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내놨다.
개찰구 옆 좌판은 목도리와 부들부들한 수면바지에 사이에 물품 하나를 추가했다. 양인형 너덧개를 안그래도 좁은 틈에 줄지어 놓은 것. 몽글몽글한 털, 부드러운 눈매. 동글게 말린 뿔이 모두 솜이렷다. 난데없이 양이라니. 갸우뚱하며 개찰구를 들어가는 이에게 아직도 새해를 맞는 동물의 이름과 그것을 떠올리는 심성에 대해 말해줄 수 있을까.
내년, 그러니까 새해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모두 양띠일 것이다. 뱃속에 아이를 갖고 있는 모든 가정은 양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텐데. 그 생각의 양이 그만그만하고 가벼운 것이 아니다. 복된 가정의 바깥에 있는 이들도 누구네 집 아이가 양띠네, 순할거네, 라는 말을 한마디씩 거든다. 그리고 이따금씩 저 먼데 가면 볼 수 있다는 상상속의 싱그럽고 푸르른 양떼목장을 떠올릴 것이고 남산처럼 부를 배를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는 한번쯤 나와 양의 관계를 떠올려 보는 거다. 누가 알려줬는지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세라는 양, 그 양들의 울음소리에 잠이 더욱 바짝 깨는 밤을 생각한다. 어쩌면 술냄새가 진동하는 골목, 양꼬치 집이 붉게 늘어선 거리를 생각할지도 모른다. 거기서 멀지 않은 가로등마다 토자국을 칠하는 회식의 연속, 연말에 도착한 사람들이 까만 뒤통수를 노랗게 비추는 가로등 빛아래 있다. 어떤 성실과 회환과 뿌듯함으로 그곳에 도착했나. 그런것들을 떠올리는 사이 저 솜뭉치로 이뤄진 양이 귀엽게 좌판을 뛰어내릴 것도 같은데, 그래서 목도리와 수면바지만 내놓던 좌판은 양을 추가함으로써 내게 새해를 맞는 마음가짐에 대해 일러준 셈이다. 오늘 회식은 내년으로 미뤄졌다.
주소와 층수, 현관 번호키와 평수, 그리고 가격을 말하자 알겠다는 인사로 이어졌다. 나의 바깥, 집이 갖고 있는 재물로서의 가치만이 중요하다. 이럴 땐 이름이 보호된다는게 아니라 치워지는 느낌이다. 내가 지내던 집을 내 놓는 행동으로 인해 가장 먼저 내 이름이 그곳에서 제외된다. 세들어 살기 때문인가. 집을 구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겠으나 <사회문제의 경제학>과 <토지의 경제학>을 읽고 있다. '지가'란 무엇이고 '지대'란 무엇인가. 집이나 땅을 갖지는 못해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기라도 해보자는 마음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인간이라는 천부자원을 다른 인간이 사유재산으로 삼지 않고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바로 임금노동시장이 중심을 이루는 자본주의적 고용제도다. 임근노동시장에서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일정한 기간 동안 인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거래된다. 고용주는 노동자를 사유재산으로 삼지 않고도, 얼마든지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한다. 일종의 임대시장이다. 사용권을 거래하는 임대시장이 중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고용제도는 토지가치공유제와 성격이 유사하다. 인류가 노예제도를 철폐하는 대신 인간 임대제도, 즉 자본주의적 고용제도를 만들어냈듯이, 토지사유제를 철폐하는 대신 토지가치공유제를 도입하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할 수는 없는 것일까? p. 91. <토지의 경제학>
'지혜'와 '용기'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노예제도와 비견하는 토지제도가 있다는 걸 생각 하지 못했다. 돈이 있다고 사람을 노예로 여길 수 없는 것처럼 토지 역시 천부의 것으로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말일텐데 돈으로 사람을 노예부리는 건 지금까지도 공공연하고 별로 감추고 싶은 생각도 없는 것 같다. 노예라는 말이 반복되니 노엘처럼 들린다. 트리마다 걸린 공에 얼굴이 잘 비치는 날이기 때문인가.
언젠가 지하철 역사에 트리가 반짝이고 그 앞에 놓인 몇 개의 의자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앉아계신 걸 본 적이 있다. 말 없이 트리를 보고 계셨다. 멀직이서 그걸 좀 보다가 발길을 돌리던 날. 그분들의 집에는 트리가 없을 것이고, 아마 나무며 전구며 오만가지 걸어 놓는 것들을 메워놓을 마음도 없을 것이다. 어디서나 크리스마스라고 말하니 그런가, 하고 알 뿐인 듯 하실텐데 그게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를 곰곰하시는지도 모르겠다. 공마다 반짝이는 불빛에 어떤 생각을 걸어 놓으셨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잊고 깜빡이는 불빛을 보며 수십년을 가로지르셨을지도. 모르겠다. 모른다는 말만을 쏟아놓으니 아무런 약속도 없고, 아무런 사람도 없는 곳과 어울리는 양이 되고 싶다. 양이 된다면 그가 아만자에서 말했듯이, 사람이라서 슬픈일이 별로 슬프지 않을까 궁금하다. 조금 더 열심히라는 다짐과 함께 양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이 자리를 짠다. 모두가 기쁘려고 하는 곳에서 기쁘지 않으려는 일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