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시구(詩句)가 되기 쉬운 교토의 거리를 시치조(七條)에서 이치조(一條)까지 가로지른다. 부옇게 보이는 버드나무 사이로 따뜻한 물을 뿌리는 다카노가와(高野川) 강변의 하얀 천을 다 헤아리며 길게 북쪽으로 구부러지는 길을 8킬로미터 남짓 나아가자 산은 저절로 좌우에서 다가오고 꺾고 돌 때마다 발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도 이쪽저쪽에서 들려온다. 산으로 접어드니 봄이 깊어지는데,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아직 눈이 남아 있어 추울 거라고 생각하며 올려다보는 봉우리기슭을 뚫고 어두운 그늘로 이어지는 완만한 외줄기 오르막길 저쪽에서 오하라메(大原女)가 온다. 소가 온다. 교토의 봄은 끊이지 않는 소의 오줌 줄기처럼 길고 적막하다.
- P18

정적만이 남았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가운데 그 고요함에 내 한 목숨을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 세상 어딘가로 통하는 내피는 고요하게 움직이는데도 소리 없이 해탈한 심경으로 몸을 토목으로 여기고, 하지만 어렴풋이 활기를 띤다. 살아 있다는 정도의 자각으로 살아서 받아야 할 애매한 번민을 버리는 것은,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구름을 벗어나 하늘이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모든 집착을 초월한 활기다. 고금을 공허하게 하고 동서의 자리를 다한 세계의 바깥에 한쪽 발을 들여놓아야만…… 그렇지 않다면 화석이되고 싶다. 빨간색도 흡수하고 파란색도 흡수하고 노란색과 보라색까지 다 흡수하여 원래의 오색으로 되돌릴 줄 모르는 새까만 화석이 되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죽어보고 싶다. 죽음은 만사의 끝이다. 또 만사의 시작이다. 시간을 쌓아 날을 이루는 것도, 날을 쌓아 달을 이루는 것도, 달을 쌓아 해를 이루는 것도, 결국 모든 것을 쌓아 무덤을 이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덤 이쪽의 모든 다툼은 살 한 겹의 담을사이에 둔 업보로, 말라비틀어진 해골에 불필요한 인정이라는 기름을부어 쓸데없는 시체에게 밤새 춤을 추게 하는 골계다. 아득한 마음을가질 수 있는 자는 아득한 나라를 그리워하라.
- P27

음력 3월, 붉은색이 사방을 감싸고 있는 한낮인데도, 잠들어 있는천지에 봄에서 뽑아낸 진한 자줏빛 한 점을 선명하게 떨어뜨려놓은것 같은 여자다. 꿈의 세계를 꿈보다도 곱게 바라보게 하는 검은 머리를 흐트러지지 않게 접어놓은 살쩍 위에는, 야광패를 제비꽃 모양으로 아주 맑게 새겨 넣은 가느다란 간자시‘가 꽂혀 있다. 조용한 낮이먼 세상으로 마음을 빼앗으려는 것을 검은 눈동자가 휙 움직이면, 보는 사람은 앗 하고 정신을 차린다. 반 방울이 퍼지는 짧은 순간을 훔쳐 질풍의 위세를 보이는 것은 봄에 있으면서 봄을 제압하는 깊은 눈이다. 이 눈동자를 거슬러 올라가 마력의 경지에 이르면 도원(桃園)의백골이 되어 다시는 속세로 돌아올 수 없다. 보통 꿈이 아니다. 희미한 꿈속에서 찬연히 빛나는 요성(妖星) 하나가 죽을 때까지 자신을 보라며 자줏빛으로 눈썹 가까이 다가온다. 여자는 자줏빛 기모노를 입고 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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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0-14 2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교토의 美는 가을!

이 책 전체가 하이쿠 처럼 정교하게 짜여 있는 것 같습니다. ^^

그레이스 2021-10-14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맞아요^^
완전히 빠져들어요
글로 화폭을 만들어가고 있어요^^

서니데이 2021-10-14 2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줏빛 색채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표지도 자주색이네요.
그레이스님, 좋은 밤 되세요.^^

그레이스 2021-10-14 22:43   좋아요 2 | URL
예~
서니데이님도 굿밤요

초딩 2021-10-15 1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교토 교토 하도 말도 많이하고 텔비에서도 나오는 것 같아 가보고 싶다했는데......
교토에서 왔습니다 라는 광고도 인상적이고요 ㅎㅎ
ㅜㅜ 이제 당분간 가기 힘들다 하니 더 가고 싶네요 ㅜㅜ

그레이스 2021-10-15 14:35   좋아요 0 | URL
^^
곧 이 상황이 좋아지길...
이 책 읽어보니 저도 가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