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바뀌어버렸다. 그럼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 했다. 따귀를 맞고 웃음을 짓는다고 상상해보라. 그것을 하루에 스물 네 번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것이 유대인을 숨기는 일이었다.” 312쪽.
죽음의 사신조차 울게 하는 시대, 과로사 할 것 같은 시대다. 젊은이들이 끝도 없이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이유는 그들조차 모른다. 그들이 되뇌이는 하이 히틀러같은 말장난은 죽음의 주문이다. 그들이 죽어가는 동안,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들의 영혼을 몇 만 단위로 죽음의 사신이 실어나를 때, 정작 그들을 죽음으로 돌진하게 한 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2차대전을 다루는 이야기들은 많지만 화자가 죽음의 사신이라니.
그러나 그 시대, 가장 알맞은 화자가 아닐까.
숱한 목숨들을 거두어 들이는 죽음의 사신조차 흔들리고 안타까울만큼 아름다운 영혼들이 여기 있다.
그 어떤 사상도 그 어떤 신념도 타인을 헤칠 수도 죽여서도 안된다.
말장난과 혐오로 타인을 밀어내고 묻어버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수 없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구호와 인사말들이 살아있는 이들을 시체더미로 만들어버린다.
낯선 곳에 동생을 묻고, 엄마는 떠나고, 그렇게 리젤만이 덩그라니 남는다.
그런 리젤을 사랑으로 감싸는 후버만 부부가 있다.
한스와 로자 후버만 부부.
칠쟁이 한스는 아코디언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며, 유대인을 숨겨준다.
리젤에겐 동생을 떠나보내는 의식의 마침표같은 책 <무덤 파는 사람을 위한 안내서>를 읽도록 도와준다. 이유는 묻지 않는다. 그는 리젤의 마음이 얼마나 산산조각 났는지, 그것을 다시 잇고 뛰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안다.
리젤을 품어주는 후버만 부부, 그저 리젤이 좋아 호시탐탐 뽀뽀를 노리는 루디라는 금빛 영혼을 가진 소년, 아들을 잃고 허깨비같던 그러나 책을 좋아하는 리젤을 위해 서재의 문을 열어둔 시장부인인 일자. 리젤에게 책을 만들어준 막스.
방공호아래 두려움에 떨던 마을 사람들에게 리젤은 책을 읽어준다. 잠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그들은 리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예전 한스의 푸근한 농담같던 아코디언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한스가 한 자 한 자 리젤에게 글자를 가르치면서, 리젤은 떠듬 떠듬 책을 읽어내려간다.
그러면서 리젤은 책들을 훔쳐나간다.
처음엔 불태워진 광장의 책더미 속에서, 그 후엔 시장부인의 서재에서.
리젤이 훔쳐낸 책은 폭력에 맞서는 삶이었다.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양심이었다. 희망이었다. 방공호에서 그 책들을 펼쳐 읽어내려갈 때 리젤의 책은 모두에게 위안이 되었다.
“리젤 메밍거는 편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실제로 막스 판덴부르크에 비하면 편했다. 물론 남동생은 리젤의 품에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리젤을 버렸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유대인이 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238쪽.
“작지만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실 하나. 오랫동안 많은 젊은이들이 다른 젊은이들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향해 달려왔다.”
죽음의 사신의 말. 257쪽
죽어가는 적군 비행사의 어깨에 곰인형을 얹어주며, 리젤을 위해 차가운 물에 들어가 책을 찾아주며, 숯칠을 하고는 오언스 흉내를 내며 달리는 소년 루디의 죽음은 죽음의 사신조차 울게 한다.
“그러나 나는 위로하는 일에는 별로 재주가 없다. 특히 내 손이 차고 침대가 따뜻할 때는 나는 루디를 살며시 이끌고 부서진 거리를 통과했다. 한쪽 눈은 짰고 죽음 같은 심장은 무거웠다. 나는 루디의 경우에는 조금 더 노력을 했다. 잠시 그의 영혼의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상상의 테이프를 끊으면서 제시 오언스라는 이름을 외치는 검게 칠한 소년이 보였다. 얼음처럼 찬 물에 엉덩이까지 담그고 책을 쫓는 소년이 보였다. 침대에 누워 멋진 이웃과 키스를 하면 어떤 맛일지 상상하는 소년이 보였다. 이 아이는 나에게 뭔가를 해준다. 이 소년은, 매번, 그것이 이 아이가 유일하게 손해를 보는 부분이다. 이 아이는 내 심장을 딛고 간다. 나를 울게 한다.” 2부 324쪽.
(북플님들이 좋다고 하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