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inumsa님의 "[판미동]「숨만 쉬어도 셀프힐링」서평단 모집"

잠이 안오는 밤을 걱정하다가 우연히 판미동에 들렸습니다. 불면증에 대한 꼭지를 읽었어요. 잠이 안오는 이에게 그럴 땐 이렇게 해봐, 알려주곤 했지요. 이 꼭지들이 모여 책으로 나왔군요! ^^!
또 한 번 기쁘게 신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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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읽기-논문을 잡지처 '보고읽기


글항아리-아케이드 프로젝트 001, 002, 계속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


오늘날 인문학 출판사들은 갈수록 어려운 글을 기피하는 대중과 양질의 인문서를 집필할 시간이 없는 저자들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한 사람의 저자가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고 흥미롭게 파헤치는 책은 내기 힘들어지고, 여러 사람이 쓴 여러 관점의 글을 단순하게 묶어서 낼 수밖에 없는 현상이 되풀이되면서 학술 출판에 대한 대중의 외면과 출판인들 스스로의 자괴감은 깊어지고 있다. 국내 대부분의 인문학 출판사들은 국내 저자들의 저서를 통해 존립할 수 있는 자생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이는 번역서에 대한 심화된 의존과 몇몇 유명 저자에 대한 쏠림 현장을 빚고 있다. 


(…)






논문은 드물다

그것의 유통은 어떤 학회지에 한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반적인 독자를 영영 갖지 못할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그것은 탄생하는 시간이 터무니 없이 많이 드는 것 중에 하나다. 드물게 쓰이며, 그만큼 드물게 읽힌다. 논문에 쓰인 글자만큼 비싼 글자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생년월일처럼 이름, 제목, 년도로 표시되는 표tag를 갖는다. 태그로 이곳저곳 많이 불리는 것이 논문의 1차적인 목표다. 쓰는 사람들은 한 편에 그쳐서는 안된다. 모아야 책이 되기 때문이고 그래야 누구라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 편을 쓸 수 있는 용자 누구던가? 잠재적으로 창조적인 논문을 쓸 수 있는 연구자와 일단 논문을 지금 현상할 수 있는 연구자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쨌든 쓸 수 있는 (상황의)사람만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열 개가 모여 한 권의 책이 되지 못하면 한 개의 논문은 다른 논문의 꼬리표로 살기 쉽다. 내용이 아니라 제목만 게 된다. 최종에는 개수로 남는다. 누구, 몇 편 썼더라. 내용은? 모른다. 


가시의 탄생

이 무쓸모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대중은 더이상 어려운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편집부의 말에서처럼 '양질의 인문서를 집필할 시간이 없는 저자들'의 처지와 같다. 읽을 시간이 없다. 시간을 내서, 어려운 책을 읽고, 그것을 음미해서 지知의 기쁨이나 새로운 창을 내는 즐거움을 가질 여유가 없다. 가시적인 계발(어학, 컴퓨터, 그 밖에 넘처나는 자격증)을 하기도 바쁜데 알아주지도 않는 '영혼'의 걸음을 위해 책을 읽고 머리를 싸매라니, 가시가 가득 핀 이유다. 가시는 아름다움을 (지키기)위해서 만들어졌으나, 이제는 아름다움 이전에 이미 존재한다. 장미가 피는 것은 한 철이지만 가시는 일년을 난다. 가시는 잠재적인 장미를 현상하고, 사회는 가시의 날카로움을 사랑한다. 가시를 보고 꽃이라고 말하고 장미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러니 장미가 필 시간이 어디있겠나. 하루빨리 가시를 더 돋아야지. 때 맞춰 봄과 가을이 사라지고 있다.


논문을 잡지

 나 자신은 도덕적 의무

 면제와 책임 회피,



 즉 처음부터 나의 

책임은 아니었다고 

자위한다.

 주창윤,『허기사회』, 47쪽. (실제 있는 페이지입니다)


지하철에서 어떤 여자가 이 페이지를 편 채로 졸고 있다. 눈이 안 갈 수 없어서 누구라도 한 번씩 읽어보고 기분이 나쁘다. 글항아리는 기분 나쁘라고 이런 페이지를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논문을 잡지처럼 만들었다. 눈이 가기 쉽다고 논문 읽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 풀어쓴 생각은 색보다 깊이 들어온다. 이 똑똑하고 쉬운 논문들은 한 번 들어오면 머릿속에서 좀처럼 나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책에 대한 리뷰가 아니라 책을 만든 것에 대한 리뷰이다. 논문을 풀어 써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일단 두께가 얇고, 감각적인 컬러로 눈을 붙잡고, 시작이 부담없고, 읽으면서 모르는 것은 짚어준다. 게다가 중간중간 잠을 쫓는 페이지까지 마련되어 있다(위에서 소개한 페이지). 이것은 발굴이 문제다. 논문은 수두룩하다. 눈 밝은 이가 '어머, 이건 읽혀야 해'하는 논문을 모은다. 튼실하지만 젠체 않는 날렵한 책으로 만든다. 느려터진 시의 외양(가격과 두께)과 잡지의 감각(컬러)을 입혔다. 그곳을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함께 모이기 좋은 공터다. 광장이다. 가볼만한 카페나 새로 나온 책, 오늘의 잇 아이템이 아니라, 그곳에서 세기말이나, 울음이나, 죽음을 혼자 읽지 말고 모이자. 나가는 문은 '시'다. 『허기사회』는 마지막에 지독히도 아름다운 대안으로 '눈부처'를 호명한다. 저자는 알고 있던 것이다. 세계를 바꾸는 것은 결국 '시'라는 것을.  


아무도 남을 돌보지 않는 시대에 모든 상황은 상호존중이 아니라 상호배제이며,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만 집착하는 즉 '나는 나이고 너는 너'라는 논리만이 지배한다. 눈부처 주체는 불의와 세계의 부조리에 저항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면서도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그러니 허기사회에서 눈부처 주체만큼 지독히도 아름다운 대안은 없을 것이다. 102쪽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정호승, 「눈부처」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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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inumsa님의 "[서평단 모집] 오쿠다 히데오 신작, 「침묵의 거리에서」서평단 모집 "

'연대적인 함구' 비단 학교내 이지메에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섬마을 노예로 충격을 주었던 우리의 사건도 함께 돌아보게 됩니다. 침묵의 거리에서 침묵으로 스며드는 사람들, 남쪽으로 튀어에서 보여주었던 작가의 시선은 결국 '사람' 내가 단 하나의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느냐,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어쩌면 고전-적인 이야기가 된 이지메-문제를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까, 새로운 눈을 기대합니다. 


 *참, 서평 기간이 잘못 기재된 것 같습니다. 
서평 기간: 2014.02.27~2014.03.02 (10일간) 날짜가 오타난 것이라 믿습니다. 27일부터 10일간이 맞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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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해가 바뀌는 날의 미덕이라면 매일 뜨는 해에 다시금 1번이라 동그라미 치고 손을 마주 모으는 일일 텐데, 나는 머리를 드밀며 태어나는 해를 눈 빨갛게 보고 싶지 않아 오래 자버렸다. 뒤뚱거리며 일어나 근처 산으로 향했다. 치마 레깅스가 짧아서 아래가 휑했지만 무작정 나온 걸음은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나가는 시선이 아래춤에 꽂히기 전에 큰 보폭으로 버스에 올랐다.


도착한 곳은 작년에도 올랐던 곳으로 일년이 지나 다시 찾게 되었다. 익숙하면서 낯선 곳이었다. 알듯 모를듯한 길을 걸으며 작년을 떠올렸다. 작년 1월 1일에는 눈이 왔었다. 눈을 맞으면서 산을 올랐는데 다른 것은 잘 기억나지 않고 그저 눈보라가 치면서 들렸던 굉음이 생각났다. 산이 떨면서 내는 소리였다. 산이란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구나. 산을 멀리 손그늘 아래만 두었던 날들이 많았다. 내가 본 것은 산이라고 할 수 없겠구나. 


그때와 달리 오늘은 혼자다. 뒤를 돌아볼 일도, 앞을 쫒아갈 일도 없이 내 다리의 변덕에 맞춰서 올라가면 되었다. 원래 없던 것들이 없던 위치로 돌아가는 것 뿐인데 왜 혼자였을 때보다 더 마음이 휑했던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중얼거렸다. 물을 가져오지 않은 것에 후회가 시작되었다. 입속이 낙엽처럼 위 아래가 말라갔다. 


산 속에 들어가면 나무와 나무사이를 지나야 한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나무 사이를 통과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나무가 길을 내준 곳에 발을 디뎌 올라가는 것이다. 눈 앞에 가까운 나무는 돌처럼 단단히 서 있었다. 그것을 '나무다' 말하기보다 시간과 공간에서 우뚝하다고 해야한다. 나무 껍질 위에 올라간 껍질을 만져보고, 껍질과 껍질이 갈라져 골을 이루는 곳의 깊이를 가늠해 보았다. 깊어진다는 것은 아마 저것을 말하는 것이겠지. 가지와 가지 사이에 걸리는 건너편 산봉우리를 매만지며 쉬었다. 중간 중간 끊기는 산등성이를 눈썹으로 이으며 올랐다. 처음 이십분은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것을 지나니 숨 쉴만 해졌다. 


내려오는 길에 어제의 눈, 작년의 눈, 작년 겨울이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눈을 만날 때마다 무엇을 쓰고 싶은 생각에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낙엽위에 구름처럼 내려앉은 눈은 시간을 가늠하지 않고 그늘과 햇빛의 적절한 보살핌으로 제 몸을 희게 할 수 있었다. 넓직하게 펼쳐진 눈을 만나자, 나는 견디지 못하고 누군가 짚었을 큰 나무막대기를 주워서 등산코스를 넘어 갔다. 굵은 동앗줄을 넘어가 산의 몸판에 앉아 글자를 썼다. 당신의 이름과 내 이름. 나는 그 이름이 같이 누워 있는 것이 보기 좋아서 곁을 한참 있었다. 산 속으로 하늘은 잘 들어오지 않아서 나는 목 아프게 산 틈으로 들어오는 하늘을 오래 바라보았다. 

얼마쯤 내려왔을까, 내려오는 발자국에도 봄이 시작될 것이라는 예감, 저 눈이 곧 녹으면, 눈 위를 지나간 나무막대기의 폭에 따라 허물어져 내릴 이름이, 이름이, 걱정되었다. 나는 다시 올라갔다. 다시 등산코스 밖으로 다시 넘어가 손으로 눈 위에 쓴 이름을 흐트려 놓았다. 희게 해 놓았다. 아무것도 없던 자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무엇이 있었다고 읽기는 어려운 것이 되었다. 나는 내 손으로 쓴 것을 내 손으로 덮고서 내려올 수 있었다. 구름은 무엇에 매인듯 그 자리였다.


한참을 내려오자 폭이 좁은 계곡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내려오자, 호수 같은 것이 있었다. 호수 위에는 돌이 떠 있었는데 이곳은 산의 아래라도 산 그늘에 해가 잘 들지 않아 얼어있었던 까닭이다. 물은 돌을 받치고 있었고, 돌들은 새떼의 머리처럼 호수위에 가만히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돌과 조금씩 움직이는 돌의 그림자. 더 내려오니 콸콸콸 흐르는 물소리, 얼음 속까지 울리고 있었다.


산의 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산속에서 유난히 따뜻한 자락을 이은 길이다. 그래서 그 위를 지나는 눈이 제일 먼저 녹는다. 눈은 물이 되어 봄과 함께 이른 계곡을 이룬다. 듬성듬성 남은 어제의 눈도 언젠가 덥혀진 산몸뚱이를 견디지 못하고 맑은 것으로 내릴 것이다. 나는 당신과 나의 이름이 사라지기라도 할까봐, 그것은 이름일 뿐이야 하면서도 자국을 덮으면서 걱정했었다. 그러나 눈은 자신과 함게 천천히 당신과 내 이름을 아래로 데리고 간다. 조금 더 높은 지대에 쓰여진 내 이름이 당신의 이름 위에 포개지기도 하면서, 어느새 당신과 내가 무엇을 뜻했는지 이름도 잊어버리면서 내려올 것이다. 한참을 내려오면 커다란 호수를 만나게 되는데, 밤이 깊으면 겨울내 호수 위에 있던 돌들이 바닥으로 서서히 낙하한다. 낙하하는 돌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천천히 호수에 내려갈 것이다. 물가 언저리에서 가운데로, 가운데에서 바닥으로 몸을 서서히 뒤집으면서. 아이가 돌을 던져서 호수가 삼키는 계절에는 우리 이름이 그 안에서 천천히 유영할 것이다. 어느날은 내리는 물 따라 산 아래로 더 내려가다가, 그늘이 깊은 낙옆 위에서 잠을 잘 지도 모르겠다. 구름이 우리 몸을 잠시 지우다가 지나갔다. 이름을 잊어버린 당신과 내가 산 속에 있다. 다음엔 우리 이름을 부르러 올라요. 당신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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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08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이정 시집을 훔치던 날 

 그때는 8월, 여름의 한가운데였으나 추운 겨울로 기억한다. 그 거리는 추웠고 나는 훔쳐야 했다. 추위로 훔친 것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 날씨, 혹독한 계절이었다. 나는 그것을 샀지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훔친 것이 분명했으므로 날씨는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어야 했다. 몹시 추워야 했고 내게는 품에 안을 만한 것이 필요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아니라면 얼어 죽거나 죽는 것을 모른체해야 했다. 그때 나에게 이 시집을 알려준 이는 나를 눈감아 주었으니 그도 공범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그에게도 이 시집이 필요한 이가 여러 명 떠올랐을 것이나, 말하지 않았다. 아마 내 마음속에 있는 이토록 욕망을 알았다고 생각한다. 내게 '왜'라고 묻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그리고 밖으로 내어봤자,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아챈 그의 본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곳은 누구나 다 아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열린 시내의 깔끔한 헌책방이었다. 한낮의 추위를 피해서 들어온 곳은 시원해서 땀이 다 식었다. 가지런히 꽂혀진 책들은 저마다 등을 보이며 제목을 읽게 해 주었고 언제나 그렇듯 시 코너에서 오도 가도 못할 걸음을 미진하게, 그러나 부산하게 떨고 있었을 때였다. 내게는 결코 보이지 않았을 시집이 그의 눈에는 단 한 번에 띄어 뽑아 들었다.

왜 여기 있지, 그의 첫마디였다. 세상에는 자기 자리를 모르고 자리에 있는 것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주 이상한 자리에 있다는 거였다. 아주 오래전에 나왔던 시집, 더 이상 시인이 없는 시집, 그래서 읽고 싶은 사람도 구하지 못한다는 이 시집이, 누구나 다 아는 곳에 나와서 값어치를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집에 표기된 값어치라기보다는 정말로 필요한 사람에게 가기 어려운 곳에 있어서 가치를 다 하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오래전에 읽었던 시가 스쳐갔다. 여섯 살, 여섯 살, 중얼거렸다. 

 


어느 해거름

                             진이정

 

멍한,

 

저녁 무렵

문득

나는 여섯 살의 저녁이다

 

어눌한 

해거름이다

 

정작, 

 

여섯 살 적에도

이토록 

여섯 살이진 않았다

 

다행히 한 편이라도 알고 있어 그것을 말할 수 있었으나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게는 이 시집을 가질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시집이라면 다른 시집도 많았다. 이것을 구하고 싶어서 발을 구르고 있을 문청이 수두룩할 것 같았다. 어린 나이에 시에 투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했을 간청이 외딴곳, 아무 눈에나 띄는 곳에 꽂혀 있었다. 아무 눈의 욕심이었다. 그렇게 밖에 설명될 수 없는 마음이었다. 나는 갖고 싶은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할 줄 알았다. 특히나 잘했고 그것은 내가 갖고 있는 몇 개 안되는 미덕이었다. 마음 내는 것은 대부분 갖고 싶은 것이라는 걸 알았고 필요하지 않다면 사거나 갖지 않았다. 나는 검소했으며 검소한 것이 자랑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갖고 싶은 것이었다. 

 

영화 마지막 사중주를 보면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켜는 부부가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는 딸에게 새로운 바이올린을 사주기 위해서 경매에 참여한다. 경매에 나온 바이올린은 아주 좋은 소리와 울림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그들은 이것을 꼭 사 가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경매는 어느덧 자신들의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그리고 그것은 그 바이올린이 갖고 있는 가치를 넘어선 가격을 내고 있었다. 부부는 결국 바이올린을 사지 못한다. 그리고 경매장을 나오면서 마지막 가격을 불렀던 어떤 남자에게 묻는다. 

 

저게 어떤 바이올린인지 아시오? 바이올린리스트가 되려는 장래있는 아이의 앞길을 방해했어! 당신에게 저 바이올린이 정말 필요한 것이오? 

 

완전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으나 이런 내용의 화 냄이었다. 어떤 남자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부부는 경매장을 완전히 빠져나간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당연히 부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남자가 바이올린을 가져야 했을 마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쩌면 어떤 남자도 바이올린을 켜고 있을지 모르고, 재능이 있는 어떤 이에게 선물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돈이 많아 취미나 수집으로 바이올린을 빼앗아 가는 사람이라고 그려졌고 그렇게 생각했다. 돈이라는 이유로 꼭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고 그것은 화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나도 이 자리에서 마찬가지였다. 어떤 남자보다는 돈이 적었지만 충분하기도 했다. 화를 내던 이는 어떤 남자의 얼굴이 되어 부부의 비난을 듣고 있었다. 바이올린이 정말 필요한 것이오? 그에게 투사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나빴다. 나도 나쁜 얼굴이 되었다. 바이올린이 부부의 딸에게 갔을 이유보다 자신에게 돌아갈 필요를 증명하지 못 했다. 남자는 바이올린을 간절하게 켤 수 없었고 나는 한글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읽을 수 있었을 뿐이지, 그것을 어떤 소용으로 데려갈 힘이 없었다. 힘이 없는 나는 나쁜 얼굴을 내려놓고 시집을 찬찬히 살폈다. 시집을 갖고 있었을 이는 시집을 무척 아끼는 사람이었다. 낙서도 접은 흔적도 없었다. 그(녀)의 필기를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 줄이었는데 '21세기 전망 동인'이라는 진이정이 몸담았던 곳의 이름이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시집을 보면서 나는 이것을 내놓은 이가 시를 포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를 버렸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알 수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알고 싶지도 않다. 그(녀)는 시를 포기하면서 자신의 시집을 정리했다. 자신의 지인이나 원하는 사람에게 원하는 책을 보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나 다 아는 곳에 책들을 보내기로 했다. 분명히 헐값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술값이기 쉬웠다.

 

시를 포기하면서 할 말 같은 게 있을까요. 당신도, 그리고 당신도, 이것을 읽기 바랍니다. 쓰여있지 않은 말을 만들어내 한참 들여다보고 마침내 그것을 훔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침내라고 말하기에는 고민이 없었다. 보자마자 훔쳐야 했으므로 천백 원. 결코 산 것은 아니었다. 그날 헌책방을 나오면서 책을 여섯 권을 샀는데, 그중에 하나는 600 쪽에 달하는 우주에 관한 책이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넉넉히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연 훔친 것도 모자라 은폐하려는 노력은 시집의 두께가 보이지도 않게 했다. 완벽했다. 그는 그것을 보고 '욕심'이라 말하며 들어주었다. 그 말에 조금 편해졌는지 웃으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왜 울지 않았을까. 그때 환하게 웃었던 얼굴이 천상 도둑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남는다. 정말 필요한 사람이 찾았다는 것처럼, 거짓. 그에게도 비췄을 것을 생각하니 나는 내가 조금 걱정되었다. 

 

나는 무엇으로도 이 책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계절에 영원히 봄이 오지 않는 곳에 있어 네게 그만 봄을 줄테니 달라고 해도 갖고 있을 것이다. 겨울이 여름으로 착각하는 뜨거움이라도 언제나 책등을 말끔하게 닦아 차갑게 놓을 것이다. 그날 나를 모른척해주었던 서가의 책들과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특히나 그에게 공범이라는 굴레는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지금도 편치는 않을 것인데,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면 그 마음을 내가 알면서 모른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그도 시집을 보면서 이곳에 있는 연유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리에서 말로 되어 이야기할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문자로 이야기하는 것도 잘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시집을 훔쳤으니 나는 도둑으로서의 자세만 가지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길게 남기는 이유는 하나다. 언젠가 그(녀)가 자신의 책들이 누군가에게 갔을까 불현듯 고민하게 되는 날 당신의 시집이 도둑맞았다는 것을 알려 걱정하기를 포기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고민이나 걱정이 염려로 더할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또 불현듯 차서 도둑은 다리를 곧게 펴지 못하고 잔다, 구부정하게 시집을 읽는다. 

 

나의 희망엔 아직 차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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