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필가이자 소설가 윌리엄 스타이런. 적나라하고 진실된 우울증 고백서인 그의 대표작 ‘보이는 어둠(Darkness Visible)’은 희망을 주는 책으로 부족함이 없다.

강연 원고를 보완해 만든 이 책에서 저자는 몇 곡의 음악 이야기를 한다. 베토벤, 슈만, 말러의 음악에 고통의 여운이 배어 있으며 바흐의 우울한 칸타타에도 어김 없이 우울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우울하거나 슬플 때 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 2악장(농담이란 뜻을 가진 스케르초 악장),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3악장,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3악장 등 경쾌한 곡들을 듣는 나도 사실 이 곡들이 진정 밝은 곡인지 장담하지 못한다.

스타이런이 이야기한 작곡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나는 슈만 첼로 협주곡의 잔잔한 슬픔과 우울이 좋고, 말러 교향곡들의 깊은 슬픔이 좋다.

스타이런은 브람스의 ‘알토 랩소디’를 듣고 즐거움이 범람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실 브람스의 곡들은 환희와 밝음보다 우울과 슬픔에 더 가깝다. 그의 곡들을 듣기 좋은 시기가 따로 있지는 않지만 시월이 가기 전에 그의 교향곡 4번을 들어야겠다.

지난 6개월 사이에 거의 듣지 못했지만 이 곡을 매일 듣던 때가 있었다.

우울감을 충전한다면 이상하겠지만 힘이 되는 슬픔을 위해서 곡을 들은 것이라 하면 오해의 소지가 없겠다. 잠시 음악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할 것 같은 시월의 마지막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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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한 숲 해설사 선생님과 대화를 할 기회를 가졌다. 이 대화를 통해 내가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평소 시(詩)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나무에 관한 문학작품을 찾아 시의 영역으로도 찾아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는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나오는 나희덕 시인의 ‘해미읍성에 가시거든’을 아는지 물은 결과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미읍성에 가시거든’에는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 말 천주교 신자들을 죽이는데 쓰인 회화나무와, 사람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느티나무를 대비시킨 이 시는 구별하기 어려운 데다 괴(槐)라는 글자를 함께 쓰는 두 나무가 우연히(?) 배치된 작품이어서 눈길을 끈다.
몸을 베푼다는 말을 다시 기억하며 찾게 된 시가 김수우 시인의 ‘단풍든다는 것은’이다.

숲 해설에 자료로 쓰기 위해 검색하는 분들은 검색창에 나무 또는 특정 나무를 칠 것이다. 단풍이란 말을 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을 것 같다.

시인은 단풍든다는 것은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과 마주 앉는 일, 물든다는 건 모든 삐걱이는 슬픔에게 저벅저벅 돌아가는 일이라는 말을 한다.

단풍든다는 것은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라고 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 궁금하다.

단풍도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과 마주 앉는 일이라 말하든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라 말하든 분명한 것은 단풍을 슬픔과 연결지었다는 점이다.

단풍은 아름답기에 상실(喪失)의 슬픔을 망각하게 하는지도 모르는 것일까?

그렇기보다 그런 내력은 다 알지만 모른 척 하는 것이리라.

아니 차옥혜 시인처럼 단풍을 곱다고, 반짝인다고 말한뒤 마지막 부분에서 ˝단풍 든 목숨의 빛이/ 찬란하고 아프다˝(‘숲 거울‘ 수록 ‘단풍 든 목숨의 빛‘에서)고 말하기 위해 숨을 고르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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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분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군(郡) 도서관이 어떤 때는 멀게 느껴진다.

아니 멀지만 참고 가는 것이다. 왕복 40분이 걸리는 그 도서관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 책을 빌리고 반납하던 해가 있었다.

지난 2007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심리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지금은 한 달에 두, 세번 가는 정도이다.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책을 대하는 마음, 빌리는 책과 사는 책의 비율, 체력, 책을 대하는 요령 등등에서.

이런 점들에서의 변화 때문에 도서관을 덜 찾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나는 책을 소중히 여긴다.

다만 빌리는 책보다 사는 책이 더 많아졌으며 체력은 나빠졌으며 많이 세련되고 효율적으로 책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든 반납 기한인 어제 연체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집 가까운 곳의 반납함에 책을 넣고 도서관에 전화했다.

반납함의 책은 바로 수거처리되지 않아 이틀이나 사흘 정도 연체가 될 수 밖에 없는데 반납함에 넣은 사실, 그리고 그렇게 한 배경과 심경 등은 당연히 알리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 전화한 것이다.

직원은 내 이름을 듣더니 도서관 이용 많이 하는 분이시죠? 연체 처리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을 했다.

우수(?) 고객에 대한 예의 차원의 조치인가? 감사한 일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지만 가까운 반납함에 책을 넣은 데에는 심리적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다.

나는 이를 적당한 선에서의 퇴행이라 부르고 싶다. 컨디션을 회복한 후 서울의 서점에 가서 가장 최신의 책들을 살 것이라는 생각도 작용했지만 조금 쉬고 싶은 마음이 작용한 것이 메인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가을이 깊어간다. 여행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는 내게 최선은 여행하며 책을 읽는 것이다.

하지만 컨디션이 좋아질 때까지 여행은 미루기로 한다. 유보가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이름의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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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0-30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애용하는 우수 고객을 위한 멋진
서비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원 분의 아름다운 응대였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10-30 14:3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좋은 해석입니다.. 감사합니다..
 

울프 마이어의 ‘서울 속 건축‘이란 책에서 흥미로운 개념을 만났다. 건축물이라는 나무, 도시라는 숲이란 개념이다.

지난 번 정동 해설에서 풍수지리를 이야기하며 나는 서울시립미술관, 정동 제일교회, 주한 캐나다 대사관, 정동극장, 이화여고, 프란치스코 회관 등 정동의 주요 건축물들이 정동이 명당이어서 그 자리에 모인 것도 아니고 정동을 명당으로 만들기 위해 모인 것도 아니지만 시기와 사연을 달리해 들어선 그 건축물들이 결과적으로 정동을 명당이 되게 했다는 말을 했다.

나는 명당을 만드는 풍수에 관심이 많다. 이를 비보 풍수라 한다. 지세가 약한 곳에 나무를 심고 절을 짓고 제방을 쌓는 것 등이 비보 풍수의 개념이다.

100페센트 길지(吉地)도 없고 100퍼센트 흉지(凶地)도 없다. 그러니 만든다는 표현은 사실 덜 좋은 땅을 더 좋게 한다는 의미이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숲 밖으로 나가거나 외부인에게 물어야 한다.

독일인 건축가인 울프 마이어는 우리의 숲인 서울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외부인으로 선정된 사람이다.

울프 마이어가 쓴 책의 특징은 서울 전 구의 주요 건축물들을 소개했다는 데 있다.

한편 서울 외곽의 파주, 안양, 인천, 과천, 성남, 수원, 양주 등의 건축물들도 소개되었는데 내가 사는 연천과 접경한 파주를 보며 나는 연천의 상대적 낙후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중구는 몇 차례의 해설을 통해 많이 친근해진 곳이다. 그런가 하면 자주 찾아 많이 안다고 할 수 있는 가나아트센터, 서울역사박물관, 교보빌딩, 세종문화회관 등 종로의 건축물들은 체계적으로 알고 싶다.

서울 건축물들도 중구, 종로구, 강남구, 마포구, 서초구 등의 것이 많고 상대적으로 다른 구들의 건축물들은 적게 다루어졌다.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 사실을 담은 ‘서울 속 건축‘은 공부한다기보다 놀이하듯 읽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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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17-10-30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벤투님 글은 이따금 읽었지만 오늘 첨 댓글 남깁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랑 비교적 가까운 데 사셔서 반가워서요.
저도 형편이 나빠져서 서울에서 밀려나 동두천에서 산 지 이제 여덟달 반이네요.
알라디너 분들 가운데 동두천,연천 사시는 분은 첨 봐서 그냥 댓글 한 번 달아 봤어요.
안녕히 계세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10-30 14:30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동두천은 어떠신지요?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최근 번역, 출간된 ‘보이지 않는 고통’의 원제는 ‘pain and prejudice’이다. ‘고통과 편견‘으로 번역되는 이 제목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으로부터 영감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번역본의 제목을 원제와 다르게 짓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고통과 편견’처럼 문학적 멋이 담긴 제목은 원제대로 ‘고통과 편견’으로 설정했어야 한다는 점에서 아쉽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그런 점을 크게 아쉬워했지만 지금 나는 그런 점을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보이지 않는 고통’에서 주목할 부분은 여럿이지만 불확실성 강박이란 개념이 특히 눈길을 끈다. 과학자들이 단도직입적이고 완전무결한 진술을 하지 않도록 훈련받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결국 약자가 당면하는 고통스런 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어떻든 그런 변화(본질적인 면이 아닌 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는 ‘마네와 모네’ 읽기에서도 확인되었다.

‘마네와 모네‘는 마네와 모네라는 두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들을 분석한 책인데 사진기와 튜브 물감, 기차 등이 인상주의 그림에 미친 영향, 빛을 그린(또는 빛에 주목한) 화가 모네가 백내장에 걸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및 백내장이 모네의 그림에 미친 영향에 대한 글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사진기의 정확성을 따를 수 없었기에 사진기가 낼 수 있는 특징과는 다른 특징에 주목해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고 튜브 물감이 발명됨으로써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여건이 마련되었으며 기차가 발명됨으로써 화가들이 야외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초점이 다른 곳에 맞춰진 것이라 보면 좋다. 다른 곳에서 읽은 내용이 없다고 해서 아쉬워하는 것은 동어반복적 욕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나는 바라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그리고 또 그린 모네의 인내심과 의지를 높이 산다.

모네는 빛이 시시각각 대상에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던 화가이다.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종일 수련을 그리고 또 그렸다.

당시 모네는 큰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70대의 노인이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그가 가졌던 작업에 대한 도취를 중단시켰다.

이 장면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마(魔)의 산(山)을 내려오는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를 그린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의 종말부를 연상하게 한다.

지금 나는 예전보다 더욱 미술과 음악, 소설 등을 함께 보는 것에 마음이 간다. 마네가 벨라스케스를 우상으로 여겼다는 부분을 읽으며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을 분석한 것을 떠올렸으니 미술과 음악, 소설, 그리고 철학 등을 함께 보는 것에 더욱 마음이 간다고 해야겠다.

물론 푸코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분석은 어려운 부분이니 명실상부(名實相符)한 관심이 되도록 철학 공부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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