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임 테스트가 페부커들의 게시 글을 보고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에서 내가 무척 좋아하는 단어로 ‘게리는‘이라는 단어가 선정되었다. ‘게리는‘이 무슨 뜻일까?

게리는 지난 2012년 일반 관람객이 없는 이른 시각에 자신과 일행들 몇몇만 종묘를 특별 관람하게 해달라고 해 어렵게 꿈을 이룬 분으로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설계한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 1929 - )이다.

그는 종묘 정전 만큼 장엄한 곳은 다시 보기 힘들다는 말을 했다.

1985년 국립 로마박물관을 설계한 건축가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 1937 - )가 지난 6월 한국을 찾았다. 이 분은 세계 건축계에서 드물게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대스승으로 알려진 분이다.

게리가 표면적으로는 삼성 리움 미술관 특강을 위해 한국에 왔지만 실은 종묘 정전을 보러 온 것이라면 모네오는 서울대 강연을 위해 한국에 오자마자 덕수궁, 광화문, 서촌 등을 찾았고 종묘에서는 해설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모네오는 종묘에 대해 담장 밖은 바쁜 서울인데 담장 안 종묘는 전혀 다른 영적인 세계라며 감탄했다. 영적인 세계란 내 식으로 말하면 잠시 세속의 번잡함과 어수선함을 잊을 수 있는 곳이다.
종묘가 이런 찬사를 받는다는 사실이 반갑고 궁(宮)보다 묘(廟)를 더 좋아하는 내 취향이 인정받은 듯 해 기쁘다.

나는 물론 묘(墓)도 묘(廟) 만큼 좋아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능(陵), 원(園), 묘(墓) 가운데 능을 좋아하는 것이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이고 묘는 대군, 공주, 옹주, 귀인 등의 무덤이다.

해설사로서 필수인 연구팀으로 왕릉연구팀을 선택하며 나는 종묘 연구팀도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섯 곳에 산재해 있는 궁궐, 수십여 곳에 나뉘어 있는 능과 달리 종묘(宗廟)는 한 곳에 있지만 그 주인공들은 궁과 능의 주인공들과 같다.

그러니 이야기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계속 한 곳에서만 모인다는 점이 걸림돌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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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5월부터 2007년 1월까지 울산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의 광어 양식장에서 일할 때 신암리 통신이란 블로그 카테고리를 운영했었다.

동해남부선이 지나던 그곳은 지금도 낭만과 아쉬움의 정서를 교차하게 하는 근원지 같은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간절곶에서 5분 거리인 그곳에는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술을 마시며 바다를 보기에 좋은 횟집이 있었다.

그 횟집은 약간은 모호한 그리움의 정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페북에서 우포늪 통신사 역할을 하시는 손 시인의 글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오늘 글에는 수달이 목격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를 보고 내가 생각한 것은 달제어(獺祭魚)라는 말이다.

수달이 물고기를 잡은 뒤 먹지는 않고 제사를 지내듯 늘어놓고 있는 것을 뜻하는 이 말이 어떤 계기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중요한 것은 수달을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수달은 다른 곳에도 있으니 가시연꽃을 비롯한 우포의 수생식물들과 짙은 청록을 보려는 것이다.

올해는 궁궐 순례를 많이 했다. 지난 8월 창경궁에서는 청설모(청설모가 아니라 청서靑鼠라 해야 맞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를 보았고 7월 창덕궁에서는 너구리를 보았다.

당시 청설모를 보면서 나는 저 동물은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말을 해설사에게 했다. 함께 해설을 들었던 누군가가 청설모가 다람쥐를 잡아먹는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색해보니 청설모가 다람쥐를 잡아먹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청설모는 나무 위에서 살고 다람쥐는 땅 위에서 살며, 청설모는 잣을 좋아하고 다람쥐는 도토리를 좋아하는 등 습성이 다르고 청설모는 겨울잠을 자지 않고 다람쥐는 겨울잠을 자는 등의 차이도 분명하다.

어떻든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는데 말하고 싶은 것은 나에게는 새로운 것에 대한 그리움 또는 아쉬움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궁궐 시나리오를 쓸 때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쉽고 간결한 글, 관심을 유도하는 질문과 미션 제시 등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나는 새로움과 독창성 등도 염두에 둔다. 물론 이로 인해 글이 어려워지기도 한다.

요즘 열 가지 서울의 색을 시나리오에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궁리하고 있다.

그 색들은 서울의 건축문화유산과 나무와 자연의 원소들을 연상하게 하는 색이라고 한다. 궁궐 기둥의 빨간색, 궁궐 기타 영역의 갈색, 가을 거리의 은행나무의 노란색, 한강의 물결이 드러내는 은백색 등이다.

왕조시대의 유산인 궁궐은 죽은 건축 유형이다.(조재모 지음 ‘궁궐, 조선을 말하다‘ 4 페이지) 그럼에도 궁에 갈 때는 마음이 늘 설렌다.

미지의 영역이고 거대 건축물이고 문화 유산이기 때문일 것이다.(궁은 십년을 드나들어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가볼 수 없는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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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9-08 0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도시에는 산이 도심에 있는데요. 그곳에 친구와 함께 등산 혹은 산책을 갔어요. 간식으로 해태 에이스 크랙카를 가지고 갔는데요. 그곳 정상에서 에이스 크랙카를 먹는데요. 아 글쎄, 청설모 한 녀석이 쫄랑쫄랑 제 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그리곤 앞발을 모아 들고 나 좀 하나 달라는 표정으로 서 있지 뭡니깤ㅋㅋㅋ 크랙카 한 조각을 주니까 오몰오몰 바삭바삭거리며 받아 먹더라고요. 넘 귀엽고 기특하더라고요. ㅎㅎㅎ

그래서 산에 갈 때는 한동안 늘 에이스 크랙카를 가지고 가곤 했죠. 에이스 크랙카 은박지를 구겨서 바시락바시락거리는 소리를 내면 그 신호를 듣고 청설모가 어디선가 다가옵니다. 청설모도 에이스 크랙카가 맛있는가 봐요. (아니 아니 인간들이 청설모한테 나쁜 식습관을 들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연식만 해오던 청설모가 인공식인 과자를 먹고 해롭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하더군요.) 어쨌든 언제부턴가 청설모들이 인간과 친해진 것은 분명해요. 저 같은 경우 산에만 가면 청설모들이 다가오는 경험을 합니다. 걔들한테 아무것도 줄 것이 없을 때는 얼마나 아쉽던지요. 그리고 에이스 크랙카(크래카, 크래커)는 참 질리지도 않는 추억의 과자입니다. 지금도 저는 에이스 크랙카를 먹으면서 댓글을 쓰고 있네요 ㅎㅎㅎ

벤투의스케치북 2017-09-08 01:13   좋아요 1 | URL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 뿐이어서...”란 구절이 있는 나희덕 시인의 ‘시월’이란 시 이야기를 했었지요. 아늑하고 고즈넉한 시이지만 다람쥐를 잡아먹는 청설모가 있어 의아하다는 말을 했던 것인데 검색 해보고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에이스 크래커는 예전에 많이도 먹던 것이지요. 달지도 않고 약간 짠 맛이 나는 독특한 맛이 자꾸 입맛을 당기게 한 과자였지요.

청설모와 얽힌 사연이 재미 있습니다. 그것도 교감(交感)이겠지요. 들짐승이나 날짐승들의 입맛을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요. 도심에 산이 있는 도시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고려의 풍수와 조선의 풍수는 다르다는 점이 생각납니다. 고려는 비보(裨補)의 개념이고 조선은 명당(明堂)에 관심을 기울이는 개념이었지요. 아, 나희덕 시인의 ‘시월’도 첫 구절이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산문을 여는 여기...”이지요. 재미 있는 댓글 감사합니다. ^^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신분석의 기법 중 하나인 자유연상(Free Association)이 생각난다. 특히 정치에서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언어, 자유연상을 정신분석에서 중요한 것으로 강조했다.

 

자유연상의 관건은 두서 없이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 소망과 기억 등을 억제하지 않고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의 내로남불도 자유연상으로 볼 수 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합리적인 생각, 책임감 있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머리가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이고 말도 안 되는 생각들에 잠식되었다면 표현하지 말아야 하는데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을 사명이라도 되는 듯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기야 머리에 온통 비이성적인 생각들이 들어차면 자신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정신분석에서는 오류가 (개인의) 진실을 알게 하는 수단이 되지만 공공의 장에서의 그런 자유연상적인 발언은 양식(良識)있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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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음력 7월 보름)가 백중(百中)이었다. 백중은 우란분절(盂蘭盆節)이라고도 한다.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구한, 붓다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목련존자의 효성(孝誠)으로부터 비롯된 절기가 우란분절이다.

“오늘은 우란분절. 효성 깊은 목련존자가/ 아귀도의 고통 받는 어머니를 위해/ 고귀한 불공을 드린 날이었다지, 그후/ 여러 가지 음식을 盆에 담아 조상의 영전이나/ 부처께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다네./ 우란분. 우란분. 심한 고통이라는 뜻이지...

아니면 어머니, 우란분 우란분/ 그 화분 속에 심어/ 내 두개골의 대지 그 아늑한 밀실 속에/ 보관하여 세상풍파 더 이상 미치지 못하도록/ 어머니를 한번 잉태할 수는 없는 것인가...” 오랜만에 다시 읽는 김승희 시인의 ‘우란분절‘의 주요 부분이다.

이 시를 보며 종법질서와 장자 우선 원칙을 고수했던 유교의 효는 어떨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자현스님에 의하면 유교의 효는 아버지에 대한 효, 남성 중심의 효라면 불교의 효는 어머니에 대한 효, 여성과 관련된 효이다.

“이제야 생각납니다./ 기역 니은 디귿! 하고/ 어머님께 매를 맞으면서/ 처음 글씨를 배웠던 일이,/ 첫애를 낳을 때의/ 그 무시무시한 고통과/ 현란을 극한 사랑의 고마움이,...고해를 하고 성찬을 받은 것처럼/ 목숨이 더없이 맑아진 것 같습니다”

김승희 시인의 ‘유서를 쓰며’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이다. 목숨이 더없이 맑아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 모성에 대한 인식이 인상적이다.

자신에게 자리매김된 모성성의 시인이라는 말이 묘하게 불편했다고 말하는 나희덕 시인은 ‘모성성 – 불모성을 건너는 다리’에서 모성도 분명히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시인이 든 예는 모성성을 상징하는 여신 데메테르나 그녀의 할머니 가이아이다.(‘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64, 65 페이지) 보라는 칸딘스키가 “냉각된 빨강”이라 표현한 색이다.(‘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57 페이지)

티에리 베제쿠르는 유럽의 회화는 무엇보다 동일 계열 색의 끝없는 뉘앙스와 미묘한 색조의 변화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한다.(‘풍경의 감각’ 133 페이지)

세상을 고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효율성과 게으름, 상투성도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필요한 것은 유연성과 새로운 시각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다.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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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윤선(允善)님이 올린 실상사(實相寺) 사진을 보고 정끝별 시인의 ‘여운(旅雲)’이란 산문집을 찾아보았다.

5월을 맞이하는 실상사, 지리산 뱀사골 아래의 그 절 연못에 수련(睡蓮)이 떠 있는 사진을 보고 경복궁 향원정, 종묘(宗廟)의 하지(下池), 중지(中池), 상지(上池) 등의 연못 생각을 했다.

여담이지만 내 사는 연천을 漣川이 아닌 蓮川이라 쓴 현판을 단 한 문화 단체를 보고 연꽃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해 그런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맞거나 말거나..

‘여운’에는 우포 이야기도 있다. 실상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곳에 들렀다. 마음으로만. 실상사는 지리산 뱀사골 아래에 있는 절이다. 고정희 시인이 이곳 뱀사골 계곡에서 실족사했다.
‘2003년에 나온 ‘여운’이란 책은 여행지와 관련된 시를 소개하는 책이어서 시도 익히고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게 한다.

손남숙 시인의 시집(‘우포늪’)과 산문집(‘우포늪, 걸어서’)이 반영되기에는 너무 앞서 나온 책이다.

‘우포늪’이란 시집에 실린 시 제목들만 보아도 우포늪의 정경이 그려지는 듯 하다. ‘늪의 수레바퀴’, ‘꽃과 새들이 열람하는 우포늪’, ‘달에 가는 달뿌리풀’, ‘새들의 배경은 물결’....

여름 우포늪의 백미(白眉)라는 가시연꽃을 보려면 내년을 기약할 수 밖에 없겠다. 아니 내 사정이 되어야 여행도 할 수 있겠다.

그제는 숲해설사 공부를 하는, 나의 문화해설사 동기가 레이첼 카슨의 ‘잃어버린 숲’을 숲해설사들의 바이블 같은 책이라 이야기하기에 숲 공부를 하지 않지만 참고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은 트리스탄 굴리(작가이자 내비게이터, 탐험가)의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이란 책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의 부제는 ‘우리 주변에 널린 자연의 신호와 단서들을 알아보는 법’이다.

말하기, 듣기, 보기 등 세 가지 핸디캡을 가졌던 헬렌 켈러가, 못 보는 것은 자신을 사물과 멀어지게 했고 듣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사람과 멀어지게 했다며 듣지 못하는 것이 더 힘들다는 말을 한 기억이 난다.

자연의 신호와 단서들이란 말 때문에 생각해낸 사실이다. 자연(自然)을 생각으로만 향유(享有)하는 버릇은 깨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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