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번역, 출간된 ‘보이지 않는 고통’의 원제는 ‘pain and prejudice’이다. ‘고통과 편견‘으로 번역되는 이 제목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으로부터 영감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번역본의 제목을 원제와 다르게 짓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고통과 편견’처럼 문학적 멋이 담긴 제목은 원제대로 ‘고통과 편견’으로 설정했어야 한다는 점에서 아쉽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그런 점을 크게 아쉬워했지만 지금 나는 그런 점을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보이지 않는 고통’에서 주목할 부분은 여럿이지만 불확실성 강박이란 개념이 특히 눈길을 끈다. 과학자들이 단도직입적이고 완전무결한 진술을 하지 않도록 훈련받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결국 약자가 당면하는 고통스런 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어떻든 그런 변화(본질적인 면이 아닌 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는 ‘마네와 모네’ 읽기에서도 확인되었다.
‘마네와 모네‘는 마네와 모네라는 두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들을 분석한 책인데 사진기와 튜브 물감, 기차 등이 인상주의 그림에 미친 영향, 빛을 그린(또는 빛에 주목한) 화가 모네가 백내장에 걸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및 백내장이 모네의 그림에 미친 영향에 대한 글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사진기의 정확성을 따를 수 없었기에 사진기가 낼 수 있는 특징과는 다른 특징에 주목해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고 튜브 물감이 발명됨으로써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여건이 마련되었으며 기차가 발명됨으로써 화가들이 야외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초점이 다른 곳에 맞춰진 것이라 보면 좋다. 다른 곳에서 읽은 내용이 없다고 해서 아쉬워하는 것은 동어반복적 욕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나는 바라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그리고 또 그린 모네의 인내심과 의지를 높이 산다.
모네는 빛이 시시각각 대상에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던 화가이다.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종일 수련을 그리고 또 그렸다.
당시 모네는 큰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70대의 노인이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그가 가졌던 작업에 대한 도취를 중단시켰다.
이 장면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마(魔)의 산(山)을 내려오는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를 그린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의 종말부를 연상하게 한다.
지금 나는 예전보다 더욱 미술과 음악, 소설 등을 함께 보는 것에 마음이 간다. 마네가 벨라스케스를 우상으로 여겼다는 부분을 읽으며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을 분석한 것을 떠올렸으니 미술과 음악, 소설, 그리고 철학 등을 함께 보는 것에 더욱 마음이 간다고 해야겠다.
물론 푸코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분석은 어려운 부분이니 명실상부(名實相符)한 관심이 되도록 철학 공부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