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이라는 환상 - 문명화의 의례와 권력의 공간 경성대문화총서 43
캐롤 던컨 지음, 김용규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미술사가 캐롤 던컨의 미술관이라는 환상은 의례(儀禮)적 구조에 초점을 맞추어 미술관을 분석한 책이다. 저자가 말하는 미술관이란 미술 갤러리(art gallery)와 박물관(museum)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미국의 방식에 따른 것이다. 이 책에서 의례란 특별한 목적에 따라 섬세하게 구획되고 설계된 방식을 말한다. 이는 정치(적 의도)와 무관한 듯 보이는 미술관이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 그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보스턴 미술관, 시카고 미술관 등 미국의 미술관들이 보인 차이점을 부르주아적 문화양식과 귀족적 문화양식이 서로 분명한 대결구도를 이루고 있던 담론 속에서 설명한다. 루브르 박물관은 궁전을 개조해 만든 공공미술관의 대표적 사례이다. 저자에 의하면 프랑스의 공공미술관 즉 루브르 박물관에서 관람자들은 미술관이라는 형식 속에 구현된 국가 그 자체와 마주친다.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 절대주의의 종말을 상징한다. 프랑스의 부르주아는 절대 왕정을 전복시키고 역사의 주체로 등장했다. 루브르의 전례를 따라 유럽 전역에서 일련의 국립 갤러리들이 설립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이 창립됨으로써 국민적 소장품에 대한 영국민들의 소망이 강화되었다. 영국의 부르주아는 왕과 귀족들을 압도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영국 의회는 처음에 내셔널 갤러리를 설립하는데 거부감을 가졌다. 내셔널 갤러리를 설립할 경우 군주에게 해방자의 면모를 제공할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다.


1824년 결국 영국에서 내셔널 갤러리가 설립되었다. 영국이 정치 발전을 통해 보편적 가치 아래 통합된 하나의 국민을 상징할 수 있는 최상의 기념물이 갖는 이점들을 깨달았을 때 내셔널 갤러리는 비로소 루브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저자에 의하면 공공 미술관은 도덕적, 정신적 계몽을 찾아 입장하는 가장 이상적인 차원에서 자기개선적이고 자율적이며 정치적 힘을 가진 남성적 개인의 정체성을 연기하고 의례적으로 수용할 것을 촉구한다.


미국의 경우 부르주아 입장에서 타도할 절대 권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공공미술관은 엘리트들에게 명확한 계급적 경계를 제공하는 동시에 계급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미국의 경우 금융 자본가 J. P 모건 등의 기증자 기념 미술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미국의 공공미술관은 미국 금융 자본주의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그것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욕구를 이해한 실력가들에게 기념관으로 작용했다.


그럼 다른 나라들에서 미술관은 어떤 위상을 보이는가? 저자는 현대 미술관의 의례적 각본이 정확히 남성 지향적인 신화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의하면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MoMA: the museum of modern art)을 비롯한 다른 미술관들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현대미술의 역사는 명백하면서 동시에 은밀한 방식으로 남성들을 특권화하기 위해 구축된 구성물이다.


현대 미술관들에 전시되는 그림의 상당수는 여성을 모델로 한 것들이다. 물론 여성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대상으로 그려지고 남성은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대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저자가 말했듯 광고(주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에 의해 구축된 세계와 현대 미술관 내부에서 구성된 세계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미술관의 공간은 한번 싸워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공간임을 선언한다.


다음의 문장을 보자. 물론 모든 것은 관람자가 이들 작품들을 의례적 인공품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그리고 그들이 작품, 작품의 표면과 구도와 상징, 그리고 예술적 선택의 다른 형식을 통해 예술가의 정신적, 형식적 투쟁과 동일시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224 페이지) 이 문장은 미술관을 싸워볼 만한 공간으로 선언하는 저자의 의도에 잘 들어맞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억압되었다기보다 미학적인 것 속에 숨겨진 도덕적인 것(222 페이지)을 읽어낼 수 있는 눈이다. 미술관이 의례 공간인 것은 관람객을 특정 이데올로기를 연기하고 그 정체성을 수용하게 하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고 환상의 공간인 것은 그런 의도를 감추기 때문이다. 던컨의 책은 셀린 들라보의 착각을 부르는 미술관과 조경진의 예술은 어떻게 거짓이자 진실인가?,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등을 읽고 싶게 한다. 이슈를 던져주는 좋은 책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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