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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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사랑보다 더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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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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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다.

일본 추리소설이야 이미 그 탁월한 전개와 긴박한 심리 묘사가 압권임을 잘 아는데, 그 탄탄한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 식으로 한다는게.

끌렸다.

평소에 호감가는 고수 + 점점 날아오르는 손예진 + 우리나라에 이 배우 빼놓고 얘기할 수 없지, 한석규의 만남이.

원작은 보지 못했다.

단지 일본드라마가 매우 호평을 받았다는 것은 들었다.

그래서 더욱 부담이 대단했을 터인데,

자신있게 초호화배우들을 끌어들여 작품을 만들어낸 감독에게 우선 박수.

영화 전체적으로도 꽤 괜찮았다, 개인적으로는.

연기가 뒷받침되었고, 무척 흥미로운 구성에, 스릴러적 요소까지.

처음엔 이해할 수 없게 되다가 나중에는 이해하기 싫어지게 되는 마음의 울림이야말로 이 영화의 매력일게다.

순간의 선택으로 결국, 평생을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어쩌면 그런 이들이야말로 가장 측은하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묘미는, 인생의 재미는 결국 미래를 알 수 없어 현재를 가꾸어가는 것에 있는데, 미래가 없는(혹은 다 보이는) 사람의 한평생은, 누가 책임져주고 누가 보상하여주나?

그래서 결국, 요한과 미호의 선택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더 인상 깊었고 백야행의 덧없음이 그려져 슬펐다. 과연 그러면 행복할까?

과연, 사랑보다 더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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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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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부감이 드는가?

얼굴이 찌푸려지는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가?

            자신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혁명이라는 단어가?

 

세상이 달라졌듯이, 지금 숨 쉬는 사회가 어제와는 다르고 내일과는 또 다르듯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 단어는 옛날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쉽게 말하면 변화이고, 어렵게 말하면 생각(혹은 행동)의 전환이다. 변화는 조금만 노력해도 드러나지만, 생각이나 행동의 전환은 그 동안 살아온 방식과 가치관으로 인해 무척 힘들다.

 

그러나, 어쨌든 저쨌든, 이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특히 대한민국 20대에게는 더더욱, 이 단어만큼 쓸모없다며 콧방귀를 낄만한 것도 없을듯하다. 모든 공부가 결국 다 돈 잘 벌기 위한 수단이고, 모든 청춘이 결국 다 좋은 곳에 취업하기 위해 써버린 시간들이 되어버린지가 오래다.

 

그럼에도 저자 우석훈이 ㅡ 그 누구보다 20대의 마음을 잘 알며 지대한 관심 끝에 20대에게 88만원 세대라는 저 유명한 명칭을 덧붙인 그가, 「88만원 세대」다음으로 써낸 책이 바로 이 작품이다. 왜 그는 하필 이때 이 단어를 들먹였을까? 주목을 끌어보려고? 자극하기 위해서? 지금 20대에게 절실히 필요한 게 이것밖에 없으므로?

 

모두 다 맞는 얘기다. 오직 취업을 위해서만 달려가는 인생 가운데, 정신이 없고, 영혼이 멈춰버린 상태가 되버리는 건 당연지사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정녕 꿈꾸는 게 무엇인지보다 당장 내일 먹고 살 걱정이 앞서는 삶. 그 삶에 필요한 망치가 바로 이 단어였다, 혁명.

 

무언가 다르게 다가온다.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예전 같으면 '이 시대에 왠?'이라고 했겠지만, 우석훈이니까, 20대와 함께 살아숨쉬고 싶어하는 이가 쓴 책이니까, 자연히 기대하게 되는건 다름아닌 색다름. 그래서 지금, 그 무엇보다도 색다르게 다가오는 그 이름, 혁명.

 

조용히 하란다. 어떻게? 그 동안 보고 듣고 느낀 그것은 과감한 결단을 필요로 하고 인생을 내걸어야 하며 고요보다는 풍파를 일으키는데? 피바람이 부는 것도 예상할 수 있는데? 그러나 이제는 정말 조용히 하는 게 더 효과적일 듯하다, 이렇게 시끄러운 세상에서는.

 

맞지 않는 학교를 어느 순간부터 조용히 나가지 않는다.

좌파는 구질하다는 편견은 가라! 패션 혁명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건다.

취업보다는 적성에, 돈보다는 재미에 더 행복이 있는 나를 차별화시킨다.

다른 사람을 통해 나를 보는 것도 좋지만, 나를 통해 나를 보려고 한다.

ㅡ 이 모든 게 가능한 일,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멋지다!

나를 위해 살면서도, 또한 남을 위해 사는 삶.

결국은 쫄지 않고 기죽지 않게 마음이 가는대로 즐기는 인생.

 

가슴이 뛴다!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더욱 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

열정을 다하여 희망으로 살아갈 때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는 한 조각.

 

결국, 별거 아니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는 우리네 노력, 그거야말로 혁명의 발걸음일 터.

바라보고 느끼자, 생각과 행동의 전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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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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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가 섬뜩하다. 세계의 절반이나 굶주린다니.. 세계 인구가 60억이라는데, 그럼 30억이나 굶주리고 있단 말인가?! 헐.. 믿기지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보는 것만 보이고 아는 것만 알게 된다고, 내 옆 사람은 굶주리지 않고 있거든. 값을 떠나서 삼시세끼 먹을 수 있으니까. 반찬이 왜 이 모양이냐고 투덜대도 굶주리지는 않으니. 굶주리지 않는 절반에 속한 거다. 다행인거니, 행복한거니?

책은 정말로 '왜'에 집중했다. 전세계 인구가 충분히 먹을 식량이 있음에도 막상 절반이 굶주리는 현실, 노력은 있었으나 욕망을 뺏길까봐 질투에 눈이 뒤집혀 살인이 일어나는 현실, 부자인 소수와 가난한 다수에서 이상하게도 다수가 이기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현실을 고발하고 그 이유를 파헤친다.

특히 네슬레의 만행이나 강대국들의 오만은 서글프기만 하다. 끊임없이 배를 불리기 위해 잡아먹히기보다는 잡아먹음을 선택하는 인간. 잡아먹힘과 잡아먹음 사이의 함께 덜 먹음을 보지 못하는 인간, 아니 보지 않는 인간.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말을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인간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의 절반이 굶주리고 그 이유가 가진 자의 욕망 때문인건 이제 알겠는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인가? 항상 무언가 문제 제기를 할 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대안이다. 알았으면 바꾸려고 실천해야지! 그런 면에서 독서 후에 진한 아쉬움만이 남을 뿐이다.

온통 글 자체가 사실 전달에 치우쳐서, 이성을 만족시켜주기는 했지만 감성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나마 딱 한가지 마음을 건드리려 한 시도 ㅡ 표지의 울고 있는 흑인 아이의 사진 ㅡ 는 오히려 반감만 산다. 아시아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제일 많다면서?!

결국은 그놈의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가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힘이 빠진다.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이미 마약처럼 모든 이가 중독된 상황에서 우찌해야한단 말인가?! 바뀔 가능성은 0에 가깝고, 혼자서는 나약하기만 한데.. 여기서 또 마더 데레사의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하는 일은 넓은 바다에 떨어지는 물 한방울 정도 밖에 되지 않을지 몰라도 물 한방울조차 없는 것보다 낫다'

움직이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머리를 가슴으로 느끼고, 가슴을 행동으로 보이면 그게 곧 물 한방울이 된다. 그 한방울로부터 광대한 물결이 시작되듯이, 나부터 시작하자. 힘들면 함께 하면 된다. 주위를 둘러보면 동지는 많다. 할 수 있는 것들도 많다. 눈을 뜨고 가슴을 펴자. 내가 움직일 때 한 사람이라도 더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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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스승 톨스토이와의 만남 1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동완 옮김 / 신원문화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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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 어찌 보면 질문 자체가 뜬금없는 질문이자, 밑도 끝도 없는 질문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노력한 끝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작품을 통해 확고히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예술이란 예술가가 체험한 특수한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일이라고.

과연, 맞는 말이다. 더 나아가서 나는 예술에 있어서 예술가와 그가 예술로 표현하려는 대상에 더 주목하고 싶다. 즉,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가는 주체-그 대상은 객체의 관계가 아닌, 소통하려고 다가가는 예술가도 주체-그 대상(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무엇이든지) 또한 주체의 관계로 서로 소통하고 관계 맺으려는 활동 자체가 예술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가-예술적으로 표현되는 대상-예술작품을 접하는 타인, 이 셋의 관계가 모두 주체가 되어 서로 다가가고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이 된다.

하지만 그는 예술이란 진실한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하며 다른 부차적인 것들을 비판하였는데, 나는 그의 비판적인 생각을 내 생각대로 비판하고 싶다.

먼저 그는 비평가들이야말로 쓸모 없는 작자들이라고 깎아 내렸다. 그들은 작품에 드러난 예술가의 감정을 느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로써만 작품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의 말에는 모순이 있다. 그는 분명 아주 훌륭한 예술 작품이란 다수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를 설명하고 지식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 역할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바로 비평가들 아닌가? 만약 그들이 예술가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작품에 대해 어떠한 관심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그 작품에 담긴 감정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비평가는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한편으로 그는 예술이 점점 직업이 되는 점을 우려했다. 그에게 진정한 예술은 오직 조금의 보수도 받으려 하지 않고 심지어 자기 이름을 붙이려고 조차 하지 않는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과연, 톨스토이가 지금에 와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자본을 통해 먹고 사는 것이 정해지는 사회에서, 직업은 없으면 안 되는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예술가는 예술이라는 직업으로 먹고 살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일까? 오히려 예술 자체를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평생 직업 삼아 예술로서 인생을 영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 받은 행복한 삶이 아닐까? 예술이 직업화(職業化)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지 그것이 예술의 본질을 흐리지는 않는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그는 모든 표절, 혹은 모방을 통한 작품은 모조품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하지만 나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을 믿는다. 모방을 하면서도 그 속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려고 힘쓴다면, 그것은 결코 그릇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만 보인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누가 모방 없이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어떤 작품을 모방하여 그것을 풍자적으로 재구성한 패러디의 가치를 높게 사고 싶다. 패러디야말로 그 작품에 담긴 감정을 십분 이해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 역작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방’과 ‘표절’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이렇게 그의 예술에 대한 생각에 무수한 비판을 가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그의 핵심 의견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앞에서도 말했듯 그는 예술이란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수단이 되는 인간의 작업’이라고 정의 내렸고, 나도 적극 동감하는 바이다. 그는 예술가가 작품을 통해 표현한 감정이 자신에게 감염될 때에만 - 정말 톨스토이가 ‘감정이 감염된다’라는 표현을 썼는지, 무척 궁금하다. 원작에서는 러시아어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알고 싶다. - 진정한 예술이라 보았고, ‘사람과 사람을 서로 결합시키는 마음’이야말로 ‘예술의 마음’이라고 역설했다.

다음 두 그림을 살펴보자.


              <27-ⅩⅠ-72>, 김환기                                 <시장의 여인들>, 박수근

위 두 그림의 공통점을 알겠는지? 둘 다 아주 비싼 값에 팔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왜 왼쪽 그림이 비싸게 팔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제목부터가 이상하다.) 도대체 화가가 어떠한 것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와 닿지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오른쪽의 그림은 화가가 얼마나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대상과 소통하려고 힘쓰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고 그 감정이 전달된다. 그래서 박수근의 그림을 보면 나도 감명을 받고 많은 사람들도 그의 가치를 인정하여 그의 그림에 비싼 값어치를 매긴다.

만약 톨스토이가 위 두 그림을 본다면, 그리고 위 두 그림이 다 비싼 값에 팔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뭐라고 했을까?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왼쪽 그림은 예술가가 감정의 전달에는 아무 신경도 안 쓰고 오로지 기교로만 멋을 낸 작품이고, 오른쪽 그림은 예술가가 삶 속의 민중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려고 충분히 애쓴 수작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결국 예술을 감정 전달의 수단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한 모호함과 약점이 드러난다. 왼쪽 그림이 비싸게 팔린 것은 또한 왼쪽 그림을 산 사람이 충분히 화가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감정에 감염되어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라면, 그 누가 그에게 머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결국 감정이란 극히 주관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기에, 우리는 그 누구의 감정도 비난할 수 없고 그 어떤 예술 작품도 폄하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런 면에서 - 모든 예술작품을 감정적인 측면으로 받아들이고 드러내려 한 점에서 - 톨스토이가 왜 종교에 심취하고 종교적인 작품을 많이 써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좀 더 많은 이들에게 감염시키길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인을 하나의 감정으로 결합시키기 위한 수단이야말로 종교적 자각으로 인한 감정, 즉 인간은 누구나 신의 자녀이고 똑같은 동포라는 자각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임을 믿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고전이 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이러한 감정을 사람들이 느끼기 때문은 아닌 것 같지만..)

아직도 그를 알고 이해하기에는 먼 길이 남아 있지만, 그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어떤 생각으로 글을 썼는지, 조금은 그에게 다가간 느낌이 든다. 나도 그가 남긴 예술 작품들을 통해 그의 감정을 더 진실히 느끼고 싶고, 그와 오래도록 소통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더욱 간절히 톨스토이-되기를 원한다.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

1. 예술의 직업화(職業化)를 피할 수 있을까? 예술이 직업을 벗어났을 때 그것은 단지 취미에 불과하게 되지 않을까? 나는 한번도 무료 전시회나 음악회, 공짜로 전하는 책을 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만행 친구들의 시도는 대단!)

2. 만인을 하나의 감정으로 결합시키는 수단은 꼭 종교적 자각의 감정 하나만 있는가? 톨스토이의 생각에 동의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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