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한 숲 해설사 선생님과 대화를 할 기회를 가졌다. 이 대화를 통해 내가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평소 시(詩)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나무에 관한 문학작품을 찾아 시의 영역으로도 찾아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는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나오는 나희덕 시인의 ‘해미읍성에 가시거든’을 아는지 물은 결과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미읍성에 가시거든’에는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 말 천주교 신자들을 죽이는데 쓰인 회화나무와, 사람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느티나무를 대비시킨 이 시는 구별하기 어려운 데다 괴(槐)라는 글자를 함께 쓰는 두 나무가 우연히(?) 배치된 작품이어서 눈길을 끈다.
몸을 베푼다는 말을 다시 기억하며 찾게 된 시가 김수우 시인의 ‘단풍든다는 것은’이다.
숲 해설에 자료로 쓰기 위해 검색하는 분들은 검색창에 나무 또는 특정 나무를 칠 것이다. 단풍이란 말을 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을 것 같다.
시인은 단풍든다는 것은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과 마주 앉는 일, 물든다는 건 모든 삐걱이는 슬픔에게 저벅저벅 돌아가는 일이라는 말을 한다.
단풍든다는 것은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라고 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 궁금하다.
단풍도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과 마주 앉는 일이라 말하든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라 말하든 분명한 것은 단풍을 슬픔과 연결지었다는 점이다.
단풍은 아름답기에 상실(喪失)의 슬픔을 망각하게 하는지도 모르는 것일까?
그렇기보다 그런 내력은 다 알지만 모른 척 하는 것이리라.
아니 차옥혜 시인처럼 단풍을 곱다고, 반짝인다고 말한뒤 마지막 부분에서 ˝단풍 든 목숨의 빛이/ 찬란하고 아프다˝(‘숲 거울‘ 수록 ‘단풍 든 목숨의 빛‘에서)고 말하기 위해 숨을 고르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