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고는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총안처럼 생긴 작고 좁은 창문너머로 북쪽 골짜기, 그 슬픈 땅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펜은 종이 위에서 조금 더사각거렸다. 밤이 온 세상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보루를 에워싼 방어벽사이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며 뜻 모를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보루안에는 짙은 어둠이 밀도를 더했고 공기마저 습하고 불쾌했지만, 조반니 드로고는 ‘모든 면에서 저는 아주 만족하며 잘 지내요‘ 라고 적어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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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보다 앞서 기다리고있는 놀랍고 환상적인 일들을 미리 맛본다. 아직 그 일들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우리가 그것에 다다르리라는 것은 틀림없으며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그것이 멀리 있느냐고? 아니, 저 아래 강을 건너기만 하면 되고, 저푸른 언덕을 넘어가기만 하면 된다. 아니, 어쩌다 벌써 도착한 것은 아닐까? 이 나무들과 초원, 이 하얀 집이 우리가 찾고 있던 게 아닐까? 잠시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거기에 머물기를 바랄 수도 있다. 그러면 이런 말이 들려올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더 멀리 있으니 괴로워 말고 다시 길을 떠나라.
그리하여 신뢰에 찬 기다림 속에서 걸음은 계속된다. 하루하루 날은길고 평온하다. 태양은 다시 하늘에서 높이 빛나고, 결코 석양으로 저물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어떤 시점에서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그러면 등뒤에, 돌아갈 길이 막힌 채 빗장이 질린 철문이 보인다. 그 순간 무언가 변했음을 느낀다. - P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