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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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다. 어디서, 어떤 신분으로, 어떻게 태어났냐가 무척이나 중요하다. 누구는 CEO 딸로 태어나 모자람 없이 마음대로 살고, 누구는 한쪽 팔이 기형이어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누구는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고, 누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운 전쟁터에서 숨막히며 살아간다.

 

이 땅의 대표적인 전쟁 지역인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는 이들의 삶은 어떠할까. 전통 이슬람교에 폭력이라는 이름의 통제가 가해지니 그야말로 힘겨움의 연속일터.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3자, 그것도 언론을 통해서만 접한 '그럴 것이다' 라는 모습.

 

이런 점에서 작가의 강점이 빛을 발한다. 사람이 풀어내는 이야기 중 가장 호소력 짙은 것이 바로 본인의 경험담일터.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고 자라 뼛속까지 아프가니스탄 사람인 호세이니의 소설은 그래서 그 어떤 픽션보다 더 사실로 그리고 실제로 다가온다.

 

「연을 쫓는 아이」가 남성 위주의 이야기였다면,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프간 여성의 삶의 여정이다.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성의 한 맺힌 생애와, 순식간에 변해버린 나라만큼 급격히 바뀐 일상에서 발버둥치는 여성의 눈물 많은 인생이 만나, 아프간 여성으로 태어난 이들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무엇이 한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가. 집안? 가족? 친구? 돈? 사랑? 능력? 의지? 꿈? 어떻게 될지 모르는, 한번 뿐인, 그래서 참 기가 막힌게 바로 인생 아닌가. 그네들의 고통와 슬픔, 그러면서도 잃지 않는 희망과 변함 없는 의지가 마음에 박힌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지금도 그럴 테고.

 

기억하자.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는 것을. 만나고픈 함께 아픔을 공유하고픈 그들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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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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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 넘치는 도발적인 신선함.

 

말로만 듣던 김연수다. 아니, 그를 접한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고마운 잡지 에서 한동안 짤막하게 살풀이를 했었다. 독특한 제목을 지닌 작품의 소유자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때는. 문장을 뒤에서부터 거꾸로 나열하여 실은 글을 봤을 때부터 알아보기는 했지만.

 

이건 뭐. 세상의 이치와 인간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

 

거대하고 무정한 세상 속에서 한없이 작고 여린 인간 군상들의 발버둥치는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 사람도 내가 되고, 저 사람도 내가 된다. 물론 글 속 '나'는 한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 거론돼도 마치 나인듯. 그래서 더 흥미롭고 몰입되는 쏠쏠한 재미.

 

무엇이 인간을 덧없고 우연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가. 방종의 단계에 다다른 자유 때문인가. 자유란 관념이 아니라 욕망이라는데. 인간의 욕망보다 강한 권력은 이 세상에 없다는데. 맞는 것인지도. 모든 문제와 전쟁은 인간의 욕망에서 출발하니까. 자유로서의 발전이 아닌, 자유가 전부인 욕망의 폐해.

 

뿐만 아니다.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된단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그 때 네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 때 나는 왜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는지, 그 때 왜 꼭 그렇게 말해야만 했는지. 후회하기엔 이미 떠나버린 기차.

 

'통찰력'이란 것을 배웠다. 사회 속의 인간이 얼마나 추해지고 얼마나 나약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 가늠하는 것.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인간이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면 무엇이 먼저인지 깨닫는 것.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 누구의 슬픔도 아니라면서 보듬어줄 수 있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것.

 

고맙다.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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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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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내쫓고 동물이 지배하는 농장. 스스로의 생활을 위해 스스로 일하고, 그들만의 규칙을 만들어 오직 그들만을 위해 살아가는. 그 누구의 복종도 필요없이 오직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곳. 유토피아. 그러나-

 

한 사회 안에서는 언제나 지도자가 있게 마련이고. 그 권력이 절대적일 수 있도록 절대 부패하게 마련인바. 점점 없던 규칙이 생기고, 있던 규칙이 사라지고. 누군가는 더 살찌고, 누구는 조용히 없어지고. 평등 위의 평등이라는 웃지 못할 논리까지 벌어지는 판.

 

마지막 파티 장면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우화도 이런 우화가 또 있을까. 조금이라도 관심 있으면 알만한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을 절묘하게 배치하여, 시작은 거창했으나 그 끝은 엉망진창인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니, 이 아니 통쾌할수가.

 

수장이 '돼지'인 것부터, 동물과 인간의 대치, 그 안의 동물들 사이의 계급관계, 지식인과 평민의 대조적인 모습, 권력을 다지기 위한 상상초월 행동들, 각 동물들의 각기 다른 반응 등이 어우러져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생각나게 만든 고전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용기있는 작가 오웰의 용기와 센스에 박수를-

 

이 책을 스탈린이 봤다면, 볼셰비키가 봤다면, 트로츠키가 봤다면, 멘셰비키가 봤다면, 어떤 반응이었을지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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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의 저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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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한 분위기. 우연인듯 필연적으로 모인 인물들. 상상을 초월하는 기발한 연쇄살인. 도무지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각종 트릭들(밀실살인, 정체불명 범인, 사라진 시체, 뜻모를 암호). 내부 안에 있는 범인의 만행. 명탐정의 통쾌한 추리. 극적인 반전. 애잔한 범행동기.

 

'추리소설'하면 떠오르는 것들.

 

김전일 시리즈가 아직도 나에게는 최고이고, 애거서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의 소설이 내 스타일이며, 요즘은 그러한 타입의 추리소설을 찾아보기 힘들어 안타까운 나에게는.

 

그런데 이게 진부하다고?!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고?!

 

한술 더떠 이런 것들을 '본격 추리소설'이라고 싸잡아 주제로 삼아버리는 그 오만함과 대담함이란.

 

히가시노니까 그래도 인정.

하지만 히가시노여서 그의 마지막 본격 추리소설이라 불리는 이 작품은 무척 평이하여 조금은 아쉬움.

물론 그 트릭과 범인은 역시 놀랍지만.

 

여튼 오마주스러운 필체에 젖어 금방 읽어내려간.

역시 빠질수 밖에 없는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결국 머, '인위적인 설정(영원한 고2 김전일, 김전일 있는 곳에 사건 있다)+사연 많은 인물+기막힌 타이밍'이 돋보이는 본격 추리소설이든, 게이고만의 '리얼리티+현대적감각+사회성'이 담긴 소설이든, 좋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인간의 추악한 본능과 욕망이 여실히 드러나는, 그 이면의 어쩔 수 없는 동기가 스며드는, 아직 정의는 죽지 않았음을 화려하게 풀어내어 탐정의 명쾌함이 살아있는, 매력 넘치는 장르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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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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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5]

 

나에게는 참 어렵다. 아니, 인간의 몸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오롯이 내려놓고,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 살라는것. 분명 거룩하고 영광된 말씀이며 확고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본질이란 말인가?!

 

이 작품을 보면서 숱하게 들었던 생각이자 의문이었다. 종교가 삶이었고 신앙이 생활이었던 그때, 겉으로 보면 확연하게 정반대에 서있는 한 인간이 작품에서 툭 튀어나와 멋대로 욕하고 욕망을 해결하는 모습은 대부분 거부감을 일으킨다. 왜 저러지, 왜 저럴까 하면서.

 

더욱 이해가 안가는 것은 작품속 화자(실화이니까 곧 작가)의 태도.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조르바의 모습에, 그의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에, 감탄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을 자책하는 장면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조르바의 무엇이 그를 그렇게 사로잡았을까. 과연 그는 조르바에게서 어떤 깨달음과 교훈을 얻은 것일까. 조르바가 누구이길래 화자는 끝까지 조르바와 함께 웃고 그를 마지막까지 기억하려고 한 것일까.

 

처음에는 마초에다 짐승같은 조르바를 보며 불편해하다, 화자의 마음으로 그를 다시 대하니, 점점 달라보였다. 뚝심있고, 자연을 사랑하며, 삶을 즐길줄 아는, 지극히 인간적인, 무엇보다 열정과 희망이 넘치는 사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도무지 찾아보기도 만나기도 힘든 위인이 이야기 전반을 휘어잡는 흐름은 이제 흥미롭기만 하다.

 

「터질 만큼 처넣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생각해 봐요, 두목. 반쯤 악마가 되지 않고 어떻게 악마를 다룰 수 있겠어요?」

「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중략)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 낸 나뭇조각도 성물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나요? 그럼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문설주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디 그 이야기 좀 들읍시다. 요 몇 년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씩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 낸 게 무엇이오?」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랜만에 인상깊은 대사를 곱씹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 별다른 기대 없이 접했던 작품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은, 무엇이 옳고 그름보다 무엇이 유익하고 유의미한지가 더 중요함을 절감한.

 

조금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의 의미를 공감하게 만들었으며, 대범한 카잔차키스의 진솔하면서도 살아있는 필체가 유쾌했던 작품이었다. 이제는 주위에서 찾기 정말 어렵게 된 조르바. 만나기 힘들다면 나라도 조르바의 면모를 조금은 닮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곧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처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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