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누구의 것인가
재런 러니어 지음, 노승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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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초기 VR(Virtual Reallity) 토대를 만든 과학자로 ‘가상 현실의 아버지’ 라는 별칭과 함께 철학자, 시각예술가, 작곡가, 영화감독 그리고 저술가의 수식어를 갖고 있는 재런 러니어의 ‘미래는 누구의 것인가’를 일독했습니다. 저자 이름은 지정된 외래어 표기 명칭으로 딱히 확정된 바가 없기 때문에 재런 러니어 혹은 재런 래니어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3년 출간된 책으로 국내에는 2015년에 열린책들에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원제는 ‘How Owns The Future?’ 입니다.

근래에 점차 확대되고 있는 이 ‘네트워크 확장 시대’ 에 개인적인 관심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라는 주제입니다. 그래서 제가 간혹 위키백과와 같은 ‘집단지성’을 다룬 글이나, ‘광범위한 오픈 소스’에 대한 글들을 찾아 읽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사실 이러한 분야에는 거의 문외한과 다를바가 없기 때문에 이런 관련 글들을 읽을라치면 고생으로 이만저만한 상황이 아니게 됩니다.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앞선 질문에 대한 조그만 답을 찾기위해 이렇게 노력하게 되네요.

이 책은 크게 9개의 장으로 되어 있고, 마지막에는 글 전체에 대한 흥미로운 결말의 결론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6장의 민주주의, 그리고 네트워크 상의 만연된 경제적 담론에 있어서 인본주의적 대안을 그려본 8장이 흥미로웠습니다. 저자 스스로 ‘전산학자’를 자임하면서 위로는 구글과 아마존의 과거와 현재, 중요한 세이렌 서버와 관련된 의의, 밑으로는 이 세이렌 서버를 과연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되는가를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독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밀한 현재에 대한 평가와 미래의 대안을 같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전체적인 관점을 되짚어 보게 되었는데요. 이 재런 러니어라는 네트워크 및 IT 업계의 선구자가 제게는 다소 생소하기는 했습니다. 리눅스를 개발한 리누스 토르발스의 일화만 알고 있던 저로서는 말이죠.

우선 중요한 주제로서 논의되고 있는 ‘세이렌 서버’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구글이나 아마존 서버와 같이 막대한 정보량의 입출력이 동시에 이루어지며 마찬가지로 어마한 금전적 수익과 파급력을 갖고 있는 기술적 용어 내지는 중요한 네트워크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 세이렌 서버의 파급과 앞으로의 미래가 과연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저자인 러니어도 조심스런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많은 ‘SF적 예견 미래’가 대체로 긍정적이지만,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정치경제적으로 예견된 모습은 사뭇 부정적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애매하게 연결된 네트워크의 빅데이터의 현대 세계 문제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완벽한 전형적인 방식”으로 오늘날 정부 휘하의 폐쇄적 정보국들이 현 상황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려는 이해관계와 시도를 분명 갖고 있으며, 이것은 독점적 정보 지위를 갖고 있는 이 세이렌 서버의 속성과 동일하게 민주주의 정부내에서도 이 정보들의 물리적인 통제를 손에 쥐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저자는 이 정치적 목적과 경제적 이해관계를 따로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이러한 정치 엘리트의 아주 광범위한 시민들에 대한 정보통제 및 정보 수집이 “민주주의 내에서는 이로 인한 소득 집중의 증대로 인해 엘리트가 점차 부유해진다”는 신빙성 있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안보라는 큰 테두리로 시민들의 내밀한 정보들과 소규모로 네트워크화가 되고 있는 시민들 모임의 빅데이터화는 위의 일차적인 목적을 위해 ‘정보 수집의 정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이 정보들을 누가 다루고 정부는 이를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대한 아주 엄밀하고 세세한 견제 장치가 없이는 독점된 정보로 인한 경제적 이득을 포함한 부차적인 결과가 엘리트들에게 집중된다는 불평등이 예견됩니다.

여기에 저자는 “진짜 부와 영향력, 경제적 존엄성을 겸비한 힘 있는 대중 만이 국가 권력의 상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며, 여기에 덧붙여 ‘경제적인 측면의 중산층’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적인 중립성을 겸비한 중산층’의 필요성을 언급합니다. 민주주의 옹호자와 네트워크 기업인 둘다 통제를 증오하기 마련인데요. 네트워크 비즈니스에 대한 기회가 소수 대기업들에게 집중되는 것도 시장 경제정의에서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도 안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거대한 종 모양의 두터운 중간층 및 중산층이 전통적인 민주주의 시대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와 건강한 경제 발전에 필요불가결한 요소인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민주주의가 지속되려면 승자 독식 정치에 저항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한다”는 지향점도 우리가 눈여겨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마불사의 오늘날 금융과 관련해서도 “디지털 네트워크는 무엇보다도 효율적으로 도덕적 해이를 증폭했다”고 평가하며, 투자 은행들과 대량 증권을 만들어내는 이들 금융 네트워크가 적절한 견제나 대응이 지금도 전무하고 금융 엘리트들에게 현재에도 거의 자율권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은 우려할 만합니다. 사실상 이러한 금융 네트워크가 빅데이터와 만나, “빅데이터의 상업적 상관관계는 거의 언제나 영구적으로 숨겨져 있다”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속성으로 말미암아 네트워크로 연결된 디지털 경제가 더욱 정상적으로 견제되지 않게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 점이 더욱더 부의 집중을 초래하는 원인이 아닌가 조심히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구축하고 있는 정보 경제의 진짜 바탕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봉건제”라는 저자의 고유한 판단과 앞에서 보았던 예측과 사례에 기반한 디스토피아적 의견에 점차 동의하게 되더군요.

창의적인 IT 업계와 공정한 정보를 다루고 누구에게나 정확한 디지털 네트워크의 올바른 균형이 ‘세이렌 서버’의 부정적인 면을 제어하게 되겠죠. 이를테면 스타워즈의 ‘포스’의 밝은면과 어두운면이 공존하면서 발생하는 세계 존립의 위기가 이와 비슷할 겁니다. 그래서 저자는 소규모 그룹이 이러한 ‘세이렌 서버’를 창조하고 접근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런 시도가 세이렌 서버하의 세계에 유익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스스로 소름끼치다고 말했던 ‘온라인 보안, 개인 정보 보호, 신원을 비롯한 골치 아픈 문제’를 중심으로 구축된 우리가 목도하는 신산업이 정치와 경제를 해치지 않고 너무나 무분별한 개방성을 최대선으로 여기지 않는 ‘적절한 중간주의 내지는 중도’를 유지하는 것이 확실히 필요하며, 오판하게 되면 인간 본연의 삶이 파괴되는 이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를 우리의 손으로 제어할 수 있는 여러가지의 대책을 세워 놓는 것이 결국에는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경제에 유익한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호기심과 같은 사소한 측면의 사례들과 작지만 꽤 유용해 보이는 정보들도 이 책에서는 가볍게 여기지 않고 다르고 있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기존의 가치와 신기술을 넘나들며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는 이 세계에 적당한 ‘요약 스케치’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의미있는 글이었습니다. 저는 특히 ‘대마불사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개념이 완독한 지금에도 떠오릅니다.

“세상의 수많은 혼란과 증오가 종교와 현대성 사이의 경계에서 생기는 갈등과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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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량의 창조 - 인간다운 삶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마사 누스바움 지음, 한상연 옮김, 이양수 감수.해제 / 돌베개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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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누스바움은 미국 뉴욕 출신으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철학자로 명성을 얻은 바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법학과 고전, 윤리학에 있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녀는 현재 하버드대와 브라운대를 거쳐 미국 시카고 대학의 석좌교수로 있으며, 특이한 점은 자신의 특출난 경험을 통해 유대학과 여성학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여성학 및 젠더학과 관련해서도 적지 않은 글을 출판했으며, 국내에도 그녀의 여러 저서가 번역 출판되어 있는데요. 이 책의 제목인 ‘역량의 창조’는 지난 2013년 출간된 것으로 원제는 ‘Creating Capabilities : The Human Development Approach’ 입니다. 국내에는 지난 2015년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책의 제목이자 글의 중요한 주제인 ‘역량 Capabilities’는 최종적으로 ‘인간 자유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라 규정하고, 이 자유의 영역은 아마도 정치적 자유주의적 개념으로 사람이 스스로 가장 인간답게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범위 내지는 가능성을 뜻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여기에 나와있는 ‘역량’의 측정과 역량의 증진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인도 출신의 아마티아 센과의 공동 작업으로 전체적인 개념과 이론이 탄생한 것으로 여기에 누스바움은 센과의 작업에서 ‘동물권’의 개념을 제외한 나머지에서 서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누스바움은 센과 달리 고유한 동물의 권리인 동물권을 인정하는 편입니다. 한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 내지는 국민이 그들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를 설명하고 분석할 전반적인 지표로서, GDP 접근법이 오랫동안 학계를 포함해 정치권에서까지 통용되어 왔는데요. 누스바움은 이 GDP 접근법에 대해 발전경제학에서 말하는 외형적인 수준의 이 경제지표가 개개인의 시민의 삶의 수준과 만족도를 설명하기에는 이미 충분한 한계를 보여왔으며, “이러한 발전경제학으로 얻게 되는 수출 증대와 투자에 따른 이익이 우선적으로 엘리트와 기득권들에게 먼저 제공된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우리가 흔히 말해온 신자유주의 시대의 낙수 효과가 이와 다를바 없는 개념이라고 평가하면서 외부에는 ‘잠재능력’이라는 말로도 해석되는 이 ‘역량 접근법’을 앞선 새로운 해석의 수단으로 삼아 경제와 정치, 문화, 사회의 측면에서 유용한 도구로 다루고 있습니다.

즉, 여기에는 핵심적인 10대 역량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 신체건강, 신체보전, ‘감각,상상,사고’ , 감정, 실천이성, 관계 인간 이외의 종, 놀이, 환경 통제 등으로 열거하고 “위의 10대 항목을 모든 시민에게 최저 수준 이상으로 광범위하게 보장해줘야 한다”고 누스바움은 주장합니다. 단순하게만 보면 외적인 경제 성장의 지표인 GDP 접근법을 한 국가의 외형적인 자료가 그 국가의 시민들의 삶을 온전히 분석하고 측정하기란 어렵고, 역량 접근법을 포함해 중요한 점은 “각각의 삶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지표로 담아낼 수 있는가”에 대한 좀더 가까운 대답이라고 볼 수도 있어 보입니다. 저 역시도 전자인 GDP 접근법의 한계는 분명하다고 느끼고 있고 근래 읽었던 다이앤 코일의 ‘GDP 사용설명서’에서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듯이 그 한계는 익히 명확해 보입니다.

다만, 누스바움은 남편으로부터 시작해 사회로부터 외면받아온 인도의 한 여성을 통해 이 역량 접근법을 새롭게 조명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오늘날 인도가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이긴 하지만 아직도 카스트 제도의 잔재가 너무나 뿌리깊게 남아있고 인도 국민의 최고의 가치인 힌두교에 따른 율법 체제로 인도가 범상한 민주주의 국가로 인식되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인도 여성의 뿌리깊은 차별과 외면이 인도 민주주의 제도의 불완전한 완비 때문이 아니라 앞서 제가 설명한 바와 같이 전통적이라면 전통적이고, 비타협적인 관습법이 지배하는 현상황이 제거되지 않은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부분은 인도 정치권과 시민이 해결해야 되는 문제인데, 이걸 또 그녀가 말한대로 과거 영국 식민지 치하의 잔재로서만 해석하는 것도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사회계약론에 따른 사회보장의 의미로서 이 ‘역량’을 추적하고 공리주의를 비롯한 문화적인 상대성, 정치체제적인 차이 등의 다면적인 차원의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꽤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이들 가운데 “공리주의 접근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계층이 극심한 고통을 겪더라도 대다수가 잘살면 국가 정책의 평균 효용이나 총효용은 높아질 수 있다고 보는 것”에 비판을 가하고 있고 이를 통해 복지와 사회보장과 관련된 무분별한 애매한 공리주의적 해석에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도 매우 중요해 보였습니다. 더욱이 “핵심 역량과 국가의 기본 정치구조로서의 정부 사이에는 개념적인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과, “오늘날 비정부기구가 정직하고 효율적이고 현명하다 해도 민주주의를 웃도는 책임을 지지는 못한다는 것과 시민 전체가 아니라 시민 개개인을 위해 선을 증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은 복지와 최소한의 사회보장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이론적 근거로 인용될만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품위있는 사회라면 부의 추구를 목표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정치사회학이 미시로서도 거시로서도 많은 발전을 거듭해 왔음에도 사회보장과 사회안정장치와 관련해서는 개인의 자유의 침범 내지는 다른 사람의 권리 약탈로까지 배척당해 왔는데요. 우리가 이념적 구분으로 이러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소모적인 논쟁으로 지금까지 이끌어 왔던 것을 많은 시민들이 자신 스스로의 삶을 위해 깊은 공감대를 확장시켜 나가야만 한다고 또한 누스바움의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국내에서 누스바움은 일부 남성들에 의해 협소한 여성학 내지는 페미니즘 운동가로 오역되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인식은 너무 성급하고 한정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사회 정의와 인간다운 삶, 사회 보장과 같은 실제적인 시민들 삶의 증진에 높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을 인지하고 이 글을 보신다면 앞선 주장들에 대해 큰 도움을 받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역량접근법은 무엇이 사회적 선인지 알려주는 포괄적 견해가 아니라 구체적인 권리에 관한 부분적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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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이후 (반양장) - 제도와 전략적 억제 그리고 전후의 질서구축
G. 존 아이켄베리 지음, 강승훈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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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정치학과 국제관계론을 가르치고 있는 G. 존 아이켄베리는 미 국무부와 브루킹스 연구소를 거쳐 현재 로버트 코헤인과 함께 많은 인용과 관심을 받고 있는 국제정치학자입니다. 저는 아이켄베리를 과거 한스 모게소와 같은 비슷한 인식을 가진 학자로 이해하고 있는데요. 다만 약간 상이한 점은 모겐소와는 달리 아이켄베리는 국제환경과 국제정치에 대해 다소 자유주의적 시각에 따른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헨리 키신저와도 사뭇 비교되는 점이라 볼 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 ‘승리 이후’라는 글은 바로 제도와 타협을 통한 세력균형적 억제와 전후 질서를 만들기 위한 역사와 이론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고 또 이러한 가치들이 세계 안정과 평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는 것도 꽤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글 도입에 관련하여 아이켄베리가 논의하고 있는 여러 국제정치질서 즉, 세력균형과 패권, 입헌형태 등을 소개하고 최종적으로 전후질서에 대한 안정적인 요건을 구축해 특히, 제도적으로는 일종의 입헌주의적 형태로서 여기에 참여하는 국가들의 공통적인 합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패권에 준하는 정치 주도국을 따라 포용 내지는 추종국들의 관계를 현실주의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적극적 이상주의의 모습과 같이 적절한 체계로 설명하고자 하는 아이켄베리의 의도가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비엔나 체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베르사유 체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테헤란과 얄타 회담에서의 전후 논의 및 냉전 종식 이후 세계의 체제 전환적 구축을 역사가 가미된 국제정치적 분석을 하고 있는데요. 이는 어떻게 하면 불협을 넘어 각국의 억제와 질서를 재정립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실질적인 방안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혼란한 전후의 질서를 정상적으로 바로잡기 위해 주도국의 역할과 그만의 행적들을 되짚어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유용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1.2차 양차대전 이후의 질서 구축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이해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는 점도 분명히 이 책의 장점입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전 유럽의 질서와 관련하여 특히 오스트리아와 영국은 전쟁으로 종결될 것이 아니라 당시 나폴레옹을 통한 합의에 준하는 종식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역사는 그것과는 다르게 나폴레옹이 두 차례의 좌절을 겪고 나서야 소위 ‘구체제의 회귀’라는 비엔나 체제가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제일의 혹은 세계 제일의 패권국이었던 영국은 자신들이 유럽에 물리적인 군을 파견하면서까지 질서 구축에 나서기는 원하지 않았고, 다만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에 이르는 동맹을 통해 이후 이들 국가의 야심과 욕망을 적절하게 제어하고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노력을 영국 스스로 기울여 왔다고 서술합니다. 즉, 이것은 점차 드러나고 있던 러시아 황제의 팽창주의적 영토 야욕에 이르러 적절히 개입이 되었고 이어 프랑스가 이 4국 동맹에 참여함으로써 이 전제주의 동맹이 결과적으로 전후 질서에 불안전하지만 도움이 되었다고 아이켄베리는 다소 제한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에 프랑스가 비스마르크에 굴욕을 당함으로써 이러한 체제는 그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1차대전 이후, 베르사유 체제는 “미국이 유럽에 제공하는 자산이 아니라 독일과 조기 단독강화를 맺을지 모른다는 유럽국가들의 우려”가 전제된 꽤 의심스런 질서 체제였습니다. 더욱이 우드로 윌슨의 그 끝도 모를 이상주의적 견해와 희망적인 에단은 전후 복구와 질서를 위해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수동적인 합의는 이끌어 냈지만 윌슨의 세계연맹의 그림, 자결주의와 같은 당장 실현하기 힘든 정치적 입장이 결국 느슨한 질서 유지에 그쳐 후에 독일의 굴욕에 따른 파탄을 간접적으로 초래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윌슨은 스스로 “민주주의 세계혁명과 제도적 약속이행을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다소 뜬금없는 이상주의적 태도와 목적을 갖고 있었고, 반대로 “유럽의 동맹국가들은 미국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새로운 정세를 인식했으며, 전후의 경제부흥을 촉진하고 유럽 대륙에서 대국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미국이 전후 유럽에 계속 관여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들의 희망대로 미국의 보증은 다소 애매했는데 그것의 전제 조건이 “강화에 참여하는 유럽 국가들이 민주주의와 주권재민의 원칙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차대전 이후 각국의 황제를 비롯한 전제정권이 강제로 붕괴하고 그 짧은 시기에 민주주의적 국가체제를 이행하기란 사실상 힘들었습니다. 특히나 동유럽 부근은 민족자결적 원칙에 따라 “민족국가들”로 쪼개져 이들 신생국가들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우드로 윌슨이 주도하는 유럽 질서는 마찬가지로 한계가 명백했습니다

1차대전 이후의 전후체제가 교훈이 되었는지 2차대전 이후 처칠의 영국은 미국의 직접적인 유럽에 대한 지속적 개입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처칠과 루즈벨트의 커넥션은 대체로 견고했고, 독일을 무장해제 시킨 후에 서유럽 전체에 대한 제도적 질서에 영국이 대체로 동의함으로써 ‘대서양 헌장’과 같은 전제 조건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영국의 제국주의적 질서에 미련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미국의 계획은 전후 질서가 민주주의적 입헌 질서에 따른 체계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처칠이 총선에서 패배하지 않고 퇴장하지 않았더라도 이러한 처칠의 숨겨진 희망은 아마도 달성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미국-(부분적인) 서유럽 관계의 대서양 동맹이 후에 NATO로 연결되었고 전후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영미 양국의 협력은 긍정적이었습니다.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은 색다른 전후구축을 탄생시켰는데 최종적으로 소련과의 냉전에 따른 봉쇄질서와 세력균형과 핵억지, 정치 및 이데올로기의 경쟁이 수반되는 혼재 양상의 체제였습니다. 이 2차대전 이후의 구축 체제는 미국과 서유럽을 경제 및 군사로서 잠정적인 하나로 묶고, 미국이 세계 패권국으로서 원만한 민주주의적 추종국들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세계 시스템의 기초를 마련한 것이 큰 기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켄베리도 인정하듯이 미국 스스로 패권에 의한 강요를 서유럽 동맹국에 가하지 않음으로 이어지는 냉전시기에도 이들 자유진영의 노골적인 불협화음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모델이 과거와는 달리 패권국의 새로운 형태였지만, 거대한 민주주의 국가, 뒤를 따르는 제도적 민주주의 국가들의 자유진영 연합이 물론 산적한 문제도 있었지만 세계 안정에 기여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냉전 이후의 상황도 프랜시스 후쿠야마식의 극적인 장면은 아니었지만 러시아에 맞선 NATO체제의 확대, 통일 독일의 문제 그리고 경제적으로 NAFTA와 APEC의 출범이 이념 대결의 끝의 혼란을 종식 시키는데 기여했고 특히 NATO의 확대에 따른 러시아의 묵인은 후에 러시아의 양보로까지 여겨지고 러시아 측에서는 이를 미국과 서유럽의 술책으로 받아들여지는 정도의 러시아를 향한 신대결구도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현재로서도 NATO가 러시아를 향하고 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주의 및 공업국가 연합이 오늘날 중국의 부상에 직면해서도 힘의 분배가 적절하게 이뤄지고 있는 셈입니다. 바로 그것의 기반이 아마도 미국의 전통주의적 고립추구를 제어하고 유럽과 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개입이 바로 미국 이익에 기반한다는 의견을 확대시킨 결과로도 또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아이켄베리는 이러한 결과의 배경에는 중요한 ‘제도적 합의’ 및 민주주의 국가들간에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선험의 인식을 중요하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패권의 지위에 이른 미국이 스스로 민주주의 체제를 신봉하고 있고 그러한 바탕으로 각국 간의 관계에서 제도와 입헌적 가치 체계를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미국 패권의 아마도 생산적인 부분일 겁니다. 현실적으로도 미국이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경제적으로 비상한 권위주의 체제 국가들의 대두에도 일정의 제어력이 되지 않을까 감히 예측해봅니다.

과거 소련은 거의 비등한 동유럽 세력을 갖고서도 미국이 주도하는 서유럽 및 대서양 민주주의 연합에 대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념적 대결이 경제적 부흥의 차이로 종식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공업국가의 결합이라는 우월성이 안보와 경제적 측면에서 서로간의 제도적 합의를 전제하게 되었고 꼭 직접적인 위압과 물리력이 아닌 대화와 타협으로 이러한 안정적 질서 체계의 번영을 보장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이 책 자체의 기본 골자가 기존 체제의 신흥 주도국의 정치적 개연성 등을 다루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앞선 나폴레옹 전후 및 1차대전의 전후 체제의 완만한 최종적 실패가 미국으로 대변되는 신흥 주도국의 학습효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안정적인 세력 균형을 통한 질서 안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이것을 어떤식으로 달성하느냐가 과거에 중요했고 꼭 일련의 일어나는 주도국에 의한 약간의 불확실성의 동반되는 안정이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성공적인 주변 억제와 질서 구축이 그 자체 만으로도 미국의 이익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2차대전 중 독일과 일본의 공동경영권의 자급자족 권역을 미국이 심각한 위협으로 여겼듯이, 오늘날의 자유시장 경제 기조와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발전이 여러 국가들에게 혜택이 되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물론 미국의 과도한 냉전적 안보를 위한 불법적이고 불행한 타국의 개입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 점은 망각하지 말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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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빈 2022-05-09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제정치학자 한스 모겐소와 미 재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모겐소 주니어를 혼동하신 건 아닌지요.

베터라이프 2022-05-10 19:47   좋아요 0 | URL
오 감사합니다 한스 모겐소인데 오타였네요. 전적으로 저의 착오입니다. 곧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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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출신으로 영국의 요크 대학과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에서 수학해 정치학 및 역사학 학위를 취득해 현재 캐나다에서 방송을 통한 정치 토론과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실상을 알리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자크 파월의 가히 ‘기념비적인’ 저술,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를 일독했습니다. 이 책은 2002년경에 처음 출간된 뒤, 2015년에 개정판으로 재출간이 되었는데요. 개정 영문판 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2015년판을 번역 출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출판을 맡은 오월의봄의 ‘질문의 책’ 이라는 연작 시리즈 중에 하나이고, 더불어 역자인 윤태준 번역가의 나무랄데 없는 번역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자크 파월의 이 글은 실로 제2차 세계대전의 놀라운 관점이 담겨져 있습니다. 저자 스스로는 일종의 ‘수정주의적’ 입장이라는 자기 겸손으로 평가하는데요. 이것은 글 서두에 “미국 시민들 역시 대다수가 이 전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지 못했다”고 언급하며 종래의 ‘민주주의가 전체주의라는 악을 격멸하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2차대전의 슬로건이 본질의 만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한 것으로 “서사의 흐름대로 운명처럼 미국이 이 유럽의 대재앙에 구원자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미국의 이익에 따라 매우 치밀하게 준비하고 뛰어든 전쟁이라 저자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실 얼마전에 이 곳을 통해 소개한 제임스 Q. 위트먼의 ‘히틀러의 모델, 미국’에서도 당시 헨리 포드와 같은 미국 기업 집단이 히틀러와 파시즘에 얼마나 열광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미국의 기업가들은 히틀러의 독일이 소비에트의 스탈린 모델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에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일견 파악이 되지마자 크게 안심한 것으로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히틀러의 오판으로 비롯된 나치의 미국에 대한 선전 포고 이후에서야 파시즘과 히틀러에 대한 전면적인 대응에 나섰고, 이러한 비슷한 태도는 전후 프랑스의 독재자 드골에 대한 승인에 미온적으로 나섰던 것과는 달리 우호적 판단 내지는 판단 보류에 가까웠습니다. 이것은 숨막히게 돌아가는 당시 유럽 전선에 독일 기업과 합작 또는 투자와 같은 형태로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포드와 GE와 같은 기업들과 정치 엘리트들이 다소 나치 독일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보인 것과 같습니다. 이에 헨리 포드는 “연합군도 추축군도 (전쟁에) 이기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 했는데, 그는 일전에 히틀러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이력으로 이렇게 양자 사이에 저울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유럽의 대전이 미국의 대공황을 탈출하는데 엄청난 기여를 했고 그것을 몸소 체험한 미국의 많은 기업인들이 이런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 태도를 보인 연유이기도 합니다.

다른 새로운 관점중에 하나인 대 일본 참전과 관련해서도, 당시 미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일본에 대한 지극한 인종주의적 태도로 떠오르는 이 신흥국이 동남아시아의 자원을 발아래 두고 급기야 그것을 약탈하려고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며, 매우 확실하게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루즈벨트가 일본의 진주만 폭격을 유인했는지 안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네덜란드와 손잡고 일본의 원유 등과 같은 중요 자원 공급을 막은데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 작센의 주도인 드레스덴에 대한 무차별적인 영미 항공기의 폭격과 관련해서도 이들 소위 ‘정의로운’ 연합군이 독일 민간인을 상대로 75만발의 소이탄을 투하하고 30만명의 희생자를 내게 만든 것이 사실상, 스탈린과 소비에트에 대한 경고였다는 저자의 통렬한 분석과 독일군이 점차 괴멸하고 있던 시점에서 서부 전선의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내 이 잉여 독일군 부대를 재무장 시켜 스탈린의 소비에트를 치는데 이용하려고 했다는 근거와 그 자료들은 이 드레스덴의 재앙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탈리아와 그리스로 진격한 연합군이 당시 시민들이 지지하던 정부를 제외시키고 제2의 파시즘 정부를 노골적으로 세운 것은 후에 스탈린에게 학습효과를 만들어 그와 같은 개입으로 거의 동일하게 동유럽에 써먹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서방측이 흔히 말하는 ‘얄타 트라우마’가 회자되게 되는데, 이에 자크 파월은 “영악한 스탈린이 크림반도의 휴양지에서 그의 서방 동지들로부터 모든 종류의 안보를 쥐어짜냈다는 혐의는 전적으로 거짓이다”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선 이유와 함께 이미 스탈린은 독일과 베를린에 대한 양보, 인접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연합국의 권리도 인정했고 원칙적으로는 폴란드와 체코에 민주 정부를 세우는 데 동의까지 했습니다. 더욱이 당시 미국은 트루먼 행정부의 그 즈음 개발된 원자폭탄을 이용하여 스탈린과 소비에트에 대한 협박과 같은 ‘원자외교’를 행했고 이 모든것은 대전 중 동맹이었던 관계에 태세를 바꿔 적대를 시작한 것으로 이 부분에 대한 어떠한 당위성을 제시하는 것은 무리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보이는 거의 대부분의 논점은 나라와 나라간의 관계나 국제 그룹의 외교가 절대 낭만이나 이상주의적 품격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다만 이익과 그를 보장하는 술수들로 채워져 있는 것임은 자명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단순히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것으로 포장하는 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결과로 비추어 질 수 있습니다.

이후 시작된 기나긴 냉전의 시기는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의 정치 엘리트들이 파시즘에 호의적이었지만, 걔급 혁명의 가능성 때문에 스탈린의 소비에트를 적대로 몰아갔고, 이러한 매커니즘은 뒤이어 나오는 매카시즘과 자유민주주의의 자연스런 대적의 상대를 만듦으로써 분명하게도 그에 따른 숱한 과를 초래한 것은 부인할 수없을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미국이 복지국가가 되지 못한 것은 핵심 권력들이 사회적 개혁의 압력을 피할 수 있는 방법, 즉 냉전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며, 이 점은 미국 시민의 타고난 개인주의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고 분석합니다. 정말 대단한 통찰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이 냉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미 시작했으며, 20세기의 거의 대부분을 냉전으로 인한 명과 암이 수없이 혼재되는 세계의 편린들로 채우게 됩니다.

책의 맨 처음 부분에서 저자, 자크 파월은 종래의 2차대전에 대한 수정주의적 입장이라는 것을 다소 애매하게 밝히면서 여기에 인용된 근거 자료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나온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는 이 글 자체가 구조적으로도 그리고 학문적 연계의 측면에서도 치밀한 대응을 하고 있고, 각각의 주장들이 터무니 없거나 과한 인용이 아니라 그 시대의 시대상을 정확히 조명해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더불어 단순한 어느 사건의 전환된 시각이 아니라 두루두루 정확한 근거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2차대전사와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시에 우리는 어쩌면 이 글로 인한 적잖은 불편함을 목도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의로 포장된 전쟁의 진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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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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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세계에 알려진 슬로베니아 인으로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자크 라캉과 관련하여 인정받는 권위자이며, 세계 철학계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흔히 말하자면 ‘팝스타’와 같은 인기의 소유자 슬라보예 지젝의 ‘멈춰라, 생각하라’를 일독했습니다. 저에게 지젝의 서평은 이번이 3번째인데요. 저는 간혹 지젝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경희대 이택광 교수가 같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아마 두 사람에게 학문적 유사성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아주셨음 좋겠군요. 2012년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The Year Of Dreaming Dangerously 로서, 번역 출간된 책의 제목인 ‘멈춰라, 생각하라’의 부제가 바로 이 원제를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젝의 이 책은 크게 10장의 논제로 이뤄져 있습니다. 글의 성격이 대체로 문화비평적인 색채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나, 특히 오늘날 세계의 정치사회적인 사건들의 분석과 비판도 분량을 할애에 담고 있습니다. 글 서두에 지젝은 독자들에게 ‘인식적 지도를 제공’하고자 하는 작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지젝에게 인식적 지도라는 것은 명백한 것으로 대중들이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현실에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정치사회적 파열현상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대처하기를 바라는 마음일텐데요. 여기에는 지젝의 신자유주의의 비판과 서구의 소위 민주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의 어김없는 비판의 논조를 가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논의들은 “무엇보다도 현재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거스르며 맞서는 행위”이며, 이런 정치경제적 지배이데올로기가 시민의 선택을 제공하는 것으로 포장 되어 있지만, 결국 이 선택은 기존의 체계의 복종하더가, 아니면 자기 희생적 폭력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모순을 안고 있다고 그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모순으로 시작하고 있는데요. 첫번째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저지하려는 움직임, 두번째는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세계화가 정작 ‘세계’없는 세계화라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이란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등으로 이어진 ‘아랍의 봄’ 내지는 ‘아랍의 시민 혁명’과 관련해서 지젝은 그들이 자유와 평등을 위해 행동에 나섰으나,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과 관련하여 수많은 서구 자유주의자들은 너무나 물리적인 수단으로 자유와 평등을 쟁취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의 주장들에 대해 “서구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은 숨이 막힐 정도이다”라고 일갈합니다. 무바라크 정권에 대해 이해 관계를 갖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사실상 이집트의 무바라크 독재 정권의 전복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은 바로 이러한 것을 설명한다고 행각합니다. 이러한 유럽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은 오늘날 유럽의 난민 문제와도 동일한 인식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자체를 ‘현실주의’로 포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저로서도 부정적인 판단이 듭니다.

4장의 ‘사악한 민족주의의 귀환’이라는 부분은 실로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헝가리 정치의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정치적 이행을 다루고 있는데요. 다문화주의와 이민주의를 배격하고 자신들의 기득권과 민족주의적 체제 고수를 위한 정치 작업들이 이어지고 이에 헝가리에도 ‘자유의 방송’이 필요하다는 점은 의미 심장합니다. 유럽의 자유와 민주주의 역사에 반대의 큰 획을 긋는 이 헝가리의 사례는 이들이 파시즘으로 이르는 길을 닦고 있다고 볼 수는 없으나 매우 유념하게 봐야 하는 부분이며, 이 점은 어쩌면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정치적 현실과 흡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유럽의 반이민주의는 위험한 수준인데, 이들의 반이민주의 및 인종주의가 ‘극우 포퓰리즘’을 초래하고 있으며, 마치 미국의 티파티 운동을 빗대어 말한 것 같은 지젝의 표현인 ‘새로운 기독교 근본주의 포퓰리즘’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면적으로 기존의 사회와 정치를 붕괴시키는 이 포퓰리즘을 과거 파시즘과 동일하게 위험하게 인식하고 있는 지젝의 평가는 그래서 매우 합리적입니다.

앞선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의 사례에서 아랍의 봄 당시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다소 지지하거나 자신들의 이익에 유리하다고 봤던 것은 유대인들만의 배타적인 현재 민족주의가 미국과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과 시민사회의 비판을 ‘반유대주의’로 몰고 가는 것처럼 우리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편협한 가치체계에 물들어 있는지 여실히 이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문제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관여가 만들어낸 것이지만 현재의 팔레스타인들의 거의 인종 차별과 다름없는 분리 정책은 실로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보이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지젝은 이스라엘의 래즈비언 시위대와 팔레스타인 시위대들이 만나서 서로 포옹을 하고 위로 했던 것을 큰 인식의 전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이 이러한 목소리에 귀기울일 것인지는 회의적이나 전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러한 경각심을 전하는데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뉴욕 발 세계금융위기로 그 ‘정합성’에 의구심을 불러 일으킨 신자유주의는 지젝의 언급대로 “미국에는 이미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있으며, 부자들의 부가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상실될 위험에 처하면 사회가 나서서 막아줘야 한다”고 희화화 하고 있는데요. 그는 오늘날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모순과 폐해에 주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노골적인 암시”가 있다고 소개하며 이 신자유주의적 정책 자체는 사회안전망을 비롯한 국가의 최소한의 정책에 노골적으로 적대하는 등의 입장을 보이고, 지그문트 바우만의 입을 빌리자면 “타인의 상황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들”은 바로 이 신자유주의자들을 빗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신자유’가 타인의 고통이 비롯되는 최소한의 보장 장치를 박탈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모두가 이에 나서야 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여기에 인용된 바우만의 일침도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것도 이와 같습니다. 더불어 “포퓰리즘적 보수주의자들의 주된 경제적 요구는 규제적 개입의 재원을 마련하자고 열심히 일하는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강력한 국가를 타도하라는 것”이며, 이는 많은 국민들의 세금 부과를 담보로 부유층의 증세는 뒷전으로 밀어버리는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자들의 경제적 포퓰리즘과 동일한 시각입니다.

끝으로 자본주의의 번영이 오로지 한길이라고 주입되는 세상에 이 건강한 자본주의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은 시민 사회의 연대와 공감, 행동일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강요된 선택을 주입시키고 더욱이 점차 확대되는 포퓰리즘의 위기 시대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모두를 지켜내기 위해 앞으로도 시민들의 역할과 직접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지젝의 말대로 각각의 시민 내지는 대중이 현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그 이후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한 성찰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다른 시민들과 연대를 함으로써 이러한 과정의 ‘위대한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진정한 ‘유토피아’의 길에 한걸음 내딛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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