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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잡사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화에 담긴 은밀하고 사적인 15가지 스캔들
김태진 지음 / 오아시스 / 2024년 7월
평점 :
<아트 인문학>시리즈로 만났던 김태진 작가의 신간이다. 오랜만에 신간이 나왔다. 자주 자주 출간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는데. 명화에 관한 책들은 저자가 의도하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에 어느 한 권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지만 다 읽어낼 수는 없으니 아쉽다. <명화잡사>를 다 읽고 느낀 점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라는 거였다. 그만큼 역사라든지, 특정한 사건보다는 사람이 보였다. 15점의 대표작을 만났다. 그 중 두 작품은 화가도, 그림 속 주인공도 낯설었다. 처음 만나는 이야기여서 더 재미있었는데, 익숙한 그림에서도 저자는 많은 책에서 다루고 있는 흔한 이야기가 아닌 다른 각도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좋았다.
루이즈 데스노스의 <왕실에서의 만남>은 처음 보는 그림이었는데,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루이 14세의 바람기가 낳은 그림이었다. 루이 14세의 공식적인 정부가 수녀원에 들어가기 전 왕비 마리 테레즈에게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는 장면이었다. 원하지 않았지만 정부가 되었고, 또 다른 정부에 의해 고통받았고, 결국 수녀원에 들어가 세상과 벽을 쌓음으로써 평안을 얻게 된 루이즈였다. 새장 속으로 들어가 비로소 자유로워진 새 라는 타이틀이 이해가 되었다.
렘브란트의 그림 <다윗의 편지를 들고 있는 밧세바> 에서 모델인 헨드리케는 렘브란트의 하녀였다. 씀씀이가 헤펐던 렘브란트는 아내가 죽은 후 도덕적인 문제도 있어서 내리막길을 걸었는데, 그때 언급되는 여인이 헨드리케였다. 부정적인 이미지일 수 밖에 없었는데, 저자는 헨드리케의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렘브란트에게 버팀목이 되었던 헨드리케와 좀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구약성서 속 한 장면을 담고 있는 그림으로 지식적인 측면으로만 봤던 그림이 왠지 헨드리케와 렘브란트의 삶이 오버랩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막시밀리안은 에두아르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란 그림으로 익숙하지만 개인사에 대해서 아는 바는 거의 없었다.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렸다는 정도? 저자는 그를 집중조명했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역사적으로 이 사건은 아주 간단하게 요약된다. 순진한 황족의 어리석은 욕망이 낳은 비극이라고. 하지만 이 사건이 남기는 여운을 길다. 막시밀리안은 선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믿었고 정성의 가치를 믿었다. 하지만 그는 정치와 권력의 속성을 몰랐다. 그 추악한 세계에서 한 사람의 선의와 정성이라는 건 너무나 쉽게 짓밟힌다. 그 세계에서 순진함은 자신은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 죄악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시대의 격류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다.-p249
막시밀리안이 정치를 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정치지 하면서 응원했는데, 결국,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희생당했다.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선한 사람이었지만, 저자가 '어리석은 욕망'이라고 표현한 그 욕망이 고개를 쳐들지 않았더라면 조용하고도 평탄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텐데. 짧은 인간의 삶으로 보면 안타까움이 컸다.
라파엘로가 사랑했던 마르케리타, 프랑스 혁명 중 많은 이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마라를 죽였지만 더 큰 혁명의 바람을 일으키는 결과를 만들어 버린 샤를로트 코르데, 제임스 티소의 영원한 뮤즈 캐슬린 뉴턴등 어쩌면 조연일 수 밖에 없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개개인의 삶의 역사도 소중했음을, 그들이 있었기에 명화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작품들을 보며 우리의 삶도 돌아볼 수 있었음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화가의 마법이 시간을 붙드는 것이라면 관람자의 마법은 그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와 닿았다. 그 마법에 의해 몇 백년, 몇 천년의 시간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 시간 안에서 다양한 모습들을 만나고, 그 모습은 내 삶의 한 부분에 조그만 물결을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동안은 뭔가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발견으로 지식을 쌓는다는 것보다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졌다. 현재의 내 모습도. 그래서인지 에필로그의 저자의 글을 옮겨두고 싶어졌다.
이따금 가슴 설레는 일을 발견해도,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젊음이 다 빠져나갔다고,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때다. 나는 그럴 때면 10년 뒤의 나를 상상한다. 10년 뒤 나는 지금을 회상하며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때만 해도 참 젊었는데.....' 그렇다. 지금의 나는 내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에서 가장 젊다. 어쩌면 싱그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뿐 아니라 난 이미 성숙을 경험했다. 과거의 내가 갖추지 못한 경험과 지혜까지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 건 한마디로 가장 좋을 때라는 것이다. (에필로그 중에서)
루이즈 데스노스, <왕실에서의 만남>
렘브란트, <다윗의 편지를 들고 있는 밧세바>
장 폴 로랑, <처형장으로 가는 막시밀리안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