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스트로스는 모든 신화들은 비슷한 구조를 가지며, 게다가(이것이 그의 주된 초첨은 결코 아니었으나) 모든 신화들이 유사한 사회적, 문화적 기능을 가진다고 말하였다. 즉, 신화의 목적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한편, 이 세계의 문제와 모순들을 마술처럼 해결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신화적 생각은 항상 그들의 목표에 반대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자각함으로써 진전된다...신화의 목적은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적 모델을 제공하는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달리 말해서 신화는 모순을 추방하고 이 세계를 이해할 만하고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하나의 문화로서의 이야기이다. 신화는 우리 자신과 우리 존재 사이의 갈등을 진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112> 




이해할 수 있을까. '신화는 모순을 추방하고 이 세계를 이해할 만하고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문화'로서의 이야기로 존재한다는 설명을. 살 떨리는 만감의 교차를. 여지껏 사라진 적이 없으니 신화 있던 오늘은 언제나 이해하기 어렵고 살기 만만찮았던 것 같다. 신화의 존재가 이렇게 절망적일 수가 있나. 싶으면서도 신화를 읽으며 조금 더 나은 날을 갖고자 하는 긍정의 태도를 읽는다. 이제 신화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이야기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에 존재하게 되었다. ex_아이폰의 작동 원리, 엑티브 엑스의 존재 이유, 중세에서 날아온 듯한 어느 항공기 일가와 현 정권 (이건 도무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과 함께 이해 불가의 어깨를 견준다. 


그렇다는 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되고 '신화소'라는 특유의 단위를 통해서 해석해 왔던 '신화'에 대해 정신분석을 적용한 책이 나왔다. <신화와 정신분석>. 중국 일본 한국은 물론, 그리스, 북유럽에 이르기까지 온갖 신화를 정신분석적으로 설명한다. 주몽에 대한 정신분석은 다음과 이렇다. (이런 건 생각도 못했다)


주몽은 어머니로부터 극진한 돌봄을 받아 자존감과 거대자기가 잘 형성되었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 경우 자신을 냉대하는 상징계의 요구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기 어렵다. 주몽은 어머니 외에 친밀관계를 맺은 여인의 존재가 모호하다(별거). 그의 삶에 만족을 주고 정신에너지를 보충하는 데 필요한 아니마(여성에너지)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여성과의 관계가 신화에 부재한 것은, 주몽(당대 한민족)의 모성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컸음을 암시한다. <신화와 정신분석, 583>


이 책에서 흥미로운 건 이젠 새롭지도 않는 동서양의 차이를 신화에서도 발견하고 해석하는 데 있다. 세상이 최초로 생성되는 과정에서도 동양의 신은 선대의 신과 싸우거나 대립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승, 생성되는데 이에 비해 서양의 신은 '살해'라는 과정을 통한다.
 

세상이 최초로 생성되는 과정을 담은 창세신화는 동서양의 차이가 매우 확연하다. 중국의 창세신 반고는 저절로 노쇠해져 죽은 뒤 그 몸에서 자연만물이 자연스레 생성된다. 일본의 창세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는 성관계를 통해 국토와 태양, 달, 바람 등을 창조하며 선대의 신들과 대립해 싸우지 않는다. 한국의 창세기에서는 우주와 만물이 최초 형성되던 때부터 미륵·천지왕이 존재해 우주와 인간 세상을 조화롭게 다스리는데, 이 신들이 자연만물을 직접 창조하지는 않는다. 

(...)

그리스의 창세신 우라노스와 게르만족의 태초신 이미르는 모두 신세대 신에게 살해된다. 북유럽의 오딘은 형제들과 연합해 태초신인 거인 이미르를 살해하고, 이미르 몸의 각 부분을 절단하여 하늘·대지·바다·호수 등의 자연을 창조한다. 바빌로니아에서는 '만신의 어머니'거인 티아마트가 젊은 신들에 의해 살해당한다.<신화와 정신분석, 564>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는 "동양 특히 한국에서 왕 살해·아버지 살해는 유독 반인륜적 행위로 해석되어, 그 흔적이 말소된 상태"라고 하면서 "왕 살해 요소에 때한 이런 철저한 검열·부인·억압은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에서 언급했듯이, 억압된 무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비롯된 신경증적 과민방응일 수도 있다." p. 568. 며 설명을 잇는다. '왕 살해'를 찾아 볼 수 없더라도 '왕 살해' 위협이 없던 것은 아닐 것이다. 신채호가 '조선역사상 제일대사건'으로 지목한 묘청의 난을 기억한다. '왕 살해'가 왕만을 처단하는 것만이 아니라, 왕과 함께 하는 지배 체제 전부를 전복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물론이다.

 

힘 없고 약하고 작고 가난한 것은 온전하게 존재하기가 어렵다. 그들이 '보통'처럼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필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막는 사회는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소식을 전한다. 흡사 '영아 살해'를 떠오르게 하는 소식들에서. 직접적으로 가해하는 이들을 미워하기보다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 더 어리고 약한 것의 억압을 부추겨야만 하는 세계의 잘못을 생각하고 싶다. 여기서 '왕 살해'를 떠올리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상상력이며, 필요한 물음인지 돌아본다. 신화 읽는 것을 고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세계를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라는 본문의 말은 붙이지도 않겠다. 그저 이곳을 이해할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오래된 신과 신들의 싸움과, 영광을 읽는다.


덧붙여 신화 읽는 것이 저 먼 곳을 비롯해 오늘을 읽는 시도라고 한다면, 문화를 아는 것은 오늘을 반영하는 거울에 눈 맞추는 거라고 할 수 있을지. 두 번 읽고 싶은 책이다.


긍정적 문화는 내일에 대한 약속을 현시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 현재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오늘의 노동을 지속하기 위해서 잠시 재충전하며 쉬려고 들어가는 영역이며, 결국 "생존의 적대관계들이 무마되고 평정될 수 있으며, 외관상 분명히 통일되고 자유로운 영역이 문화 속에서 구축되는 것이다. 문화는 사회생활의 새로운 조건들을 긍정하거나 또는 감춘다."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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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26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저 <황금가지>에도 전임사제를 죽임으로서만 가질 수 있는 황금가지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하죠. <전>의 세계는 스스로 속죄양이자 파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데, 지금의 세계는 자본주의와 인간 욕망의 괴이한 이종교배 속에 분열적인 양자역학 결과들이 너무 많이 파생되니...(모든 걸 누리고 배울 수 있는 최상위층들이 오히려 더 막되어먹은 부분들만 봐도;;)....우리 고뇌든 고통이든 줄어들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동서양을 나누기도 어려운 지점.

봄밤 2015-01-26 10:33   좋아요 0 | URL
칼비노! 칼비노를 읽어야겠습니다. 반가워요 Agalma님.
<황금가지>로 풀어주시니, 그에 대한 댓글을 달 수가 없네요.
`양자역학`이라는 말을 이렇게 듣다니요.
고뇌든 고통이든 줄어들 순 없겠지만 점심만큼은 맛있게 드시길요!

AgalmA 2015-01-26 11:41   좋아요 0 | URL
저도 반가워요^^ 방금 칼비노 생각하며 도서관에서 오는 길인데...이거 오버랩들이 재밌습니다 ㅎ
 




사랑에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다고 우리는 말했다. 이 사랑의 침묵의 충만함은 죽음의 침묵에까지 건너간다. 사랑과 죽음은 서로 하나를 이루고 있다. 사랑 속에 있는 모든 생각과 행위는 침묵에 의해서 이미 죽음으로까지 뻗어 있다. 그러나 사랑의 기적은 죽음이 있을 수 있는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


사랑에 한계를 짓고 분명하게 해주며, 사랑에게 사랑에 적합한 것만을 주는 것은 말이다. 사랑은 말을 통해서 구체화되며, 말을 통해서 진리 위에 서게 되며, 말을 통해서, 오직 말을 통해서만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된다. "사랑은 단순한 하나의 샘물과 같다. 그 샘물이 둘레에서 꽃들이 자라나는 자갈 바닥을 뒤로 하고 이제 하나하나의 물결과 함께 냇물로서 혹은 강물로서 자신의 성질과 모습을 변화시켜가다가 마침내 가없는 대양 속으로 흘러든다. 그 대양은 미성숙한 정신을 가진 자에게는 참으로 단조로워 보이지만, 위대한 영혼은 그 해안에서 끝없는 명상에 잠긴다."(발자크)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까치. 110~111쪽




신림의 어느 책방에서는 책표지를 싸준다. 투명한 비닐을 잘 드는 가위로 재단을 하는 동안 손님은 그럴 듯한 이유로 조금 더 서성여서 좋다. 아쉬워 서점 안쪽을 한 번 더 다녀와도 좋고 표지를 잘 싸는 주인의 손을 유심히 보는 것도 좋다. 책 안쪽에 붙은 테이프는 처음에는 투명하게 붙지만 나중에는 노랗게 떠 지나간 시간을 짐작하기 좋다. 


<침묵의 세계>는 신림의 어느 책방에서 왔다. 곁에 둔지 일 년이 지났으나 읽은 부분과 읽지 않은 부분을 헤아리기 어려워 언제나 낯설게 펴보는 책이다. '가까이 두고 싶지만 가능하면 끝까지 읽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이해가 될까. 언제나 새 책처럼 두려는 마음은 읽은 부분을 잊고 읽지 않은 부분을 헷갈려 놓기로 했다. '침묵'에 대한 사랑을 전하기 위해 이토록 두껍게 쌓인 말을 들여다 보면, 침묵에 대한 이해를 앞질러 사랑에 대한 이해를 전해 듣는다. 


'그러나 사랑의 기적은 죽음이 있을 수 있는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려울 것도 모를 것도 없는 말 앞에서 마음을 절고. 다음 구절로 넘어가면, 말이 침묵보다 불완전 함에도 사랑에 있어서는 침묵보다 위에 있는 이유를 알게 된다.


'사랑은 말을 통해서 구체화되며, 말을 통해서 진리 위에 서게 되며, 말을 통해서, 오직 말을 통해서만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된다'


고백하는 말은 우리 말이 없었던 날들과, 말을 주저하는 날들에는 언제나 조금씩 사랑 없었음이다. 말이 필요한 곳에 침묵이 있던 까닭은 침묵이 쉽고 침묵은 다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의 극진한 형태는 침묵일 것이나, 사랑은 말을 통하지 않고서 전해질 수 없다. 바다 속이나 하늘 위에는 인간의 말이 닿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말이 침묵과 같은 형태가 된다. 인간이 사랑을 약속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이 더럽고 위험한 땅위에서만이다.


새해 선물로 책을 세 권 선물 받았다. <너희는 고립되었다>세 권. 기륭전자 조합원들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집이라는 설명이 간단하다. 사진이라는 '침묵'을 사진집이라는 책으로 엮어 그것은 하나의 '말'이 되었다. 사진집은 보통의 서점에서 구할 수 없다. 사진집은 기륭전자 해고노동자분들이 직접 보내시는데 내일부터 오체투지를 또 하기 때문에 오늘 보내신다는 말을 들었다. 선물을 주신 분은 한 부는 내가 갖고, 두 부는 꼭 전해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길 바라셨다. 


그래서 책은 내일 받을 수 있다. 그 내일은 누군가의 오체투지가 시작되는 날이다. 오체투지는 불교에서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삼보께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절의 이름이다. 신께 바치는 기도는 깊고 은밀해서 기도는 침묵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그들이 엎드리는 기도는 아스팔트 위에 있다. 신이 아니라 사람에게 바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무한히 낮추면서 오체를 바닥에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직 이 더럽고 위험한 지면 위에서만 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만 이곳에 말이 모여야 함을 온 몸을 당겨 크게 쓸 수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그곳에서만 말하지 않는 이들의 침묵을 아프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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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5-01-07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를 싸준다니.. 저 같은 책 결벽증 환자에게는 감동이네요.

봄밤 2015-01-07 18:25   좋아요 0 | URL
직접 싸보셔도 좋아요. 어렵지 않으니 두 번째로 아끼는 책부터 해보시길 바라요.
 

집을 내놨다. 

개찰구 옆 좌판은 목도리와 부들부들한 수면바지에 사이에 물품 하나를 추가했다. 양인형 너덧개를 안그래도 좁은 틈에 줄지어 놓은 것. 몽글몽글한 털, 부드러운 눈매. 동글게 말린 뿔이 모두 솜이렷다. 난데없이 양이라니. 갸우뚱하며 개찰구를 들어가는 이에게 아직도 새해를 맞는 동물의 이름과 그것을 떠올리는 심성에 대해 말해줄 수 있을까. 

내년, 그러니까 새해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모두 양띠일 것이다. 뱃속에 아이를 갖고 있는 모든 가정은 양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텐데. 그 생각의 양이 그만그만하고 가벼운 것이 아니다. 복된 가정의 바깥에 있는 이들도 누구네 집 아이가 양띠네, 순할거네, 라는 말을 한마디씩 거든다. 그리고 이따금씩 저 먼데 가면 볼 수 있다는 상상속의 싱그럽고 푸르른 양떼목장을 떠올릴 것이고 남산처럼 부를 배를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는 한번쯤 나와 양의 관계를 떠올려 보는 거다. 누가 알려줬는지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세라는 양, 그 양들의 울음소리에 잠이 더욱 바짝 깨는 밤을 생각한다. 어쩌면 술냄새가 진동하는 골목, 양꼬치 집이 붉게 늘어선 거리를 생각할지도 모른다. 거기서 멀지 않은 가로등마다 토자국을 칠하는 회식의 연속, 연말에 도착한 사람들이 까만 뒤통수를 노랗게 비추는 가로등 빛아래 있다. 어떤 성실과 회환과 뿌듯함으로 그곳에 도착했나. 그런것들을 떠올리는 사이 저 솜뭉치로 이뤄진 양이 귀엽게 좌판을 뛰어내릴 것도 같은데, 그래서 목도리와 수면바지만 내놓던 좌판은 양을 추가함으로써 내게 새해를 맞는 마음가짐에 대해 일러준 셈이다. 오늘 회식은 내년으로 미뤄졌다.

주소와 층수, 현관 번호키와 평수, 그리고 가격을 말하자 알겠다는 인사로 이어졌다. 나의 바깥, 집이 갖고 있는 재물로서의 가치만이 중요하다. 이럴 땐 이름이 보호된다는게 아니라 치워지는 느낌이다. 내가 지내던 집을 내 놓는 행동으로 인해 가장 먼저 내 이름이 그곳에서 제외된다. 세들어 살기 때문인가. 집을 구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겠으나 <사회문제의 경제학>과 <토지의 경제학>을 읽고 있다. '지가'란 무엇이고 '지대'란 무엇인가. 집이나 땅을 갖지는 못해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기라도 해보자는 마음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인간이라는 천부자원을 다른 인간이 사유재산으로 삼지 않고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바로 임금노동시장이 중심을 이루는 자본주의적 고용제도다임근노동시장에서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일정한 기간 동안 인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거래된다고용주는 노동자를 사유재산으로 삼지 않고도얼마든지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한다일종의 임대시장이다사용권을 거래하는 임대시장이 중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고용제도는 토지가치공유제와 성격이 유사하다인류가 노예제도를 철폐하는 대신 인간 임대제도즉 자본주의적 고용제도를 만들어냈듯이토지사유제를 철폐하는 대신 토지가치공유제를 도입하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할 수는 없는 것일까? p. 91. <토지의 경제학>

'지혜'와 '용기'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노예제도와 비견하는 토지제도가 있다는 걸 생각 하지 못했다. 돈이 있다고 사람을 노예로 여길 수 없는 것처럼 토지 역시 천부의 것으로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말일텐데 돈으로 사람을 노예부리는 건 지금까지도 공공연하고 별로 감추고 싶은 생각도 없는 것 같다. 노예라는 말이 반복되니 노엘처럼 들린다. 트리마다 걸린 공에 얼굴이 잘 비치는 날이기 때문인가. 

언젠가 지하철 역사에 트리가 반짝이고 그 앞에 놓인 몇 개의 의자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앉아계신 걸 본 적이 있다. 말 없이 트리를 보고 계셨다. 멀직이서 그걸 좀 보다가 발길을 돌리던 날. 그분들의 집에는 트리가 없을 것이고, 아마 나무며 전구며 오만가지 걸어 놓는 것들을 메워놓을 마음도 없을 것이다. 어디서나 크리스마스라고 말하니 그런가, 하고 알 뿐인 듯 하실텐데 그게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를 곰곰하시는지도 모르겠다. 공마다 반짝이는 불빛에 어떤 생각을 걸어 놓으셨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잊고 깜빡이는 불빛을 보며 수십년을 가로지르셨을지도. 모르겠다. 모른다는 말만을 쏟아놓으니 아무런 약속도 없고, 아무런 사람도 없는 곳과 어울리는 양이 되고 싶다. 양이 된다면 그가 아만자에서 말했듯이, 사람이라서 슬픈일이 별로 슬프지 않을까 궁금하다. 조금 더 열심히라는 다짐과 함께 양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이 자리를 짠다. 모두가 기쁘려고 하는 곳에서 기쁘지 않으려는 일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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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여행자는 새로 당도한 곳에서 그 사회의 선한 풍경만을 풍문으로 변주한다. 

눈 밝은 여행자는 그 사회의 풍경과 풍습에서 숨은 악을 발견하고 놀란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여행자는


한 사회의 선이 만들어낸 뜻하지 않은 악들과 악이 만들어낸 거짓된 선들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미주의 인상』황호덕 해설 中에서






태국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일주일 정도. 이제 그 곳의 기후와 그곳의 날씨와 그곳의 먹을 것, 풍경과 알아듣지 못하는 말에 익숙해지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쯤 있자 무엇을 보기 보다 같이 앉아 있길 좋아했고요, 더 걷기보다 정주하면서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돌아가는 날이 다가오자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언니들이 물었습니다. 


한 달이나 두 달 더 있지 않겠느냐고, 주변을 다 돌고도 좋을 여행이라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러겠느냐고,


모두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시에 알게되었습니다. 저는 여행으로 무엇을 깨달을만한 녀석이 아니라는 점을요.

어써 빨리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괴로웠거든요. 이 공간에서 내가 불일치합니다. 그저 걷고, 먹고, 놀고, 그런것으로 

힐링이라던가, 마음의 평화, 일하지 않는 기쁨 그런것들을 감사히 느낄만한 그릇이 못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내가 

여행을 하는 중에도 이 곳에서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들의 노동, 이들의 쉼, 이들의 저녁, 이들의 무엇...나는 

그속에서 구분없이 지냈습니다. 여행을 하러 떠난 곳에서, 사람들은 여행을 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 나를 

여행하게 만들었겠지만 그것이.


여행을 그치게 만들었습니다.


여행이 제 깜냥을 재는 곳일 줄 몰랐더랬습니다. 남 사는 곳에 삶의 모습으로 있지 못하는 것이 괴로워 

제 살던 곳으로 내빼는 모습이라니요. 여행 전후가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는 일이 여기서 

비롯되는가 싶었습니다.



비행기가 아닌 기차, 배를 타고 떠났을 세계여행이라고 합니다. 백여년 전의 여행이라니 감도 잘 오지 않습니다.

여행에 큰 흥미는 없지만 여행이 마음껏 주어지지 않는 지금 또 마음껏 주어지지 않았을 그때의 기행을 보며 

여행을 또 동경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나는 어떤 여행자로 있었는지 살펴봅니다.


글에 비추어 보아. 저는 보통의 여행자가 선한 풍경으로 마음이 배불렀던 중



뜻하지 않게 들어온 눈빛, 눈빛,에 좀 아팠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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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희 옆집 살아


성동혁


 난 너의 옆집에 살아Ⅰ소년이 되어서도 이사를 가지 않

는 난 너의 옆집 살아Ⅰ너의 집에 신문이 쌓이면 복도를

천천히 걷고Ⅰ베란다에 서서 빈 새장을 바라보며Ⅰ새장

을 허물고 사라진 십자매를 기다리는 난Ⅰ너의 옆집 살

Ⅰ우린 종종 같은 버튼에 손가락을 올려놓고Ⅰ같은 소

독을 하고 같은 고지서를 받고 같은 택배를 찾으며 ll 안

개가 가로등을 끄며 사라지는 아침Ⅰ식탁에 앉아 처음으

로 전등을 켜는 나는 너의 옆집에 살아Ⅰ이사를 오며 잃

어버린 스웨터를 찾는 너의Ⅰ냉장고 문을 열어 두고 물

을 마시는 너의 옆집 살아Ⅰ내가 옆집에 사는지 모르는

너의Ⅰ불가사리처럼 움직이는 별이 필요한 너의 옆집 살

Ⅰ옆집엔 노래하는 영웅이 있고 자전거를 복도에 세워

두는 소년이 있고 국경일엔 태극기를 올리는 착한 어린이

가 있어 ll 십자매가 날개를 접고 돌아와 다시 알을 품을

수 있도록Ⅰ알에 묻은 깃털을 떼어 내지 않는Ⅰ비가 오는

날에도 창문을 열어 두는 나는 너의 옆집에 살아Ⅰ복도

끝에서 더 긴 복도를 만들며Ⅰ가끔 난간 위에서 흔들리는

코알라처럼Ⅰ난 너의 옆집 살아Ⅰ바다의 지붕을 나무에

새기며Ⅰ커튼을 걷으면 밀려오는 나쁜 나뭇잎을 먹어 치

우며Ⅰ같은 난간에 매달려 예민한 기류에도 함께 흔들리

는 난Ⅰ난 너희 옆집 살아




성동혁, 『6』, 민음사. 2014.





나와 너만큼 반복되는 '살아'라는 말. '살아'보다 먼저 오고 싶은 '나'라는 말. 

내가 사는 것 만큼이나 자주 곁에 두고 싶은 '너'라는 이름.

마음에 거리를 둘 수 있어야 오래 지켜볼 수 있다는 노래에 

나는 너의 옆(집)에 머물고, 마지막에 가서 너는 비로소 '너희'가 된다.



독자들을 위해 썼다고 한다.

















'성동혁'이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6'이라는 시집이 나오고 '6'이라는 시집을 검색하면 '성동혁'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저 네모난 테두리가 빛나서 당신 눈이나 손가락이 비친다고 하면 쉽게 믿지 않겠지만. 그치만 정말이예요. 가까운 서점에 가면 꼭 만져보세요. 이 커버 안으로 은색의 눈부신 양장이 얼마나 고요한지. 왜 아름다운 것 앞에선 숨을 크게 참고 싶어지는지. 왜 처음 본 시에게서 나를 이해받는 것 같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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