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음력 7월 보름)가 백중(百中)이었다. 백중은 우란분절(盂蘭盆節)이라고도 한다.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구한, 붓다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목련존자의 효성(孝誠)으로부터 비롯된 절기가 우란분절이다.
“오늘은 우란분절. 효성 깊은 목련존자가/ 아귀도의 고통 받는 어머니를 위해/ 고귀한 불공을 드린 날이었다지, 그후/ 여러 가지 음식을 盆에 담아 조상의 영전이나/ 부처께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다네./ 우란분. 우란분. 심한 고통이라는 뜻이지...
아니면 어머니, 우란분 우란분/ 그 화분 속에 심어/ 내 두개골의 대지 그 아늑한 밀실 속에/ 보관하여 세상풍파 더 이상 미치지 못하도록/ 어머니를 한번 잉태할 수는 없는 것인가...” 오랜만에 다시 읽는 김승희 시인의 ‘우란분절‘의 주요 부분이다.
이 시를 보며 종법질서와 장자 우선 원칙을 고수했던 유교의 효는 어떨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자현스님에 의하면 유교의 효는 아버지에 대한 효, 남성 중심의 효라면 불교의 효는 어머니에 대한 효, 여성과 관련된 효이다.
“이제야 생각납니다./ 기역 니은 디귿! 하고/ 어머님께 매를 맞으면서/ 처음 글씨를 배웠던 일이,/ 첫애를 낳을 때의/ 그 무시무시한 고통과/ 현란을 극한 사랑의 고마움이,...고해를 하고 성찬을 받은 것처럼/ 목숨이 더없이 맑아진 것 같습니다”
김승희 시인의 ‘유서를 쓰며’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이다. 목숨이 더없이 맑아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 모성에 대한 인식이 인상적이다.
자신에게 자리매김된 모성성의 시인이라는 말이 묘하게 불편했다고 말하는 나희덕 시인은 ‘모성성 – 불모성을 건너는 다리’에서 모성도 분명히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시인이 든 예는 모성성을 상징하는 여신 데메테르나 그녀의 할머니 가이아이다.(‘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64, 65 페이지) 보라는 칸딘스키가 “냉각된 빨강”이라 표현한 색이다.(‘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57 페이지)
티에리 베제쿠르는 유럽의 회화는 무엇보다 동일 계열 색의 끝없는 뉘앙스와 미묘한 색조의 변화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한다.(‘풍경의 감각’ 133 페이지)
세상을 고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효율성과 게으름, 상투성도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필요한 것은 유연성과 새로운 시각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다.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