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해 11월 4일 오전 우리가 성철스님이라고 불렀던 수도자는 세수(歲首), 82세 법랍(法臘) 59세의 삶을 마치고 그분이 늘 응시하던 불생불멸의 풍광(風光) 속으로 고요히 걸어들어가셨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 시월의 해인사 뜰녘에 선 나는 그분이 ”머지않아 곧 가시겠구나”라는 선명한 예감을 기(氣)로 느꼈다....“

93년 10월 13일 월간 ‘해인(海印)’지(誌)에 실린 일지(一指) 스님의 글이다. 외우는 글인데 오늘 오랜만에 그 글을 보고 머지않아 곧 가시겠구나라는 부분에 인용 부호가 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스님의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에도 실린 저 글을 읽은 지 20년 정도가 되었는데 이제야 발견하다니.. 추정되는 이유라면 인용 부호 정도를 분별할 겨를이 없을 만큼 글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아 곧바로 외운 뒤 그 내용이 있는 부분은 다시 들춰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분의 말씀일까?

올해는 해인(海印) 총림(叢林)이 설립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총림은 수행승들이 한곳에 머물며 수행하는 것을 나무가 우거져 숲을 이루는 모양에 비유한 이름이다.(해인사는 신라의 승려였던 순응과 이정에 의해 802년 세워졌다.)

고려 대장경(大藏經)을 보관하고 있기에 법보 사찰인 해인사의 총림 설립 50년은 우리나라사찰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창덕궁(昌德宮)과 종묘(宗廟) 외의 다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대해서는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는데 해인사에 보관된 고려 대장경과,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장경각(藏經閣)도 세계문화유산이다.(장경각이 지어진 것은 조선시대인 15세기이다.)

오는 10월 10일 오후 1시 해인사 보경당에서 해인 총림 개설 50주년 기념 및 유네스코 등재유산 활용과 가치 학술세미나가 개최된다고 한다.

일지 스님의 산문집인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에 나는 그 후 스님이 쓴 이론서인 ‘중관(中觀) 불교와 유식(唯識) 불교’, ‘붓다 해석 실천’ 등을 읽었다.

이해를 위해 지금도 고투(苦鬪)의 길을 걷고 있지만 탄탄한 논리와 정연함에 흡족하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나는 불교 이론 공부도 해야겠지만 문화유산 공부를 위해서라면 불교 미술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사학자 강우방 박사의 글이 눈길을 끈다. ‘젊은 날 낭만·방황의 진원지’(2002년 6월 17일 중앙일보 강남통신 수록)라는 필자의 글에는 플라타너스, 낙산(駱山)자락, 동숭동 학림(鶴林)다방 등의 단어들이 등장한다.(나무, 사람, 건축물의 유기적 결합!)

앞의 두 단어가 문화 해설과 관련해 내가 최근 들은 것들이라면 지금은 학림(學林) 다방으로 변한 학림(鶴林) 다방의 학림(鶴林)은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곳인 쿠시나가라 사라쌍수(娑羅雙樹)의 숲을 지칭하는 말이다.

최근 정동(貞洞) 유람(遊覽) 중 마로니에가 칠엽수(七葉樹)의 별칭이라는 사실, 불교 1차 결집이 이루어진 칠엽굴(七葉窟)이 주위에 칠엽수가 많아서 불리게 된 이름이라는 사실 등을 알았다.

여태동 기자의 ‘점심 시간엔 산사에 간다’ 등을 참고해 틈나는 대로 사찰에 들르고 싶다. 해설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있을지?

내게 불교 미술서들은 중관, 유식, 아비달마 등의 이론서와 불교 신앙서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게 하는 방편(方便), 궁궐 문화를 더 잘 알게 하는 촉매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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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명절이다. 힘들게 귀성길에 오르는 사람들의 고난의 행군은 올해라고 예외는 아니다. 추석 연휴이지만 나는 올해 설 연휴 시작일인 1월 26일 창덕궁에 갔다 온 생각이 난다.

명절에 궁궐에 다녀온 것은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이 특별해서는 아니다. 정조의 능인 건능이 있는 화성에까지 갈 수 없어 정조와 깊은 연관이 있는 창덕궁, 특히 후원에 들러 인사라도 할 생각에서 다녀온 것일 뿐이다.

정조에게 인사를 하게 된 것은 별다른 사연이 있어서는 아니다. 정조 이야기를 설정한 것이 잘된 선택이었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

아들 문효세자를 곁에 두기 위해 중희당을 지은 이야기, 상조회(賞釣會; 상화조어회賞花釣魚會)를 만들어 규장각 신하들과 창덕궁 후원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꽃구경을 하고 낚시를 하며 시를 지은 이야기 등 정조의 사연을 택해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명절을 즈음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호칭 불평등 또는 호칭 비대칭이다. 아내는 남편의 남자 동생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데 비해 남편은 아내의 남자 동생을 처남이라 부르는 것이 대표적이다. 처남 대신 남편이 아내의 남자 동생을 부르는 존칭이 있는지 모르겠다.

조선 왕실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열에 관심이 간다. 창경궁 공부를 할 때도 그런 점이 대두된다. 창경궁은 성종이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할머니), 예종의 비인 안순왕후 한씨(작은 어머니), 추존왕인 덕종 비인 소혜왕후 한씨(어머니) 등 세 분의 대왕대비를 위해 수강궁 터에 지은 궁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안순왕후와 소혜왕후는 서열을 놓고 갈등했다. 안순왕후는 소혜왕후의 손아래이지만 남편이 왕이 된 경우이고 소혜왕후는 손위이지만 남편이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뒤 아들(성종)에 의해 추존 왕이 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손위, 손아래 여부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 남편이 왕이 되었는지 아닌지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가 문제이다. 창경궁은 정치를 위해 지은 궁이 아니다. 성종이 세 대왕대비를 위해 지은 여성을 위한 궁궐이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비교하는 마음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비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창덕궁과 경희궁을 비교하는 것이 더 실용적이리라.

조선 전기에 경복궁이 정궁이고 창덕궁은 이궁(離宮; 별궁)이었다. 후기에는 창덕궁이 정궁이고 이궁은 경희궁이었다.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은 없을 수 없다. 그렇지만 아니 그렇기에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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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두 시간 시나리오를 장장 13시간에 걸쳐 쉬지 않고 썼다. A4로 열 장을 꽉 채운 분량이다.

손가락이 아파 스마트폰 터치펜으로 타자한 후 pc와 연동된 카톡에 보내서 한글 파일로 정리했다.

다듬고 간추리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어야 하니 끝난 것이 아니다.

궁궐 시나리오를 쓰면서 느끼는 점이 있다. 각 궁궐이 모두 남다른 특징이 있고 애환이 있고 미덕이 있다는 점이다.

지난 9월 17일, 9월 24일 두 주에 걸쳐 정동 일원에서 해설을 하고 놀면서 궁궐이 주는 무게감에서 자유로운 나를 느꼈다.

궁궐은 비극이 횡행했던 공간이다. 그러니 어깨를 누르는 무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오버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궁궐 유람을 하며 또는 해설을 들으며 너무 가볍고 편한 모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창덕궁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만나는 인물이 정조이다. 정조는 내가 좋아해온 군주이지만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논리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정조와 정조 이후‘라는 책은 정조가 세도정치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논리를 편다.

세도 정치는 정조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물론 나는 그의 의도를 좋게 본다.

다만 아직 그 책을 읽지 못했으니 어떤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알아보고 싶다.

너무 역사 이야기를 읽는데 시간을 쓰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자꾸 읽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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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30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궐 시나리오라는 것은 어떤 건가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09-30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들을 해설 듣는 사람들의 취향이나 관심도, 수준 등을 고려해 설명하고 각 전각들과 관계된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들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syo 2017-09-30 09:24   좋아요 1 | URL
그런 일을 하시는 분들이 철저한 준비를 하실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시나리오˝ 라는 단어를 들으니까 어쩐지 더 흥미로워져서 여쭸습니다^^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9-30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목회자 이** 님의 페북에서 구약(舊約) 전공자인 독일 신학자 폰 라트(Gerhard von Rad: 1901 – 1971)의 글을 읽었다.(9월 9일)

이** 님은 창세기 3장 20절에 대한 해설 중 폰 라트의 것이 단연 압권(壓卷)이라 말한다.

창세기 3장 20절은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란 구절이다.

주석서인 ‘창세기(Genesis)’에서 폰 라트는 이런 말을 했다.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신앙 행위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신앙은 징계의 말씀 속에 숨겨져 있고, 가려진 약속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여자의 모성으로 인해 유지되고 지속되는 위대한 기적과 신비로, 노고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끌어 안는 신앙이다.˝

감동적이다. 그런데 폰 라트는 같은 책에서 “야훼 종교의 역사에서 여자들은 애매모호한 점성술을 좋아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말을 하며 그리하여
여자들은 삶의 한계적 상황에 직면했을 때 남자보다 더 유혹에 쉽게 빠지고 애매모호한 신비를 쫓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캐롤 P 크리스트 외 편집 ‘여성과 聖스러움’ 중 필리스 트리블 씀‘ 이브와 아담: 창세기 2 – 3장 다시 읽기’ 참고: 117 페이지)

필리스 트리블은 창조주는 여성을 만든 후 명백히 good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말한다.

강호숙 기독인문학 연구원(硏究院) 박사는 ‘예정론,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기를!’이란 페북 글(9월 6일)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여자로 만드신 것, 그리고 자녀 못 낳는 거 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건데, 왜 여성들을 타박하고 억압하고 정죄하는가?“

이 말은 선택과 유기의 이중 예정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선택(選擇)과 유기(遺棄)의 이중 예정론이란, 필요할 때는 예정론을 내세우고 그렇지 않을 때는 예정론을 무시하거나 도외시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들이 선택받은 것은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것으로 수용하고 여자를 비난할 때는 예정론은 고려하지 않는 것 즉 여자들이 현재 보이는 모습들을 하나님의 섭리(攝理)의 결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용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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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1877 – 1962)와 칼 융(1875 – 1961)은 하나의 프레임으로 보아야 할 작가, 사상가이다.

이런 점은 내가 몇 년 전 읽은 책들과 현재 읽고 있는 책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맹난자 님의 ‘주역(周易)에게 길을 묻다’, 정여울의 ‘헤세로 가는 길’, 김혜령의 ‘불안이라는 위안’...

정확히 말하면 헤세가 융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한다. 융은 자아와 그림자를 말했다.

융이 말하는 자아는 내가 누구라고 인식하는 자신이고 그림자란 내가 보려 하지 않거나 이해하는 데 실패한 부분이다.

누구에게나 대면하기 고통스러운 부분이 있다. 지난 번 네임테스트가 FBI가 나의 지나친 진지함을 범죄로 파악하고 있다는 말을 하며 부연(敷衍)한 설명에도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진지함은 위험하다는 말이다. 모든 진실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어떤 진실이 고통스러운 것이리라.

김명인 교수의 ‘불을 찾아서’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여러 부분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구절이 “입술이 타는 긴장으로 근본적인 문제들과 맞대면하는 방황의 시간이 좀더 허락되기를 바란다.”는 문장이다.

자신의 것이든 사회의 것이든 근본적인 문제들과 맞대면하는 시간은 고통스러운 것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헤세로 가는 길’에서 저자는 헤세가 카프카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말을 한다. 나는 이는 헤세가 온전해지기 위해 치른 노력이라 생각한다.

온전해지는 것은 융이 강조한 바이다. 융은 주역에 능통했고 헤세는 심취했다. ‘불안이라는 위안’은 불안은 위안으로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기쁨이 기쁨에 그치지 않고 슬픔이 슬픔으로 끝나지 않듯 불안도 그렇다고 말한다.

‘주역에게 길을 묻다’는 음이 극에 달하면 양으로 변하고 양이 극에 달하면 음으로 화(化)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두 책의 메시지는 상통한다. 다만 심리학자인 김혜령은 불안, 슬픔 등을 위안으로 바꾸는 인위(人爲)의 지혜를 말한다는 차이가 있다.

융의 주역은 의식과 무의식의 불일치 즉 정신의 분열을 통합하기 위한 차원으로 무의식을 완전히 의식화할 것을 강조한 융이 택한 방법론이다.

나는 서툴지만 주역 대가들의 책이 읽고 싶어지는 것을 보며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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