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이 없던 시절 나는 블로그를 출판사 열화당(悅話堂)에 영감을 준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 구절인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란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친척들의 정겨운 말을 들으며 즐거워 한다는 의미인데 지금의 SNS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페북은 부처님이 하신 "와서 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사실 블로그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다툼, 갈등 등이 없을 수 없다.) 내 친구들은 대체로 진지한 분들이기에 크게 관련이 없지만 페북은 블로그에 비해 기동력 있는 짧은 글들이 주류를 이룬다. "와서 보라"는 말은 자신감의 표현인데 이는 사방팔방으로 트인 페북 공간에 잘 맞는 말 같다.


그런데 자신감이 과도해 영악하기까지 한 현대적 마인드를 과거로 투사해 이완용의 매국을 국력 키우기의 일환으로 보는 사람도 눈에 띈다. '우리'는 고려하지 않고 강국의 패권적 힘을 우리 것으로 착각하는 미망(迷妄)이 아닐 수 없다.(물론 사학자 김윤희 박사의 말처럼 대한제국의 정치 구조 속에 배태되어 있던 문제들을 이완용 개인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이완용을 제외한 다른 책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 내 페친 중에 그의 비상식적인 글에 '좋아요'를 클릭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 다행이다. 최광임 시인의 경우처럼 "제법 친한" 분을 페삭하는 안타까움을 겪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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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20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북은 누구나 글과 사진을 올리면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을 수 있고, 그런 분위기에 취해 자만심을 가지게 되는 무서운 공간입니다. 쌍방향 의사소통이 원활한 공간이라고 해도 자신의 귀에 듣기 싫은 의견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09-20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습니다. 페북이 치열한 인정투쟁의 장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인품도 갖추어야 할 사람들이 꽤 있지요. 감사 합니다 .
 

 

미국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였던 플로이드 델(Floyd Dell: 1887 - 1969)이 "한가함이란 어떤 할 일도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Idleness is not doing nothing. Idleness is being free to do anything.)"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생각한 것은 일본 임제종 소속 승원사(承元寺: 죠겐지)의 주지인 시게마츠 소이쿠(重松宗育: 1943 - )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무아(無我)는 무기력하고 무감동이며 허무주의적인 삶의 자세가 아닙니다. 무아의 인간은 머리가 텅 빈 로봇 인간이 아닙니다. 무아는 대자연 전체의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서 생겨 나는 유일한 개(個)에 대한 자각입니다. 즉 지금 이곳에 있는 나(에 대한 자각)입니다."('앨리스 선(禪)을 말하다' 47 페이지) 설명이 필요 없는 부분이기에 추가하면 불필요한 덧칠을 하는 것일 수 있어 소이쿠의 책은 가도와키 가키치(門脇佳吉)의 '선(禪)과 성서'와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라는 말 정도를 덧붙이게 된다. 소이쿠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선을 말하다', '어린 왕자 선을 말하다','(미하엘 엔데의) 모모 선을 말하다'에 이어 앞으로 어떤 책을 선으로 풀이할지 기대 만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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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수국
김정수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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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금은 아산이 된 온양(溫陽)에서 태어나 성장 후 결혼해 남양주(南楊州)의 시댁으로 들어가 살게 된 김정수 작가(수필가). 이 분은 자신의 생을 온통 빛과 볕을 향해 있었던 향일성 식물 같은 삶으로 소개한다. 저자는 남양주를 ‘남쪽의 빛 고을’로 풀이한다. 물론 남양주의 양은 볕 양(陽)이 아닌 버드나무 양(楊)이다. 양(楊: 버드나무) 자체에는 빛이나 볕을 의미하는 바가 없지만 양수(陽樹)로 통하는 것을 감안하면 할 수 있는 연결이라 할 수 있다.


양수는 하루에 3에서 5시간 직사광선을 받아야 하는 나무이다. 버드나무는 극(極)양수라고 한다. 양수는 그늘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이고, 음수(陰樹)는 그늘을 잘 견디는 나무이다. 이 분의 수필집 ‘청색 수국’은 여행을 많이 하고 삶의 현장에서 깨달음을 얻어내는 데 능한 60 중반의 여성 작가의 섬세한 일상성을 풍족하게 접할 수 있는 책이다.

 


수필은 essay와 miscellany로 나눌 수 있다. 흔히 essay를 중(重)수필, miscellany를 경(輕)수필이라 칭하는데 나는 essay는 사색을 위주로 하는 관념적인 수필, miscellany는 체험을 위주로 하는 실제적인 글로 나누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miscellany에 속하는 ‘청색 수국’의 특징은 그야말로 일상에서 소재들을 취한 책으로 서평, 영화평, 여행기 등과 거리를 갖는다. 이 책의 특징은 쉽고 잔잔한 감동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짧은 글들이 대종(大宗)을 이룬다는 점도 특징이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힘을 빼고 편하게 쓴 수수한 분위기의 글들이 읽는 사람들을 차분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글이라 해서 쉽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입천출(深入賤出: 깊이 공부하고 쉽게 설명하는 것)이란 말이 알게 하듯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참고로 나는 심입천출보다 심찬이시(深撰易施)라고 부른다. 撰은 지을 찬, 施는 베풀 시이다. 깊이 생각하고(짓고) 가려내 쉽게 (베)풀어보인다는 의미이다.


어떻든 miscellany이기에 당연히 체험 특히 가족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표제작인 ‘청색 수국’을 보자. 저자는 수국은 음지를 더 좋아하는 식물이라는 말로 글을 시작한다. 수국은 토질에 따라 흰색, 보라색, 붉은색, 청색 등으로 피어난다고 한다.(106 페이지) ‘청색 수국’은 아파트 앞 화단에 버려진 수국을 데려다 정성으로 키워 청색 수국을 피워낸 저자의 희로애락이 담긴 이야기이다.


저자는 청색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신비와 동경을 상징하는 노발리스의 ‘푸른 꽃‘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나 역시 청색을 좋아한다, 보라색이 신비하다고 하지만 이제는 청색이 더 그렇게 느껴진다. 신비와 동경은 깨지기 마련인지 저자가 애지중지 키우고 애틋하게 대하던 그 꽃이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고 말았다. 저자는 그를 무정한 사람이라 표현한다.


수국을 볕이 드는 곳으로 옮겨주어 문제의 그 사람의 눈에 띈 것이 발단이 된 그 사건을 저자는 볕으로 향하는 자신의 “잠재의식“이 만들어낸 일이라 표현한다. 이 글을 읽고 생각한 시가 있다. 배현순 시인의 ’봄‘이란 시이다. ”여린 연둣빛 봄/ 아장아장 새순 움트려 왔다가/ 호르르 가 버리는구나// 내 탓이구나/ 내가 너무 귀찮게 했구나/ 꽃이 만개했다고 속절없이/ 재잘 거렸구나//


형형색색 고운 빛에 취해/ 만지지 말라는 것을/ 그만, 손대고 말았구나/ 여리고 민감한 네게 거친 호흡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했으니/ 꽃물이 되어 버리고 마는 붉은 눈물/ 바라보기 가슴이 에는구나// 미처 몰랐다/ 나로 인해“ 서른 막바지에 이르러 곧 마흔살이 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저자는 그 허망함을 달래기 위해 문학 강의를 들으러 가서 만난 문단의 선배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나는 육십대에 수필을 쓰기 시작했어. 지금 제비꽃 나이잖아. 앞으로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어. 그러니 어서 글 써.“ 어렵게 등단한 뒤 20년간이나 글을 쓰지 않은 저자는 이 말에 힘을 얻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수필의 힘은 이런 데서 찾을 수 있으리라. 저자는 쓰는 일을 계속할 것이라 한다. ”절망은 견디기 힘든 일이긴 하지만, 때로는 쓸쓸한 가슴을 정화시켜주는 청량제가 되어주기도 하는 모양.“이라고 말하는 저자. ”나에게도 언젠가 꽃이 활짝 피어나는 봄이 오리라. 아직도 믿고 있다.“는 저자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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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스승의 말씀을 듣기 위해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다가 한 시간도 안 되어 비활성화(탈퇴) 조치했다.(aqueous1091이란 아이디로. 이 단어는 물을 함유한다, 수성水性의 등을 의미. aqueous humor는 각막과 수정체 사이의 액체로 수양액水樣液이라 한다. 이 액체가 제대로 배출되지 않으면 녹내장에 걸릴 수 있다. 발음인 에이퀴어스는 꼭 A queers로 들린다.) 다음 카페에서 접할 수 있는데 굳이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던 것은 모바일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비활성화하기 전에 두 명이 나를 팔로우했다는 사실에 아무 글도 올리지 않은 나를 왜? 란 생각이 들었다. 비활성화하려 하니 정말 떠나시는건가요?란 문구가 떴다. 순간 찡한 마음이 들었다.(참 마음이 약하다.) 대신 애플리케이션 스토어에서 다음 카페를 검색해 설치하고 웹에서처럼 이용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 모바일에서의 만남이지만 헤어지는 것은 아쉽다. 사실 블로그, 카페,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카카오톡 등을 이용하기에 트위터(또는 인스타그램)까지 할 필요는 없다. 그냥 개인사에 기록할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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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라는 환상 - 문명화의 의례와 권력의 공간 경성대문화총서 43
캐롤 던컨 지음, 김용규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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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가 캐롤 던컨의 미술관이라는 환상은 의례(儀禮)적 구조에 초점을 맞추어 미술관을 분석한 책이다. 저자가 말하는 미술관이란 미술 갤러리(art gallery)와 박물관(museum)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미국의 방식에 따른 것이다. 이 책에서 의례란 특별한 목적에 따라 섬세하게 구획되고 설계된 방식을 말한다. 이는 정치(적 의도)와 무관한 듯 보이는 미술관이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 그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보스턴 미술관, 시카고 미술관 등 미국의 미술관들이 보인 차이점을 부르주아적 문화양식과 귀족적 문화양식이 서로 분명한 대결구도를 이루고 있던 담론 속에서 설명한다. 루브르 박물관은 궁전을 개조해 만든 공공미술관의 대표적 사례이다. 저자에 의하면 프랑스의 공공미술관 즉 루브르 박물관에서 관람자들은 미술관이라는 형식 속에 구현된 국가 그 자체와 마주친다.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 절대주의의 종말을 상징한다. 프랑스의 부르주아는 절대 왕정을 전복시키고 역사의 주체로 등장했다. 루브르의 전례를 따라 유럽 전역에서 일련의 국립 갤러리들이 설립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이 창립됨으로써 국민적 소장품에 대한 영국민들의 소망이 강화되었다. 영국의 부르주아는 왕과 귀족들을 압도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영국 의회는 처음에 내셔널 갤러리를 설립하는데 거부감을 가졌다. 내셔널 갤러리를 설립할 경우 군주에게 해방자의 면모를 제공할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다.


1824년 결국 영국에서 내셔널 갤러리가 설립되었다. 영국이 정치 발전을 통해 보편적 가치 아래 통합된 하나의 국민을 상징할 수 있는 최상의 기념물이 갖는 이점들을 깨달았을 때 내셔널 갤러리는 비로소 루브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저자에 의하면 공공 미술관은 도덕적, 정신적 계몽을 찾아 입장하는 가장 이상적인 차원에서 자기개선적이고 자율적이며 정치적 힘을 가진 남성적 개인의 정체성을 연기하고 의례적으로 수용할 것을 촉구한다.


미국의 경우 부르주아 입장에서 타도할 절대 권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공공미술관은 엘리트들에게 명확한 계급적 경계를 제공하는 동시에 계급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미국의 경우 금융 자본가 J. P 모건 등의 기증자 기념 미술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미국의 공공미술관은 미국 금융 자본주의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그것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욕구를 이해한 실력가들에게 기념관으로 작용했다.


그럼 다른 나라들에서 미술관은 어떤 위상을 보이는가? 저자는 현대 미술관의 의례적 각본이 정확히 남성 지향적인 신화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의하면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MoMA: the museum of modern art)을 비롯한 다른 미술관들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현대미술의 역사는 명백하면서 동시에 은밀한 방식으로 남성들을 특권화하기 위해 구축된 구성물이다.


현대 미술관들에 전시되는 그림의 상당수는 여성을 모델로 한 것들이다. 물론 여성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대상으로 그려지고 남성은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대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저자가 말했듯 광고(주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에 의해 구축된 세계와 현대 미술관 내부에서 구성된 세계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미술관의 공간은 한번 싸워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공간임을 선언한다.


다음의 문장을 보자. 물론 모든 것은 관람자가 이들 작품들을 의례적 인공품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그리고 그들이 작품, 작품의 표면과 구도와 상징, 그리고 예술적 선택의 다른 형식을 통해 예술가의 정신적, 형식적 투쟁과 동일시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224 페이지) 이 문장은 미술관을 싸워볼 만한 공간으로 선언하는 저자의 의도에 잘 들어맞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억압되었다기보다 미학적인 것 속에 숨겨진 도덕적인 것(222 페이지)을 읽어낼 수 있는 눈이다. 미술관이 의례 공간인 것은 관람객을 특정 이데올로기를 연기하고 그 정체성을 수용하게 하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고 환상의 공간인 것은 그런 의도를 감추기 때문이다. 던컨의 책은 셀린 들라보의 착각을 부르는 미술관과 조경진의 예술은 어떻게 거짓이자 진실인가?,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등을 읽고 싶게 한다. 이슈를 던져주는 좋은 책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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