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의 자서전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김희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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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태어난(1949) 앤티가 섬이 속한 앤티가 바부다(Antigua and Barbuda)는 카리브해와 대서양을 끼고 있는 섬나라이자 영국 연방의 회원국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도미니카 연방(Dominica) 역시 서인도 제도에 있는 섬이고(도미니카 공화국과는 다른 나라다), 작가의 부모의 출신지다.

 

15세기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 유럽 국가들(주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의 영토 쟁탈전의 각축장이었다. 이들은 이 섬들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였다. 이익 극대화를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원주민이나 유럽인들의 노동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그 자리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로 채워졌다. 이것은 원주민 사회의 붕괴와 새로운 사회질서의 형성을 이끌었다. “플랜테이션 경제는 엄격한 인종적, 계급적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운영되었으며, 이는 현대 카리브해 사외의 불평등한 구조적 특성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인간의 역사와 문명: 서인도 제도 사탕수수 농장과 노예 노동김상철)”

 

이 섬들의 사람들에게 무역풍은 노예를 가득 채운 배들이 바다에서 들어오던 비참한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바람이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그래서,

내 등 뒤는 언제나 황량한 검은 바람이었다.(7p)”

라는 문장은 섬의 역사와 그것을 개인적 사건으로 취하는 화자의 삶을 동시에 의미하는 다의성을 띄고 있다. 매 순간 이 무역풍이 그녀의 삶에 불어온다.

 

내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순간 죽었다(7p)”라고 하는 화자의 실존적 문장은 반복된다. 이 명제는 화자인 에게 인생의 화두가 되었다.(230p)” 지독히도 외로운 존재의 고백이다. 그래서 평생 동안 와 영원 사이에 서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고, ‘는 평생 동안 낭떠러지에 서 있었다고(8p)” 생각했다.

 

는 어머니의 꿈을 꾸지만 사닥다리를 내려오는 어머니의 발뒤꿈치만을 바라본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 본적이 없기에 꿈에서도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을 전달한다. 유니스의 집에 맡겨졌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간 날, 처음으로 꿈에서 어머니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아마도 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 들었던 기억때문인가 한다. 더욱 애절한 느낌을 받는다. 사닥다리, 발꿈치는 영적 교류를 상징하기도 한다. 발꿈치는 의 어머니처럼 이 땅을, 그녀가 사랑했던 땅을, 맨발로 걸었던 여성들의 애환의 역사를 그려보게 한다.

 

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사람(Scots-man)인 아버지와 아프리카 족속(African people)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피부는 타락의 빛깔을 띠었다-구리, , 광석의 빛. 그는 스코틀랜드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돈과 권력을 쫓는 사람이었다. ‘는 아버지를 도둑, 압제자로 부른다. 실제로 그는 관료의 자리에 있으면서 부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사람(man)’족속(People)’의 구분은 지배세력과 지배당하는 자의 차이다. 아버지는 ‘man’이고, 어머니는 ‘People’이다.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는 를 돌보지 않는다. 그는 에게 정복자이고 지배자다.

 

는 자신이 받은 교육, 식민지에 행한 유럽식 교육을 부정한다. 그것을 처음으로 신은 신발과 양말로 상징하고 있다. 그 때문에 발이 붓고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찢어져도, 길이 들도록 신어야하는 강요당하는 유럽 문명이다. ‘가 받은 교육은 배우면 얻게 되리라던 만족감을 안겨 주지 못했다.” 대답 없는 질문들과 분노만을 채웠을 뿐이다. 그리고 피부색 그이상의 영속적인 굴욕을 주었을 뿐이다.

 

그녀의 이름은 수엘라 클로데트 리처드슨이다. 어머니의 이름은 수엘라 클로데트 데바리외. 수엘라는 어머니가 수녀원에 버려질 때 그녀를 싼 천에 새겨진 이름이었고 클로데트 데바리외는 그녀를 발견하고 거둬 키운 수녀의 이름이다. 이처럼 이 나라 사람들은 굴욕적인 이름으로 불리운다. 앨프레드, 앨버트, 유니스 ……. 그녀는 수엘라라는 이름이 아닌 화자로 등장한다.

 

가 굴욕적이고 억압적인 삶을 거부하는 방식은 자신의 목소리와 몸을 사랑하고, 섬의 하늘과 대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아니, 자신을 사랑하고 그 땅을 사랑하기에 그 치욕스런 삶을 받아들일 수 없다.

 

는 남성들과의 사이에서 성적 욕구를 채우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잉태한 아이를 없앤다. ‘의 죽음을 무릎 쓴 임신 중단은 처음엔 그 누구의 소유도 되지 않겠다는 저항으로 보인다. 여러 번 이 행위가 반복되었을 듯한 시간들이 지나고, 그 행위는 에게 존재적 선언이 된다. “나는 단 하나의 아이도 낳기를 거부했다.(207p)” ‘는 수태하길 갈망하면서, 그 결정에 애통해 했다고 말한다. ‘가 수태를 거부하고 자궁을 말리는 것은 인종에 속하길 거부했고, 국가를 받아들이길 거부(234p)”하는 선언이다. 불편한 묘사들이 이어지는 이 주제는 참담하고 처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제목이 내 어머니의 자서전임에도 어머니와 관련된 내용은 거의 없고 아버지의 태생과 그의 불의한 삶, 그에 대한 의 분노, 그리고 의 이야기가 많은 양을 차지한다. 아버지도 남편도 죽고, 그녀는 오랜 시간 반복해왔던 세상과 존재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 대답한다. 한 사람이 수태되고 태어나는 것부터가 미스터리이고, “어느 날 문을 열고 마당으로 걸음을 내딛지만, 거기에 바닥은 없고 밑도, 벽도, 색도 없는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추락도, 그 멈춤도……, 그러기에 그가 누구인가는 답할 수 없는 미스터리라고. 인간 실존에 관한 사유는 정체성의 선언으로 나아간다.

 

나는 족속(people)이 아니고, 국가(nation)도 아니다. 다만 나는 내 행동들이 한 국가의 행동들이 되기를 이따금 바랄 뿐이다.(2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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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을 내 어머니의 자서전이라고 했을까? “내 인생에 대한 이 이야기는 내 인생의 이야기인 만큼 내 어머니 인생의 이야기이기도하고 동시에 내가 가지지 않은 아이들 인생의 이야기(207p)”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모두 의 안에 뿌리를 두었기에 의 이야기이고, 어머니의 이야기다. 그것은 를 둘러싼 제국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세계와 그 폭력과 억압을 향한 복수의 이야기다.

 

우리는 인종, 성별, 외모, 지능, 성격, 부모, 계급, 국가, 역사적 시간 등 그 모두 선택할 수 없다. 왜 그렇게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태어난 그 순간부터 그는 이 모든 것들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들은 역사적 주술 속에서 살아간다. 이 역사적 주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디에도 속하기를 거부하고, 누구의 소유가 되는 것에 저항하고, 자신의 존재는 스스로가 정하겠다고 결정하면 그 삶은 급진적이고 충격적인 모양을 갖게 된다. 그 에너지는 분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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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 축복받은 집의 원제는 질병 통역사·Interpreter of Maladies’. 이 작품집에 있는 소설들은 이민자의 삶과 자기 인식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조금 더 깊이 읽어보면 이야기를 지탱하고 있는 깊은 층위에 그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일상의 삶과 심리를 세밀하게 엮어내는 구성력과 통찰이 뛰어나다.

 

단편들 중「축복받은 집, 일시적인 문제, 그리고 질병 통역사가 내게는 한 주제로 다가왔다. 질병 통역사에서 관광 가이드 카파시 씨가 다스 부부에게서 눈치 챈 것처럼, 이 단편들에 등장하는 부부들에게는 말다툼, 무관심, 긴 침묵 같은 징후(93p)”를 보게 된다

 

일시적인 문제」의 '일시적'은 며칠 동안의 일시적인 정전과 부부 관계의 일시적인 상태를 지시하는 다의성을 띈다. 저녁 8시부터 한 시간 동안의 단전이 예고된 5일 동안 그들 사이에 있었던 무심함과 침묵이 깨진다. 각자가 따로 하던 식사를 함께 하고, 어둠 속에서 마음에 있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한다. 각자의 추억과 가벼운 이야기들로 시작하여, 자신의 약점들 그리고 죄의식에 대한 고백들이 이어지고, 그들 부부관계는 회복되는 듯 보인다. 단전이 끝난다는 통보가 전해지고 슈쿠마는 아쉬운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그들의 관계는 이전으로 돌아갈까? 불을 켜고 쇼바는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슈쿠마는 이제까지 감춰왔던 진실을 전한다. 다시 불을 끄고, 알게 된 진실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그들은 5일 동안 회복된 듯한 그 관계를 지켜낼 수 있을까?

 

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진심을 전할 수 없을까? 긴 침묵으로 이어져 오던 갈등상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단지 불행한 사건과 환경의 문제였을까? 언어는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말이 없어도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러면 그 헤아려지는 마음은 언어보다는 안아줌으로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상처에만 시선과 마음을 쏟는 우리는 원래부터 외로운 존재가 아닐까? 하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평일에는 질병 통역사를 하고 있는 여행 안내인에게 오래된 죄의식의 문제를 고백하는 낯선 여인에게서 인간의 질병의 징후를 읽는다.

 

작가는 질병 통역사에서 여행안내인 카파시를 통해 보이듯 언어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카파시는 구자라트어를 쓰는 사람들이 병원에 오면 의사에게 통역을 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언어를 통해 사람들 사이, 국가의 국가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 그 자신만이 양쪽 모두를 이해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사람이 되길꿈꾸었다. 그는 힌두어, 벵골어, 오리야어, 구자라트어는 말할 것도 없고,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로 대화하길 원했고(92p)”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의 징후였다(92p)”고 말한다. 인도가 여러지역의 방언으로 나뉘어져 소통하기가 어렵고, 외국어를 아는 것은 성공을 위한 힘, 권력임을 알 수 있다. 벵골어, 영어, 이탈리어로의 언어 이민을 한 작가는 그녀가 의지하고 작가로서 명성을 안겨다준 주된 영어를 떠나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다. 작가는 영어를 포기했을 때 권위를 포기한 것이라고,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고 말한다.(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92p)

 

그러니, 소통은 언어의 문제일까?

축복받은 집이란 제목은 산지브와 트윙클의 어두운 미래를 전망하고 있어 역설적이다. 겉으로 요란하게 싸우지도 않고, 자극적인 말이 오고 가지도 않으면서 부부간의 미묘한 어긋남을 섬세하게 그려낸 다른 단편들과 달리, 이들의 갈등은 조금 더 요란하다. 신혼인 산지브 와 트윙클 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언어의 부재도 대화의 단절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문제의 이유를 외면하는 그들의 마음 때문이다. 신혼집에서 발견되는 성상들과 성화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것도 이유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르고 이제는 아내가 필요하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산지브가 트윙클과 결혼하기로 한 것은 그녀가 적절히 높은 카스트 출신에다 곧 석사 학위를 받게 될(235p)” 자신과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혼은 서로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결혼은 자신의 생활 속에 다른 성격과 태도, 생활 습관 등 나와 부딪힐 가능성을 가진 타인을 들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때로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을 그에게서 발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아마도 이 두 사람도 여러 번의 충돌 후에 침묵하고 서로를 외롭게 하는 단계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과연 대화의 문제일까?

 

일시적인 문제, 질병 통역사, 축복받은 집세 편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공통점은 아내(여성)의 마음을 전혀 서술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과 심리만을 그리고 있다. 작가가 여성이기에 더욱 흥미로운 지점이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서 서로가 타자화 하는 모습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 지층에 깔려있는 가부장적인 남성위주의 사고를 발견하게 된다.

 

함께 있어도 서로를 외롭게 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자신의 상처와 고통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고통스럽고 외롭게한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한강의 단편아기부처」에서 두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를 가리는 남자와 안으로 멍든 여자의 만남, 그들의 출발이 잘못되었음을 는 뒤늦게 깨닫는다.

 

의 꿈에 보이는 그로테스크한 아기부처는 어머니가 그리는 불화 3000장과 연결되어 있다. ‘눈물로 세상을 버티려고 하지 마라라는 말과 함께 아프게 때리던 어머니의 손길과 혹독한 훈육에 상처 입은 그녀의 자아다. 어머니가 불화를 그리는 행위는 자신 안에 있는 한을 비워내고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한 것이다. 어머니가 불화 3000장을 그리는 것과 가 견딘 3년의 시간은 서로 병행하고 있다. ‘의 남편에 대한 감정에는 동정과 연민이 뒤섞여 있었다. 살면서 점차 인식하게 되는 남편의 몸에 대한 혐오의 감정 때문에 남편의 신경증적이고 폭력적 언행을 감내한다. 3년이란 시간 동안! 그것이 그와의 관계에 충실하려 했던 그녀의 방식이고, 자신의 과오에 책임을 지는 방식이다. 한편 남편은 애인에게 버림받고 술에 취해 들어와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자신을 향한 타인의 시선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우리는 자신의 상처로 스스로를 고독하게 가두고 어둠에 매몰된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고 외롭게 한다. 그것은 차가운 침묵과 외면, 폭력적인 언어와 가해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의 관계는 왜 그렇게 폭력적이고, 인간의 마음은 왜 그렇게 허약한 것일까? 그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관계를 지속할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상처와 고통에만 집중하고 사과할 줄 모르는, 호소하고 변명만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완벽한 이웃>이란 다큐를 떠올렸다. 이웃을 총 쏘아 죽게 하고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상황만을 호소하고 변명하던 사람! 극단적이지만 이것이 현대인의 병아닐까

내 안에도 이 모습이 있다. 이 깨달음은 통렬했고, 그로 인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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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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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서사시 대심문관은 이 소설 전체를 덮는 주제를 담고 있다. 대심문관의 배경은 예수그리스도가 이겨낸 사탄의 세 가지 유혹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이반이 쓴 서사시의 배경은 16세기 종교재판이 극심했던 스페인 세비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다시 기적을 베풀지만 추기경은 그를 체포하고 심문한다. 추기경은 대심문관으로 신약의 세 가지 시험과 관련된 질문을 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빵과 돈, 권력으로 당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거절하였고, 그가 속한 교회는 이것으로 사람들을 구제하고 권력을 갖게 되었다고 강변한다. 교회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대신 빵과 기적과 권위를 제공하며 통제한다고 말한다. 죄수(예수)는 그런 그에게 조용히 다가와 입을 맞추고 그(추기경)는 전율한다. 그들의 헤어지는 장면은 이 서사시의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추기경은 죄수를 풀어주며 그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오……. 앞으론 절대 찾아와선 안 되오……. 절대, 절대로.”라고 말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영적인 파문이 일었지만 다시는 오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돈과 권력을 포기할 수 없음을 알려준다. 인간이 그런 것 아닌가? 마음에 감동이 와도, 양심에 자극을 받아도 욕망에 휩싸이면 결코 돌아서지 않고 더욱 강퍅해지는 것! 교회는 진리, 신앙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 없이 권력과 돈만을 쫓는 부패한 모습을 갖고 있다. 조시마 장로의 죽음과 시취와 그에 동요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교회의 부패를 상징하는 후각적 장치와 심리다.

 

인간의 욕망은 러시아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고 믿었던 정교회 뿐 아니라 가정마저도 파괴하고 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 까라마조프의 삶과 그의 아들들 드미트리, 이반, 알렉세이의 태생과 성장기, 현재의 모습을 소개함으로 무너진 가정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 까라마조프는 방탕하고 탐욕스럽고 포악하다. 아버지의 이러한 삶은 아들들에게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성격으로 상처로 방어 기제와 병적 기질 등으로 남아있다. 그들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그릴 수밖에 없다.

 

<대심문관> 이야기는 드미트리의 심문과 병행한다. 드미뜨리에 대한 심문을 세 개의 수난으로 이름 짓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세 번의 심문 과정의 패러디다. 그 수난은 수치를 자극하는 것이다. 드미트리는 수치심 때문에 갖고 있던 돈의 출처에 대해 진술을 거부한다. 그가 공공연히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했던 것들 그리고 친부살해의 혐의와 재판을 받는 것 역시 수치스러운 일이다. 수치심(부끄러움)은 이 소설을 끌고 가는 감정이다


수치심과 죄의식이 한 개인을 장악하는 것의 부정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그 감정이 공동체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수치(羞恥)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염치(廉恥)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이등 대위 일류세츠카가 알렉세이에게서 돈을 받지 않은 이유는 그로 인해 당할 수치를 생각했기 때문이고, 염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치와 염치의 긍정적 효과를 상상해본다. 아마도 우리가 겪는 많은 부끄러운 일들, 불의가 많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된다. 가난한 이등대위의 가정과 부유한 까라마조프가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표도르 빠블로비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수치를 모르는 사람에게서 무자비하고 무정한 스메르쟈코프가 태어나고 길러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심문을 받던 드미트리는 아기 꿈을 꾼다. 울고 있는 아기를 농부는 아귀라고 부른다. 그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꿈속에서 괴로웠던 그는 깨어나서 자신의 머리 맡에 베개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그 친절함에 감사하며 눈물을 흘린다. 미쨔의 영혼은 눈물로 온통 전율하고 있었다고 한다. 꿈속의 아귀는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던 드미트리의 자아이다. 그는 베개를 고여 준 누군가의 손길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만큼 외로웠던 것이다. 연민을 일으키는 장면이다.

 

이 소설에서 3000루블은 욕망, 자존심, 수치심, 죄의식을 건드리며, 갈등과 사건을 만들어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돈의 행방이 시작부터 재판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주인공들의 운명의 향방을 정하고 있다. 이반의 <대심문관>의 주제와도 닿아있다. 욕망과 힘에 관한 메시지다.


이제 <대심문관>은 재판정 풍경으로 변형된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소설은 검사 이뽈리뜨 끼릴로비치에 대해서, 변호인 페쮸코비치에 대해서, 재판장에 대해서, 증인들에 대해서, 방청객들에 대해서 그리고 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고 한 사람의 운명이나 정의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방청객들은 검사와 변호사의 논고 중 자신이 관심을 두고 귀기울인 것만을 기억한다. 검사 이뽈리뜨는 논고에서 이 재판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다. 그 내용은 이 집안의 형제들이 왜 이렇게 불행한 상황에 빠졌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가 알료샤가 애국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부분은 작가의 생각이라고 추측된다. 러시아가 당시 부패와 혼란에 빠진 원인이 바로 그 두 가지라고 보고 있다. 애국주의와 신비주의는 어쩌면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변호사의 논고에서 밝힌 정황과 증거 논리적이고 정확한 추론에도 불구하고 배심원이 판결의 오류를 보이는 것은 이 재판정은 정의를 받칠 힘이 없음을 보게된다. 전통적 도덕의 잣대, 심정적 호소에 흔들리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게 된다. 정의조차 허약하게 느껴진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이반과 드미트리는 정신적 파멸을 보여준다. 인간 정신의 복잡하고 연약함을 새삼 느낀다. 그것이 차라리 미덕임은 그렇지 않을 때 인간 사회가 향할 지점이 끔찍할 것을 전망하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그리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교와 국가(사법에 나타난)가정 등 모든 영역에서 붕괴를 겪고 있는 러시아에서 희망은 일류샤의 장례식에 모인 또래 친구들미래 세대에 있음을 역설한다그들이 어떤 지식과 정의감을 갖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 부서지기 쉬운 마음, 신앙, 도덕....사법, 국가... 다시 읽을수록 새롭게 발견되고 생각할 주제가 많아지는 영원한 고전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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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11-09 1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권 일부만 오디오북으로 들었는데 꽤 흥미진진하더군요. 시리즈를 종이책으로 사 놓고 못 보고 오디오북으로만 접했어요.
읽을 책은 많고 시간은 모자라고 그럽니다.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완독할...ㅋ^^

그레이스 2025-11-09 14:14   좋아요 0 | URL
완독 응원합니다
다 읽고 리뷰하는데,,, 전권이 나와있는게 없어서 한권만 올렸어요 ;;;
 


 변호사라는 일의 성격으로 보아 모든 변호사는 말이다.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맡게 마련이란다. 내겐 지금 이 사건이 그래(147p)”

애티커스 판사의 말이다. 그의 이러한 고민은 이 소설의 마지막 사건에서 반전을 만드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 소설은 두 개의 층위가 있다. 한 층위는 스카웃과 젬의 일상 속 사건들과 그들의 시선에 비친 메이콤의 어른들의 모습이다. 이웃집 부 래들리에 대한 소문이 첫 번째 사건이다. 그는 청소년 시절 비행으로 아버지에 의해 집안에 갇혔다. 직업학교에 보내라는 판결을 거절하고 집안에 가두는 것이 아들을 보호하려는 뜻이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판단은 아들의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광견병에 걸린 것으로 보이는 개를 사살한 애티커스의 신중함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예단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려는 태도다. 앞으로 있을 메이콤 뿐 아니라 앨러바마 주를 떠들썩하게 할 재판을 전망하는 사건이다. 애티커스가 변호하는 톰의 재판이 또 다른 층위다. 정황과 증거가 무죄임에도 유죄선고를 받는 흑인 톰을 암시하고 있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앵무새(mockingbird,흉내쟁이 지빠귀)는 죽이지 않는다는 명제는 제목 ‘To kill mockingbird’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깨진다. 위험의 가능성 때문에 사살되는 개는 그 복선이라 할 수 있다. 애티커스의 망설임은 과연 해악을 끼치는 존재인지에 대한 인간의 판단기준은 옳은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에는 편견과 두려움의 대상들이 등장한다. 부 래들리, 듀보스할머니, 톰이 그들이다.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편견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이 밝혀진다. 등장 인물들과 익명의 마을 사람들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타자화 하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그 대상이 된다. 사물들의 관계와 질서를 파악하고 판단하여, 다시 질서를 부여하는 인식틀은 동일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동일성 밖에 존재하는 타자들을 만들어낸다. ‘이성이라고 이름지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성이라고 생각하는 영역도 왜곡되고 오히려 그 경계가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대표적 예가 게이츠 선생님이다. 박해는 편견에서 나온다며 히틀러를 비판하던 그는 법정에서 나오면서 흑인을 향한 증오를 내뱉는다. 이것이 메이콤에서 벌어진 재판의 다른 모습이다.

 

변호사로서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맡았던 애티커스 변호사는 톰의 유죄 판결과 그의 죽음으로 인해 부 래들리의 정당방위 사건을 재판에 넘기지 않고 덮기로 한다. 사법 정의에 대한 신뢰가 깨졌음을 보여준다. 청소년기에 재판을 받았던 부 래들리, 그리고 그 후에 불미스러운 소문이 무성했던 그가 재판에서 무죄를 받는 것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애티커스의 이 결정에서 의문을 갖게 된다. 더 나아가 위험하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사법을 믿지 못하는 법조인’, 생각해보면 참 흔한 말이다. 사실은 모두가 사법에서의 정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은 지금의 현실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의심은 존재해왔다. 그럼에도 사법(司法)이 있어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때론 불안함을 떨쳐버리고 그 정의에 기대보기도 한다. 왜 불안할까? 역사나 우리가 사는 시대 속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그것이 완전하지 않음을, 완전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법철학과 관련하여 검색하다 우연히 읽게 된 철학적 사유와 인식시리즈 중 법적 실증주의와 자연법 사상 비교를 읽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연법과 실정법이 어떻게 대립되고 상호 보완되어 왔는지의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한 책이다. 참 쉽게 읽히지만 법의 적용에 있어서는 그리 간단하지 않고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실정법과 자연법이 대립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소크라테스는 보편적 가치는 국가의 법보다 상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실정법과 자연법의 긴장 관계를 처음으로 철학적 담론의 장으로 끌어올린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크리톤과 안티고네의 비극에서도 나타난다. 홉스는 법 실증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 정당성은 도덕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와 주권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이 법 실증주의는 실정법과 자연법의 대립의 오랜 역사를 통해 발전해왔다. 그러면 오늘날 과연 재판은 법 조항에 의해서만 판결이 내려지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워킨의 생각이고 뉘른베르크 재판의 판결은 인간의 보편정의가 실정법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재판장의 판결에 법 조항 외에 다른 요소가 개입될 수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사법에서 실정법과 자연법의 오래된 갈등의 역사를 읽다 보면, 법에서 정의라는 것이 참 위태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입법과 사법의 과정에서 정의를 세우려는 의지는 개혁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통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히틀러의 법률가들은 법의 전문가들이 어떻게 전체주의와 독재에 입법과 사법을 통해 정당성을 부여했는가를 보게 해준다. 실증주의를 악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까? 반면,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는 보편적인 인간애, 도덕 등의 자연법이 실정법을 이기는 사례들을 보여 준다.

 

개혁과 변혁은 거센 저항이 있게 마련! 지치고 흐려진 눈을 똑바로 뜨고 오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본질을 알려면 역사를 쭉 훑어보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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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5-10-28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어느 때보다 사법 정의가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들이지만, 현실에서의 사
법 정의는 집행자들에 의해 요원해져
버렸습니다.

선동된 편견과 두려움은 항상 개혁과
변화의 적이었습니다. 지금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항 없는 개혁이 존재할 수 없는 것
처럼 말이죠.

그레이스 2025-10-28 20:21   좋아요 0 | URL
시간이 갈수록 답답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지만 이번엔 반드시 이뤄지길 염원합니다
!!!!!

호시우행 2025-10-30 1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히틀러 통치시절, 독일인 대다수는 히틀러를 지지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선동정치는 서서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선악에 대한 구분 자체를 마비시킵니다. 사법부도 예외가 아니지요. 현재 자기들이 무슨짓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성찰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그토록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던 그 세력들이 지금 벌이는 짓이 정의라는 착각에 빠져 그 늪에서 허우적대는 꼴이 우스꽝스럽기만 합니다.ㅠㅠ

그레이스 2025-10-30 14:06   좋아요 0 | URL
백퍼센트 공감입니다. 그들만의 세상에 갇혀서 사법부 독립이 자신들이 이룬 성역인듯 착각하고 있는듯요 ㅠㅠ

페크pek0501 2025-11-09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해는 편견에서 나온다”며 히틀러를 비판하던 그는 법정에서 나오면서 흑인을 향한 증오를 내뱉는다. 이것이 메이콤에서 벌어진 재판의 다른 모습이다.> - 이런 존재가 인간. 이라는 우리라고 봅니다.ㅋㅋ

그레이스 2025-11-09 14:15   좋아요 1 | URL
책을 읽는 이유가 그런 인간으로 남지 않기 위함일테지요 ^^
 

샀습니다.
알마 출판사 책인데,,, 배팅사이트에 오늘까지 1위였다는,,,
제목이 강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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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5-10-15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벨문학상 발표되던 날 1800부가 팔렸다고 좋아하는 기사를 봤어요.
표지 색도 강렬하네요!

그레이스 2025-10-28 08:56   좋아요 1 | URL
이제야 댓글을 읽네요.;;
모나리자님도 벌써 읽고 계실듯요

레삭매냐 2025-10-28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려 7년 전에 산 책이지만
두 번 읽다가 완독에 실패했습니
다.

두번째는 완독할 줄 알았는데...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형님의
만연체에 그만 넘어져 버렸습니다.

이 양반 연설문도 그러더라구요.
숨도 안 쉬고 말쌈을 하시는 걸까요?

그레이스 2025-10-28 20:23   좋아요 0 | URL
^^
사탄탱고는 그래도 좀 읽을만 한듯요! 나름 상징적 메시지도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