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로 가는 길
박재완 지음 / 연암서가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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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영역을 옮기는 것이라고 했다.


한 번도 지나친 적이 없는 허공의 길을 내고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는 영역을 구축하는

그들의 무소유는 하늘의 크기를 닮았다.


세상에도 기적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기적이 없는 세상에서 기적을 바라는 꿈'<각주1>을 꾸다가

홀연히 이 생의 영역에서

저세상의 미지의 영역으로 꿈을 

옮기는 거라 했다.


잔잔한 물결이 그들만이 그려내는

지적도와도 같고

일렁이는 바람에 영원을 담은 곡선의 흐름은

새들의 날개에서 떨어진 깃털에 뭍은 그림자로

천국으로 인도하는 초서체 문자를 쓴다.


생명이 가끔은 지난한 우울이 판을 치고

오늘이 어제와 한판의 지루한 힘 겨루어 번번이 깨지더라도

우리는 다만 새들이 옮겨 다니는

저 영역 속으로 상상만 해도 썩 나쁘지는 않겠더라.


나는 새가 울어 대는 바람 담긴 소리를

따라가고 있다.



"각주 1 : 산사로 가는 길, 박재완,연암서가, 201605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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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꼭 구구절절 장황한 느낌으로 나열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정석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리뷰는 글 몇 줄로도, 혹은 사진 몇 장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정해진 법률도 없는데 자기 꼴리는데로 주물럭이랍시고 꾸워 먹고 응용이라도 해볼 요량이다. 이상하게도 뭐든 "반드시라든가 또는 꼭 이런 스타일로 해야 한다"라는 조건이 걸리면 반항하고 싶어지더라.


리뷰 짧다고 테클 걸 일도 전혀 아닐 것입니다. 리뷰의 형식은 자유로울수록 편안하게 불 수 있으면 그만이란 생각합니다.이 책 꼭 제스타일의 문장이라서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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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9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9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깊이에의강요 2016-05-29 09: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진 넘 좋아요♥

yureka01 2016-05-29 13:10   좋아요 1 | URL
^^ 감사합니다.^^...
알라딘은 책이 우선이다보니 사진블로그로는 최적화가 어려워서
사진은 많이 올리지 못했어요.
사진이 너무 작게 나오니.....아쉬워요...

2016-05-29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6-05-29 14:14   좋아요 2 | URL
ㅎㅎㅎ네 너무 길어도 읽기에 시간이 많이 걸려야 하는 단점도 있고.그렇다고 말씀하신것 처럼 남발하는 것도 볼썽 사나울 때가 있습니다.뭐든 과유불급이라서요.저도 하루에 5편 6편씩 다량 포스팅은 지양하는 편입니다.2ㅡ3개가 적당할듯요.ㅎㅎㅎ

cyrus 2016-05-29 14:17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A4 1장 채우는 분량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알라딘 서재 활동 초창기에 무식하게 두 장 이상 썼습니다. 그때는 분량이 많아야 뭔가 있어 보인다고 착각했어요. 이제 북플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글 쓰는 방식에 변화를 주려고 합니다. ^^

yureka01 2016-05-29 14:21   좋아요 2 | URL
그럼요..리뷰형식도 다양화되면 더 재미있겠다 싶어서....택스트, 사진...또는 그림, 그래픽등 책에서 받은
느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응용해보는 것도 좋을듯합니다.
(물론, 텍스트형식을 벗어나면 리뷰 당선이 안되겠지만 ㅋㅋㅋ뭐 당선될려고 리뷰하는게 아니라면^^)
하여간 뭐든 새롭고 창작적이고 조금 다른 리뷰 만나고 싶더라구요..ㅋ^^...
 
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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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1

알라딘 문고에서 책을 예약 주문을 하고 책을 읽어 보기도 전부터 이글을 쓰게 되었다.

(이 책은 읽어 보기도 전부터 설레발을 치게 되는 오버적인 상황의 심리라면 얼마나 개인적으로 빨리 받아 보고 싶은 마음을 짐작하셔도 좋다.)

 

며칠 전 트위터로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내려놓는다는 글을 보고 정치가로서의 실패를 느꼈다. 그러나 정치가로서 실패가 반드시 정치 인생의 좌절이라던가 인생 자체를 실패하지 않았다고 서두부터 이야기하고  싶었다.

2003년도 국회의원이 당선이 되어 국회 첫 등원해서 의원 선서할 때, 그는 캐주얼 정장에 백바지의 기억이 뚜렸하게 각인이 되었음을 기억한다. 국회 모독이라며 동료 의원들이 소리 지를 때, 뉴스에서 비친 그의 모습은 의외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오. 웬걸! 저 사람 딱 내 스타일인데!!'라는 생각이 먼저 스쳤을 만큼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틀림이 아니라 다름'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러하다. 국회를 모독했다는 듯이 볼썽사납다는 야유와 함께 딱딱한 정치판에서 그의 의상에 대한 일탈(기존 정장에서의 일탈)이 내가 보기엔 즐거워 보였다. 사실 국회법 어디에서 국회 출입시에 정장만 입어야 출입이 가능하다는 조항이나 국회의원의 의관 정식 규정이라는 규칙이라고 있다면 그곳에 국회의원은 반드시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조항도 어디에도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복식 규정이 없다는 말이다. 정치란 그저 엄숙하고 근엄해야 한다는 그 특유의 선민의식과 엘리트 의식, 우월의식이라는 중압적 이미지에 덧칠된 국회에 첫 등원이 '백바지'라니? 난 개인적으로 백바지 안 백구두가 더 어울린다고까지' 한술 더 뜬 생각도 들었다.

 

분명히 하자. 그는 ""틀린(법률적으로도) 게 아니라 다른 거""였다. 예를 들어 그가 국회에 나갈 때 팬티 바람으로 나갔다면 엄밀히는 민법상 풍속법의 경범죄 단속 대상이 될 수도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건 위법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며 더구나 누군가에게 재산적으로나, 신체적 위해를 가하는 나쁜 짓도 아니다. 그런데 모독했다고 난리였다. 단지 국회라는 이미지 혹은 그 체면에 백바지로 인해서 손상된 관념적 손해를 입었다는 기분일 뿐이다.

백바지가 누군가에게 생명의 위협이라도 되었던가. 혹은 백바지가 국회 의정 활동에 심각하게 방해한 객관적 피해자가 있었던가라는 절박한 사유는 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간혹 미국이나 기타 다른 나라의 국회에서 근무복장이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국정을 돌보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회에서는 반드시 정장이 아니면 안 된다는 중대한 이유를 가진 인식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차원에서 접근해 본다면 아주 재미나는 인간의 심리적 행태적인 물음이 앞선다.

 

그럴지도 모른다. 의전적인 행위에 첫 번째가 의복에 대한 상징성이 더하였다면 그의 다소간의 일탈이 야유가 아니라 신선하게 받아들여진 나의 성격도 알게 모르게 질타보다는 박수를 보낸 생각이 떠올랐다.

 

하기야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국호와 정권과 나라의 시스템이 바꿨다고는 하지만, 조선 500년 동안의 기득권을 가진 양반님네들이야 한여름에도 두루마기와 도포를 입고 땀을 흘려야 했던 격식과 체면이 목숨보다도 중요한 가치적인 관념이 아직도 곳곳에 승계되어 오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지금의 국회라는 곳의 구성원들도 국회의 가식적인 권위와 격식과 체면 앞에서 감히 백바지를 입고 나타났다는 정형화된 오래된 바위 같은 사고의 그 틀을 깨어지지가 못 했던 것이 아니고서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맹신적인 믿음이나 의문을 달지 못하는 맹목화된 가치와 사고는 논리적인 힘이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것이고 보면 국회라도 달리 말할 것도 못된다. 아무리 합리적인 이유로 논쟁한다 하더라도 굳어버린 인식은 지구의 중량만큼이나 무겁고도 견고하다. 그런데 이 무거운 인식의 믿음을 깨라는 것은 아마도 양반의 격식과 체면 때문에 생사조차 거부한 가치와 견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기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나이가 들수록 격식은 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공고히 되고 나이가 들수록 믿음이 회의하는 것이 아니라 석고처럼 딱딱히 굳어져 간다는 고대 철학자의 선구적인 격언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구로써 작용해야만 하는 이유가 어찌 보면 2013년 대한민국 현재의 서글픈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이런 자화상을 그려 놓고 백날 새로운 창조적이고 다름의 가치가 힘을 얻으며 아이들에게 창조력을 함양하고 배양해서 세계를 새로운 가치의 선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들 배반과 모순을 매일매일 겪고 있는 현실이 우울할 뿐이다.

 

이제 그의 정치 실험적 역정은 '직업으로서의 정치가'를 내려놓았다고 선포하였다. 그러면 다른 말로 '직업적이 아닌' 일반 시민으로서의 정치는 멈춤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일반 시민으로서의 정치'는 계속 되어만 할 것이고 보면, 여하튼 일반 시민으로서의 정치라는 게 별 것도 없다. 선거일 되어서 투표하고 일반 시민으로서의 정치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정도는 누구나 다 국민이라면 할 수 있는 그런 권리까지 내려놓았다는 말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정치적인 노하우는 결코 사장되어 버려서는 안될 소중한 정치적인 자산인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백바지와 직업으로서의 정계은퇴가 서로 오버랩되었던 해석에서도 흥분이 되었다.

 

그는 은퇴하면서 책을 출간한다는 소문을 듣고 책이 나오기 전부터 주문을 넣고 기다렸다. 마치 블랙버스터급 영화의 예고편을 보고 기다리 듯이, 고대하던 주말 드라마를 기다리듯이 책이 빨리 나오기를 기다리는 독자의 심정으로 책을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그의 이미지에 대한 첫 생각이 백바지였고 그리고 책이 나오기도 전부터 이 글을 써 내려가고 싶었다.

 

특히, 그의 저서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식의 아우라와 함께 다양하고 깊은 지식, 치밀하고 논리적인 글의 주장의 문체, 그리고 문제에 대한 짙은 호소력 있는 글의 힘을 느낀다면 이번 책은 그의 감성도 엿보일 수 있는 그 특유의 예리한 감각이 왠지 책에 그대로 녹여져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이랄까.... 이런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틀의 괘변을 그의 책으로 정리하는 마음이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2013.02.26

근무 중 택배기사의 배달로 지난주에 주문한 책을 받았다. 책이 궁금해서 흥분 조금 섞인 동요가 일어났다. 퇴근시간이 되어 집으로 곧장 가서 저녁밥도 먹지 않는 채로 바로 책을 펼쳤다.

 

그의 문체가 전체적인 시작과 끝의 맥락을 우선 파악하고자 우선 목차와 프롤로그, 에필로그를 읽었다. 역시 그의 문체는 논점의 힘을 느끼게 된다. 우선 첫 느낌은 시작과 끝의 글에서 정치인으로서의 딱딱한 문장이 아니라 느낌이라는 감성적인 문투와 흡사 개인의 일기와도 같은 자신에게 고백하는 자신에게 보내는 진술서 <<이 분이 또 진술서 하나는 소설처럼 써내는 유명한 경력의 필력을 가졌다.>> 내지, 자기 고백서 한 권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대게가 보통 이런 글은 어떤 학문적인 이론이나 논문처럼 굳어진 문장체가 아닌 것이 일반적이라서 이번 책은 에세이 성격의 문장과 형식으로 자신으로 그간의 과정에 대한 소회와 그리고 앞으로 남겨진 삶에 대한 방향성을 지향하는 바가 어디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결국 어떤 과정을 자기 주체적으로 거치며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결국 우리 모두 마지막을 부인할 수 없다면 의연하고 담담해지기를 권하며 오늘, 지금, 이 순간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정치인으로서 그동안의 영광과 실패와 좌절, 연민과 분노, 이것에 대하여 이젠 그 자신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새로운 삶의 과정으로 전이하고 변화하려는 시도이자, 자신과의 다짐이며 노력하고자 함을 엿볼 수 있었고 그런 각오를 만날 수 있었다.

 

남자의 나이 사십 대, 어쩌면 나는 그렇게 정의하였다. 남자의 나이 마흔은 더 이상 국가에서 불러주지 않는, 신체적인 나이이고 더 이상 국가적인 의무에서 해방되는 나이이자, 심리적인 폐경이자, 법률적인 의무에서 자유라고 여긴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련시간에<<그때는 교련이라고 하는 군사훈련이 있었다>> 모형 총으로 총검술을 하고 제식훈련을 하고 대학 때는 방학이면 일주일 이 주일씩 병영생활로 교련 학점을 이수하며 교련복을 입고 독도법을 해야 하고 사격술에 대한 강의를 듣고 총검을 분해 조립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군대 입대하여 3년간 총 들고 근무를 서고 훈련을 뛰고 유격을 받아야 했으며 제대 후에는 동원예비군으로 지역 군부대에서 예비군으로 지내야 하고 이후는 향토예비군으로 지역에서 총을 들어야 했다. 이게 끝나면 다시 아침마다 점호 받았고 몇 개월에 한 번씩 출석을 하고 민방위 훈련이 있는 날이면 생업에 종사하다가도 훈련복과 완장을 차고 거리에 서 있어야 하는 그런 의무가 끝나는 시점이라는 마흔 중반이라는 나이이다.(그는 이제 오십 중반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자는 더 이상 국가로부터 부름을 받는 의무에서 해방이 곧 심리적인 폐경은 아닐까 싶었고 '넌 이제 앞으로는 신체적으로는 국가에서 필요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어'라며 젊음의 실종 딱지가 붙는 나이니까 말이다. 흔히 가임 여성이 출산의 역할을 종지부 찍는 때가 폐경이고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불임적 상황과 경우는 다르더라도 의미적으로는 비슷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남자는 문득 그런 마흔이란 나이에 자신의 모습을 아침에 바라보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에서 발견하고 인식이 전광석화처럼 일어나며 깨우쳐지며 '그랬지. 이젠 이빨도 빠져나가고 귀밑머리가 점점 하얗게 세치가 한둘 늘어가며 눈의 동공 렌즈가 탄력을 잃어 가며 반사적 조절되지 못 해서 시력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는 나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일어나는 상념에서 살아온 날들은 이미 내가 죽어가는 나이임을 직설적인 감각이 일어난다. 거울에서 문득 '내가 늙어가고 있구나'를 느끼게 되는 순간, 우리는 늙어가는 자신을 만난다는 것에서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반비례적 일차 방정식처럼 점점 짧아질 때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드시 겪어야 하고 반드시 닥쳐오는 타자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자신의 실존적 마지막이라는 사실""에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에 잠길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치를 내려놓고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선언서와도 같은 책은 아니었을까 싶었다.

 

유한성의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는 것에서 그의 이야기는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독백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인의 ""유시민""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며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아가 자신의 모습을 자각적이고 주체적인 자아로서 만나고자 하였다. 나의 인생 시작은 부모로부터 준비 없이 튀어나온 인생이라도 마지막에 대한 준비는 남은 자신의 인생 시간을 어떻게 향유해야만 할 것인가에 대한 자아의 실존적인 요구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젠 정치적인 이야기보다는 자기가 잘할 수 있고 잘할 수 있으므로 즐길 수 있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일을 하기를 권하고 있다. 열정이 아무리 흘러넘치더라도 이에 부흥하는 재능이 뒷받침이 되질 못하던가 혹은 그 반대로 재능이 아무리 특출나더라도 열정과 조건이 서포트 되지 않는다면 역시 그는 불만의 불행으로 보았다. 이런 경우는 주위에서도 많이 본다. 열정과 재능 그사이에서 방황은 늘쌍 우울하다. 그렇다면 그것에서 즐김과 누림을 결부시킨다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문제는 이 순간이라는 점에서 우리 각자의 방향은 어디로 조준이 되어야 할 것인가. 혹은 우리의 생이라는 시간의 화살이 어떤 과녁으로 조준될 것인가를 그는 묻고 있다.

또한 이 즐거운 일이 가치와 의미의 긍정적인 느낌으로 승화되고 주변의 이웃과 소통을 통하여 일종의 연대로 하며 공통 체적인 선을 지향하기를 권한다.(개인적으로는 블로그에 댓글로 소통으로 주고받는 역할도 어쩌면 일종의 연대라고 보았다.)

 

이제는 1막의 막을 내리고 다시 인생 2 막을 올리고자 하는 시점에서 이 책이 나왔음이 개인적으로도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종종 직장 동료나 이웃이나 혹은 친구에게 묻는다. 은퇴를 하면 무얼 할 것인가? 어떤 것을 할 꺼리는 있는가?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즐거운 가치와 의미의 일은 하고 있는가? 다시 말하자면 인생 2막에는 어떤 시간으로 마지막을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도 같다.

 

메멘토 모리. 시간은 결국은 죽음이요 내가 살아온 나이만큼 나는 죽어온 것이고 앞으로 죽어갈 것이라는 절대적인 유한성 앞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부조리'라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담담하고도 의연해질 것을 주장한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담담하고도 의연해질 수 있을 것인가라는 차원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수양에 따른 내적인 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때까지 다행히도 난 사진을 조금씩 알아 왔다. 이에 앞서 많은 포스팅에서도 밝혔듯이 이 순간의 의미와 가치에 있어서 시간을 거부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그의 정치적인 영광과 역경보다는 일찍 직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좀 더 일찍 욕먹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도 느낄 수 있었다.

 

맹자에서 측은지심처럼 자연발생적 본능성과 결부된 불행의 곁에서 내가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끼여 들 수 있는 것도 분명 한계가 있다.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민족 분쟁과 기아의 아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방법은 대단히 제한적이며 때론 아무런 손을 쓸 수없는 무력감과 분노에 스스로가 치를 떨 수밖에 없는 심정이 사람을 진보적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렇다. 누군가 아플 때는 최소한의 연민과 동정일 뿐 결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 모두는 가지고 있지 않다.

 

개인적으로도 모친이 지금 병원에서 치매 증상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 상황하에서 정작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 봐야 고작 어머니의 아기 때 모습처럼 다독이는 것뿐, 아무런 역할도, 어머니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질 못한다. 이것은 인간 자신 스스로가 안고가야 할 필연적으로 넘는 각기 개별적인 인생의 큰 산을 넘는 힘겨운 시간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자신과 이별해야 하는 두려운 질환이다. 자신과 자신의 주체성의 상실은 육신은 살았으되 이미 정신은 죽어 버렸으니까. 세상에 던져진 모든 존재는 늘 이렇게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다. 아무리 모든 생명의 삶이 근원적인 부조리하다 한들, 오늘도 누구와 결혼을 하며 SEX로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하고 출산하고 있으며 세상에 탄생된 모든 유기물은 부조리를 탄생의 순간부터 이후 종지부까지 온몸으로 부딪히게 된다. 부조리는 부조리를 양산함에 있어서 끊어낼 그 어떻게 할 방법도 없다. 수백만 년 전부터 생명이 작동된 유전자적인 메커니즘은 이 부조리조차 인정하지 못하고 끝없이 번식하려 들게 진화되어 왔다.

 

이것이 그 어떤 신학적 종교로도, 그어떤 논리의 철학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인간의 진화론적이며 유전적인 본질의 모순 그 자체이다. 생의 시간의 절대적인 모순은 죽음이란 부조리의 전체이며 이는 생명이 끌어안고 있는 고통의 모든 실체적이며 실존이다. 수용과 거부의 취사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이며 절대적인 시간 위에 놓인 우리 인생은 아니었던가?

 

 한편으로 욕먹을지언정, 차라리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피임도구를 주는 것이 더 효율적으로 최소한의 선택이 어쩌면 최대한의 부조리를 해결하는 것은 어떤가 말이지. 그렇다고 이 부조리함에 대해서 그 방법론의 한 가지로 전부 다 불임화 시킨다던지, 모두 거세를 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도, 설사 그런 시도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상적인 관념의 유토피아를 꿈꾸며 인간의 개조 프로그램이라는 오류의 신념이 낳게 된 부조리가 부조리를 낳게 된 또 하나의 부조리에 대한 더 큰 인간적인 이상적이 부조리는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 정권에서, 혹은 히틀러라는 독일 제국의 실패의 역사에서 혹은 종교적인 신념으로 중세의 마녀사냥 식으로 화형 했던 그런 예를 들어 제시하였다. 이상적이라고는 하지만 방법론적인 오류는 늘 범하는 부조리에 의거해서 또 다른 합당한 ""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엔 없다. 부조리를 안고 있지만 최소한 이 부조리에 반항하기보다는 수긍하고 긍정으로 그리고 의연한 담담함만이 주체적 자아로써 존엄한 마지막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주체적 자아의 존엄함이란 죽음보다 숭고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으로 때로는 우리가 죽음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임박에 대한 고통을 아름답게 즐김으로 승화 해낼 수 있는 일종의 착각이자 세뇌처럼 들이지 않으면 이 큰 슬픔과 우울과 고뇌를 어떻게 이길 방도는 없다고 보았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근원적인 부조리에 대한 좌절과 분노는 슬픔을 반드시 동반하고 보면 내가 어떻게 마지막을 의연하고 담대하게 여기며 마지막을 내 인생의 주체적으로 용감하게 웃으며 미소 지으며 갈 수 있을 것인가.

 

"나 더 이상 살수 없을 거 같아. 이젠 나를 편안하게 놓아주었으면 좋겠어"라며 이별이라는 작별의  일시적인 슬픔도 물론 동반되겠지만 좀 더 나아가 참 그리웠던 사람이었노라고 말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그리움으로 덧칠된 기억의 작은 트랜지스터 등이 점멸처럼 불쑥 불쑥 엷은 미소가 떠오르는 사람으로 추억이 된다면 좋겠다며 그는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주변에서도 직업적으로나 일 때문에 어느 정도 재산을 축적한 사람조차도 먹고 살기에 대한 중압감에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지금이 육이오 한국전쟁 때처럼 무조건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남아야 했던 그 절박함의 시대를 거치고, 일제의 징용과 대동아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던 시대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생의 맹목적 지상 과제였던 시대를 지나서, 아직도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에 매일 고통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내가 일하는 회사에 오너도 일 중독이라던가 일 때문에 치이고 피폐 당하고 있고 생업의 무거운 압박이 그 생의 전체를 지배하며 굴레처럼 느끼지고 다른 그어떤 여유를 돌아볼 여력 자체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무른 나도 직원이니까 여기에 보조를 맞추려니 아주 곤죽이 되곤 하지만...) 이 굴레의 압박으로 인하여 더욱 탐욕적이 되었으며 이 탐욕으로 판단이 흐려지고 찍으면 안 되는 계약서에 욕심의 눈이 모든 것을 필터링할 수도 없게 만들어 도장을 찍고 계약해서 결국 사기로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그래서 생기는 연유이다. 조금만 한 템포 늦춰서 판단을 유보하여 더 심사숙고해도 되지만 도저히 정확한 판단은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밀어 부치는 책임과 대가를 혹독하고 금전적인, 정신적인 손해를 입고 늘상 패잔병처럼 내상을 입어 허허롭게 짝이 없다. 이 굴레의 압박이 과도한 욕심의 판단을 늘상 흐리게 할 뿐이고 이 압박에서 벗어 날 수 없다면 언젠가 또다시 이런 오류와 실수를 되풀이되는 도돌이표를 땔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재연의 여지는 늘 상존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숲 속에 있으면 숲을 보지 못한다. 조금만 자신의 인생에서 조금 떨어져서 멀리서 볼 수 있도록 잠시만의 여유를 가지고 떨어져 있어 봐야 할 텐데 한순간의 불운의 실수로 넘기려고만 한다.

 

이렇듯이 사람들은 내려 놓기가 무척 힘들다. 심리적으로 어느 정도 일정한 내공이 쌓이지 않으면 도저히 깨어나지질 않는다. 언제든지 불이야 붙을 수는 있어도 작은 불쏘시개의 발화적 인자가 없으면 아무리 축적된 에너지가 있어도 불 하나 켜서 밝힐 수가 없는 것도 이런 이치는 아닐까 싶다.

자 이제 마무리하자.

이젠 그도 악착같이 안달 냈던 시간을 내려놓고 자 자신의 글을 책으로 엮어 내었다. 정말 마음의 안도함과 즐김의 미학을 느끼고 싶었던 충동을 느낀다. 나이가 들면 뒷방으로 물러나 들러주는 후학들에게 관심과 격려 혹은 짧은 따끔함의 글로 그의 앞에 놓인 시간의 부조리에 더욱 담대함과 의연함으로 글쟁이로서의 길을 축복하고 싶어진다.

 

기회가 온다면, 아 소주 한잔 함께 마시고 싶다.

이야기하면 잘 통할 것만 같았다. 

 

PS : 2013에 블로그에 올려 둔 리뷰였습니다. 다시 재편집해서 알라딘 리뷰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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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7 17: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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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7 18: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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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8 1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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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8 1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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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9 1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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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9 1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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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직전에 나온 책이 유작가의 어떻게 살것인가? 라는 책이었다.

물론 그때도 예약 주문이었고 지금도 책이 나올 예정이지만 예약부터 하고 본다.

 

나는 그의 글쓰기 문장을 상당히 선호하는 편이다.

전작의 책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서도 밝혔다시피, 유작가는 시같은 문학은 잘 하지 못한다고 고백을 하면서도 그의 논리와 연관된 그의 문장은 아주 깔끔하고 쉬우면서도 정돈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능력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의 이론도 아주 쉽게 이해가 빠르도록 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왠만큼 책 한권이 벽돌두께만한 철학서를 한번 보면 한문장의 길이가 끝없이 이어지고 결국 나중에는 대체 무슨 논점의 핵심인지조차 잃어버릴 때가 자주 있었다.

 

그런데 유작가의 글은 그의 인상만큼이나 딱딱 부러지듯 명료하다,

읽고 있으면서도 헤매지 않게 되고 문장의 선이 직선이다.(문학은 한번 비틀어야 하니까 곡선이라 해두자.)

 

이번에도 새로운 책이 나오자 미리 예약에 들어 갔다. 빨리 나오기를 고대한다..흐잇....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무슨 유시민 빠돌이가 된 기분...썩 나쁜 느낌은 아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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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7 14: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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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7 14: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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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8 10: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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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8 1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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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9 10: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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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9 13: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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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5-27 17: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출간 소식 들었는데, 앞의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어서 그런지 신간도 관심이 가더라구요.
유레카님 좋은하루되세요.^^

yureka01 2016-05-27 18:07   좋아요 2 | URL
유시민의 글은 참 편하게 읽힌다는 점..물흐르듯이 시원 스럽게 흘러 내려 가는 기분납니다.
그래서 아마 많은 분들이 그분의 책을 읽는 것 아닐까 싶어요..
어려운 문제도 쉽게 쓸 수 있다는 매력..참 돋보이는 작가입니다..
감사합니다!~

나와같다면 2016-05-27 1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두 기다리고 있는 책이예요..

yureka01 2016-05-28 05:40   좋아요 1 | URL
느긋하게 기다리죠.곧 나올겁니다.^^.

영양만점 2016-05-27 2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시민작가를 특별히 좋아하는건 아니지만, 그이 말이나 글이 좋네요. 저도 기대되어 얼른 나오기를 기다려봅니다.
님의 글도 편안하네요^^ 좋은 주말되세요~

yureka01 2016-05-28 05:41   좋아요 1 | URL
아고 그러게요.
아마도 유시민작가의 글도 영양만점이지 싶어요.영양만점님 감사^^합니다.

깊이에의강요 2016-05-28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시민님 좋아합니다^^
정치를 그만두고 편안해진 모습이 더 보기 좋더라구요^^

yureka01 2016-05-29 00:56   좋아요 1 | URL
대학에서 학생 가르치는교수님하셔도 아주 잘 어울리실 거예요^^..
팟케스트도 자주 들었습니다.^^..

깊이에의강요 2016-05-29 0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쵸?
팟케스트가 끝나서 많이 아쉬워요~~
원래도 좋아했는데 국정교과서 밤샘토론에서 마지막 소신발언 듣고 완전 반했어요. 지식인이라함은 저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개인적인 생각입니다^^

yureka01 2016-05-29 01:10   좋아요 1 | URL
지성이라는 모습을 재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죠....그 명료함이 저도 너무 좋더라구요..^^

 

 

구매한 책에 대하여 리뷰를 써주면 책값이 생길 수 있다고 기계는 친절히 안내하는 메일 보낸다.

 

그러나 어쩌겠나? 이미 리뷰를 써놨음에도 기계는 이를 가려 내지 못하고

써놓은 리뷰가 있는지 유무와 관계없이 메일을 무차별적, 일괄적인 기계답게 사무적으로 보내고 만다.

 

메일 주소가 등록되어 있고 리뷰도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이 대조 작업을 한 번이라도

거쳤더라면 이렇게 버젓이 리뷰가 있음에도 계속 리뷰를 올려달라고 권유 메일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기계적으로 발생하는 중복과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 대한

부하는 어느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인가? 

 

적은 인원에 기계가 일손을 대신하게 될 때, 앞으로 사람이 할 일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 뻔하다.

사람을 위해서 이제는 사람이 쓸모 없어져 간다는 뜻이다.

 

사람이 일함으로써 발생할 인건비는 수익적인 측면에서 모두가 다 비용이다. 그러나,

이 비용이란 것에 담긴 뜻은 가족의 생계가 걸려 있고

삶의 영위하는 가치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단순히 기계가 대신할 때 들어가는 수익적인 차원에서

비용절감만을 바라보는 이 자본의 세계에서

사람에서 서비스해야 할 것들이 사람 대신에 기계가 대신하게 될 때라면,

과연 사람은 이 지구 상에서 존재할 이유가 무엇일까?

 

누구나 다 기계가 해주는 서비스를 받게 되면결국 사람은 이 곳에 없어져도 큰 탈이 없다.

하기야 지구가 존재하는 이유가 반드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고

지구에서 사람이 사라져도 지구로써는 어떤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앞으로도 점점 사람이 여기 이곳에서 있어야 할 존재의 이유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반갑게도.!~

이미 통계적으로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줄어 든다고 했다.

이대로 쭉 가다보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기계가 대신하고

기계가 할 수 없는 일들만 사람의 묷이 될 것이다.

과연 기계가 할 수 없는 일들이 무엇일지는 글쎄,,,,,,

 

앞으로 기계의 인공지능에 의해서 사람도 그 지시를 받고

움직일 날도 멀지 않았다.

아니 지금도 업무에 기계적으로 짜인 프로그래밍에 따라

업무지시서가 날아 든다.

 

점점 인간도 기계의 노예가 될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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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7 1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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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7 1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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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7 11: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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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7 1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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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8 11: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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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진 공부 시작할 때 노트보면 이랬습니다 ㄷㄷㄷ

개념 파악한다고 시작할때요..

그때가 참 재미났었죠..

공부가 그리 재미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ㅠ.ㅠ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그런 공부하면 참 행복하죠.

좋아하는 것을 공부한다는 것..이게 공부의 역설.

 

역시 시험은 별도로 보지 않아도 이미 뭐....볼 것도 없어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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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5-26 13: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무슨 수학 문제 풀어 놓으신 줄 알았습니다.
머리에서 쥐나는 것 같습니다.ㅠㅠ

yureka01 2016-05-26 13:36   좋아요 2 | URL
빛이 물리 공식..광학적 수학이 쬐금 들어가야 하는게 랜즈라서요..
저도 머리에 마비된적이 있었습니다..
당체 이해가 안되던 적이 있었습니다 ㅋㅋㅋ

서니데이 2016-05-26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세한 내용은 사진관련 전문분야라서 잘 모르지만, 노트정리를 깔끔하게 잘 하셨네요.
저는 글씨를 잘 쓰지못해서 노트정리 못하는데, 부러워요. ^^
유레카님 오후 즐겁게 보내세요.^^

yureka01 2016-05-26 13:38   좋아요 2 | URL
기본 개념 공부부터 하고 사진 찍으니 사진이 더 재미 났었습니다 .ㅋㅋㅋ
글씨가 좀 풀풀 날아당겼지요..ㅋ

네 하루 즐거운 시간 되시길 !~

다락방 2016-05-26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사진 공부가...이런 것이란 말입니까!!!!!!!!!

yureka01 2016-05-26 14:08   좋아요 1 | URL
아 이건 자동차 운전으로 치면, 엑셀 밟으면 차가 어떻게 구동되는 원리와 비슷한 개념공부였습니다..
카메라는 빛을 읽어내기 위한 기초라서 말이죠..

알고 찍는거랑 모르고 찍는 거랑 빛을 읽는데 차이가 있으니까요..ㄷㄷㄷ

cyrus 2016-05-26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학창 시절 수학 공부 노트를 꺼낸 건 아니죠? ㅎㅎㅎ 수학 선생님들이 졸업해서 사회에 나가서도 수학이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다고 강조하던데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군요. ^^;;

yureka01 2016-05-26 16:00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전 공대 다녔어도 수학하고는 친한 적이 없었습니다..ㅋ

나와같다면 2016-05-26 1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yureka 님 혹시 고등학교때도 사진 찍으셨어요? 저 학생때 양정, 배재, 영동, 용산고등학교랑 같이 출사.. 암실 작업도 하고, 서로 사진전 가기도 했거든요.. 그때 추억 생각나네요..
그때는 그래도 낭만이 있었던것 같아요..

yureka01 2016-05-26 21:35   좋아요 1 | URL
아마 고딩때, 사진이란 것의 인식이 예술적으로 다가왔더라면
기필코 지금은 사진작가로 살았을텐데 말이죠...
그때야 그저 사진이 사진적으로 전혀 못느꼈습니다..
좋은 추억의 작업일듯합니다.^^..

2016-05-26 18: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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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6 21: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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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6-05-26 22: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녕 수학 노트가 아니란 말입니까?

yureka01 2016-05-26 22:52   좋아요 1 | URL
수학이라기 보다는 물리노트가 더 맞겟네요.^^.광학의 물리.^^.

yamoo 2016-05-27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짱입니다~
취미 수준의 공부가 아니라 약간 아카데믹한 공부 같습니다~
멋진 유레카 님^^

yureka01 2016-05-27 14:56   좋아요 1 | URL
사진이 빛을 다루는 거니까 이게 가장 기초적 지식이더군요..
랜즈에 대한 공부..카메라 공부에서 처음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