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쉽게 배우는 인류 진화사 사피엔스 - 약해 빠진 인류의 눈물겨운 생존 이야기
김지영 옮김, 하세가와 마사미 감수 / 제제의숲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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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3학년인 아이가 최근에 학교에서 인류의 진화와 관련된 내용을 배우고 와서는 관심이 생겨서 책이며, 영상을 찾아 보는 중이다. EBS의 다큐 '사라진 인류' 편은 수십 번을 돌려 봐서 영상의 내용을 줄줄 외울 정도인데, 초등학생이 볼만한 책 중에 진화를 다루고 있는 책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성인들이 읽을 만한 진화론 관련 책은 엄청나게 많은데 비해, 왜 아이들을 위한 관련 책은 별로 없는 걸까 아쉬워하던 찰나에 딱 알맞은 책을 만났다.

 

바로 40억 년 인류 진화의 역사를 만화로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 책은 최초의 생명 탄생부터 현재의 인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700만 년 전에 등장한 인류의 조상은 강한 신체도, 날카로운 이빨도, 몸을 보호해 줄 털도 없는 벌거숭이로 약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들은 현재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인류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류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살아 남게 된 걸까. 이 책은 아주 흥미로운 시선으로 진화론을 설명해 준다. 인류가 강해서가 아니라 약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아주 먼 옛날 인류의 조상들은 연약했기 때문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궁리하며 끊임없이 진화했고, 그렇게 힘겹게 살아남은 덕분에 지금의 우리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유머러스한 그림체의 만화로 인류 진화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지만,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꼭 필요한 내용들을 모두 수록했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가 잘 되어 있다. 다세포 동물, 어류, 양서류로 이어져 영장류, 유인원, 호모속(원인,구인)에 이르는 히스토리를 시대별로 정리해 각 장마다 표기했고, 오른쪽 페이지 모서리에 선캄브리아 시대부터 고생대 여섯 가지, 중생대 세가지, 신생대 세가지로 시대를 구분해 둔 탭이 있어 책의 내용을 읽을 때마다 그게 어떤 시대에 해당되는지를 바로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한참 인류 진화에 관심이 생긴 아이는 이 책을 받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완독하고, 벌써 서너 번 넘게 계속 읽고 또 읽는 중이다. 그만큼 아이가 호기심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많고, 내용 자체도 재미있지만 주요한 내용들이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어서 좋았다. 각각 인류의 조상들의 모습을 시기별로 특징과 함께 자세히 소개하고 있고, 어떤 약점이 있었으며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도 알려준다.

 

 

대부분 백악기의 끝무렵에 일어났던 거대 운석과의 충돌로 인해 공룡들이 멸종했던 시기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량 멸종은 지구 역사상 여러 차례 일어났었고, 그 중에서도 규모가 큰 다섯 번의 멸종이 있었다. 오르도비스기 말, 무척추동물과 삼엽충류가 멸종되었고, 데본기 후기 바다의 생물들이 멸종되었고, 페름기 말 바다 생물과 육지 생물이 거의 96퍼센트, 괴멸 상태가 되었고, 트라이아스기 단궁류가 멸종, 그리고 백악기 말에 이르러 새 이외의 공룡이 멸종되었다. 그렇게 3억 년 동안 일구었던 생태계가 한순간에 날아가버리고, 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앞으로도 진화의 역사는 계속 될 테고, 1만 년 후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다가올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이 책에 나온 것처럼 각종 멸종 위기에 처했던 우리 인류의 조상들처럼 변화에 대처하고,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한다면 새로운 진화의 역사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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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말리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이 웃긴 철학책 -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법
스콧 허쇼비츠 지음, 안진이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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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은 권리와 의무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사실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항상 자기 권리만 내세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남들이 자기 물건에 손대지 못하게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해도, 적어도 가끔은 자기 것을 나눠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친절과 배려다. 아이들이 친절과 배려라는 덕목을 획득하면 권리의 중요성은 감소한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을 키울 때는 여러 형태의 도덕성 교육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가 권리에 관한 질문으로 여정을 시작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p.72

 

미시간 대학교에서 법학 및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스콧 허쇼비츠에게는 렉스와 행크라는 두 아이가 있다. 아이들은 만 세살 때쯤 철학적 의미가 담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은 그게 철학인 줄 몰랐지만 말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 엉뚱하지만 매우 진지한 철학적 대화를 하기 시작했고, 허쇼비츠는 자신이 가르치는 법철학 수업에서 종종 그 일화를 이야기하고, 토론하며 강의를 진행했다. 어떤 의미에서 아이들은 어른보다 나은 철학자이고,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철학을 하게 되면 철학은 세상에서 제일 쉽고 재미있는 놀이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 책에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아이가 던지는 질문들과 아빠와의 대화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은 종종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어른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참신성과 독창성'을 발휘한다.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기 원하는 아이들은 '왜' 라는 질문을 달고 사는데, 덕분에 아이들은 어른보다 나은 철학자가 될 수 있다. 아이들은 어리석게 보일 것을 걱정하지 않고, '진지한 사람들은 그런 질문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책에서 보여주는 스콧 허쇼비츠의 두 아이의 대화들은 권리와 복수, 처벌, 권위, 젠더, 인종 등 묵직한 주제들을 탐색하고 있지만 엉뚱하고, 유쾌하고, 재미있다. 현대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수수께끼의 하나인 전차 문제와 아이가 탄산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권리가 함께 다루어지고, 아이들의 다툼에서 비롯된 처벌로 시작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의 개념으로 연결된다. 아이는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지고, 아빠는 문제의 새로운 측면을 바라보기 위해 밑바닥부터 다시 생각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아이가 대답하기 난감한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수록 그 과정은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애초에 물리학 법칙들은 왜 존재하는가? 아무것도 없으면 왜 안되는가? 이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거창한 질문이 아닌가 한다. 어쩌면 세상의 존재를 설명할 길은 없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냥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내가 틀렸고 신이 수수께끼의 열쇠일지도 모른다.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 정도로 강한 주장에 책임을 질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의심한다. 그리고 나의 의심을 의심한다. 그건 철학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습관이다. 그리고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길러주려고 노력하는 습관이다.              p.488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아이가 신발을 신지 않으려고 한다고 생각해 보자. 사실 그런 일은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그럴 때 아이가 떼를 쓰며 왜 신발을 신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부모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발을 보호해야 하니까, 발에 더러운 것이 묻으니까, 어디를 가든 신발을 신는 것이 사회적 예의니까,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냥 시키면 해, 혹은 내가 하라면 해, 라는 식으로 대답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허쇼비츠는 여기서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아이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을까? 라고 말이다. 대개의 경우 '권위'는 일방적이지만, 이렇게 권위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면 그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허쇼비츠는 철학적 질문이 결국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며 좋은 삶을 이끄는 '생각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크로스의 600P 클럽으로 스콧 허쇼비츠의 <못 말리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이 웃긴 철학책>을 3주에 걸쳐 차곡차곡 읽었다. 600P 클럽으로 책을 읽게 되면 '리딩 가이드'를 통해 매일 읽을 분량을 체크할 수 있고, 각 챕터별로 흥미로운 미션들도 있어 더욱 깊이 있게 책을 만날 수 있다. '만약 부모가 규칙을 엉터리로 만든다면, 아이들은 부모의 권위를 거부해도 될까요?'라든가, '무한한 우주에서 우리의 존재가 대단하지 않다는 자각과 우리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요?'라는 식의 미션 질문을 통해서 책의 여러 측면들을 더 다채롭게 이해하고, 사유할 수 있어서 특히 더 좋았다. 그리고 이 책의 장점을 따지자면 이미 너무 많지만, 제일 멋진 건 누구라도 철학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에 대한 문턱을 낮추고, 무거운 문제들도 유쾌하고 재치있게 풀어내고 있는 책이니 말이다. 이 책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바라보지 않도록 만들어 주고, 타인이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세상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일상의 가장 평범한 것들의 표면 아래 숨겨진 신비와 불가사의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철학이 얼마나 쉽고 재미있는 것인지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허쇼비츠가 서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른의 감수성을 잠시 내려놓고, 이 책을 읽어 보자. 세상에서 가장 웃기고 재미있는 철학을 통해 아이들이 세상에서 느끼는 경이를 다시 느껴보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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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시장, 각오가 필요하지 텍스트T 6
김혜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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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달랐으면, 그 왕 노릇을 잘했으면 상황도 달라졌겠지. 근데 그래서, 그게 뭐? 지금의 너는 이렇고, 그게 너야."
사실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내게 주문이 걸려 있지 않았다면 시장 밖에선 눈치 볼 일 없었을 거고 시장에선 쫓길 일 없었겠지. 하지만 그런 상상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 지금의 내가 나다.            p.136

 

열다섯 소녀 모라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다. 모라의 등을 밀면 상대가 튕겨 나가고, 누군가 모라에게 물건을 던지면 코앞까지 날아온 물건이 되감기 하듯 도로 상대에게 날아가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모라는 그 동안 누구도 쉽게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못하고, 늘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했다. 이제야 그 모든 일들이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걸어 놓은 반사의 주문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모라는 엄마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엄마가 있다는 곳은 바로 '남대문시장'이었다. 엄마는 그곳의 물품 보관소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은 우리가 사는 이쪽 세상이 아닌, 저쪽 세상이었다. 겹쳐져 있지만 서로 다른 쪽을 느끼지 못하고 따로 존재하는 두 세상, 그 두 세상이 통하는 일종의 교차로가 시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치 해리포터의 킹스 크로스 역 9와 3/4 정거장처럼 모라는 회현역에 내려 바닥에 표시된 특별한 안내판을 보고 그곳을 찾아가게 된다.

 

엄마는 어떻게 생겼을까, 왜 엄마는 저쪽에, 아빠와 나는 이쪽에 살고 있을까, 이쪽과 저쪽은 얼마나 다를까, 모라는 궁금한 게 많았다. 무엇보다 모라는 엄마가 걸어 놓았다는 반사의 주문을 없애고 싶었다. 엄마가 주문을 풀어 준다면 원래의 세상에서도 이상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감추며 자신을 눌러야 했던 모라는, 시장에서 더 이상 감추거나 숨지 않는다. 시장에 처음 도착한 그 순간부터 엄청난 소동에 휘말리게 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권력의 암투 속에서 죽은 자로 살아야 했던 선왕이 시장에서 나갈 수 있도록 돕고, 약장수들과의 거래에서 실패해 아버지의 약을 살 수 없게 된 아이를 도와주고, 함께 움직이게 된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서 나선다. 그리고 그 모험은 모라를 조금씩 성장시킨다.

 

 

시장은 주고, 받는 곳. 우리는 대가를 치렀고 지금을 얻었다. 그리고 나는 이 지금이 좋았다. 마음껏 싫어하고, 좋아하고, 믿고, 의지하고, 화를 내고....... 참았던 것을 다 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나는 압력 밥솥과 같지 않았다. 여기선 끓는 걸 참을 일이 없어서였다. 그냥 끓고, 넘치고, 불이 꺼졌다 켜지고, 계속 그랬어서. 다 끓고 난 내 속은 잔잔했다.             p.233


주로 청소년 소설과 판타지 동화를 쓰는 작가이지만, '김묘원'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던 <고양이의 제단>이라는 미스터리를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작품에서도 십대 소녀들을 주인공으로 생생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여주었는데, 이번 작품의 십대 주인공들 역시 개성 넘치는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엄마를 만나 주문을 풀기 위해 남대문시장에 간 모라는 살아 있으나 죽은 선왕과 엮이면서 각자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쫓기게 되는데, 숭례문에서 남대문시장까지, 가장 한국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판타지가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표백제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색이 바래 유령처럼 보이는 사람인 껍데기들이 휘청휘청 걸어 다니고, 그림 속에 있는 까치가 말을 하며,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하기도 하며, 비싼 건 싸게 팔고, 싼 건 비싸게 파는 이상한 장이 열리는 기이한 그곳에서 모라는 엄마를 무사히 만날 수 있을까.

 

 

청소년 소설이라는 카테고리로 가둬 두기에는 완성도 높고 짜임새 있는 판타지 소설이다. '이쪽'의 남대문시장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익숙한 장소이지만, '저쪽'의 남대문시장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채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는 특별한 공간이다. 시장에서의 엄청난 모험이 모두 끝이 나고 나서야 모라는 반사의 주문이 자신을 세상 전체로부터 보호하는 주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동안 자신이 보호받는 줄도 모르고, 거기에 담긴 엄마의 진심도 모르고 살아 왔던 것이다.

 

시장은 무언가를 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곳이었고, 모라와 친구들은 대가를 치르고 지금을 얻었다. 시장에 오지 않았다면, 낯선 이의 부탁을 거절했다면, 이 모든 고생을 하지 않았겠지만, 엄마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저 원망하며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모라는 그렇게 자신을 보호해주던 반사의 주문 아래에서 살 때는 절대로 느낄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끼며 성장한다. 작가는 새로운 신화를 쓰고픈 마음에서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신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소년 대신, 어머니를 찾아가는 소녀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것이다. 엄마에게서 받은 주문을 없애고,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스스로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모라의 모습에서 새로운 신화의 탄생을 느낀다.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장소, 이 매혹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모험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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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 일기 - 시간 죽이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2
송승언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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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삶으로 대하라는 권유. 나는 그 권유를 충실히 받아들였다. 나는 <레드 데드 리뎀션 2>를 하는 내내 즐겁지 않았다. 어떤 재미있는, 신나는, 멋진, 잘 만든 게임들을 할 때 느끼는 즐거움을 <레드 데드 리뎀션 2>를 하면서는 얻지 못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나는 이 게임에 몰입했다. 이 게임을 하는 동안 나는 잠시나마 서부 시대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 앞서 말한 '게임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거기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일은 꽤 복잡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악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p.36

 

김희선 작가의 <밤의 약국>에 이은 핀에세이 두 번째 작품이다. 송승언 시인은 '나는 정말로 오타쿠가 아니다'라고 '오타쿠가 될 만큼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고 단언하며 이 책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 뒤로 몇 페이지만 읽어 보아도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게임과 애니메이션, 웹툰, 영화, 드라마에 대한 취향의 나열로도 모자라 RPG게임을 위해 팀 모임을 할 정도이니 누가 봐도 오타쿠잖아 싶을 테니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여타의 '덕질'을 소재로 하고 있는 책들이 열정과 뜨거움으로 버무려져 있는데 비해, 송승언 시인의 덕질은 대상과 서늘한 거리를 유지하고,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딱 표지 일러스트 속 주인공의 시니컬한 표정처럼 말이다.

 

이 책은 게임 편, 애니메이션 편, 웹툰, 영화, 드라마 편, 그 밖의 취미 편으로 챕터를 나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세상에 수많은 게임들 중에 제대로 해 본 게 몇 개 안 되는 나로서는 게임 편에 대한 글들은 거의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면서 읽었다. 각각의 게임들에 대한 장단점과 특이점에 대해 디테일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들 게임을 해봤거나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게임들이 거의 다였기에, 조금 어려웠다. 그나마 애니메이션으로 가면 조금 상황은 나아지는데, 그래도 애니메이션을 막 챙겨보는 편은 아니라서 작품에 대한 집요하고도 치밀한 분석들이 호기심을 유발시키진 못했다. 이어지는 웹툰, 영화, 드라마와 그 밖의 취미 편으로 가면 읽기가 조금 수월해지는데, 읽다 보면 또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송승언 시인은 오타쿠적인 부분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대체 왜 자신은 오타쿠가 아니라고 하는 걸까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 한편 약간은 꼬인 상상을 해볼 수도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까닭은 행복하지 않을 자유 또한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떨 때는 숨 쉬는 것만으로도 피곤한 게 삶인데, 행복을 열심히 좇지 않을 자유마저 없는 세상이라면 불행이라는 단어보다 더 불행한 단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왜 갑자기 분수에도 없는 행복 타령을 하고 있는 걸까. 행복이 의무인 세계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참이기 때문이다.           p.263

 

이 책을 구매하면 <송승언의 덕후 외전-내가 만난 유령들>이라는 미공개 에세이를 담은 얇은 책자를 받을 수 있다. 기이하고 으스스한 존재인 유령은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가끔 그 기운을 느끼게 한다. 시인은 이 글 역시 '어릴 적부터 유령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는 부정의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유령 따위 존재할 리가 없다는 그의 생각에 상해를 입힌 사건이 있었다고 하니 더 흥미로워졌다. 여기 수록된 글들은 그가 유령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한 여러 결과물 중 일부라고 한다. 야광이라 밤이면 녹색으로 빛나는 레고 블록 세트 '마법의 성', 게임팩 대여점에서 빌려 결국 악몽으로 남아 있는 게임 '고스트버스터즈', 그 외에도 유령과 관련된 게임, 영화에 관한 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히려 본 책보다 이 작은 책자에 담긴 외전을 더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유는 내가 유령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개인의 취향이 있고, '덕질'은 보편적인 사회 현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인데, 이런 방식의 덕질도 있구나 색다른 기분으로 읽었던 작품이다. 시인의 방대한 취미의 편린이 담긴 모험일지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그다지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덕질은 바로 그렇게 누군가한테는 쓸데없고, 쓸모 없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탕진하는 데 진심인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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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아무도 없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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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참석한 파티장에서 도난 사건이 벌어지다니. 어찌되나 싶었지만 무사히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어려운 사건들을 수없이 해결해온 Q의 체면을 유지했군. 어휴.'
명탐정의 명성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명탐정이 되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런 의미로는 고독한 인생이었다. 보랏빛 연기가 바람에 일렁거리며 밤의 어둠에 녹아 들어갔다.          - '명탐정 Q 씨의 휴가' 중에서, p.87

 

여러 직업을 가진 여섯 명의 사람들이 해적섬 투어에 초대된다. 중의원, 행로사 사장, 영상 크리에이터, 시스템 엔지니어, 요양 시설 사장, 모델, 이들은 배를 타고 외딴 섬에 도착했다. 호텔에는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고용된 부부가 있었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모두 다이닝에 모인다. 그때 어디선가 그들을 향해 컴퓨터로 합성한 소리가 들려 온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모두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입니다.'로 시작된 그 목소리는 모인 사람들 모두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회피해왔기 때문에, 법관을 대신해 자신이 궁극의 벌을 내리기로 했다고, 목숨으로 죄를 갚으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스피커에서는 그들 각각이 저질러온 악행에 대해 비밀들이 폭로되기 시작하고, 해적섬에 모였던 여덟 명은 다음날 아침 일곱 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렇게 한 명씩 알 수 없는 이유로 죽기 시작하는데, 이 작품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아리스가와 아리스 식으로 재해석한 표제작이다.

 

이 책에는 그 외에도 루이스 캐럴의<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에도가와 란포의 <소년 탐정단 시리즈>를 패러디한 이야기들을 비롯해 미스터리 콩트, 다크 판타지, 블랙 코미디 호러, 괴수 소설, 타이포 그래픽션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분량도 제각각인데 초단편처럼 아주 짧은가 하면, 표제작처럼 중편 이상의 분량인 작품도 있다. 작가의 후기도 수록되어 있어 각각 작품의 집필 과정이라던가 배경에 대해 만날 수 있다.

 

 

 

"이 섬은 지옥이지만, 섬 밖도 지옥이 될 것 같네요. 덴스케가 말한 내용은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지만 분명 폭로될 거예요."
하루야마는 울적한 표정으로 유리잔에 와인을 반쯤 따라 가느다란 목을 젖히고 마셨다. 이어서 에노키가 맥주를 마시려는데 그 입술이 캔에 닿기 직전에 하루야마의 유리잔이 가녀린 손에서 굴러떨어졌다. 유리잔은 바닥에 부딪쳐 붉은 액체가 카펫 위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하루야마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털썩 쓰러졌다.        - '이리하여 아무도 없었다' 중에서, p.378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소설집이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들은 국내에도 꽤 많이 소개된 편인데, 신간이 나온 것은 오랜만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중에는 테마를 받아서 쓴 소설도 있고, 분량 제한 없이 자유롭게 쓴 소설도 있다. 짧은 작품은 두 페이지, 긴 작품은 중편이라 할 정도라고 한다. 자유롭고 비범한 인상을 마음껏 펼치고 있어, ‘아리스가와 아리스 소설의 견본집’이라 할 수 있다고 하니 그의 작품을 재미있게 읽어 왔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리스는 추리소설의 발전에 공헌한 작가에게 주어지는 ‘일본 미스터리 문학 대상’을 2023년 올해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에 수록된 14편의 작품들을 통해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가가 보여주는 장난기 있고 스타일리시한 매력이 가득한 이야기 세계를 경험해보면 어떨까.
 
작가 아리스 시리즈와 학생 아리스 시리즈를 좋아했다면 이번 작품 역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해 온 작가의 저력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라,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종합선물세트같은 느낌도 들 것이다. 무더운 여름, 제대로 된 미스터리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이 작품과 함께 시원한 이야기의 미로를 즐겨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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