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그림이 커서 좋다.
일요일의 화가로 유명한 루소의 정글시리즈 <뱀을 부르는 주술사>, 루소는 정규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내 성공한 화가다. 특히 정글시리즈는 파리수목원과 동물박제 전시관을 통해 그려낸 것, 그래서인지 더 몽환적이고 더 정글같은 느낌이다. 앞으로는 그리고 만드는 재주는 부족해도, 창의력으로 승부하는 예술가들이 득세할 거라고 한다. 데미언 허스트같은 대가도 주로 아이디어를 내면 만드는 것은 화실사람들의 몫이다. 3D 프린트가 보급되면서, 가구 디자인도 조각도 누구나 아이디어만 있으면 가능해진 세상이며, AI가 그림도 그리는 세상이다. 그러고 보면 예술품들도 이제 특허권 싸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되면 루소처럼 일요일의 화가들이 더 많이 나오지 않을까. 예술의 평등이 진정 이루어지는 걸까. 아니면 수십 년을 갈고 닦은 실력으로 자신의 꿈들을 펼쳐내는 장인 예술가들의 사라짐에 안타까워해야 하는 걸까.
귀족과 교회에서 부의 흐름이 부르조아, 부유상인들에게 흘러가면서 나온 벽걸이형 그림들, 그리고 그런 그림의 대가였던 한스 볼롬기에르의 꽃그림에 담긴 인생.
꽃은 불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산화공덕, 삶의 허무. 서양에서도 그랬나 보다. 결국 비싼 꽃이든 들꽃이든 시들게 마련이고 말라 먼지처럼 사라진다. 그렇지만 서양에선 이런 꽃들옆에 원죄를 짊어짐을 의미하는 달팽이와 탐욕을 의미하는 애벌레 등을 넣어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교휸도 잊지 않았다.
히틀러가 너무나 좋아해서 거의 뺏다시피 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회화의 기술, 알레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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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월계관이 의미하는 영광과 트럼펫이 의미하는 명성을 갖고 싶었지만, 역사의 여신 클리오는 히틀러를 다르게 기록할 것이다.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 사회에서 외면받는 계층의 세탁부들, 그들의 얼굴이 모호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들이 주인공일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세탁부>의 그림에서 아이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있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바로보는 아이의 얼굴에서 따스함과 정감을 찾는다. 돈과 권력이 줄 수 없는 연대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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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 귀족들이 마치 애완견처럼 과시하듯 데리고 다닌 다모증환자의 초상화는 벨라스케의 <시녀들> 속 난쟁이들, 인간 동물원까지 떠올리게 한다. 불운을 담는 그릇으로 필요했던, 혹은 우스개와 농담을 위해 필요했던, 혹은 특이함으로 과시하려 했던 귀족과 왕족들의 도구가 된 이들의 모습,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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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테냐의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그림은 지금의 시대에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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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세바스티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그리스도교를 믿다가 돌기둥에 묶여 온 몸에 화살을 맞고도 죽지 않아 결국 돌 또는 몽둥이로 맞아 순교한 성인이다. 옛날 사람들은 질병 또한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화살 등에 맞아 감염된다고 생각했고, 그런 화살들을 맞고도 죽지 않은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자신들을 흑사병에서 구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세바스티아누스의 얼굴엔 고통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 돌기둥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개선문 기둥 장식에 묶은 것, 만테냐는 고대 조각과 고대의 인체 비례 규범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그림의 또 다른 재미는 구름이다. 마치 말을 모는 노인같은 형상의 구름.
다빈치는 담벼락의 얼룩이나 구름을 보면서 연상하고 연상된 형상을 그려보라는 조언을 통해, 자연을 그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예술적 상상력을 표현하라고 한 것이다. 만테냐는 이 조언을 그림을 통해 충실히 따랐음을 보여준다. 구름 속에 담긴 형상, 말을 모는 기사 혹은 노인 같기도 한 모습이다.
나무 바닥에서 재미있는 무늬를 발견했던 에른스트, 프로타주도 생각난다. 백원 동전 위에 종이 올려놓고 연필로 그어대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은 모두 예술가가 아닐까
작은 얼룩, 구름 , 노을, 세상 모든 것들에서 형체를 찾아내고 상상하며 친구 삼는 것, 예술가들이 꿈꾸는 그 재능을 아이들은 그저 갖고 있으며 즐길 뿐. 나이가 들면 얼룩은 지워야할 짐이고 구름은 흘러가는 것일 뿐 이란 게 서글프다. 그런 것들 잊고 살 만큼 중요한 일을하며 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 그의 그림이 달리와 브뢰헬에 영감을 줬다고 한다. 특이한건 스타워즈 속 외계인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고.
그 외에도 다양한 작가들과 그림들에 대한 설명들, 시대배경과 작가님의 감상평등이 담겨 있다. 부담없이 재미있게, 그리고 책 한 면을 차지하는 그림들을 볼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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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보이고 싶어 최초로 하트를 그려 준 이는 누구일까.
(사랑은 가슴이 아니라 뇌가 인지하는 거라던데, 그럼 이젠 뇌 그림을 그려야 하나. 호두를 하나 손에 쥐어주는 것이 사랑을 고백하는 거라면 또 어떨까. 다람쥐들이나 좋아할까.)
글로 다 하지 못하는 마음을 색으로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 그림일까.
떠나보내는 이가, 떠나는 이의 그림자를 따라 그리며, 그리움으로 시작되었다는 그림.
그래서일까. 그림 속엔 많은 것들이 있다. 한 편의 시를 모두가 다양한 의미로 가슴에 담 듯, 그림 또한 보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보인다.
그림에는 선동의 힘도 있다. 역사를 담는 그릇도 된다. 그 시대상을 보여주는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숨기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그림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고 새롭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