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1877 – 1962)와 칼 융(1875 – 1961)은 하나의 프레임으로 보아야 할 작가, 사상가이다.

이런 점은 내가 몇 년 전 읽은 책들과 현재 읽고 있는 책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맹난자 님의 ‘주역(周易)에게 길을 묻다’, 정여울의 ‘헤세로 가는 길’, 김혜령의 ‘불안이라는 위안’...

정확히 말하면 헤세가 융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한다. 융은 자아와 그림자를 말했다.

융이 말하는 자아는 내가 누구라고 인식하는 자신이고 그림자란 내가 보려 하지 않거나 이해하는 데 실패한 부분이다.

누구에게나 대면하기 고통스러운 부분이 있다. 지난 번 네임테스트가 FBI가 나의 지나친 진지함을 범죄로 파악하고 있다는 말을 하며 부연(敷衍)한 설명에도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진지함은 위험하다는 말이다. 모든 진실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어떤 진실이 고통스러운 것이리라.

김명인 교수의 ‘불을 찾아서’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여러 부분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구절이 “입술이 타는 긴장으로 근본적인 문제들과 맞대면하는 방황의 시간이 좀더 허락되기를 바란다.”는 문장이다.

자신의 것이든 사회의 것이든 근본적인 문제들과 맞대면하는 시간은 고통스러운 것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헤세로 가는 길’에서 저자는 헤세가 카프카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말을 한다. 나는 이는 헤세가 온전해지기 위해 치른 노력이라 생각한다.

온전해지는 것은 융이 강조한 바이다. 융은 주역에 능통했고 헤세는 심취했다. ‘불안이라는 위안’은 불안은 위안으로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기쁨이 기쁨에 그치지 않고 슬픔이 슬픔으로 끝나지 않듯 불안도 그렇다고 말한다.

‘주역에게 길을 묻다’는 음이 극에 달하면 양으로 변하고 양이 극에 달하면 음으로 화(化)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두 책의 메시지는 상통한다. 다만 심리학자인 김혜령은 불안, 슬픔 등을 위안으로 바꾸는 인위(人爲)의 지혜를 말한다는 차이가 있다.

융의 주역은 의식과 무의식의 불일치 즉 정신의 분열을 통합하기 위한 차원으로 무의식을 완전히 의식화할 것을 강조한 융이 택한 방법론이다.

나는 서툴지만 주역 대가들의 책이 읽고 싶어지는 것을 보며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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