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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가죽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7월 혁명으로 국민에 의해 왕이 된 루이 필립이 부르주아의 왕, 증권업자의 왕이라 불린 것이 상징하듯 부르주아지가 권력계급이 되었다. 그들은 사교계의 중심이 되었고, 정치와 신문매체를 통해 그 권력을 행사했다. 복고왕정시대를 닫고 국민의 주권 원리에 따라 왕권을 축소하고 법과 행정제도를 개혁하고 진보를 약속한 7월 혁명의 이면이다. 그 시대-변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과격한 행동, 매일같이 벌어지는 가두시위, 자기들의 때가 도래 했다고 믿는 보나파르트 파·공화주의자·생시몽 파(Saint-Simonians)의 논쟁이 벌어지는-를 발자크는 못마땅하게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가 읽어 온 그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받는 뉘앙스다.
오를레앙 공의 거주지였던 ‘팔레 루아얄’에 만들어진 도박장은 시대의 격변을 상징한다. 밤마다 구경꾼과 노름꾼, 주정뱅이들로 북적이는 팔레 루아얄 도박장은 혁명이 꿈꾸고 개혁이 약속한 것들과는 먼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메마르고 차가운 노름꾼들의 시선은 도박장에 들어온 낯선 인물을 쫓는다. 그의 용모와 태도와 안색과 표정에서 발견한 것은 체념과 절망이다. 운명을 시험하듯 마지막 남아 있던 금화 한 개를 투기하고 떠나는 젊은이는 쾌락을 쫓다가 막장에 이른 주인공 라파엘이다. 그 시대 많은 젊은이들의 모습이다.
라파엘이 길을 걷다가 들어가게 된 골동품점 역시 그 시대를 나타내는 코드로 읽게 된다. “각 문명과 종교의 유물, 성물과 걸작 예술품, 왕궁 유물과 쾌락 용구(50p)”등으로 가득 차 있는 이곳에서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소비가 있음을 알려준다. 개인의 감상을 위한 미술품의 구매는 후에 키치라는 문화를 만들어냈음을 익히 알고 있다. 축적된 자본과 유행, 취미가 이끌어가는 시장이다.
도박장과 골동품 상점 모두 라파엘과 같은 젊은이들의 바랐지만 저버려진 욕망을 상징한다.
“대해처럼 펼쳐진 이 가구와 발명품과 의상들, 그리고 예술품과 유물의 잔해는 그에게 끝나지 않는 한 편의 시였다. 형태와 빛깔과 사상 등 모든 것이 거기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47p)”
그가 도박장과 골동품 점에 오기까지, 지난 날 경험했던 쾌락과 방탕과 좌절은 소멸해버린 지난 오랜 역사가 남긴 잔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들에 숨이 막히고, 모든 인간의 사유에 염증을 느낀다. 그는 이런 감정들에 휩싸여 죽음 충동을 느끼고, 그런 그의 앞에 환영 같은 노인이 나타난다. 마치 발푸르기스의 밤 파우스트 앞에 나타난 메피스토처럼.
노인은 라파엘에게 나귀가죽을 주고, 이 나귀가죽은 그것을 소유한 자의 욕망을 이루어주지만 그때마다 줄어들면서 그의 수명을 단축한다. 어차피 자살을 생각했던 그에게 그 조건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지닌 그는 길을 나서고,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거기서 친구 에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지금의 자신을 이해하려면 먼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서 그에게 아버지는 유년기의 정서와 인격 형성에 중요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행히도 아버지는 그에게 어두운 면을 형성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고백들이 보인다. 엄하고 곁을 주지 않는 아버지는 자신의 진로도 정해주었다. 아버지는 대혁명과 시대의 격변 속에서 파산하고, 이후 재산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10년 동안 벌이고 있었다. 라파엘은 법학을 공부하고 하고, 소송 전쟁에 뛰어 들면서, 아버지의 우수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과연 이해한다고 해서 그의 성장과정에서 만들어진 흔적과 상처가 지워질 수 있을까? 그것은 별개의 것이다. 한사람의 삶에서 이런 흔적이 만들어 놓은 결과는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 알 수 없고, 그것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넘어서는 것은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라파엘은 그런 결핍을 쾌락적 사랑으로 채우려고 했고, 페도라라는 여인을 욕망했다. 그녀와의 사이에 다리를 놓은 사람이 바로 라스티냐크, 곧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이다. 그는 고리오 영감의 장례를 치르고 파리의 번화가를 바라보며 살아가겠다고 결심했던 그 방식대로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전형적인 젊은이들이 파리의 사교계에서 바람잡이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페도라에게서 사랑을 쟁취하는 것도 실패하고, 방탕했던 생활 때문에 파산에 이르렀다. 에밀에게 이런 내용의 고백을 하고 있는 그에게 상속재산이 있다는 소식이 갑작스럽게 전해지고 그는 전율과 함께 주머니 속의 나귀가죽의 크기를 확인한다. 인간은 결핍을 욕망한다. 시간이 줄어듦을 인식하고 나귀가죽을 전해준 노인의 말을 기억한다. 욕망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그 비결이라는 말!…… 가능할까?
나귀가죽은 인생의 반어법이다. 욕망하는 것을 얻지만 그로 인해 삶의 남은 시간이 줄어드는 반어법. 줄어드는 시간 속에서 죽음을 인식하는 그는 눈을 떠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 폴린을 본다. 죽음 앞에서 진실이 드러나는 반어법! 인생에는 이런 반어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을 고통과 기쁨이라는 총량의 법칙으로 가늠할 수는 없다. 욕망의 대상은 삶의 도처에 있고, 욕망과 쾌락으로 탕진하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시간이다. 살아가는 것은 시간을 탕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