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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 살인자의 성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5
페르난도 바예호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평점 :
청부 살인자.
청년이라기보단 소년의 범주에 속한다.
브랜드 운동화와 셔츠들, 청바지, 그리고 엄마에게 선물할 커다란 냉장고, 그들이 바라는 것이다.
정작 그들에겐 커다란 냉장고를 채울 것도 없는데,
브랜드 운동화를 신고 고작 걸어봐야, 몇 걸음 가지 못해 피로 물들어 버릴텐데 .
문법학자인 페르난도가 다시 찾은 고국은 예전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무능하고 한심한 지도자와 욕심만 채우는 관리들.
그리고 고국이 생산하는 것은 살인과 마약뿐이다.
그 속에서 내 천사 내 아이, 알렉시스와 그런 알렉시스를 죽인 윌마르가 있다.
둘의 직업은 천사, 죽음의 천사, 혹은 시카리오, 청부살인자다.
시카리오는 자객이나 암살자를 의미한다.
마약카르텔에 의해 고용된 소년들은 청부살인을 하고, 그 살인으로 인해 복수당하며 죽어간다.
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세 개의 스카풀라는 일을 하게 해 달라는 것, 총알이 목표물에 빗나가지말 것, 그리고 일을 마친 후 무사히 돈을 받기를 원하는 소망이다.
사람을 죽이고, 고해성사를 하며, 성모앞에서 절실히 기도하는 시카리오들.
그들은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고, 죽은 사람의 누군가에 의해 또 죽임을 당한다.
가난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죽음이 죽음을 몰고온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영화가 바로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다.
막무가내로 다량의 마약을 풀고, 사람을 죽이는 소노라 카르텔 대신, 미국등에 좀 더 협조적인 메데인 조직에 힘을 실어주려는 작전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알레한드로는 원래 검사였으나 마약조직에 의해 아내와 딸을 잃고, 복수심에 불탄다. 결국 마약조직의 보스와 아이들, 아내 모두 죽이고 복수를 완수한다.
이 영화에서 잔인한 장면들이 많았지만, 특히 알레한드로가 아이들은 살려줄거라 생각했는데 가차없음에 조금 놀랐다.
그러다 이 소설을 보며 영화 속 아이들을 죽이는 장면은 정말 실제 상황에선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
아이가 아이를 청부살해하고, 그 아이의 동생이나 형이 또 그 아이를 죽이는 원한이란 뱀이 가득한 나라다.
마체테를 들고 도시로 온 농부들, 경찰에게 뇌물을 주면 총을 살 수 있는 나라, 마약조직들만이 현금을 갖고 있는 나라.
소년들이 아무거리낌없이 사람을 죽이고 매춘을 하는 곳이다.
너무 적나라하다. 처음엔 몇 명이나 죽이나 세어보려다가 의미없음을 깨달았다.
끊임없이 죽어나가고, 죽고 또 죽고....노인이 없는 나라, 수명을 채우며 집에서 죽기 힘든 나라다.
콜롬비아에 만연하는 마약과 청부살인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다.
성직자와 정치인들 관리들에게 내뱉는 독설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분노는 결국 청부 살인과 마약조직원 외엔 먹고 살길이 없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 아닐까.
눈을 감지 못한체, 감기려 해도 감기지 않는 초록의 어여쁜 눈을 가진 그 별들이 허무하게 꺼져간다.
“각자 자신의 별이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넌 몇 개의 별빛을 껐을까? 네가 가는 속도로 너는 하늘을 죽일 거야.”
(작가의 생각이 많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느꼈다.
작가는 동성애자, 무신론자, 반출산주의자,비건이자 동물권보호자다. 눈하나 깜짝 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던 알렉시스가 다친 강아지에게만은 그 고통을 덜어주려는 의도임에도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말을 거칠게 다루는 마부의 이마에는 총알이 박힌다. 동물만이 천국에 가겠지......)
마약과 돈이 불러오는 살인, 그 살인에 대한 복수와 원한이 불러오는 살인이 콜롬비아의 정체성인걸까.
피가 피를 부르지만, 결국 쓰러지는 건 천사들이다.
몸을 팔고, 자신의 목숨을 팔아 리복테니스화와 파코라반 청바지를 원하는 천사들, 죽음의 천사들.
그런 천사들에게 면벌부를 파는 성당은 이미 썩었다.
과거의 식민지 시절 그대로 변함없는 성당의 모습에 분노한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만의 문제일까.
권력과 부패, 오랜 시간 식민지화되면서 빼앗긴 자원과 자립의지.
저들은 왜 이유없이 몰려다니며 사람들을 죽이고 방황하는가, 왜 저렇게 몰려다니며 평화를 외치며 미친 듯이 그 짓만 해대는거지? 라는 소설들이 있다. 그 시대가 그랬고, 그 시대의 젊은이들은 그러했다. 알고보면 이유가 있는 반항과 몸짓?
이 소설도 그런걸까. 지금의 콜롬비아를 보여준다. 콜롬비아의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
크게 틀어 놓은 바예나토와, 그들의 성모, 그리고 가파르고 가파른 더럽고 냄새나는 빈민촌.
아이들은 채 여물기도 전에, 몸을 팔고 결국 마지막엔 목숨을 팔아 거리에 버려진다.
나방은 밤에 먹이사냥을 나간다. 먹이를 찾기 위해 주로 불빛을 나침반처럼 활용한다. 과거에 그들의 나침반은 달빛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나침반은 인간들의 빛이다. 나침반이 될 빛을 둘러싸고 돌다보면 어느 순간 타죽어 가게 된다.
콜롬비아의 청부 살인자들을 보며 나방이 떠올랐다.
가짜인걸 알면서도 몰려들고, 그 주변을 배회하다 결국 타 죽고 마는 나방이다.
(표지그림의 제목이 할머니의 재받이들이다. 재받이는 난로 따위에서 나온 재를 받은 물건을 말한다. 원본은 그림 아래에 난로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왜 놀랐지? 나도 거기에 있었고, 우리는 똑같은 걸찾으러 왔는데. 그건 바로 평화와 어둠 속의 침묵이야. 우리의눈은 너무 많은 것을 보아서, 우리의 귀는 너무 많은 것을 들어서, 우리의 마음은 너무 많은 증오로 지쳐 있어. "거룩하신 어머니여, 도움의 성모여, 자비와 미덕의 성모여, 당신 발아래 엎드려 제 잘못을 뉘우치옵니다. 성모님을 굳게믿으며 기원하오니 이 기도를 들어 주소서. 마침내 제 마지막시간이 되면 제게 오시어 제가 정의롭게 죽도록 도와 주소서. 사악한 영혼과 그의 불쾌하고 엉큼한 휘파람을 쫓아 주소서. 저는 이 삶에서 이미 지옥의 악몽을 겪었고, 그것도 아주 충분히 겪었으니, 영원한 저주에서 저를 구하소서. 이웃과 함께, 아멘."
콜롬비아에서는 훔친 물건의 소유와 범죄 시효가 법이라는 게 사실이야. 그러니까 기다림과 인내의 문제라는 거지.
몽셰리 아미(사랑하는 친구), 그건 운동화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믿는 정의의 원칙 때문이야. 운동화를 도둑맞은 사람은 자기가 운동화값을 냈으니 그걸 빼앗기는 건 부당하다고 여길거야. 반면에 그걸 훔치려는 사람은 그 운동화를 갖지 못하는현실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거야. 개들이 짖는 소리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가면서 자기들이 우리보다 더 낫다고 목청껏 소리치고 있어.
아, 아, 슬퍼라, 이제 더는 그걸 마시지 않아 우리는 초콜릿을 마시는 습관을 잃어버렸고, 시를 감상하고 미사에 가는 습관도 잃어버렸어. 이제 우리는 에이즈에 걸린 난쟁이가 결코 다시는 연주하지 않을 양철북보다도 더 텅비어 있어. 모든 게 쓰러져 망가졌고, 모두가 죽었어. 이제 내가 알고 있던 것 중에 남은 것은 하나도 없어. 물
우리늙은이가 젊은 애를 죽이는 게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지? 물론 그건 당연한 생각이야. 늙어서 하는 모든 건 타당치 않아. 죽이거나 웃거나 섹스하거나 무엇보다도 계속 살아가는건 부적절한 행위야. 죽는 것을 제외하고 늙어서 하는 모든건 부적절해. 늙음은 부끄럽고 천하며, 꼴사납고 혐오스러우며, 파렴치하고 구역질 나. 늙은이들은 죽을 권리 말고는 아무권리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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