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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평점 :
태고의 시간들 - 올가 토카르축
할머니의 자매들, 이모할머니들은 모이면 밤에 이부자리를 깔고 옛날이야기를 하셨다. 전쟁을 겪은 일, 인민군이 들이닥쳤을 때 남편을 마루 밑에 숨겼던 이야기, 물난리, 아이들을 잃을 뻔한 이야기....
나는 잠이 들었다가 깼다 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아마도 설화쯤으로 들었을지 모르겠다. 누워있던 나는 어느새 일어나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 빠져 들어갔다. 새벽 미명에 누군가가 ‘날을 샜네’ 하면 그때서야 나를 발견하고, ‘너는 언제 깼냐고 어서 자라고’ 한마디씩 하고 서둘러 눕는다. 잠자리에 들며 불을 끄고서도 마저 하지 못한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이야기는 끝이 나고, 날이 훤히 밝았다.
나는 이렇게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모여 잠을 자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그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살아온 세월을 얼기설기 짓게 되고 그것은 하나의 설화가 되어 기억이 되고 경험이 되었다.
토카르축이 쓴 태고의 시간들은 이렇게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로,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마을의 모습으로...
인생의 시간 중 어떤 사건을 계기로 다른 시간대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을 기준으로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과 사물이 다르게 인식되는 것을 경험한다. 어린 시절 어떤 사건이 드문드문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고 그 이후의 기억이 더욱 촘촘하게 남아있는 것은 더 오래된 기억이 지워져서일까? 오래 전 기억은 아마도 깊은 어딘가로 침잠해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속의 기억들이 띄엄띄엄 저 밑바닥으로 가라 앉았다가 불쑥 떠올라 나의 서사를 만든다.
‘태고’의 모든 존재는 배경과 기타등등이 아닌 그들만의 시간을 가진 주체로서 존재한다. 그들의 시간은 전쟁, 학살, 피지배와 같은 태고의 역사 속에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건너뛰며 존재한다. 시간의 배열과 서사의 짜임이 탁월하다.
“여기가 태고의 경계야.” 루타가 말하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이지도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태고가 끝나. 더 가봐도 아무것도 없어.”
……
“그들의 눈에는 그저 모든 게 그런 것처럼 보였을 뿐이야. 여행을 떠나 이 경계에 다다르는 순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거지. 그들은 아마도 계속 나아가고 있다고, 더 가면 키엘체나 러시아가 있을 거라는 꿈을 꾸고 있을 거야. 한번은 엄마가 화석처럼 굳어 있는 사람들을 내게 보여준 적이 있어. 그 사람들은 키엘체로 가는 길 위에 서 있었지. 눈을 뜬 채, 꿈쩍도 하지 않았어. 끔찍해 보였지. 다들 죽은 사람들 같았어.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깨어나서 꿈을 기억으로 받아들이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전부 이런 식인 거지.”
……
“이 경계는 타슈프를 지나고, 볼라를 지나고, 코투슈프를 지나 계속 이어져 있어. 하지만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 경계는 기성품처럼 준비된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 있어. 우리는 그들이 어딘가에서부터 여기로 온다고 느끼지. 내가 가장 무서운 건,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야. 마치 솥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말야.” 148~149p
‘태고’라는 것은 무의식을 만들어낸 어떤 시간일까? 우리가 과거의 어느 시점에 겪은 어떤 사건으로부터 만들어진 무의식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듯이, ‘태고’의 사람들은 그 마을에서 일어난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전쟁으로 우리 안에 생겨난 집단적 무의식과 분단선과 같은 공간적 경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태고’는 시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기억을 의미하고 그것은 공간이 되어 그들을 가둔다. 당시를 살았던 자들이나 그의 자녀들이나 그 자녀들의 자녀들도 그 ‘태고’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태고는 공간이고 시간이며 기억이다. 무의식을 만들어 낸 원형 같은 것, 그래서 태고일까?
올가 토카르축은
“예술은 신화적 언어의 수호자이다. 내게 신화는 기억이다. 신화는 우리가 종으로서의 연속성을 보존하고, 세상을 정돈하는 역할을 한다. 융의 견해처럼 나도 신화가 종의 기억을 구성하는 조각이라고 생각한다. 신화는 학습할 필요가 없으며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는 그의 사상을 나는 믿는다.”
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