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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5]
나에게는 참 어렵다. 아니, 인간의 몸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오롯이 내려놓고,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 살라는것. 분명 거룩하고 영광된 말씀이며 확고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본질이란 말인가?!
이 작품을 보면서 숱하게 들었던 생각이자 의문이었다. 종교가 삶이었고 신앙이 생활이었던 그때, 겉으로 보면 확연하게 정반대에 서있는 한 인간이 작품에서 툭 튀어나와 멋대로 욕하고 욕망을 해결하는 모습은 대부분 거부감을 일으킨다. 왜 저러지, 왜 저럴까 하면서.
더욱 이해가 안가는 것은 작품속 화자(실화이니까 곧 작가)의 태도.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조르바의 모습에, 그의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에, 감탄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을 자책하는 장면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조르바의 무엇이 그를 그렇게 사로잡았을까. 과연 그는 조르바에게서 어떤 깨달음과 교훈을 얻은 것일까. 조르바가 누구이길래 화자는 끝까지 조르바와 함께 웃고 그를 마지막까지 기억하려고 한 것일까.
처음에는 마초에다 짐승같은 조르바를 보며 불편해하다, 화자의 마음으로 그를 다시 대하니, 점점 달라보였다. 뚝심있고, 자연을 사랑하며, 삶을 즐길줄 아는, 지극히 인간적인, 무엇보다 열정과 희망이 넘치는 사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도무지 찾아보기도 만나기도 힘든 위인이 이야기 전반을 휘어잡는 흐름은 이제 흥미롭기만 하다.
「터질 만큼 처넣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생각해 봐요, 두목. 반쯤 악마가 되지 않고 어떻게 악마를 다룰 수 있겠어요?」
「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중략)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 낸 나뭇조각도 성물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나요? 그럼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문설주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디 그 이야기 좀 들읍시다. 요 몇 년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씩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 낸 게 무엇이오?」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랜만에 인상깊은 대사를 곱씹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 별다른 기대 없이 접했던 작품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은, 무엇이 옳고 그름보다 무엇이 유익하고 유의미한지가 더 중요함을 절감한.
조금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의 의미를 공감하게 만들었으며, 대범한 카잔차키스의 진솔하면서도 살아있는 필체가 유쾌했던 작품이었다. 이제는 주위에서 찾기 정말 어렵게 된 조르바. 만나기 힘들다면 나라도 조르바의 면모를 조금은 닮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곧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처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