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하버드 대 정치학과 교수로서 지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직후,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칼럼 ‘트럼프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가?’ 는 많은 조회수를 올리면서 큰 이슈가 된 바가 있습니다. 이에 두 저자는 출판사의 요청을 받아 ‘How Democracies Die’ 라는 기획물이 탄생하게 되었는데요. 이것은 이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원제이기도 합니다.

여기의 두 사람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를 부른 원인에 대해 포퓰리즘-즉, 대중중의 혹은 대중인기영합주의 등으로 해석되는-입니다. 오래전 폴 태가트는 포퓰리즘을 정의한 바 있습니다. 엘리트 정치 체제를 불신하면서 기존의 모든 체제를 부정하고 어떠한 가치주의 없이 대중의 인기에 영합해 탄생하는 정치 체제 혹은 정치가를 뜻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포퓰리즘은 다원주의하고는 확연히 다르고 더욱이 이 포퓰리스트가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독재가로 변신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학자들이 민주주의의 불완정성을 끄집어 내기 위해 자주 써먹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권위주의가 민주주의보다 월등하다고 믿는 것일텐데요. 여기선 이를 더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런 포퓰리즘의 대표적 예가 현재 미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일 것입니다. 두 저자들도 동일한 관점으로 트럼프의 출현을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공화당에 책임이 있다고 두 사람은 판단하고 있는데요. 대의적인 측면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당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을 접고 민주당의 힐러리를 지지했어야 했는데 공화당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포함한 다수 인사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치 엘리트 집단, 특히 정당이 사회적 거름망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가에 민주주의가 달려있고, 정당은 민주주의의 문지기”라고 말하는 것에서 미국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이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인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 트럼프의 출현은 블루 칼라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미국의 종교적 보수주의 운동인 티파티의 암묵적 승인까지 받게 되어 대선에서 파란을 일으켰는데요. 사실 그때의 상황은 미국인들의 현 정치 불신이 극에 달했고, 트럼프 대통령의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지 논란을 비롯한 유언비어 주장인 버서 논란과 힐러리의 이메일 사건을 ‘구속 주장’으로 확대시킨 불합리한 정치적 음모가 합리적 선택을 구축해버린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트럼프 와 이 트럼프 현상이 분명 포퓰리즘과 다름 없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스스로 인종차별주의자이면서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을 나치에 비유한다거나 아직도 오바마 전 대통령의 출생 논란을 주장하고, 오바마 케어와 관련된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고 종전의 3국 이란 핵협상을 부정한다던가 하는 기존의 정치인에게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기존의 체제와 상식을 존중하지 않는 행동에 거침이 없습니다.

미국은 건국 이래로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이 당시의 전제 왕권을 비롯한 전통주의적 통치로부터 안전한 모든 이들의 공화주의 정치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삼권의 안정과 견제로부터 견고한 헌법 체제 등 초기의 미국 정치 체제가 모든 미국 시민들이 이를 존중하고 정치인들도 이런 전통을 받드는 균형적인 발전이 있어 왔는데요. 저자들도 이를 “미국 민주주의의 버팀목은 헌법 뿐만 아니라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이 보이지 않게 작동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며 이것이 미국 민주주의의 특수성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런 보이지 않는 양자의 체계가 잘 작동해 왔으나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를 거치면서 민주 공화 양당이 서로를 같이 나아가는 경쟁자로 더 이상 여기지 않고 극한의 정쟁을 벌여 왔던 것으로 이것이 상호 존중의 틀을 깨는 행위라 이에 간한 여러 사례를 제시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는 이 점이 극심했는데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아직도 낙태 문제에 보수적인 공화당 인사들이 흑인 대통령을 맞으면서도 기존의 가치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연방 정부를 셧다운 시키고, 오바마의 여러 개혁 법안을 막아내는 등의 행위들이 낙태와 흑인에 대한 인식, 종교 등 뿌리깊은 기존의 선입견 등이 배경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정권 지우기에 강력하게 나선 현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비리 수사와 관련하여 “독립적인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사법부를 공격한 것은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는 나라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행동이었다”라고 분석하며, 투표를 억제하고 민주주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나은 공정 선거 대통령 자문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트럼프의 국제외교부분를 제외하더라도 국내 정치에 있어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책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앞으로 더 어두운 전망으로서 트럼프와 공화당이 백인 중심의 정치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는 등의 ‘인종적 민주주의’로 나아갈지도 모르는 우려는 매우 심각해 보였고 앞으로 미국의 중간선거와 다음 있을 대선 기간까지의 미국의 정치적 행보를 천천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미국의 반지성주의가 현실에서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키는 기존의 이념을 부정하는 종교적 세속주의와 관련이 깊다고 말해왔고, 저는 여기에 이 반지성주의와 포퓰리즘은 거의 한 쌍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반지성주의와 포퓰리즘 양자는 기존의 지식 체계와 정치사회적 엘리트들을 부정 및 불신하며 반지성주의가 시민에 대한 지식의 습득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포퓰리즘은 정치적 각성이 없는 대중들의 단순한 이해 관계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양 자 모두 반사회적이며 반정치적이라고 여겨집니다. 결국 해결책은 투표권을 갖고 있는 시민들이 스스로 지식의 습득과 성찰, 정치적 각오 등을 새롭게 하여 이러한 반정치인들이 제외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겠는데요. 이러한 선동 정치인들이 설 땅을 없애는 것이 앞으로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저의 입장과 관련하여 지난 프랑스 2017년 대선에서 르펜과 대결한 중도파의 후보인 마크롱을 시민들이 뽑은 것이 이러한 측면의 정치 행동이 아닐까 판단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