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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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쇄 다기(多岐)한 조선 당파의 실상, 학파가 곧 당파였던 그들의 사정(학파가 곧 당파였다는 말은 저자의 말이지만 저는 조선의 학파는 당파이었음은 물론 종파宗派적이기까지 했다고 생각합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 주자와 그가 체계화한 성리학의 실상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책이란 생각을 하며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었습니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이름이 나오는 전설적인 인물이라지요. 어쩌면 전설적이라기보다 신화적이라 해야 마땅할지 모르는 것은 그가 공자나 주자처럼 송자로 불렸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조선과 시공간적으로 먼 13세기 남송의 학자인 주자의 학문을 조종(祖宗)으로 삼은 송시열로서는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겠지요. 저자는 자신에게 송시열은 호오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 탐구의 대상이라 말합니다.

번쇄다기한 역사책을 쉽게 읽는 마법의 지름길 같은 것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리학이란 큰 틀로 사태를 보는 것도 의미 있는 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공자의 말씀보다 공자에 대한 주희의 해석을 절대시한 송시열과, 공맹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윤휴의 대립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잘 알다시피 공자는 주나라를 본받아야 할 나라로 보았습니다. 송시열은 주나라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흥미롭게도 주나라와 조선을 이어준 것이 공자와 주자의 유교(장인용 지음 '주나라와 조선' 7 페이지)였지요. 저자는 북벌주의자라 할 효종의 죽음으로 조선은 송시열 등이 주도하는 극심한 문치의 나라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151 페이지) 이 부분에서 말해야 하는 사람 역시 송시열입니다.

그는 겉으로는 북벌을 주장했지만 실상은 효종의 북벌론에 반대했는데 그 이론적 근거가 되어준 것이 바로 주희의 이론이었지요. 송시열은 숙종대에 이르러 종묘에 효종의 신주를 영원히 모시자고 주장함으로써 예송논쟁 때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공격을 받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잡고 효종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확실히 밝혀두려 했지요.(330 페이지)

저자는 이를 계책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제가 생각한 것은 자기부정이란 말입니다. 광해군이 법적인 모후였던 인목대비에게 불효했다는 이유로 반정을 일으킨 인조(와 그 일파)가 소현세자의 빈인 며느리 강빈을 부친상에 가지 못하게 한 것은 저자의 말대로 심각한 자기부정(63 페이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들은 명분을 중시해 명을 받들고 청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두 차례의 호란을 자초했지요. 물론 선조의 무능과 시대착오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송이 칭기즈칸이 금을 멸망시키고 자신들을 압박해 오는 난세에 명분과 절의(節義)를 중시한 성리학을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대안으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맹난자 지음 '주역에게 길을 묻다' 62 페이지)

효종이 일찍 죽지 않고 송시열이 일찍 죽어 북벌이 현실화되었다면 조선은 어떤 상황을 맞았을까요? 송시열이 받아들여 정치에 적용시키려한 성리학은 너무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통해 새로 익힌 단어들은 많습니다. 인견(引見), 입대(入對), 봉사(封事) 등등...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으며 지혜로 은나라를 상대한 주나라(우궁좌묘가 아닌 궁궐을 중심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을 두는 좌묘우사는 이 주나라의 지혜의 산물이지요.), 명과 청 사이에서 현실외교를 펼친 광해군 vs 명분에 치우쳐 나라를 위기에 빠트린 선조, 주자 유일주의로 나라를 경직과 혼란의 당쟁으로 몰고간 송시열 등의 대립구도를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분명한 시사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자는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는다는 주이불비(周而不比)란 말로 송시열과 그 일파를 비판합니다. 송시열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니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였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고 이는 챽의 제목이기도 하지요.

송시열이 그토록 닮고자 했던 주희(朱熹)가 심혈을 기울여 공부한 주역은 변화와 흐름을 중시하는 학문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변화에 민감했던 주희는 자신의 이름 중 한 글자인 밝을 희(熹) 즉 밝음을 어두울 회자가 들어 있는 회암(晦庵)이란 호로 중화하려 했지요.

잘 알다시피 주역(周易)의 역은 변화는 물론 그 변화를 낳는 이법(理法) 자체를 의미합니다. 송시열은 변화가 아닌 불변의 이법만을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수선한 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상황과 인물들에 좀 더 익숙해지면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이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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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이다. 마침 오늘은 일요일이다. 일월 일일 일요일이란 말을 조용히 되뇌어본다. 만트라(진언) 같이 느껴지는 말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결국 흘러갈 것이다. 문제는 정체(停滯)이다. 2016년은 문화유산해설사 공부를 위해 그 어느 해보다 서울을 많이 찾은 해이다. 

 

서울은 그 유래에 있어서 몇 가지 시나리오를 갖는다. 어떤 것이 정설인지 관계없이 나는 지금의 서울이란 말이 좋다. 시인 릴케는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는 말('말테의 수기')을 했지만 적어도 공부를 위해 찾는 서울은 참 좋다.

 

전쟁기념관, 국립중앙박물관, 경복궁, 고궁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남산한옥마을, 북촌, 선정릉, 한양도성 등을 수업을 통해 만났고 개인적으로 덕수궁(이중섭전), 세종문화회관(호안 미로전) 등을 찾았다. 다시 진언 같은 일월 일일 일요일이란 말을 되뇌며 나의 2017년이 그 부드러운 유음(流音)처럼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흘러가길 기도해본다. 아니 그렇게 흐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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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7-01-01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록 사람이 그어놓고 만든 시간이긴 하지만, 2017년 한 해도 생각하신 일 모두 이루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구요 ㅎㅎ 저도 문화공연이나 전시 때문에 서울 가는데 참 좋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01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러시군요. 서울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되네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님도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 맞으시길 바랍니다...
 

 

CIA는 세계 3대 요리학교의 하나인 Culinary Institute of the America의 약자이다. 그곳에서 유학한 뒤 귀국해 요리와 미술을 주제로 칼럼을 쓰다가 그림책까지 내게 된 최지영. 요리와 그림의 관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내 관심은 그가 미술서를 탐독하고 갤러리를 제 집 드나들 듯 오가며 애정을 키워 나간 끝에 미술 교양서를 썼다는 사실에 닿아 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세잔이다. 그는 사과를 많이 그린 화가이다. 그런데 그를 보며 그림과 먹을 것의 연관성을 논할 수 있는지 자신하지는 못하겠다. 세잔은 사과를 먹을 것으로 보고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잔은 참으로 다양한 색깔의 사과들을 그렸다. 세잔은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사과들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각도를 형성하는 화폭에 공존하는 그림들을 그렸다.(이정우 지음 ‘세계의 모든 얼굴’ 94 페이지)

 

세잔은 모델들에게 심한 부동성(不動性)을 요구했다. 세잔은 초상화 하나를 그리는 데도 백 번도 넘게 모델을 세웠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그의 후기에는 주로 아내의 초상과 자화상이 주를 이룬다. 세잔은 모델에게 사과처럼 가만히 있을 것을 요구했다.(전영백 지음 ‘세잔의 사과’ 238 페이지) 이 글만 보면 세잔이 사과를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사람 대신으로 활용한 것으로 알겠지만 세잔에게 사과는 그런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다.

 

궁금한 것은 앞서 이야기한 ‘그림의 맛’의 저자(갤러리를 제 집 드나들 듯 오갔다는..)가 갤러리에서 어떤 걸음을 걸었을까, 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미술관 안에서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걸으라는 말을 했다.(요한 이데마 지음 ‘미술관 100% 활용법’ 25 페이지)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대상을 보기 위해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을까?

 

카뮈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관(棺)을 닫기 전 어머니와의 마지막 인사를 거절했다. 반면 세잔은 생트빅투아르산을, 자신의 예술적 뜻을 이해해주고 끊임없이 후원해주었던 어머니의 장례가 있던 날에도 찾았다.(전영백 지음 ‘세잔의 사과’ 375 페이지) 세잔은 그 산에 오래 머물려 그림을 그렸다. 차이가 있다면 ‘그림의 맛’의 저자는 그림을 공부한 것이고 세잔은 화가여서 한 군데 오래 머물러야 했다는 점이다.

 

세잔은 빛에 반사된 산이 아닌 산의 존재감 자체를 그리려 한 화가라 말해진다. 대상을 입체적으로 조합한 뒤 분할하는 등의 방법 등으로 그림으로써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산은 실재하는 생트빅투아르산과 사뭇 다른 모습이 되었다. 실재보다 그림을, 대상보다 표상을 중요하게 여긴 결과일 것이다. 그간 너무 소원(疎遠)했던 세잔을 통해 현대 미술로 진입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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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금요일 네 분께 경복궁 해설을 했다. 내가 치른 첫 full 해설이었다. 광명 출신의 네 여자 분인 그분들은 여중 또는 여고 동창들이었다. 그 분들 가운데 미술대학을 졸업한 분이 눈에 띄었다. 나이보다 10년 정도는 젊게 보이는, 모델을 해도 좋을 것 같은 그 분은 놀랍게도 최근 몇년간 마음 고생 때문에 얼굴이 많이 상한 것이라고 했다. 골프 때문에 팔꿈치가 아파 약을 복용하는 그 분을 보며 한 친구가 저 사람은 결혼 때문에 미술을 포기한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내가 그 분에게 골프에서 힘 빼는데 삼년이란 말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그 분은 사실이라 답했다. 그 분은 큰 근육을 쓰는 골프 때문에 그림의 섬세한 필치를 포기하게 되더라는 말도 했다. 힘 빼는데 삼년이란 말을 물은 것은 내가 힘을 뺀 스윙에 비유될 법한 쉬운 글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네 분들 가운데 문화 해설사가 있다. 그리고 올 여름 췌장 수술을 받은 분도 있다.

 

내년 봄 다시 경복궁 또는 다른 궁 해설을 통해 그 분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김소연 시인의 ‘목련 나무가 있던 골목‘이란 시가 생각나 해설사분께 보내 주었다. 나에게 들려주는 위로의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봄이 올 때까지 주먹을 펴진 않을 겁니다 내 주먹 안에/ 당신에게 줄 밥이 그릇그릇 가득합니다 뜸이 잘 들고 있/ 습니다 새 봄에 새 밥상을 차리겠습니다 마디마디 열리는/ 따뜻한 밥을 당신은 다아 받아먹으세요˝

 

모두 이 추운 겨울을 잘 보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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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2-31 0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벤투님^^ 올해 하반기는 경복궁 해설에 올인하셨던 거 같아요^^? 좋은 공부였을 거 같아요.
올한해 뜻하신 계획은 잘 마무리 되셨는지...
내년도 건강히 읽고 생각하며 쓰는 인간으로 또 함께 하길 바랍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벤투의스케치북 2016-12-31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새벽에 오셨네요. 올 한 해도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주신 agalma님! 말씀대로 경복궁에 많은 애정을 쏟았습니다.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어느 해보다도 최선을 다했다고 자평합니다. 감사합니다... agalna님도 건강,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은유와 마음 - 새로운 나를 만나는 은유이야기 수업
명법 지음 / 불광출판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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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 스님의 은유와 마음은 나무 비유가 참 많이 등장하는 책이다. 은유와 마음치료 프로그램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자신과 닮은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라고 요구했더니 외롭고 힘든 나무, 오죽(烏竹), 벚나무, 크기도 적당하고 보기 좋게 다듬어진 정원수(庭園樹), 벼랑 위의 소나무, 아무도 다가올 수 없는 벼랑에 홀로 선 낙락장송 등으로 자신들을 비유한 것이다. 물론 돈이 들어오고 나가지만 잔고가 항상 0원인 저금통, 멈춰버린 시계 등으로 자신을 비유하는 내담자(來談者)들도 있다.


명법 스님은 이야기치료는 삶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는 자각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며(60 페이지) 이 이야기치료는 과거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기존의 심리치료와 달리 과거에서 문제 해결의 자원을 찾는다고 덧붙인다.(61 페이지) 우리가 은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가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자신의 의도대로 은유를 조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은유는 결국 그런 모든 저항을 뚫고 휘몰아쳐서 진의를 드러내게 한다고 말하는 책 은유와 마음...


은유와, 그에 대비되는 환유에 대해 참고하기 위해 오규원 시인의 날 이미지와 시'를 오랜만에 다시 펴보았다.(은유와 마음이 은유를 적극 활용하는 책이라면 날 이미지와 시는 은유를 부정적으로 보는 책이다.) 지난 2007년 고인이 된 시인은 자신의 시 현상실험후박 나무 이래 1을 예로 들어 은유와 환유를 설명한다.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 늘 방황하는 기사/ 아이반호의/ 꿈 많은 말발굽쇠다./ 닳아빠진 인식의/ 길가/ 망명정부의 청사(廳舍)처럼/ 텅 빈/ 상상, 언어는/ 가끔 울리는/ 퇴직한 외교관댁의/ 초인종이다.란 시 현상실험에서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 늘 방황하는 기사, 아이반호의 꿈많은 말발굽쇠, 가끔 울리는 퇴직한 외교관댁의 초인종 등으로 대치된다.


이런 대치(은유와 마음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전환)가 바로 은유의 특징이다. 오랜 세월 워커홀릭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배터리가 방전된 것처럼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깊은 무기력에 빠져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을 찾은 한 내담자가 자신을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느티나무로 표현하다가 멈춤을 휴식으로 생각하는 관점의 전환을 이룬 뒤 홀로 있지만 그윽한 미소를 짓는 느티나무로 자신을 표현한 것이 (은유) 전환의 예이다.


한편 잎 진 후박나무 아래 땅을 파고/ 새끼를 낳은 어미 개/ 싸락눈이 녹아드는 두 눈을 반쯤 감고/ 태반을 꾸역꾸역 먹고 있다./ 배 밑에서는 아직 눈이 감긴 새끼가 꿈틀거리고/ 턱 밑으로는 몇 줄기 선혈이 떨어지고// 그 위로 어린 싸락눈은 비껴 날고후박 나무 아래 1은 환유를 이해하기에 맞춤한 시이다. 이 시는 관념적이고 해석적인 현상실험과 달리 사실적이고 감각적이고 표상적이다.


오규원 시인은 조주(趙州)를 종교와 관계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선사(禪師)로 말하며 그는 일상의 간결한 언어로 법()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조주와 비교되는 선사로 임제(臨濟)가 있다.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을 한 선사이다. 오규원 시인은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라는 말은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법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서운 선언이라고 말한다.(날 이미지와 시37 페이지)


오규원 시인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스승의 말에서 부처를 죽이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기에 무()가 부처요, 우상 파괴가 도()가 되는 바 결국 세계()를 바로 이해하려면 무를 알지 않으면 안 되고 세계를 알려면 무를 알아야 하므로 무를 모르는 한 세계를 알 도리가 없어서 무에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찾아내야 하며 이로 인해 우리는 이 무()에 엄청난 양의 의미를 부과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엄청난 크기의 관념의 우주를 짓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 결과 무 역시 우리가 알아야 할 대상으로 바뀌기에 대선사들은 함부로 부처가 무엇인지, 법이 무엇인지 말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날 이미지와 시38 페이지)


새로운 나를 만나는 은유 이야기 수업이란 부제를 가진 명법 스님의 은유와 마음은 은유 스토리텔링 심리 치유를 소개한 책이다. 은유 스토리텔링은 자기와 닮은 것을 말하거나 어떤 사물에 빗대어 자기를 말하는 것이다.(11 페이지) 이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구성한다는 의미이다. 이야기가 달라지면 또는 다르게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삶을 살거나 세상을 초월할 수 있다.(36 페이지) 오래전부터 정신분석을 비롯한 많은 심리치료에서 은유가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75 페이지) 이는 은유 없이는 그 어떤 글쓰기도 불가능한 문학 세계를 생각하게 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야기치료는 해결중심 치료의 하나로 난 할 수 있어!라고 순진하게 믿는 긍정심리학이나 모든 것을 과거 탓으로 돌리는 정신분석학과 달리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치료법이다.(62 페이지) 이야기치료는 과거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기존 심리치료와 달리 과거에서 문제 해결의 자원을 찾는다.(61 페이지) 이야기치료는 삶의 의미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강조한다. 세상은 우리가 참여하기 전까지 어떤 곳인지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61 페이지)


저자는 완결된 사건을 기술하는 역사조차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는데 하물며 자기 이야기이랴는 말을 한다. 같은 이야기이라도 새로운 맥락에 기입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64 페이지) 이야기는 진실이지만 완결된 것은 아니다.(64, 65 페이지) 중요한 것은 심리 문제는 담론에 의해 결정되며 담론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대화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67 페이지) 담론이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야기이다.(41 페이지) 심리치료에서 무의식이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유가 어떻게 마음에 작용하여 치료적 효과를 갖는가, 이다.(76 페이지)


무의식이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문학적 표현 뿐 아니라 진리, 구조 등 우리가 사용하는 학문적인 용어도 은유라는 지적(최문규 지음 문학이론과 현실인식34 페이지)을 언급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은유의 유사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경험된 것이라는 점이다.(83 페이지) 가령 시간은 돈이란 은유가 채택될 수도 있고 시간은 화살 같다는 은유가 채택될 수도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의 뇌에 은유를 담당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점이다.(84 페이지)


은유를 통해 사물의 어떤 속성은 부각되고 다른 속성은 은폐되거나 축소된다.(87 페이지) 은유는 현실을 창조적으로 다시 기술한다. 세계를 다르게 보고 다르게 말하는 것이 바로 삶을 확장하는 은유의 힘이다.(92 페이지) 은유에 의해 드러나는 세계는 의식에 의해 걸러지지 않은 무의식 차원의 것이며 모든 창조의 원천이다.(95 페이지) 코끼리를 완전하게 기술하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코끼리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은유는 간접성과 다의성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해준다.(98 페이지)


심리 치료에서 문제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고,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112 페이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선택도 훌륭한 은유가 될 수 있다.(112, 113 페이지) 은유는 객관적인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바라보는 주관의 입장을 보여주기 때문에 마음의 작동 방식과 특징을 쉽게 포착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113 페이지) 물론 이야기는 절반만 진실이다. 나머지 절반의 진실은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 속에 있다. 그 속에 자기도 몰랐던 진실이 있다. 은유 스토리텔링은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다.(115 페이지)


정신분석이나 분석심리학과 달리 은유 스토리텔링은 은유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고 은유의 전환을 통해 이야기를 만든다.(120 페이지) 라캉 정신분석학의 상상계와 상징계처럼 은유 스토리텔링을 통해 일어나는 심리적 변화는 상상적인 결과가 아니라 심리적 현실성을 갖는 변화를 가져다준다.(121 페이지)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은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가 우리를 선택한다는 사실이다.(130 페이지) 은유의 본래 의미를 확장하고 다른 의미로 변용하는 단계를 재정의 과정이라 말한다.(131 페이지)


앞에서 은유와 마음에 나무 비유가 참 많이 등장한다는 말을 했는데 수험생들은 자신들을 하나 같이 외롭고 힘든 나무로 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나뭇잎이 다 떨어졌거나 폭우 속에서 떨고 있기에 절망하고 아파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발상을 바꾸면 그럼에도 견디는 건강하고 씩씩한 나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141 페이지) 내담자 중에서 한 스님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은유가 겉도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이는 그가 은유를 잘못 선택해서가 아니라 그의 은유가 모순된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다.(151 페이지)


은유는 사물의 객관적인 특징만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과 해석도 반영한다.(159 페이지) 은유는 주관의 내면 상황을 반영하면서도 사태에 따라 사물을 관찰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161 페이지) 은유는 그 자체로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참가자는 자기도 모르는 깊은 내면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은유의 주관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근본적인 변화와 성장으로 인도된다.(165 페이지) 은유는 현재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동시에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한다.(167 페이지)


은유를 전환시킬 때 상상으로 하니까 아무 것으로나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 상태와 맞지 않는 은유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은유의 전환은 언어적 유사성이 아니라 마음의 유사성이 있을 때 일어나기 때문이다.(171 페이지) 저자는 부분으로 쪼개진 마음, 산란한 마음을 불교에서는 번뇌라고 부른다고 말하며 통합적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 문제를 바라보고 다음으로 타인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덧붙인다.(192, 193 페이지)


앎이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면 번뇌에 불과하지만 통합되면 깨달음이나 지혜가 된다.(193 페이지) 은유는 서로 다른 시각을 연결하여 통합적인 인식을 얻는 데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 (197 페이지) 은유는 단지 심리 문제를 드러내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본질적이고 더 무의식적인 힘들과 관여하면서 스스로 해법을 찾아내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209 페이지)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 참가자 가운데 은유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씀으로써 자신을 새롭게 정의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통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소통에 도움이 된 것이다.(221 페이지)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 참가 후 이제 자신을 조금 알게 되었다고, 자신과 친해진 느낌이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겁났지만 하고 나니까 시원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229 페이지) 저자는 중요한 말을 전한다. 나를 초월한 높고 깊은 어느 곳엔가 존재하는 참나가 아니라 삶의 한 가운데에서 너와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나, 그것이 진정한 연기(緣起)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아닐까란 말이다.(234 페이지) 이 말은 불교적으로, 그리고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의 핵심을 압축한 의미심장한 말이다.


은유 스토리텔링은 이야기와 은유에 대한 최근의 철학적, 심리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한다. 특히 심리학을 철학적 전제 없이 심리현상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이라고 보는 주류 심리학계의 믿음에 대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이 취하는 비판적 관점에 공감한다.(243 페이지) 저자는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 것 외에 특별한 은유 스토리텔링 기법은 없다고 말한다.(244, 245 페이지) 모른다는 마음가짐이야말로 내담자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한 기본자세이다.


저자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리 판단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분석가는 내담자에게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중립적인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섣부른 공감도 단정적 판단도 금물이다.(245, 246 페이지) 은유스토리텔링에서는 참가자가 은유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상담자는 구체적 정황을 알지 못한다. 상담자가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이나 상식적 판단 따위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 은유 스토리텔링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자기 변화의 경험을 하도록 한다고 말하는 저자는 상담자 스스로 변화의 가능성과 내면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내담자 내면의 힘을 일깨울 수 있다고 설명한다.(246 페이지)


나는 어떤 이야기로 환원되지 않고 온전히 비어 있는 존재 즉 공()한 존재이다. 자신이 공하기에 은유 이야기는 새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정해진 것은 없다.(247 페이지) 은유와 마음은 공(), 무아(無我) 등 불교의 가르침을 쉽게 체득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기존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점이 바로 우리의 공(), 무아(無我)적 실상을 말해준다. 명상 상태에서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버리고 역할을 떠나 순수하게 공()으로서 존재할 수 있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든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공의 다른 모습이다. 저자는 은유와 이야기는 무의식에 감춰진 무한한 원천들을 건져 올리는 방법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것들이 많다고 말한다. 심리 상담을 배우지 않았고 세상 사는 법에도 밝지 못하고 타고난 아둔함 때문에 늘 실수투성이라는 저자.


나는 임제의 살불살조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가졌고 오규원 시인의 날 이미지와 시를 통해 임제의 그런 인식이 은유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임제의 인식은 비유적인데 부처나 조사를 비유적으로라도 죽여서가 아니라 무한 사유를 초래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물론 나는 오규원 시인으로부터 많은 지식을 얻었다. 하지만 은유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은유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문학에서 은유를 살아 있게 쓰는 법이 궁구(窮究)되어야 할 것이다. 은유를 전이(轉移)의 잠재력이라 표현한 최문규 교수의 정의를 되새기게 된다. 세상은 이야기로 구성된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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