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없는 자본주의
조너선 해스컬.스티언 웨스틀레이크 지음, 조미현 옮김, 김민주 감수 / 에코리브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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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공동저자 중 한명인 조너스 해스컬은 영국 브리스틀 대학교와 런던 비즈니스 스쿨에서 강의하고 미국 다트머스 대학에의 객원 교수를 역임한 바 있는 저명한 경제학자입니다. 이 책의 소개와 기사를 조금 찾아본 결과로는 조너선 해스컬은 특히 영국 정부와 공공기관 등과 여러 연구를 해온 연구자로도 알려져 있더군요. 마찬가지로 공저자 중 다른 사람인 스티언 웨스틀레이크 역시 케네디 장학생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및 정부학을 연구한 학자입니다. 이 렇게 신자본주의에 관한 해박한 연구서는 2018년 출판되었고, 원제는 Capitalism With Out Capital 입니다. 국내에도 마찬가지로 작년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일찍이 앨런 그리스펀은 앞으로의 세계 경제가 첨단 기술과 정보 통신 산업이 주도하는 경제로서, 이것을 신경제 New Economy라 명명한 바 있습니다. 즉 이러한 자본주의 패러다임 변화의 시대로서 과거의 자본을 유형의 자산이라고 정의한다면, 앞으로는 유형이 아닌 아이디어, 지식, 예술적 컨텐츠, 소프트웨어, 브랜드 및 네트워크와 관계 등을 일컫는 무형 자산이 주가 되어 선도하는 신자본주의에 대한 개념과 상세한 전망을 담은 연구가 바로 이 글입니다. “지난 몇 십년간 형체가 없는 것들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며 마침 이 글의 주제가 어떠한지 대략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 책의 2부 5장 : 무형자산, 투자, 생산성 및 장기 불황과 6장 : 무형자산과 불평등 확대를 주목해 읽게 되었는데요. 자본이 축적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많은 경제학자들이 증명하는 것으로 이런 차원에서 오늘날 소득의 불평등에 이 무형자산에 따른 불평등이 또 다른 요소로서 가능성을 보이지 않나 싶었는데, 대략 제 추측이 옳았습니다. 일단 무형 자산은 4S 즉, 확장성, 매몰성, 스필 오버, 시너지 효과 등의 대표적 속성을 갖고 있고, 이들과 관련해서 저자들은 스필 오버와 시너지와 관련된 부분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스필 오버란 무형 자산과 관련된 기업과 각 주체들의 투자들이 일종의 서로간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으로 동종 산업 뿐만 아니라 상이한 업종 간에도 의미있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네트워크와 자동차라는 자산을 통해 발전한 우버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이들 무형 자산에 관련된 일차적인 결과가 도출되는 것은 오늘날 IT 산업의 발전과 함께 이 무형 자산이 놀랄만한 성장을 해왔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가 고도화 됨에 따라 노동의 역할이 중요해 질 것이라는 전통주의적인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의 예상을 넘어 이 무형 자산의 증대는 전통적인 노동의 역할을 변질시키고 결과적으로 자본창출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요소를 갖고 있는 노동자들이 아닌 결핍이 내재되어 있는 다수의 노동자들이 더욱더 불평등의 길로 내몰릴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습니다. “노동자들이 엘리트들과 사회 현실에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현재의 노동시장의 패러다임 변화가 결국 저자들도 일정 부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개인의 노력 만으로 이러한 무형 자산의 요소를 습득하고 훈련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며, 장기 불황 시대에 각 관료주의와 정부가 유아 계층을 비롯한 청소년 교육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선험적 주장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판단해봅니다.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많은 선진국들은 그렇지 않은 국가들에 비해 무형 자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R&D 라는 측면도 정확히 수치를 계산할 수 없는 이 무형 자산의 스필 오버와 시너지 효과를 갖는 수단으로서 저작권과 특허에 관련한 보장에 많은 국가들이 힘을 기울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분을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수한 경영과 높은 성과라는 강한 문화를 가진 기업들”은 앞으로도 자본 산출에 다른 수단인 무형 자산에 힘을 쏟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지 않은 기업과 국가는 더욱더 도태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적게 나마 인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공동 저자들의 이 연구물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광범위한 금융에 대한 설명도 담겨져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요. 사실은 금융과 이를 뒷받침하는 네트워크에 대한 설명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저처럼 실망감을 맛보고 싶지 않은 분들께는 이 책을 강하게 추천드리기는 어렵겠습니다. 다만 제4의 혁명과 신경제와 같은 최신의 정보 및 자본주의의 변화된 모습을 지식으로 얻고 싶은 분들은 구매와 일독을 권유드려봅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의 통계와 상세한 도표, 최근 발표된 여러 경제 논문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최신 경향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군요.

엄밀하게 따져 본다면 전통적인 유형의 자산과 여기에 언급된 무형의 자산이 서로 만나서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이지 앞선 양자의 경계가 명확하게 분리되어 완벽하게 자본주의의 흐름이 변화되었다고 보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전통적인 제조업 수준의 상품 생산과 그것을 시장에 공급하는 것만으로는 기술의 발전 시대에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분명할 겁니다. 다만 무형 자산을 수치화하려고 하고 그 파급을 예측해보려고 했다는 점은 충분히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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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0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을 정밀하게 분석해서 나열하고 정리해서 결과를 말해주니까 어느정도 책을 고르는데 도움이돼네요. 긴글쓰신다고 수고많으셨습니다.ㅎㅎ

베터라이프 2019-12-20 23:26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하는데 어쩔수 없이 어떤 부분은 주관적이고 편파적이 되기도 하네요 ^^ 하여튼 감사합니다
 
일본의 한국식민지화 - 담론과 권력
Alexis Dudden 지음, 홍지수 옮김 / 늘품(늘품플러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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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코네티컷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이자, 특히 일본제국주의 시대와 관련된 동북아 역사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 온 알렉시스 더든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학자입니다. 지난 2015년, 일본 종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 내 역사학자 성명을 이끈 공로로 만해평화상을 받은 이력이 있는데요. 당시에 일본 아베 정권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그녀의 ‘일본의 한국식민지화’라는 이 글 또한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연구라고 생각되는데요. 다만 이 책에 대한 서지 정보가 확실히 잡히지 않아 구글링을 하게 되었는데, 출판 연도가 2004년으로 나와 있지만 정보가 정확한지는 약간 불명확합니다. 이 점 양해 말씀 드립니다. 국내에는 출판사인 늘품플러스가 2016년 번역 출판하였습니다.

알렉시스 더든이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점은 이렇습니다. 1차대전 발발 이전의 제국주의 시대에서 야만국은 마땅히 문명국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계몽적 통치’에 대한 해석과 이를 바탕으로 일본이 근대화 된 군사무기로 팽창에 나서지만, 그것보다 “권력 다툼에서 군사력만이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넘어서 일본이 이 시기의 국제법과 국제조약 및 외교용어들을 조선과 청나라에 능수능란하게 교묘한 술수로 사용하며 팽창주의의 합법성을 얻으려고 한 이면을 파헤치고자 쓴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장황하지만 결국 요점은 “이른바 문명 국가들은 야만적인 국가들을 합법적으로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다”는 당시 식민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론적 잣대인 계몽적 통치와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조선을 병탄하고, 당시의 조선을 야만국으로 규정한 일본의 외교적 술수에 대한 분석이 주된 요점입니다.

일본은 1853년 미국 매튜 페리 제독의 흑선에 의해 소위 불평등 개항을 강제로 맞게 됩니다. 당시의 일본 식자들은 이러한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이 후에 일본이 기준에 맞는 힘을 되찾게 될 때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그것보다도 도쿠가와 막부가 붕괴하고 일왕이 전면에 등장하는 정치적 격변의 시기와 부분적 근대화를 통한 국력을 신장한 경험으로 자신들의 제국주의 시대를 열게 되는데요. 물론 저는 이 점을 옹호하고자 저런 수사를 붙인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알렉시스 더든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짤막한 평가인 “일본제국주의 역사 속에는 한국, 중국, 그 밖의 도처에서 강제로 이주당해 공장과 군막사에서 노동자로, 성노예로 착취당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가슴 복잡한 이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금도 일본의 대다수의 지식인들과 무지한 시민들은 2차대전 이전의 아시아에 대한 침략행위가 일본제국이 종말을 고함으로써 끝났다고 동시에 그 책임이 소멸했으며, “일본의 팽창주의 산물인 제국이 붕괴된 후 반세기가 지난 현재,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 서로 다른 방법을 이용해 마치 입을 맞춘 듯 서로 도와가며 역사적 과오를 정화하하려고 하고 있다”고 저자 역시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글의 시작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의 진화론적 사회학에 입각해 유럽 제국주의의에 의한 식민통치를 번영이라 여기고 이 왜곡된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여기고 있던 당시의 시대상이 저자인 더든의 글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일찍이 E. H. 카는 1차대전 이전의 이러한 이상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평화 분위기가 끔찍한 대전의 원인이었다고 여기는 것에 한편으로 동의가 될 만큼 이들은 자신들을 문명국이라 자처하면서 번영의 시대라고 여기고 있었죠. 가까스로 신흥국의 반열에 들어선 일본은 자신들도 역시 열강의 틈바구니 안에 들어가길 원했습니다. 여기에는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international 인터내셔널, 국제 및 국제주의와 국제법과 관련한 당시 동아시아에는 생소했던 이들과 관련된 연구를 일본인들이 끊임없이 지속해 왔고 이것이 단순한 상업행위를 통한 교역을 야만과 비야만을 구분하는데 그치지 않고 도로 조선과 청나라를 야만으로 규정하는 데 교묘히 쓰였다는 점에서 통렬한 감정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의 정한론과 조선 병합의 목적을 추구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 말려들어간 이유도 이와 같이 인도주의적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얼마나 교묘한 언술에 지나지 않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들 손으로 더러운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이완용과 송병준 같은 부역자를 이용해 추잡한 짓을 벌인 일은 일본인들이 과연 인도주의와 정의를 입에 담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저는 이 미국의 여류 역사학자의 이 연구에서 특히, 일본이 당시 조선을 의사-독립국으로 여긴 점이 관심을 끌었는데요. 조선이 법적으로 청나라 속국이었던 것은 명백했지만 독립국으로서 조선 국왕이 자주권으로 통치하고 있었으나 이 중국 대륙에 의한 전통적인 동아시아 정치적 관계를 잘 알고 자신들도 그러한 범주안에 속해 있던 일본이 그것을 모른척하면서 조선을 독립과 자주권을 주장할 수 없는 국가로 술책을 부린 것은 1870년대 초 일본에서 불던 정한론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는 노골적인 야욕이라고 해야할까요. 저자도 분명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강화도 조약으로 시작해 1910년 말장난에 불과한 대한제국 병탄을 한일합방으로 포장하기까지 면밀한 정치외교적 과정을 꼼꼼히 갖춰나가면서 당시 열강국들로부터 승인받으며 대한제국 편입을 마무리 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심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1943년 미드웨이 해전 패배 후 미국과의 단독 강화 시도를 통해 만주와 대만, 한반도의 지배 만이라도 유지하려고 했던 일본제국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바로 3장이 일본의 동아시아 침탈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국제법과 국제용어 해석과 이론 습득에 나선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조선 사법권 박탈과 관련된 프랑스인 구스타브 봐소나드의 일화가 쓰여져 있는데요. 저자인 더든이 이런 사례까지 조사한 것은 한국 학자들보다 더 치밀한 연구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한국의 국사학계가 당시 메이지 유신에 대한 천편일률적 해석과 일본의 근대에 대한 지속적인 폄하를 해오고 있는데요. 저는 지금이라도 우리 학계가 이것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 많은 학자들은 1905년 태프트-가쓰라 밀약과 1902년 이후 영일동맹이 갱신되면서 인도와 대한제국을 맞교환한 영일 양국의 우호조약에만 신경쓴 나머지 이것만을 알파와 오메가로 여기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한론에 대한 연구도 이런 차원에서 다시 조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끝으로 오늘날의 일본인들과 일본 정부가 2차대전 종전 이후, 과거의 일본제국과 미군에 의해 민주정치로 개조된 자신들의 현재 정부가 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과거 제국주의의 유산과는 다르다고 선을 긋고는 있지만 전후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주의적 입장과 종래의 평화헌법 개정과 관련된 시도에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우려를 금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사과가 국격의 손상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태도에서 앞으로 역사 문제 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까지 일본과 관련된 요건들이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지는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어 보입니다.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이 알맹이가 빠진 협력 운운이 차라리 아예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이 역사 문제가 과연 해결될 문제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는 모두가 답을 짐작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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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 그들 - ‘그들’을 악마로 몰아 ‘우리’의 표를 쟁취하는 진짜 악마들
이안 브레머 지음, 김고명 옮김 / 더퀘스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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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마치고 뉴욕 대학의 교수를 거쳐 유명한 ‘타임’지의 전 편집장 및 현재 글로벌 정치 리스크 연구 및 컨설팅 기업 유라시아 그룹의 설립자 겸 회장인 이안 브레머의 최신의 세계정치경제 비평서 ‘우리 대 그들’을 일독했습니다. 원제는 Us Vs. Them The Failure of Globalism 이며, 현지에서는 지난 2018년 출간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브레머는 J-Curve 에 대한 개념과 관련된 글로 유명하고, 특히 중국과 관련하여 종래의 중국굴기론을 지지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글들은 국내에도 그동안 번역 출간이 되었는데요, 현재는 일부 책들이 절판된 상태이기도 합니다.

여기 이 글은 크게 실패했다고 보는 세계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재조명 및 현재의 실패를 세계화의 문제로 몰고가는 포퓰리즘과 포퓰리스트들에 대한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와 관련한 브레머의 논증 과정에서 보여지는 여러 주장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오늘날 세계의 포퓰리즘의 대두와 이들의 정치경제적 왜곡 시도는 분명 우리 민주주의에 위협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들 포퓰리즘의 대두에 분노와 경멸과 같은 감정적인 대응으로는 해결하기 힘들며, 우리가 현실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각각의 체계를 정확히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겠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포퓰리스트들은 “엘리트들이 우리의 삶을 둘러싼 규칙을 정할 자격이 있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밝히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포퓰리스들이 적절한 대안은 제시하지 못한 채, 기존의 엘리트 정치를 전복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측면입니다. 이것을 반증하는 입장에서 “세계 엘리트들의 대부분은 세계화가 불평등의 해결책이라고 믿는다”는 논점에는 개인적으로는 완벽히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만 브레머가 저 말을 확신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떠나서 그 역시 “선진국의 강력한 사회 안전망이 앞으로의 수많은 불평등 문제를 좌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에는 대체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문제는 결과의 불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불평등이다”는 평가도 비슷한 맥락이고, 이 점은 3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대표적인 개도국 12개국의 사례와 결부지어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12개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나이지리아,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브라질, 멕시코, 베네수엘라, 터키, 러시아,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으로써 앞으로 세계의 미래와 관련해서도 이들 국가들이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와 관련해서도 독자들이 주목해 볼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이들 국가들이 파탄 국가의 길을 걷지 않고, 경제적 평등과 국민들의 삶을 신장시킬 수 있는가에 따라 2020년 이후의 세계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의 이러한 태도는 기본적으로 세계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면밀한 확신과 현저히 자생하고 있는 이 포퓰리즘 정치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정치경제적 입장과 수단으로 저자 자신이 설득력을 높이려고 하고 있으나 각각의 논증들이 다소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2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자동화와 기계학습 등이 과연 우리의 노동 시장과 노동력의 변화에 어떠한 영향이 될 것인지는 미래경제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4장에서는 보호주의의 장벽이라는 화두로 세계화에 반하는 각국의 보호주의 상황을 열거하면서 특히 근래 획기적으로 유입되었던 난민 문제와 이민 문제를 분석하며 특히 중국과 이란 등의 국가 당국에 의한 검열과 같은 자국민에 대한 폐쇄적 보호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뒤에 5장에서 중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후커우 제도를 대비한 ‘사회신용체계’가 조지 오웰이 경고했던 ‘빅브라더의 출현’과 매우 유사하게 언급되고 이러한 중국의 신 평판 시스템이 결과적으로는 모든 중국의 인민이 국가의 감시를 받는 상황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애써 그런것이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그것의 결과는 어떠할지 우리와 같은 외부인들은 자명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에 중국 정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는 “신용이 없는 자들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어 일반 국민이 하늘 아래 어느 곳이든 마음껏 누빌 수 있는 신용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는 분명한 불가능한 목표에 대해 허울좋은 목소리만 높이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이 앞으로 어떠한 식으로 작동할지에 대해서는 우려할만한 상황이죠.

이렇게 사우디아라비아와 중국, 이란에 사는 사람들과 다른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의 처한 입장이 정치 체제에 따라 현저히 갈립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현재 유럽에서 목도하고 있는 난민 문제에 대해 이들을 우리의 사회쳬계 안에서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지에 그동안 사회계약론에 기초한 여러 이론들을 살펴보고 새로운 시민들에 의한 계약론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답이 무엇이든 간에 단순히 국가 안보와 더 좋은 삶을 살 기회를 보장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을 문제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슬라보에 지젝이 말했던 전통적인 국민국가의 위협 상태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오히려 장벽을 세우고 차별하고, 보호주의적 입장에 서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미국의 티파티 운동과 같이 “미국을 다시 하얗게 만들겠다는 성난 인종주의 노인들과 평범한 애국 시민으로 위장한 돈 많은 공화당 활동가들의 야합”이 포퓰리즘과 포퓰리스트들의 생명력을 더욱 높이고 우리들의 민주주의를 더 위험한 상태로 몰고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위기는 저자가 마지막 장에서 분석하는 만연한 ‘가짜뉴스’와 이를 바탕으로 ‘선동된 가짜 여론’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제 민주주의하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을 건전하고 열심히 사는 것 만으로는 이 토대를 지켜낼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앞선 장에서 이것과 관련해 저자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이 교육의 제공은 ‘기회의 균등’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가장 부합되고 시민을 이성과 지식으로 재무장하는 꽤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경제를 시민의 삶을 영위하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더이상 목적과 수단의 경계가 왜곡되어 우리 시민들이 가치왜곡에 빠지지 않도록 ‘허위의 부르짖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동안 세계화와 세계주의의 뒤안길에 비롯된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극명한 빈부격차와 심각한 불평등 문제, 심각한 정치 불신이 이 자본주의적 경제 세계화의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퓰리스트들은 이 세계화가 미국 시민들을 궁핍에 이르게 만들고, 아시아의 개도국의 중산층을 키우는데 일조했다고 비난하면서 세계화 자체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은 강화하면서도 정확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현실을 왜곡하는 것으로 우리가 중요하게 알아야 될 부분은 이 ‘세계화’를 어떻게 하면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 그 고민입니다. 이미 셰계는 경제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일정 부분의 번영이 이런 가치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다만, 기존의 엘리트들이 자신의 기득권과 부를 위해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매번 강조하는 말이지만, 제도의 재정비와 민주주의의 확대, 평등한 기회를 더욱더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고 여론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또한 중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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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전쟁 50년의 점령 - 중동 테러리즘의 불씨를 지핀
아론 브레그먼 지음, 정회성 옮김 / 니케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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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킹스칼리지의 전쟁연구학과 교수로 있는 아론 브레크먼은 이스라엘 출신으로 중동 전쟁에 참전한 후, 제 1차 인티파다 발생 이후, 비롯된 이스라엘 정부와 군에 의한 팔레스타인들에 의한 가혹한 처우와 정책에 반대하여 이스라엘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한 이력이 있는 역사학자입니다. 이 책의 서두에서도 이와 관련한 개인사로 그의 이런 양심의 문제에 대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장인과의 관계 등이 언급되고 있는데요. 아마도 조국인 이스라엘을 떠나 외지에서 모국에 대한 역사와 중동 전쟁사를 연구 집필하며 현재까지 학자적 양심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로 이 책도 그러한 결과의 산물일텐데요. 지난 2014년 Cursed Victory라는 원제로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주를 포함한다면 약 630여페이지의 적지 않은 분량을 갖고 있습니다. 저도 책을 주문해서 받았을 때, 전부 소화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아득했습니다만 짬짬이 틈을 내어 3일만에 정독을 마칠 수 있었는데요. 글의 전체적이 구성이 예상외로 꽤 명료하고 번역의 질 또한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만, 1948년부터 1967년 사이의 당시 이스라엘 정치와 외교사 및 전쟁사를 인지하고 있어야만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제3차 중동전쟁 이후인 1967년 6월 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에 대한 선제 공격을 감행해 승리한 후, 의도하지 않은 전리품으로 요르단 강 서안, 지중해에 면한 가자 지구, 시리아의 골란고원,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것은 지난 제네바 협약에 반하는 명확히 불법적인 이스라엘의 점령화로 저자인 아론 브레크먼은 이러한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이들 점령지역에 대한 ‘영구점령화’에 대해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정치적 의도들이영구점령을 염두해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글을 써가고 있는데요. 이들 지역의 점령 초기에 이스라엘 당국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하긴 했지만 유대인 정착촌 문제와 특히 점령 이후 거주하고 있던 팔레스타인들을 요르단과 시리아 쪽으로 강제적으로 쫓아냈다는 점은 앞선 의심을 절로 갖게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 뿐만 아니라 저자가 짚어 내고 있는 이스라엘 당국이 주도한 중요한 정책들, 특히 광범위한 군정과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야간 통행 금지, 서안 지역에서 실시한 행정 및 경제적 강제 관리와 팔레스타인들 스스로를 위한 정치적 수단 행위를 사실상 금지한 것은 이들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식민지 통치 행위와 다를바가 없어 보였습니다. 이에 저자는 글의 말미에서 인도 등에 행해진 영국의 식민지 정책보다 훨씬 정치적으로 교묘했다고 평가하며, “이 책에 기술된 이스라엘의 40년 점령기를 두고 훗날의 역사는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역사에 크나큰 오점이었다는 평가를 내릴 것이라 믿는다”는 매우 겸허하면서 연구자적 양심에 의한 평가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스라엘 군에 의한 군사적 보복행위와 PLO나 하마스에 의한 테러 행위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수준의 문제이며, 국제 사회와 동맹국인 미국, 여러 유럽국가들이 이스라엘이 자행하고 있는 수많은 군사적 작전에 많은 우려와 중단을 요구했고 점령지 내에서 팔레스타인들에게 최소로 필요한 물과 전력과 같은 인간 생황의 기본적인 보장 또한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차단되어 왔다는 점은 지금도 자신들을 성공적인 개방된 민주주의 국가로 자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심각한 괴리 현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런 현저히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부당한 정치적 현실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속내로 미국에 추진된 평화 협상은 작게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 크게는 중동국가들간의 관계 개선 및 평화 구축에 있었는데요. 여기 3부에는 이러한 노력들의 일환으로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가 이스라엘과 PLO를 상대로 중재 노력을 기울인 정치외교적 노력들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특히 노회한 아라파트 전 PLO의장과 에후드 바라크,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들 간의 협상 내용들이 꽤 상세히 나와 있는데요. 특히. 동예루살렘의 중요한 이슬람 성소인 ‘하람 알샤라프’ 지위 및 주권 문제가 서로간에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 인식되며 협상의 공식적인 해결을 도외시한 조건이었습니다. 당시의 아라파트 의장은 이집트와 시리아 등의 아랍국가들의 심대한 압력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캠프데이비드와 프랑스 파리의 여러 협상에서 이 하람 알샤라프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 문제를 클린턴 대통령이 용인해달라고 요청하지만 결국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이슬람 율법에 의해 이 성소 문제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로 만약 팔레스타인 국가가 용인받는다면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겠다는 주장과 함께 타협이 불가능한 부분이었습니다. 좋은게 좋은것이라는 취지의 클린턴 대통령의 설득과 외부의 한 서양 정치인의 시각이 얼마나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한 것인지 알 수가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임기 말까지 중동 평화 해결을 위해 기울인 노력이 사적인 업적을 위해 기울인 것이라 할지라도 클린턴의 외교적 노력이 무조건 폄하되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이슬람이라는 유일무이한 종교가 수많은 개인들의 일상의 삶을 제어하고 관리하는 것은 계몽주의의 혜택을 받은 다른 시민들이 보기에는 이해하기란 어려분 문제입니다. 다만, 오늘날의 테러리즘과 관련해서 이 이슬람 율법의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해석을 이슬람 종교인들이 나서서 관리하고 제거할 필요는 있지만, 이슬람 자체가 정치적 수단인 많은 중동 국가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어떤식으로든 개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무고한 희생자들을 끊임없이 양산해 낼 수 있다는 점은 모두가 알다시피 매우 우려스러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 이 책을 통해 이스라엘 정치와 정치인들의 복잡한 셈법과 시종일관 비타협적인 유대주의와 평범한 팔레스타인들의 희망을 대변하지 못하는 전자와 동일한 노회하고 정략적인 종교정치인들의 실상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과연 평화를 위해 정치적 협상을 할 의지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정치적 평화가 많은 일반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에 기여해야 한다는 이 정치도덕론적 원론이 거부되는 상황을 어떻게 봐야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보는 태도를 단순한 현실이 결여된 이상주의적 입장이라고 단언하기는 쉬우나 누구나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 권리에 대해 이들이 주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또한 뒤에 정치 세력들이 이것을 거의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숨은 의도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2005년에 반환된 가자지구에 대한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 정부에 의한 교묘한 통제는 바로 이러한 점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안보와 생존권과 관련하여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는 주의를 보여주고 있고 군사적으로도 ‘방어적 공격’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으며, 모사드에 의한 정치인 및 테러 지도자들의 암살과 관련해서도 정치적으로 필요하다면 무슨 짓이든 감행할 의지가 있는 국가로 여겨져 다소 복잡한 감상이 들었습니다. 미국에 대해 비재래식 군사력(자신들이 보유한 핵무기)과 관련하여 어떠한 개입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주장이나 미국 내에 수많은 유대인 단체를 움직여 여론을 환기시키고, 자신들의 정보 단체를 움직여 정보를 쥐어짜내는 모습은 마키아벨리가 희망했던 다수의 국민들을 위한 어떠한 도덕적 문제에 연연하지 않은 그야말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상적인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더불어 현재의 동맹외교와 관련해서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면서 미국에게 자신들이 양보했으니 막대한 비밀 원조를 요구한 이스라엘의 소위 외교력에 대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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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타르드 컴북스 이론총서
유진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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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사회학’으로 오늘날 재조명을 받고 있는 가브리엘 타르드의 얇은 소개서인 ‘가브리엘 타르드’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상명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인 유진현 교수가 썼습니다. 출판사인 커뮤니케이션북스에서 현대 사상가 시리즈물로 꾸준히 내고 있는데요. 과거에 한길사 로로로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시공사에서 펴낸 사상가 시리즈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기획들은 해당 인물의 주저를 읽기전에 훌륭하게 참고할 만한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선 저자인 유진현 선생은 글 서두에서 문학 전공인 자신이 어떻게 가브리엘 타르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그 소감을 먼저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1년 귀국해서 르 봉과 타르드의 저작을 번역해보고 싶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여의치가 않게 된 것을 아쉬워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상률씨가 초역한 ‘모방의 법칙’, ‘여론과 군중’을 소개하고, 특히 동일한 역자가 번역한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를 다수의 번역판이 있는 가운데 가장 선호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도 역시 이상률씨의 번역이 탁월하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에게 가브리엘 타르드는 많은 현대 사상 연구자들에 의해 ‘인터넷으로 연결된 현대사회를 분석하기에 적합한 이론의 틀을 가브리엘 타르드가 마련한 것으로 우선 해석’합니다. 과거 에밀 뒤르켐과의 10여년간의 논쟁의 귀결로 그동안 그의 ‘심리사회학’이 사회학의 실증주의적 대세에 밀려 한동안 잊혀져 왔는데요. 미국에서 프랑스보다 질 들뢰즈 연구가 각광을 받으면서 ‘모방’과 관련된 가브리엘 타르드의 이론이 주목을 받게 되고 이러한 경향이 꾸준히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이론보다 가브리엘 타르드의 군중과 공중 이론이 좀 더 면밀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늘날 합리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학 이론이 직면한 한계로 새삼 가브리엘 타르드가 각광 받고 있는 이유로서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가 이제서야 다시 우리의 인식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앞서 언급한 과거 에밀 뒤르켐과의 논쟁에서 이론적으로 밀리게 되어 거의 그의 심리사회학이 오랫동안 퇴출된 역사 때문입니다. 타르드의 표현대로 일견 궤변론자이기까지 했던 당시 떠오르는 신예 에밀 뒤르켐의 사회학의 실증주의적 증명과 인간 행동 법칙의 합리적 개연성이라는 당시 프랑스 사회학의 주류에 심리적 관계, 관습적 요인, 심리 이동, 모방 등과 같은 다소 실증적 또는 합리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그의 이론이 그 특유의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쫓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한동안 타르드를 연구하는 하는 것을 꽤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인식되기까지 했죠.

오늘날 광범위한 인터넷 시대와 개인과 개인을 서로 물리적인 거리가 있음에도 순수한 온라인 상에서는 무한히 가깝게 만드는 이러한 초연결사회에 타르드는 여느 사회학자가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인간이 서로를 모방하고, 한편으론 이러한 방식이 일종의 문명화 과정으로 해석되는 시대상에 그의 사상이 관습적인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분명 우리가 목도하는 세계에서 반대의 합리주의적 수단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한계가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회 분석 수단이 한계에 봉착하면 또 다른 것으로 분석을 시도해 보는 것은 학문의 또다른 열린 강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18세기에 우리가 계몽의 문을 열었던 것처럼 이 점을 인지하고 좀 더 인간적인 사회학 및 현대철학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학문을 하는 자의 소명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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