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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자서전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김희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평점 :
작가가 태어난(1949년) 앤티가 섬이 속한 앤티가 바부다(Antigua and Barbuda)는 카리브해와 대서양을 끼고 있는 섬나라이자 영국 연방의 회원국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도미니카 연방(Dominica) 역시 서인도 제도에 있는 섬이고(도미니카 공화국과는 다른 나라다), 작가의 부모의 출신지다.
15세기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 유럽 국가들(주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의 영토 쟁탈전의 각축장이었다. 이들은 이 섬들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였다. 이익 극대화를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원주민이나 유럽인들의 노동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그 자리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로 채워졌다. 이것은 원주민 사회의 붕괴와 새로운 사회질서의 형성을 이끌었다. “플랜테이션 경제는 엄격한 인종적, 계급적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운영되었으며, 이는 현대 카리브해 사외의 불평등한 구조적 특성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인간의 역사와 문명: 서인도 제도 사탕수수 농장과 노예 노동』 김상철)”
이 섬들의 사람들에게 무역풍은 노예를 가득 채운 배들이 바다에서 들어오던 비참한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바람이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그래서,
“내 등 뒤는 언제나 황량한 검은 바람이었다.(7p)”
라는 문장은 섬의 역사와 그것을 개인적 사건으로 취하는 화자의 삶을 동시에 의미하는 다의성을 띄고 있다. 매 순간 이 무역풍이 그녀의 삶에 불어온다.
“내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순간 죽었다(7p)”라고 하는 화자의 실존적 문장은 반복된다. 이 명제는 화자인 ‘나’에게 “인생의 화두가 되었다.(230p)” 지독히도 외로운 존재의 고백이다. 그래서 평생 동안 ‘나’와 영원 사이에 서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평생 동안 ”낭떠러지에 서 있었다고(8p)”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의 꿈을 꾸지만 사닥다리를 내려오는 어머니의 발뒤꿈치만을 바라본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 본적이 없기에 꿈에서도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을 전달한다. 유니스의 집에 맡겨졌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간 날, 처음으로 꿈에서 어머니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아마도 ‘나’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 들었던 기억때문인가 한다. 더욱 애절한 느낌을 받는다. 사닥다리, 발꿈치는 영적 교류를 상징하기도 한다. 발꿈치는 ‘나’의 어머니처럼 이 땅을, 그녀가 사랑했던 땅을, 맨발로 걸었던 여성들의 애환의 역사를 그려보게 한다.
‘나’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사람(Scots-man)인 아버지와 아프리카 족속(African people)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피부는 타락의 빛깔을 띠었다-구리, 금, 광석의 빛. 그는 스코틀랜드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돈과 권력을 쫓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도둑, 압제자로 부른다. 실제로 그는 관료의 자리에 있으면서 부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사람(man)’과 ‘족속(People)’의 구분은 지배세력과 지배당하는 자의 차이다. 아버지는 ‘man’이고, 어머니는 ‘People’이다.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는 ‘나’를 돌보지 않는다. 그는 ‘나’에게 정복자이고 지배자다.
‘나’는 자신이 받은 교육, 식민지에 행한 유럽식 교육을 부정한다. 그것을 처음으로 신은 신발과 양말로 상징하고 있다. 그 때문에 발이 붓고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찢어져도, 길이 들도록 신어야하는 강요당하는 유럽 문명이다. ‘나’가 받은 교육은 “배우면 얻게 되리라던 만족감을 안겨 주지 못했다.” 대답 없는 질문들과 분노만을 채웠을 뿐이다. 그리고 피부색 그이상의 영속적인 굴욕을 주었을 뿐이다.
그녀의 이름은 “수엘라 클로데트 리처드슨”이다. 어머니의 이름은 “수엘라 클로데트 데바리외”다. 수엘라는 어머니가 수녀원에 버려질 때 그녀를 싼 천에 새겨진 이름이었고 클로데트 데바리외는 그녀를 발견하고 거둬 키운 수녀의 이름이다. 이처럼 이 나라 사람들은 굴욕적인 이름으로 불리운다. 앨프레드, 앨버트, 유니스 ……. 그녀는 수엘라라는 이름이 아닌 화자로 등장한다.
‘나’가 굴욕적이고 억압적인 삶을 거부하는 방식은 자신의 목소리와 몸을 사랑하고, 섬의 하늘과 대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아니, 자신을 사랑하고 그 땅을 사랑하기에 그 치욕스런 삶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남성들과의 사이에서 성적 욕구를 채우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잉태한 아이를 없앤다. ‘나’의 죽음을 무릎 쓴 임신 중단은 처음엔 그 누구의 소유도 되지 않겠다는 저항으로 보인다. 여러 번 이 행위가 반복되었을 듯한 시간들이 지나고, 그 행위는 ‘나’에게 존재적 선언이 된다. “나는 단 하나의 아이도 낳기를 거부했다.(207p)” ‘나’는 수태하길 갈망하면서, 그 결정에 애통해 했다고 말한다. ‘나’가 수태를 거부하고 자궁을 말리는 것은 “인종에 속하길 거부했고, 국가를 받아들이길 거부(234p)”하는 선언이다. 불편한 묘사들이 이어지는 이 주제는 참담하고 처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제목이 ‘내 어머니의 자서전’ 임에도 어머니와 관련된 내용은 거의 없고 아버지의 태생과 그의 불의한 삶, 그에 대한 ‘나’의 분노,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많은 양을 차지한다. 아버지도 남편도 죽고, 그녀는 오랜 시간 반복해왔던 세상과 존재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 대답한다. 한 사람이 수태되고 태어나는 것부터가 미스터리이고, “어느 날 문을 열고 마당으로 걸음을 내딛지만, 거기에 바닥은 없고 밑도, 벽도, 색도 없는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추락도, 그 멈춤도……, 그러기에 그가 누구인가는 답할 수 없는 미스터리라고. 인간 실존에 관한 사유는 정체성의 선언으로 나아간다.
“나는 족속(people)이 아니고, 국가(nation)도 아니다. 다만 나는 내 행동들이 한 국가의 행동들이 되기를 이따금 바랄 뿐이다.(2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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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목을 ‘내 어머니의 자서전’이라고 했을까? “내 인생에 대한 이 이야기는 내 인생의 이야기인 만큼 내 어머니 인생의 이야기이기도”하고 동시에 “내가 가지지 않은 아이들 인생의 이야기(207p)”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모두 ‘나’의 안에 뿌리를 두었기에 ‘나’의 이야기이고, 어머니의 이야기다. 그것은 ‘나’를 둘러싼 제국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세계와 그 폭력과 억압을 향한 복수의 이야기다.
우리는 인종, 성별, 외모, 지능, 성격, 부모, 계급, 국가, 역사적 시간 등 그 모두 선택할 수 없다. 왜 그렇게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태어난 그 순간부터 그는 이 모든 것들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들은 역사적 주술 속에서 살아간다. 이 역사적 주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디에도 속하기를 거부하고, 누구의 소유가 되는 것에 저항하고, 자신의 존재는 스스로가 정하겠다고 결정하면 그 삶은 급진적이고 충격적인 모양을 갖게 된다. 그 에너지는 분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