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무령왕릉 - 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
김태식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직설 무령왕릉'은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 - 1970)이라는 교육자를 가장한 도굴꾼, 고고학자를 중심으로 권력과 고고학의 관계와 무령왕릉을 계기로 드러난 민족주의적 레토릭(rhetoric; 수사修辭; 특정 이념을 주입시키려는 수단)을 파헤친 책이다. 가루베는 공주를 떠난 1940년 무렵 자신이 조사한 백제 고분이 1천기를 돌파했다고 떠벌였을 정도로 큰 도굴꾼이었다.

 

가루베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문화유적을 파괴하고 수탈한 장본인이다. 저자 김태식은 무령왕릉에 대한 레토릭(중국의 천자에게나 쓴다는 붕이란 글자를 보고 무령왕을 민족주체성을 선지해준 분으로 열렬히 선전)이 이후 전개된 경주 지역 신라 왕릉 발굴로 이어져 굉음을 내게 되었다고 말한다.

 

무령왕릉에 대해 논하려면 공주 송산리 고분군(古墳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송산리 고분군은 충남 공주에 자리한 웅진 도읍기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일곱 기의 무덤으로 무령왕릉이 대표적이다. 송산리 고분이란 이름은 가루베가 처음 쓴 것이다. 무령왕릉 외에 누구의 능인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은 도굴이 워낙 심한 까닭이다.(34 페이지)

 

무령왕릉은 배수로 공사를 하던 김영일(현장소장)에 의해 발견되었다. 송산리 고분군에 대한 초창기의 고고학적 기록은 대부분 가루베의 자료를 출처로 한다. 일본 학자들이 인정하듯 1920, 1930년대 일본은 고고학 인력을 전부 평양과 경주에 쏟아부었다. 이 바람에 공주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가루베는 공주를 틈새 시장으로 삼은 것이다.(53 페이지) 물론 당시 일본 총독부는 모든 고적조사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한편 각종 법령으로 유적과 유물 보존 정책을 표방했었다.(52 페이지) 마타도어 같은 도굴꾼 가루베가 무령왕릉을 놓친 것은 무령왕릉을 6호분 보호를 위해 인공적으로 쌓은 주산(主山) 또는 배총(陪冢)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다.(56, 57 페이지)

 

저자는 가루베의 범죄적 실체를 부각시키면서도 그가 수행한 역할을 일정 부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백제 붐을 조성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산하 공주분관은 무령왕릉 발견으로 폐쇄 위기를 넘기고 국립박물관 산하의 다른 지방 분관과 함께 공주박물관으로 지위가 격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77 페이지)

 

충남 역사문화관으로 변모한 이 건물은 무령왕릉 발굴 이전 230점 정도였던 수장 유물이 발굴 이후 8,365점으로 늘었다. 저자는 무령왕릉이 졸속 발굴되었다고 주장한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의 5, 6호분으로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한 배수로 준설 공사 도중 발견되었다.

 

책에는 새 왕릉을 짐작케 하는 상황에서 계속 배수로를 파내려가자는 쪽과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해야 한다는 쪽의 가벼운 다툼은 물론 무령왕릉 발견 공을 차지하기 위한 분투 또는 책략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졸속을 무마하려는 사후 변명에 대한 기록 역시 생생하다.

 

무령왕릉 입구를 파헤치자 천둥 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떨어졌다는 과장된 소문이 돌았다. 이 릉 이후 천마총, 황남대총 등 경주 지역 발굴 때 가뭄도 왕릉 탓, 폭우도 왕릉 탓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제주, 하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잠들지 않는 남도'라는 곡이 생각난다. 저자는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아무리 고고학자라도 사자(死者)가 잠들어 있는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이 인간이 할 짓인가?라고 말한다.(111 페이지) 본문이 말하듯 죽은 사람이 묻힐 땅을 (토지신에게서) 구입했음을 증거하는 문서인 묘권(墓券)이란 것도 있다.

 

제주 4. 3이 죽임의 폭력과 관계된 것이라면 고고학자의 작업은 문화를 위한 것이다. 참고할 것은 지진제(地鎭祭)이다. 1938415일 국립중앙박물관 공주분관 기공식때 지진제(地鎭祭)가 드려졌다. 일종의 위령제이다.(118 페이지..위령제는 한국고고학계의 관례이다.) 공사가 무사히 진행되도록 땅의 신에게 지내는 고사이다.(25 페이지)

 

무령왕릉은 공개적으로 발굴된 최초이자 마지막 유적이다.(117 페이지) 일반인에게까지 공개된 것이다. 무령왕릉임을 확신케 한 문구는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란 문구였다.

 

저자는 "손 하나 대지 않은 완전한 백제 왕릉, 그것도 백제 중흥의 대왕 무령왕의 능이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고고학 하는 사람으로서 누가 가슴 떨리지 않겠는가."란 김원용의 말에 졸속 발굴(하룻 밤에 발굴을 해치운)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지는 않았을까, 란 말을 한다.(127, 128 페이지)

 

졸속 발굴은 유물의 파손을 초래한다. 김원용은 보도진이나 구경꾼들과의 마찰과 사고 방지를 명분으로 도굴꾼이 아니면 생각하지도 못할 한밤중 발굴을 결정했다.(143 페이지) 졸속 발굴 때문에 실측도도 부실했고 사진 자료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147 페이지)

 

저자는 고구마 감자 캐듯 이루어진 유적 파괴라는 말을 한다. 저자는 고고학자의 합법적 발굴이라도 경험 부족, 지식 부족, 성의 부족 등으로 얻어내야 할 정보를 일부분 밖에 얻어내지 못하거나 기록화가 미비, 불충분하여서 다른 사람이 유적의 원상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면 그도 또한 결과적으로 유적의 파괴자요 도굴자란 글을 언급한다.(163 페이지)

 

"그러나 어쩌랴. 이런 글을 남긴 주인공은 바로 무령왕릉을 고구마나 감자 캐듯 파헤친 김원용이었다."는 저자의 글(164 페이지)은 의미심장하다. 저자에 의하면 김원용은 분명히 고고학 발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몸에 배어 있었지만 분위기에 휩싸여 기본을 잊고 무령왕릉을 졸속 발굴하고 말았다.(16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무령왕릉은 졸속 공개되었다가 급기야 영구 폐쇄된다.(177 페이지) 저자는 일반 공개가 무덤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충분히 예상됨에도 무리하게 공개한 것은 무령왕릉을 통해 관광 수익을 올리려는 당국의 얄팍한 계산 때문이라 말한다. 무령왕릉은 발견 당시 이미 허물어져 원형을 알 수 없는 왕릉 봉분을 무리하게 만들어 올림으로써 신라 고분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봉분이 우람, 장대하다.

 

이는 백제 왕릉이 크기면에서 신라 왕릉만은 해야 한다는 경쟁심의 발로일 수 있다. 저자는 무령왕릉 졸속 발굴에 청와대가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무령왕릉 발굴 완료 시점과 출토 유물의 청와대 나들이 시점에 주목한다. 저자에 의하면 무령왕릉 발굴을 계기로 박정희는 고고학 발굴을 민족주체성 회복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 선전에 마음껏 활용했다.

 

저자는 무령왕릉에서의 실패(홍보 자료로 만들지 못한) 이후 경주 발굴은 전 과정을 홍보용 영화로 만들었다는 점을 들어 무령왕릉이 고고학과 권력이 결합하는 단초를 마련했다고 말한다.(215 페이지) 무령왕릉은 유물 처리와 보고서 발간도 졸속이었다.(223 페이지) 고의인지 실수인지 유물 누락도 있었다.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티격태격하는 불상사도 있었다. 무령왕릉 보고서 작성은 일본에 의해 주도되었다. 일본 학계는 예나 지금이나 백제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더구나 무령왕릉에서 쏟아진 많은 유물이 일본 각지에서 출토된 것과 비교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무령왕릉에 대해 보인 각별한 관심은 이해가 간다.

 

한국 정부 차원에서는 무령왕릉을 선전용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238 페이지) 저자는 일본 학계 주도의 무령왕릉 연구의 문제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무령왕 또는 무령왕릉을 오직 중국이나 일본 중심의 대외관계로만 보게 되었고 백제사를 전체사의 맥락에서 접근하지 못하고 무령왕이 재위하고 무령왕릉이 만들어진 웅진 도읍기라는 극히 짪은 시기로 따로 떼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241, 242 페이지)

 

무령왕은 일본 열도 어느 섬에서 태어났지만 곧바로 귀국해 한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성 도읍기와 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성왕 때 도읍을 사비로 옮겼다. 사비시대와도 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일본 학계가 무령왕릉 연구를 주도하고 거기에 국내 학계가 종속되는 것은 문제이다.(243 페이지)

 

저자는 한글판과 거의 동시에 발간된 김원용의 일본어판 무령왕릉 단행본을 일본에 간도 배알도 다 내준 것으로 본다.(243 페이지) 무령왕릉은 삼국 시대의 고분 중 거의 유일하게 시기는 물론 주인공이 밝혀진 고분이다.(흥덕왕릉과 태종무열왕릉도 무덤 주인공이 밝혀졌다.) 무덤의 주인공이 토지신에게서 땅을 구입했음을 증빙하는 서류인 묘권(墓券)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묘권 즉 매지권과 오수전(五銖錢)이라는 돈 꾸러미는 무령왕릉이 살아 있을 때 이 세상의 주인이었으나 지하세계에서는 불청객일 뿐임을 증명한다. 묘권과 오수전을 함께 묻은 것은 지하세계의 동티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무령왕릉보다 더 많은 유물이 출토된 경주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주인공이 밝혀지지 않아 연구가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송산리 6호분이 무령왕릉의 가묘라는 설을 제시한다. 저자는 고고학 발굴에 광범위한 자연과학적 방법을 도임해야 함은 무령왕릉 부부 관재(棺材)에 대한 목재조직학의 분석 결과로도 잘 드러난다고 말한다.(351페이지) 저자는 우리나라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했다고 해서 대한제국을 대단한 나라로 착각하지 말라고 한다.

 

저자는 주()나라 천자가 죽음에 붕을 쓰고 팔일무라는 특권 춤을 추었으며 죽어 빈() 기간이 7개월이나 되는 특권을 누렸다 해서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라고 말한다. 패권은 제후국 왕인 제나라 환공, ()나라 문공, 초나라 장공, 오나라 부차, 월나라 구천이라는 다섯 패자(霸者)에게 갔는데 천자라는 허울만 뒤집어쓴 채 맞이한 죽음이 붕이든 훙이든 졸이든 무슨 차이가 있으랴, 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럼에도 무령왕릉 지석에서 중국 천자에게나 쓴다는 붕()자를 발견한 학계에서는 이 글자 하나로 백제가 민족주체성을 견지한 왕조였노라고 호들갑을 떨었고 아직도 이런 미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373 페이지)

 

자를 보고 호들갑을 떤 사람들에게 고민거리가 있었다. 붕이란 글자가 들어 있는 매지권에서 중국 양나라가 무령왕에게 내린 영동대장군이란 봉작이 그대로 쓰였다는 것이다. 또한 무령왕릉은 구조부터 중국적인 색채가 농후하고 출토 유물도 중국 수입품이 아주 많다는 심각한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답은 주체의식에 불리한 증거는 백제의 진취적인 기상이라 하며 넘어가고 주체의식이 뚜렷해 보이는 것은 과대포장한 것이다. 저자는 무령왕릉은 중국인들이 만든 것임을 강력 주장한다. 저자는 무덤은 결코 보수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쉽게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닌, 한바탕 불고 지나는 유행품일 뿐이라 말한다. 무덤은 입었다 버리는 옷과 같다는 것이다.(411 페이지)

 

저자는 중국식 무덤을 썼다고 중국이 백제를 지배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 말한다. 저자는 박정희의 경주 개발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언급한다. 박정희는 경주개발을 기폭제로 삼아 국민정서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개조하며 유신(維新)하고자 했다.(449 페이지) 박정희는 경주개발을 통해 정서를 순화해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국민, 철두철미 반공으로 무장한 국민을 만들고자 했다.(450 페이지)

 

저자는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얼마 전까지도 유일하게 고고학 발굴현장을 직접 찾은 인물이다.(453 페이지) 고고학과 정권의 밀착은 전두환으로 이어졌다. 정권 기반이 박정희보다 더 취약했던 서울 올림픽 공원 조성 지구에 포함된 몽촌토성 발굴을 고리로 고고학계와 연결되었다.

 

"고고학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학문이다. 땅속에서 캐내는 모든 것이 새로울 수 밖에 없고 그 하나하나가 옛 문화의 새로운 면을 부활케 한다. 유물 대부분은 군주시대에 정점을 이루었던 왕과 관계가 있다. 이런 유물을 통해 관람객은 무의식적으로 위대한 왕이 구가했을 왕국을 떠올리게 되고 나아가 현세의 독재자 출현에 대한 갈망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아울러 독재자는 흔히 극단적인 국수주의 성향을 지니며 이를 위해 과거 어느 때인가의 영광을 재현하려 한다. 민족주체성, 전통문화 부활을 부르짖은 박정희가 좋은 예다. 여기서 고고학과 독재정권은 접점을 이루며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454 페이지)

 

절묘한 말이다. 김윈용은 유적 발굴에 고도의 정치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았다. 저자는 무령왕릉을 땅 속에서 파내는 민족주체성의 뿌리로 정의한다. 하고 싶은 말은 많다. 저자의 노고가 돋보인다는 말부터 무령왕릉을 둘러싼 고고학과 정권의 공생, 역사에 대한 숙고 등등....

 

나는 물론 저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독재정권이 고고학과 유물 등을 이용해 국민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하고 통제하려 한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경주 개발과 같은 선물이 주어진 것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가 국민의 무의식적 동화 또는 갈망을 이야기했기에 대응논리가 미비하지만 요즘 국민들은 그런 이데올로기적 술수를 헤아릴 줄 알지 않을지?란 말을 하고 싶다. 저자로부터 많이 배웠다. 개인적으로는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 개발과 관련해 삼불 김원용 선생이 공과 별개로 무령왕릉 졸속 발굴은 물론 실증사학, 친일사학 등의 혐의를 지닌 것을 알게 되었다. 균형 있게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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