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 우파는 부도덕하고 좌파는 무능하다??
조지프 히스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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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도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혁명을 팝니다’의 공저자 조지프 히스의 일반인을 위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글인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을 일독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Filthy Lucre - Economics for People Who Hate Capitalism 로서 지난 2009년 출간된 것 입니다. 책의 저자인 히스는 몬트리올 맥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위르겐 하버마스의 밑에서 조교로 일한 경험 등으로 원래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점에 대해서 자신이 여러 경제학서를 바탕으로 공부한 내용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도 경제학을 독학을 배운 것만큼 우리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듯 했습니다.

국문으로 번역된 제목대로라면 세계의 유일한 사회경제적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좌파들에 대응하는 글 정도로 추측되지만 히스의 이 글은 자본주의를 해석하는 우파와 좌파 양쪽의 선입견과 확대해석 및 오해 등을 우리에게 매우 밀접한 실제 생활에서의 사례로 각각의 근거를 세우고 있는데요. 공공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가 세금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저자가 옆에서 “당신이 그 세금 때문에 생활할 수 있는 것”이라는 등의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만한 대화나 사례들을 글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은 꽤 훌륭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물론 마찬가지로 많은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보이는 저자의 논점은 크게 보면 ‘자본주의하의 시장이 분명 필요하고 반대로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내적 모순과 불안점은 개선시킬 필요가 있다”는 식의 균형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에 1부는 우파가 저지르는 오류에 대해 2부는 좌파가 저지르는 그것을 각각의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우파는 감세가 경제 발전을 추동한다, 국가 경쟁력이 중요하다, 인세티브의 중요성, 그리고 도덕적 해이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부분을 비판하고 바로잡고 있습니다. 자유 방임주의자들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우파는 시장에서의 개인의 이기심이 합리적으로 발휘된다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정부가 시장에 무분별하게 개입하지 않고 야경 국가에 국한된 형태를 선호한다와 같은 주장들은 거의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기심을 통한 개인의 행동을 더욱 긍정적으로 유발시키는 인센티브와 관련된 입장에서도 과도한 해석을 하는 부분과 사실상 인간 이기심을 합리적이라고 단언하는 등의 내용은 우파가 얼마나 이 신고전주의 경제학과 연관되어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회의 양상은 각 개인이 내리는 선택의 총효과이며, 개인의 선택은 지역의 사정과 상황에 상당히 민감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관건”이라고 저자가 언급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이기심을 포함한 행동들이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것 자체가 인간행동학에서 말하는 인간 행위의 단순 수치화가 어렵다는 측면의 해석과 개인이 합리적이라고 해서 집단이 무조건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오류에 가깝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각각의 이기적 개인들이 참여하는 시장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이것을 간단하게 수치화해서 국가의 참여를 어느 정도까지인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완연한 법과 제도의 완비와 함께 국가의 역할이 분명 필요한 것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에서도 앞의 가치가 거의 동일할 것입니다.

애덤 스미스가 조심스럽게 예측한대로 이기적 인간들이 합리성에 도달하기란 말 그대로 일어나기 어랴운 일이고 자유방임주의 자체가 직관에 기초한 논리인 만큼 이들간의 엄밀한 분리가 분명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런 측면에서 ‘개인의 이기심과 공익은 조화시키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 점일 것입니다. 토크빌은 이미 오래 전에 개인의 이기심을 조절하지 않으면 사회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예견한 바가 있습니다. 공익이라는 대의를 사익인 이기심이 과연 해치지 않고 조화롭게 나아갈 수 있는지는 앞으로 좀 더 지켜봐야겠죠.

뒤이어 좌파가 저지르는 오류에 대해 저자는 시장에서의 시장 참여자들이 가격을 조절하려는 욕망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과 돈버는 일이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 자본주의의 고도화는 결국 내부 모순으로 인한 붕괴로 이어진다는 전통적인 입장, 하향평준화는 평등의 방법으로는 옳지 않다는 등 좌파들의 이런 주장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실살 자본주의에 대한 좌파들의 비판은 자주 도덕주의적 원칙론과 같은 입장으로 선회해 그 목소리의 한계가 분명해 보입니다. 현실 상황에 합당한 비판들을 해야하는데 아직도 계급에 대한 입장에 돌아서지 않고 자본주의 자체를 타파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좌파 지식인들이 많아 이런 부분의 자기 수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잉 생산이 소비주의의 근원’ 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현실과 다른지 충분히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를 무조건 옹호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에 서서 이것을 건전하게 비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레이건과 대처 이후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시대에 좌파가 그 비판 세력이 되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것은 히스의 이 글에서도 보이듯 너무나 그 비판이 도덕적이고 이념적이어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태세를 전환하여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해 경제적 타당성을 우선하여 끈질기게 비판해 나가는 것이 앞으로 좌파들의 여러가지 선결 조건 중에 하나가 되어야겠죠. 히스도 이런 입장의 문장을 글에 담고 있습니다.

다만, 빈곤층에 대한 히스의 도덕적 태도가 저는 약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매우 값싸게 생산되는 전력에 대해 낭비되는 자원을 막아보고자 계층의 상황과 상관없이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도 뭔가 납득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빈곤의 절대적 문제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문제라고 이제는 받아들여야 하는데 좀 더 힘든 노동에 처해 마땅한 댓가를 수용하고 있지 못한 하층의 노동계층에 대한 이해도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이런 몇 가지를 제외하면 다른 자본주의 경제론에 대한 여타 글보다는 충분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군요. 특히 앞서 언급한 대로 실제 생활로 많은 사례를 들고 있는 것은 큰 장점이라고 생각되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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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 - 욕망과 무지로 일그러진 선거의 맨얼굴
리처드 솅크먼 지음, 강순이 옮김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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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직한 국제적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폭스뉴스와 CNN에 단골로 시사 해설가로 출연하고 방송계의 퓰리처상이라 불리우는 에미상을 수상했으며 스스로는 자유주의적 언론가라 자임하고 있는 리처드 솅크먼의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를 일독했습니다. 솅크먼의 이 책은 얼마 전 리뷰했던 트론토의 ‘돌봄 민주주의’에 인용이 되어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현재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적나라한 리포트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를테면 ‘오만한 선동 정치인들과 무지한 대중의 민주주의’가 글의 요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찍이 미국의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은 소수에 의한 권력 독점과 투표에 의한 유산계급에 대한 몰수 등’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으로 솅크먼은 판단합니다. 미국의 건국 초기 워싱턴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무대와 오늘날 케네디와 닉슨, 카터와 레이건이 거쳐간 정치 무대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저자는 인식하고 어떻게 보면 이들 건국의 아버지들이 우려했던 소수에 의한 권력 독점이 이상한 방향으로 금권 정치와 마크 트웨인이 그의 작품에서 밝혔던 ‘도금 시대’와 같은 수준의 정치적 위기라고 시종일관 피력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정말 많은 대중에 대한 무지와 선동 정치인의 사례가 적잖이 들어가 있는데요. 특히 2001년 9. 11 사태를 이라크 후세인에 의한 범행이라고 아직도 믿고 있는 다수의 미국인들과 이를 이용하여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주장으로 개입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선동 정치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사례가 무지의 대중과 선동 정치인의 결합이라는 실체적인 왜곡된 정치 모델을 보여준 사례라고 여겨집니다. 이후 9.11 사태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안보 이슈를 최우선으로 삼는 혹은 (삼는척) 으로 국내의 모든 이슈를 진공 청소기처럼 빨아들여 오로지 국가 안전과 안보에 그는 몰빵을 했는데요. 이처럼 부시의 사례는 시민의 투표로 당선된 통치자가 시민들을 위해 일하기 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일에 몰두했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시민들이 이슈와 상황에 대한 명확한 현실 인식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결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외에도 솅크먼의 이 책은 진실을 외면하거나 진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일면으로 크게 부각된 정치인의 신화에 더 큰 점수를 준다던지, 이슈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해보지 않은채 정치인들이 더욱더 몰입하는 이미지 정치에 편승하여 정치 무대 자체를 비생산적으로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는 등의 대중들의 많은 무지에 대해 저자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선 시대의 존 듀이는 특유의 통찰력으로 “집중을 방해하는 오락거리들에 둘러싸인 소비 사회를 사는 유권자들이 시민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몹시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을 한 바가 있습니다. 실로 절묘하게도 오늘날 현대사회의 우리의 상황과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는 미디어와 더욱더 왜곡적으로 결합해 생산적 정치가 되지 못하고 이른바 ‘쇼무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네트워크 시대가 도래한 이 시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떤 식으로 또 변하게 될지에 대해 조심스런 시선을 갖고 있는 것은 일전의 ‘미디어에 의한 실패’가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솅크먼도 보수주의자들이 대부분 민주 정치에 대한 지극한 회의를 품고 있으며 허버트 스펜서가 꼬집은 바와 같이 보수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하지 않는 상황이 무지한 대중과 적극적으로 영합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거두려고 하는 것이 더 손쉬워서가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계몽주의 시대의 초기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민주 정치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 정치인들과 사적 이익에 매우 민감해 하는 대중들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을 우려했는데요.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들은 전자와는 매우 다른 상황입니다.

현재의 미국 정치는 명목상으로 공화당 대 민주당의 양자 대결 구도이긴 하지만 좀 더 엄일히 말하면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4년에 낙태 이슈를 끌어들여 모든 다른 정치적 문제들을 사멸시킨 조지 W. 부시의 사례를 봤을 때도 현실 정치와는 다소 관련이 없는 종교적 혹은 도덕적 이슈들을 이데올로기적 다툼으로 편파가 되는 행태가 자주 있어 왔습니다. 정치인들이 진실을 말하되 전부 말하지는 않는다는 고언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미국의 이런 상황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선출되지 않은 강고한 기득권들이 더욱 반기는 현실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금권 정치와 수많은 이익 단체가 범람하여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고 있는 많은 국가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겠죠. 물론 저는 동의하지 않고 있지만 중국 출신의 저명한 학자인 장웨이웨이와 엔쉐퉁이 이들 국가의 민주주의를 ‘저열한 민주주의’라 말한 것도 일정 부분 원인이 있겠죠.

물론 저자는 이런 미국의 정치적 상황을 비관주의적인 접근으로만 오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해결책은 각급 교육기관과 미국 시민에 대한 공민학 교육과 우리 자신들의 무지를 냉엄하게 직시하고 이를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을 보여야 한다고 크게 주장합니다. 다만 미국의 상황과 우리의 그것은 ‘자신의 상황에 맹목적으로 몰입하여 사회, 정치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어버린 많은 대중들’을 어떻게 정치로 다시 끌어들인가가 중요한데, 이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로서 앞으로 우리 모두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되는 문제라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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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민주주의 - 시장, 평등, 정의
조안 C. 트론토 지음, 김희강.나상원 옮김 / 아포리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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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네소타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이자 돌봄 (care)과 관련된 최고의 권위자이자 여성주의 정치학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학자인 조안 C. 트론트의 유명한 주저 ‘돌봄 민주주의’를 읽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Caring Democracy로 지난 2013년에 출간 되었습니다.

우선 이 돌봄 (care) 이라는 용어에 대해 고찰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자는 이 돌봄이라는 용어를 도덕적 및 정치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일반적으로 알려진 책임이라는 단어를 이 돌봄에 의미 부여를 하고 더불어 적지 않은 정치사회 이론가들의 저서와 주장을 여기에 뒷받침 하는 형태로 독자의 이해를 구하고 있는데요. 이는 소극적으로 알려져 있는 개인적 차원의 돌봄을 궁극적인 전사회적인 단계인 함께 돌봄 (caring with)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저자의 희망적인 당위성도 포함합니다. 물론 이런 결론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 및 국가적인 측면의 해석으로까지 확장하는데요. 여기에 논의되는 주장들이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많은 공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정치사회학을 비롯한 기존의 학문들이 ‘정치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을 해왔고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 대의적인 측면의 이데올로기로서 현실적으로 약간 동떨어져 있었다고 저자는 받아들이고 있는데요. 그래서 더 면밀한 접근으로 이제부터라도 민주주의 이론이 ‘실질적으로 누가 보살피는가 라는 질문을 다뤄야 한다’ 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그동안 민주주의 사회에 뿌리 내린 신자유주의는 시장과 개인의 책임 이데올로기를 강조해왔고 이러한 의의를 해치는 국가의 역할에 대해 비판을 가해왔습니다. “정치는 단순한 선거 경쟁이 아니라 제때에 올바른 방향으로 국가를 인도해 갈 수 있는 집합적인 행동으로 보는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으로 봤을 때 신자유주의가 국가의 역할을 제한하려고 했던 것은 정치의 본질적인 의미와 국가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일종의 부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신자유주의가 왜곡한 정치에서 “함께 돌봄의 핵심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사회를 가능한 한 민주적으로 만듦으로써 최대한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의 정치 본연의 회귀 및 회복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즉, 트론토의 이 돌봄이라는 당위적 맥락은 우리가 스스로 건설한 민주주의를 좀 더 건강하고 건실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어느 사회나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는 강한 성역할의 이데올로기와 성차별, 당연히 결핍된 자는 도태되어야만 한다는 생태학적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어떤 과외 비용을 들여서 이러한 돌봄을 대체하거나 무임승차론에 편승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기본적으로 이 글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돌봄이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 국한시키는 의도, 성차별주의자들의 케케묵은 주장들,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난립 등은 신자유주의의 그 애매한 태도로 인해 점차 힘을 얻고 우리 정치의 불신과 부정의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민주 사회가 해주어야 할 최소한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평등하고 포괄적으로 누릴 수 있는 돌봄을 만드는 것”이고, 사회의 외곽에 있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의 사회적 돌봄의 배려가 그것이 불평등한 처사가 아니라 마땅히 정치적 평등에 입각한 행위라고 시민 모두가 인식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도 실려 있습니다. 책의 4장까지가 신자유주의와 시장에 상황에 놓여 있는 민주주의와 돌봄에 대한 내용이라면 5장은 시장의 논리가 전파되어 있는 시점에서 시장이 돌봄을 행할 수 있느냐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될 것입니다. 대범하게 우리에게 인간성을 삭제하라고 강요하는 시장의 논리가 공공재를 민영화하려는 의도도 숨기지 않고 있기에 그것에 대한 성찰이 분명 필요해보입니다.

끝으로 마지막 두 장은 민주적 돌봄과 돌봄 민주주의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상세한 해석으로 돌봄을 받은 시민이 과연 앞으로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에 대한 예측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측은 결코 일회성이 아니며 정부와 시민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해지고 정부 스스로는 시민들에게 일종의 ‘영감’을 계속 제공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어쩌면 이상주의적일지도 모르는 입장을 저자는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저자의 이 글은 돌봄 결핍과 민주주의 결핍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주장으로 시작되었다고 글에서 소개되어 있는데요. 결국 이러한 돌봄은 세상을 바꾸게 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확신을 보여 줍니다. “신자유주의자는 선택이라는 깃발 아래 자유시장에 대한 간섭일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정부 활동의 제한을 추구한다”는 이 무차별 이데올로기를 부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마땅히 ‘돌봄의 가치’와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고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을 당위로 행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트론토의 이 글은 바로 앞선 이런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나 감히 판단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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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외교 읽기
케리 브라운 지음, 도지영 옮김 / 시그마북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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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내에 저명한 중국 전문가로 알려진 케리 브라운은 킹스칼리지런던 라우중국연구소의 소장이자 중국학 교수이며, 채텀하우스의 아시아 프로그램 협력 연구원입니다. 여기에 채텀하우스는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별칭입니다. 더불어 여러 외교 관련 언론 매체에 중국에 대한 글을 기고해 왔습니다.

이 ‘중국 외교 읽기’는 케리 브라운의 중국 정부 관련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데요. ‘새로운 황제들’과 ‘CEO 시진핑’이 여기에 속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CEO 시진핑’에 이어 두번째 리뷰가 되는데요. 앞의 두 글이 공산당을 비롯한 중국 정부와 시진핑에 대한 글이었다면 이 ‘중국 외교 읽기’는 중국의 외교 정책에 대한 기본적 분석 및 평가와 예측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는 중국과 밀접한 경제 관계와 북한 문제를 비롯한 여러 당면한 외교 문제를 공유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근래 출간된 케리 브라운의 이 책은 적지않은 영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일찍이 존 미어샤이이머는 중국이 평화적으로 부상하기는 힘들 것이라 단언했고, 데이비드 샴보는 세계 무대에 중국이 불완전한 강대국으로서의 한계를 갖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가 있는데요. 이것은 아마도 이 책의 케리 브라운의 새로운 해석대로, “시진핑 정부의 중국은 동맹을 만들거나 분위기에 밀려 차기 세계의 경찰 자리에 오르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현재 미국의 지위에 걸맞는 세계적 책임감을 떠앉지 않으려는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즉, 앞으로의 중국의 부상이 국제 정치 무대의 도덕적 책임감은 어깨에 지지 않고 당면한 이익에 집중하는 형태의 중상주의적 국가 형태로 중국이 나아가지 않을까 싶은데요. 다만, 자신들의 이익이라 여기는 지점은 절대 타협하지 않는 이를테면 중국식의 사회주의와 자기들식의 외교 정책으로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남중국해와 티벳 문제, 타이완 등의 자신들의 사활적 이익이라 불리우는 지역의 어떠한 국가 어떠한 세력의 접근을 불허할 가능성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중국의 외교 정책은 어떠한 식으로 결정되는 지에 대한 저자의 관심과 분석이 이 책에 놓여져 있습니다. 특히 중국의 외교 정책 또한 공산당의 의지가 관여 되어 있고, 예상 외로 인민해방군의 영향력은 다소 상관없는 상황이며, 다른 여타 국가와는 달리 매우 모호하면서 특정 사건에 대해서는 매우 확정시하는 입장으로 중국 외교의 외형적 근간이 되었음을 책의 1장과 2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후 3장은 앞으로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 될 수 있는 미중관계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저자는 노련하게 밝히고 있는데요. 특히 미국 외무위원회 보고서를 인용하며 “미국의 우방국과 동맹국들 사이에는 새로이 특혜 무역을 설정하여 상호이익을 늘리되 이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중국은 배제한다. 미국의 동맹국들과 함께 기술 통제 체제를 다시 만들어 중국이 미국과 동맹국들에 고성능의 전략적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군사적, 전략적 능력을 획득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는 것의 입장이 앞으로 미국이 중국에 대해 보여줄 중요한 지렛대가 되겠죠. 앞선 예가 지금은 유야무야 된 TPP이고, 뒤의 입장은 중국에 대한 더 나은 군사 정보 기술에 대한 적극적 통제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중간의 관계는 서로 경제적으로 상호 이익이 겹치는 부분이 많아 과거 냉전 시기의 구소련에 대한 전면적인 봉쇄를 통한 견제가 가능할 지는 매우 불확실해 보입니다. 아세안과 같은 국가들은 아직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경제적인 측면이 분명 이득이 되고 있고, 우리와 일본도 대 중국 무역의 비중이 꾸준히 높아져 왔습니다. 다만, 이런 중국 경제의 모습이 단편적인 해석으로 그쳐서는 안되는 것이 중국에서 경제는 이미 당의 영도하에 정치적적인 밀접성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단순하게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는 저자의 분석이 매우 타당성이 있습니다. 중국인들과 중국 정부는 자신들의 부상이 지역에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이익이라고 외치고 있으나, 최신 무기를 도입하고 군사력을 증강시키며, 특히 해군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등의 행태가 과연 중국이 세계에 평화적으로 부상하는 중국을 입으로만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우려가 드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 이러한 우려는 현재 남중국해에 관한 중국의 진출에 드러나고 있는데요. 국제 재판소의 판결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이 타협 불가라고 외치고 있는 이 거대한 권위주의정부를 과연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아직도 어려운 부분입니다.

결국 전방위적으로 중국은 국제적 헤게모니를 확보하기 위해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을 만들고, 상하이 협력 기구와 해당 국가들과 일대일로에 나서는 등의 독자 노선을 세우고 있는 것은 과거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이후로 국제통화기금 등과 같은 국제 기구에서 의결권이 없다는 점을 불만스러워 한다는 이야기가 알려진 바와 같습니다. 일당 독재 체체 국가 특유의 대외에 대한 정보 편협성과 외교에 있어서 다소간의 일방주의적 태도, 인도와 일본과 같은 주변국들과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앞으로 중국의 행보의 불확실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감히 추측해봅니다. 저는 그동안 적지 않은 중국 관련 책들의 후기에서 우리 나라를 비롯한 주변국들이 중국과 많은 경제적 협력과 유대를 추진하되, 지역 안보를 뒤흔들거나 과거 조공관계와 같은 지위를 강요하거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한다면 언제든지 대 중국 봉쇄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중국이 국제 규정과 제도를 준수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으로 전면적으로 중국이 미국의 역할을 대신하는 새로운 국제 지위적 재편을 반대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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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민주주의의 하모니
이홍규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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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이홍규 교수는 과거 김영삼 정부 및 김대중 정부에서 일했으며, 서울대에서 경역학을 오리건주립대에서 MBA와 한국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지난 1975년엔 행정고시에도 합격한 이력을 갖고 있는데요. 요즘에야 학부와 석사 및 박사 학위가 다른 것이 크게 이상하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이 교수도 경제학과 정치학을 전공 삼은 당시에는 약간 보기 힘든 케이스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다른 학문간의 융합이 요즘 학계의 화두라면 경제와 정치를 공부한 관료 출신의 학자가 이런 주제의 글을 쓴다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나 싶군요.

1장은 한강의 기적으로 시작된 한국의 경제 발전과 그 이후 1997년과 2008년의 위기와 그 배경를 분석하고 다시 현재의 시기에서 고도화된 금융과 세계 경제 환경에 따른 한국 경제의 취약점을 설명하고 2장은 다보스 포럼 등에서 제시한 미래의 ‘제4차 산업혁명’의 패러다임 변화와 이를 위한 한국 경제의 ‘창조적 파괴’의 당위성을 3장은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을 살펴보고, 이에 우리 나라는 법과 제도를 보완하고 대중이 깨어나 포퓰리즘과 같은 민주주의 위기를 불식시키고 궁극적으로는 한국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조화를 위해 시민과 정부의 여러 주안점을 마지막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교수의 이런 기본적인 관점은 큰 틀에서 딱히 꼬집을 만한 부분은 없었습니다. 대체로 평이한 분석과 해결책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다만 경제 위기에 대해 아마도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통해 제반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듯 했고, 이런 측면에서 수출과 내수의 균형, 서비스 업과 강소기업 및 맞춤 생산으로 새로운 기회를 찾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3차 산업 시기에 관광업을 비롯한 여러 서비스 업의 발전이 국가 발전의 중요한 부분이었는데요. 단순한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균형 구조를 강조하지 않더라도 어느 한 분야의 중점적 선택 만으로는 그 한계가 명백하다는 것은 여러 나라의 사례를 통해 입증된 바 있습니다. 일종의 서비스 업 만의 한계에 대해 이 교수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데요. 또한 경제적 불평등을 경제 발전 만으로 해결하려는 것도 그 한계가 이미 드러났고, “소득 불평등의 초연결 사회에서는 사회를 더욱 파편화, 분리화, 동요화 시킬 것이라 여기며 이것이 바로 폭력적 극단주의와 사회 안전의 위협 요소가 될 것”이라고 저자 역시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근원적인 소득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들이 필요한데 저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소득 불균형과 극심한 빈부 문제에 한몫하고 있는 기존의 기득권과 수많은 이익 단체의 이익화에 대해서는 “대중이 깨어날 경우 선거를 통해서 (이들을) 응징할 수 있는데, 문제는 유권자가 그만큼 깨어 있느냐의 문제”라고 피력하는 부분에서는 그것이 기본적인 인식이겠으나, 이것만으로는 범람하는 이익 단체들의 견고한 집단 이기주의를 불식시키는 것에는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결국 이상주의적으로 법과 도덕의 균형을 통한 시민들 대부분의 인식 변화가 요청되나 자본주의의 속성이 자유로운 이기심의 발현을 통한 개인의 합리적 이익 추구라고 봤을 때 이 합리적이라는 부분을 과연 누가 결정할 수 있느냐가 지금 뿐만 아니라 미래의 사회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일 것 입니다.

‘과연 경제적 번영이 민주주의를 촉진하는가?’ 라는 본문의 질문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봐야 할텐데요. 사실상 근래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발전국들이 경제 발전 단계에서 비타협적인 권위주의 체제로 비롯되었고, 서구 유럽은 이미 제국주의적 식민주의가 그 전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 경제적 번영을 완성하기 위한 그 시작이 민주주의와 그리 가깝지는 않다는 것이 양자의 완성 단계에서나 겨우 양립이 가능하고 일부 권위주의 정부의 학자들은 비성숙한 민주주의를 저열하거나 포퓰리즘 그 자체로 여긴다는 측면에서 양 자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자본주의의 인식 변화가 우선 전제되어야 하지 않나 판단해 봅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자도 비슷한 인식을 하고 있는데요. 즉 ‘포용적 자본주의’라는 소득과 일자리의 불평등 완화를 강조하고 있고, 각 이익 단체들이 무분별한 죄수의 딜레마의 빠져 사회적 우생을 감소시키는 행위 등을 감시해야 한다는 측면의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 서두에서 저자인 이홍규 교수의 일종의 소명 의식이 느껴지는 구절이 있었는데요. 한국의 학자로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많은 자본주의적 모순과 정치적 모순에 대한 문제점을 이 교수 스스로도 앞으로 미래의 한국을 위해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이러한 기본적인 인식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고 이런 문제 제기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 일독과 더불어 일정 부분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도 그렇고 문장 등도 상당히 평이해서 저로서도 일독이 수월했는데요. 더욱이 거듭 반복되는 주장도 거의 없이 일관된 논지를 갖고 건전하게 확장시켜 나가고 있는 점도 꽤 긍정적인 부분일 것 같습니다. 다만 앞서 설명해드린 대로 대체로 기본적인 인식의 문제와 다소 부족한 해결 방안 등이 있어서 일부 독자들은 다소 부족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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