대놓고 드러내는 모녀 관계는 끊어지지 않고 지속됨며 여러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좀 독특하게 설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늙은 부모를 보살피는 것에 대해, 돌봄 노동과 모녀 관계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누구나 언젠가는 '늙음'이라는 짐을 가지게 된다. 미즈무라 미나에는 가족 관계에 대해, 그 중에서도 모녀 사이의 역학 관계에 대해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인간이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통찰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유산이라는 것이 재산이라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만들어 준다. 누구나 언젠가는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현실이라는 점이 더욱 마음 한 켠을 서늘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남다른 여성 삼대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