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그리모(Helene Grimaud)의 내한 피아노 연주회와 종묘 대제(宗廟 大祭)가 오늘(5월 7일) 열린다.

그리모가 연주할 곡은 클로드 드뷔시의 ‘물속에 잠긴 성당‘, 루치아노 베리오의 ‘바서 클라비어‘, 가브리엘 포레의 ‘뱃노래 5번‘, 모리스 라벨의 ‘물의 유희‘, 레오시 야나체크의 ‘안개 속에서 1번‘ 등 물을 주제로 한 피아노 작품들이다.(5시 예술의 전당)

종묘대제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오후 2시)
나는 어떤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을까? 종묘 대제는 엄숙하고, 흔히 볼 수 없는 이벤트이고, 음을 들으면 색을 느낀다는 그리모의 연주는 세련된 미모를 자랑하는 연주자의 서정과 힘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이다.

종로에서 종묘 대제를 보고 그리모 연주회를 듣기 위해 예술의 전당으로 이동한다면 나는 강북에서 강남으로, 우리의 전통 왕실 문화제에서 서양 고전 음악회로 이동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생각을 하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예매 또는 예약 여부를 떠나 오늘은 근무일이다. 한참 생각하고 이리 저리 궁리했는데 일정이 잡혀 있는 것을 뒤늦게 안 것이 아니라 일정이 잡혀 있는데도 어떤 것을 선택할지를 공상한 것이다. 허무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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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5-08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를 키운다던 그녀, 엘렌 그리모가 왔었군요.
잘 모르지만 그녀의 야나체크는 강렬했어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05-08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야나체크 음악도 들어야 하는데 관심이 덜 갑니다. 늑대 양육 자격증을 가진 분이라지요. 인상적인 분입니다...

양철나무꾼 2017-05-08 10:07   좋아요 1 | URL
헤헷~, 늑대였군요.
전에 그녀가 쓴 자서전인지 수필집을 읽어놓고도 이리 되었네요.
비로 잡아주셔서 감사~^^

벤투의스케치북 2017-05-08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맙습니다...
 
직설 무령왕릉 - 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
김태식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직설 무령왕릉'은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 - 1970)이라는 교육자를 가장한 도굴꾼, 고고학자를 중심으로 권력과 고고학의 관계와 무령왕릉을 계기로 드러난 민족주의적 레토릭(rhetoric; 수사修辭; 특정 이념을 주입시키려는 수단)을 파헤친 책이다. 가루베는 공주를 떠난 1940년 무렵 자신이 조사한 백제 고분이 1천기를 돌파했다고 떠벌였을 정도로 큰 도굴꾼이었다.

 

가루베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문화유적을 파괴하고 수탈한 장본인이다. 저자 김태식은 무령왕릉에 대한 레토릭(중국의 천자에게나 쓴다는 붕이란 글자를 보고 무령왕을 민족주체성을 선지해준 분으로 열렬히 선전)이 이후 전개된 경주 지역 신라 왕릉 발굴로 이어져 굉음을 내게 되었다고 말한다.

 

무령왕릉에 대해 논하려면 공주 송산리 고분군(古墳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송산리 고분군은 충남 공주에 자리한 웅진 도읍기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일곱 기의 무덤으로 무령왕릉이 대표적이다. 송산리 고분이란 이름은 가루베가 처음 쓴 것이다. 무령왕릉 외에 누구의 능인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은 도굴이 워낙 심한 까닭이다.(34 페이지)

 

무령왕릉은 배수로 공사를 하던 김영일(현장소장)에 의해 발견되었다. 송산리 고분군에 대한 초창기의 고고학적 기록은 대부분 가루베의 자료를 출처로 한다. 일본 학자들이 인정하듯 1920, 1930년대 일본은 고고학 인력을 전부 평양과 경주에 쏟아부었다. 이 바람에 공주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가루베는 공주를 틈새 시장으로 삼은 것이다.(53 페이지) 물론 당시 일본 총독부는 모든 고적조사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한편 각종 법령으로 유적과 유물 보존 정책을 표방했었다.(52 페이지) 마타도어 같은 도굴꾼 가루베가 무령왕릉을 놓친 것은 무령왕릉을 6호분 보호를 위해 인공적으로 쌓은 주산(主山) 또는 배총(陪冢)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다.(56, 57 페이지)

 

저자는 가루베의 범죄적 실체를 부각시키면서도 그가 수행한 역할을 일정 부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백제 붐을 조성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산하 공주분관은 무령왕릉 발견으로 폐쇄 위기를 넘기고 국립박물관 산하의 다른 지방 분관과 함께 공주박물관으로 지위가 격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77 페이지)

 

충남 역사문화관으로 변모한 이 건물은 무령왕릉 발굴 이전 230점 정도였던 수장 유물이 발굴 이후 8,365점으로 늘었다. 저자는 무령왕릉이 졸속 발굴되었다고 주장한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의 5, 6호분으로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한 배수로 준설 공사 도중 발견되었다.

 

책에는 새 왕릉을 짐작케 하는 상황에서 계속 배수로를 파내려가자는 쪽과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해야 한다는 쪽의 가벼운 다툼은 물론 무령왕릉 발견 공을 차지하기 위한 분투 또는 책략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졸속을 무마하려는 사후 변명에 대한 기록 역시 생생하다.

 

무령왕릉 입구를 파헤치자 천둥 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떨어졌다는 과장된 소문이 돌았다. 이 릉 이후 천마총, 황남대총 등 경주 지역 발굴 때 가뭄도 왕릉 탓, 폭우도 왕릉 탓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제주, 하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잠들지 않는 남도'라는 곡이 생각난다. 저자는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아무리 고고학자라도 사자(死者)가 잠들어 있는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이 인간이 할 짓인가?라고 말한다.(111 페이지) 본문이 말하듯 죽은 사람이 묻힐 땅을 (토지신에게서) 구입했음을 증거하는 문서인 묘권(墓券)이란 것도 있다.

 

제주 4. 3이 죽임의 폭력과 관계된 것이라면 고고학자의 작업은 문화를 위한 것이다. 참고할 것은 지진제(地鎭祭)이다. 1938415일 국립중앙박물관 공주분관 기공식때 지진제(地鎭祭)가 드려졌다. 일종의 위령제이다.(118 페이지..위령제는 한국고고학계의 관례이다.) 공사가 무사히 진행되도록 땅의 신에게 지내는 고사이다.(25 페이지)

 

무령왕릉은 공개적으로 발굴된 최초이자 마지막 유적이다.(117 페이지) 일반인에게까지 공개된 것이다. 무령왕릉임을 확신케 한 문구는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란 문구였다.

 

저자는 "손 하나 대지 않은 완전한 백제 왕릉, 그것도 백제 중흥의 대왕 무령왕의 능이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고고학 하는 사람으로서 누가 가슴 떨리지 않겠는가."란 김원용의 말에 졸속 발굴(하룻 밤에 발굴을 해치운)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지는 않았을까, 란 말을 한다.(127, 128 페이지)

 

졸속 발굴은 유물의 파손을 초래한다. 김원용은 보도진이나 구경꾼들과의 마찰과 사고 방지를 명분으로 도굴꾼이 아니면 생각하지도 못할 한밤중 발굴을 결정했다.(143 페이지) 졸속 발굴 때문에 실측도도 부실했고 사진 자료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147 페이지)

 

저자는 고구마 감자 캐듯 이루어진 유적 파괴라는 말을 한다. 저자는 고고학자의 합법적 발굴이라도 경험 부족, 지식 부족, 성의 부족 등으로 얻어내야 할 정보를 일부분 밖에 얻어내지 못하거나 기록화가 미비, 불충분하여서 다른 사람이 유적의 원상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면 그도 또한 결과적으로 유적의 파괴자요 도굴자란 글을 언급한다.(163 페이지)

 

"그러나 어쩌랴. 이런 글을 남긴 주인공은 바로 무령왕릉을 고구마나 감자 캐듯 파헤친 김원용이었다."는 저자의 글(164 페이지)은 의미심장하다. 저자에 의하면 김원용은 분명히 고고학 발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몸에 배어 있었지만 분위기에 휩싸여 기본을 잊고 무령왕릉을 졸속 발굴하고 말았다.(16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무령왕릉은 졸속 공개되었다가 급기야 영구 폐쇄된다.(177 페이지) 저자는 일반 공개가 무덤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충분히 예상됨에도 무리하게 공개한 것은 무령왕릉을 통해 관광 수익을 올리려는 당국의 얄팍한 계산 때문이라 말한다. 무령왕릉은 발견 당시 이미 허물어져 원형을 알 수 없는 왕릉 봉분을 무리하게 만들어 올림으로써 신라 고분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봉분이 우람, 장대하다.

 

이는 백제 왕릉이 크기면에서 신라 왕릉만은 해야 한다는 경쟁심의 발로일 수 있다. 저자는 무령왕릉 졸속 발굴에 청와대가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무령왕릉 발굴 완료 시점과 출토 유물의 청와대 나들이 시점에 주목한다. 저자에 의하면 무령왕릉 발굴을 계기로 박정희는 고고학 발굴을 민족주체성 회복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 선전에 마음껏 활용했다.

 

저자는 무령왕릉에서의 실패(홍보 자료로 만들지 못한) 이후 경주 발굴은 전 과정을 홍보용 영화로 만들었다는 점을 들어 무령왕릉이 고고학과 권력이 결합하는 단초를 마련했다고 말한다.(215 페이지) 무령왕릉은 유물 처리와 보고서 발간도 졸속이었다.(223 페이지) 고의인지 실수인지 유물 누락도 있었다.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티격태격하는 불상사도 있었다. 무령왕릉 보고서 작성은 일본에 의해 주도되었다. 일본 학계는 예나 지금이나 백제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더구나 무령왕릉에서 쏟아진 많은 유물이 일본 각지에서 출토된 것과 비교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무령왕릉에 대해 보인 각별한 관심은 이해가 간다.

 

한국 정부 차원에서는 무령왕릉을 선전용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238 페이지) 저자는 일본 학계 주도의 무령왕릉 연구의 문제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무령왕 또는 무령왕릉을 오직 중국이나 일본 중심의 대외관계로만 보게 되었고 백제사를 전체사의 맥락에서 접근하지 못하고 무령왕이 재위하고 무령왕릉이 만들어진 웅진 도읍기라는 극히 짪은 시기로 따로 떼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241, 242 페이지)

 

무령왕은 일본 열도 어느 섬에서 태어났지만 곧바로 귀국해 한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성 도읍기와 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성왕 때 도읍을 사비로 옮겼다. 사비시대와도 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일본 학계가 무령왕릉 연구를 주도하고 거기에 국내 학계가 종속되는 것은 문제이다.(243 페이지)

 

저자는 한글판과 거의 동시에 발간된 김원용의 일본어판 무령왕릉 단행본을 일본에 간도 배알도 다 내준 것으로 본다.(243 페이지) 무령왕릉은 삼국 시대의 고분 중 거의 유일하게 시기는 물론 주인공이 밝혀진 고분이다.(흥덕왕릉과 태종무열왕릉도 무덤 주인공이 밝혀졌다.) 무덤의 주인공이 토지신에게서 땅을 구입했음을 증빙하는 서류인 묘권(墓券)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묘권 즉 매지권과 오수전(五銖錢)이라는 돈 꾸러미는 무령왕릉이 살아 있을 때 이 세상의 주인이었으나 지하세계에서는 불청객일 뿐임을 증명한다. 묘권과 오수전을 함께 묻은 것은 지하세계의 동티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무령왕릉보다 더 많은 유물이 출토된 경주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주인공이 밝혀지지 않아 연구가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송산리 6호분이 무령왕릉의 가묘라는 설을 제시한다. 저자는 고고학 발굴에 광범위한 자연과학적 방법을 도임해야 함은 무령왕릉 부부 관재(棺材)에 대한 목재조직학의 분석 결과로도 잘 드러난다고 말한다.(351페이지) 저자는 우리나라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했다고 해서 대한제국을 대단한 나라로 착각하지 말라고 한다.

 

저자는 주()나라 천자가 죽음에 붕을 쓰고 팔일무라는 특권 춤을 추었으며 죽어 빈() 기간이 7개월이나 되는 특권을 누렸다 해서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라고 말한다. 패권은 제후국 왕인 제나라 환공, ()나라 문공, 초나라 장공, 오나라 부차, 월나라 구천이라는 다섯 패자(霸者)에게 갔는데 천자라는 허울만 뒤집어쓴 채 맞이한 죽음이 붕이든 훙이든 졸이든 무슨 차이가 있으랴, 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럼에도 무령왕릉 지석에서 중국 천자에게나 쓴다는 붕()자를 발견한 학계에서는 이 글자 하나로 백제가 민족주체성을 견지한 왕조였노라고 호들갑을 떨었고 아직도 이런 미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373 페이지)

 

자를 보고 호들갑을 떤 사람들에게 고민거리가 있었다. 붕이란 글자가 들어 있는 매지권에서 중국 양나라가 무령왕에게 내린 영동대장군이란 봉작이 그대로 쓰였다는 것이다. 또한 무령왕릉은 구조부터 중국적인 색채가 농후하고 출토 유물도 중국 수입품이 아주 많다는 심각한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답은 주체의식에 불리한 증거는 백제의 진취적인 기상이라 하며 넘어가고 주체의식이 뚜렷해 보이는 것은 과대포장한 것이다. 저자는 무령왕릉은 중국인들이 만든 것임을 강력 주장한다. 저자는 무덤은 결코 보수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쉽게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닌, 한바탕 불고 지나는 유행품일 뿐이라 말한다. 무덤은 입었다 버리는 옷과 같다는 것이다.(411 페이지)

 

저자는 중국식 무덤을 썼다고 중국이 백제를 지배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 말한다. 저자는 박정희의 경주 개발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언급한다. 박정희는 경주개발을 기폭제로 삼아 국민정서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개조하며 유신(維新)하고자 했다.(449 페이지) 박정희는 경주개발을 통해 정서를 순화해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국민, 철두철미 반공으로 무장한 국민을 만들고자 했다.(450 페이지)

 

저자는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얼마 전까지도 유일하게 고고학 발굴현장을 직접 찾은 인물이다.(453 페이지) 고고학과 정권의 밀착은 전두환으로 이어졌다. 정권 기반이 박정희보다 더 취약했던 서울 올림픽 공원 조성 지구에 포함된 몽촌토성 발굴을 고리로 고고학계와 연결되었다.

 

"고고학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학문이다. 땅속에서 캐내는 모든 것이 새로울 수 밖에 없고 그 하나하나가 옛 문화의 새로운 면을 부활케 한다. 유물 대부분은 군주시대에 정점을 이루었던 왕과 관계가 있다. 이런 유물을 통해 관람객은 무의식적으로 위대한 왕이 구가했을 왕국을 떠올리게 되고 나아가 현세의 독재자 출현에 대한 갈망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아울러 독재자는 흔히 극단적인 국수주의 성향을 지니며 이를 위해 과거 어느 때인가의 영광을 재현하려 한다. 민족주체성, 전통문화 부활을 부르짖은 박정희가 좋은 예다. 여기서 고고학과 독재정권은 접점을 이루며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454 페이지)

 

절묘한 말이다. 김윈용은 유적 발굴에 고도의 정치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았다. 저자는 무령왕릉을 땅 속에서 파내는 민족주체성의 뿌리로 정의한다. 하고 싶은 말은 많다. 저자의 노고가 돋보인다는 말부터 무령왕릉을 둘러싼 고고학과 정권의 공생, 역사에 대한 숙고 등등....

 

나는 물론 저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독재정권이 고고학과 유물 등을 이용해 국민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하고 통제하려 한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경주 개발과 같은 선물이 주어진 것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가 국민의 무의식적 동화 또는 갈망을 이야기했기에 대응논리가 미비하지만 요즘 국민들은 그런 이데올로기적 술수를 헤아릴 줄 알지 않을지?란 말을 하고 싶다. 저자로부터 많이 배웠다. 개인적으로는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 개발과 관련해 삼불 김원용 선생이 공과 별개로 무령왕릉 졸속 발굴은 물론 실증사학, 친일사학 등의 혐의를 지닌 것을 알게 되었다. 균형 있게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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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보고 이 이후의 예술은 모두 데카당스란 말을 한 사람은 화가 피카소이다. 그는 동굴벽화의 독창성과 추상성에 깊은 찬사를 보냈다. 원시 혈거인(穴居人)들이 (들소 등의) 벽화를 그린 이유에 대해 많은 설이 제기되었다. 사냥설, 유희설, 모방설, 파괴설 등..

 

그런데 남아메리카공화국의 인지고고학자인 루이스 윌리엄스(David Lewis Williams; 1934 - )가 획기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동굴 속 어둠에 대응하기 위해 뇌가 일으킨 단순 환각을 벽에 옮긴 것이 동굴벽화에 산재하는 추상적인 문양이라는 것이다.

 

빛이 전혀 없는 어둠 속에서 눈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 중 하나가 환각이다. 깜깜한 상태이기에 눈은 실상 아무 것도 보지 못하지만 무언가가 보이는 것은 깨어 있는 한 눈을 통해 바깥세계를 이해하고 위험 요인을 감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뇌의 작용 때문이다.

 

단순 환각이 지속되면서 뇌는 그림의 요소들을 가지고 구체적인 형태를 그려내는데 이것이 바로 복합 환각이다. 관건은 환각과, 그것을 동굴에 옮기는 것은 다른 차원이라는 점이다. 영화 이론가이자 평론가인 앙드레 바쟁은 소중한 존재나 동경의 대상을 영원히 간직하려는 심리적 충동을 그림의 동기로 보았다.(조주연 지음 현대미술 강의참고)

 

내가 환각설을 지지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사냥설, 유희설, 모방설, 파괴설 등은 각기 한계가 있다. 어떻든 나는 원시 혈거인들이 어떻게 동굴 벽화를 그렸는지를 통해 무엇을 하려는가.(*)

 

* 루이스 윌리엄스는 그들이 왜 그림을 그렸는지를 논하기 전에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를 논했다. 어떻게는 루이스 윌리엄스가, 왜는 앙드레 바쟁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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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5-06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아~ 상당히 흥미롭고 아주 깊은 암시를 주는 글이네요. 그리고 벤투 님 덕분에 David Lewis-Williams의 해당 책을 아마존에서 찾아봤네요. 인간 의식(consciousness)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 나오는데 함 읽어봐야겠네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Lewis-Williams, David (Nov 2002/Paperback, Apr 2004). The Mind in the Cave: Consciousness and the Origins of Art. London & New York: Thames & Hudson. [320 pages]

[처음 댓글 올린 시각 : 2017-05-06 15:48]
[탈자 수정해 다시 올린 시각 : 2017-05-06 19:44]

벤투의스케치북 2017-05-06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 읽으시고 관련 페이퍼 쓰시길 바랍니다... (부담 갖지 마시기를... 바라며) 감사합니다...
 

미학을 전공하고 동시대 미술과 사진 이론을 가르치는 한 세련된 분이 ‘볼작시면‘이란 말을 쓴 것을 보고 혼자 웃었다.

˝반면에 피카소가 그린 ‘칸바일러‘를 볼작시면 관람자는 당황한다. 최초의 당혹감은 이 그림이 초상화라는데 인물을 단박에 알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나온다. ..˝

단박에란 말도 미학자와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듯 하다. 단박에는 지체 없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를 뜻하고 -ㄹ작시면은 우습거나 언짢은 경우에 흔히 쓰는 말이다.

물론 ˝어머니께 딸이, 딸에게 엄마가˝란 인상적이고 멋진 표현을 한 이 저자의 면모를 나는 부럽게 생각한다.

어머니에서 딸에게만 유전되는(아들에게로도 전해지지만 이 경우 더 이상 다음 세대로 전할 수 없다.) 미토콘드리아를 생각할 만하지만 딸이 어머니께 드리고(책 헌정) 그 딸(저자)은 엄마로서 딸에게도 책을 헌정한 것이니 미토콘드리아와는 다르다.

굳이 헤아리자면 저자가 시간을 역류해서는 물론 순방향으로도 책이라는 문화적 미토콘드리아를 전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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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額子)의 액은 이마 액자이다. 조주연 교수의 ‘현대미술 강의’에서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가 액자를 그림과 세상을 단절(고립)시키는 것으로 정의했다는 내용을 읽고 있는 입장에서 흥미를 느끼게 하는 사실이다.

말라르메의 말은 더 이상 우리가 보는 세계를 재현하지 않고 심리 상태 등을 표현하는 현대 미술의 특성을 설명하는 말로 그림 밖의 세상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인 반면 그림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액자 소설이란 것이 있다.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것이 이청준의 ‘매잡이’이다. ‘매잡이’는 액자 밖 인물인 소설가 지망생 민태준(평생 자료수집을 하러 다녔을 뿐 단편 소설 하나 발표하지 못한)과 액자 안 인물인 매잡이 곽돌(변해 버린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매잡이라는 옛것을 고집하는)의 삶이 묘하게 닮았음을 드러내 보이는 소설이다.

서술자인 ‘나’는 민태준의 취재 노트를 넘겨 받아 ‘매잡이’라는 소설을 쓰면서 장인 정신을 알게 된다. 액자 안 인물과 액자 밖 인물이 무관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액자 안 인물과 액자 밖 인물이 무관한 소설이 있는지 궁금하다.

(말라르메가 이야기한) 현대 미술과 현대 소설의 차이를 논하기 전에 액자 밖 인물과 액자 안 인물이 무관한 소설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먼저여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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