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화제의 책 ‘괴델, 에셔, 바흐’의 개역판이 나왔다. 원작이 나온 것은 1979년, 첫 번역본이 나온 것은 1999년, 개역판이 나온 것은 2017년이니 원작과 첫 번역본, 첫 번역본과 개역판 사이에는 각각 20년과 18년의 세월이 가로 놓인 것이다.

1999년 나온 첫 번역본은 번역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 비등(沸騰)했었다.

물론 이번에는 좋은 번역이라는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새 번역자가 번역을 맡은 것이 아니라 ‘첫 번역자 + 공동 번역자 한 분‘의 시스템으로 번역이 이루어진 것이 특이하다.

번역에 문제가 있었다 해도 새로운 분 홀로 전면적으로 책을 새롭게 번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두 필지(筆地)의 땅을 마련한 뒤 한 필지에만 건물을 짓고 20년이 지나면 그 건물을 지은 사람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해당 건물을 보며 비워두었던 필지에 똑같은 건물을 짓고 옛 건축물은 허무는 식년천궁(式年遷宮) 방식을 택하는 일본의 이세 신궁(神宮)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 잘못된 번역본을 읽고 감동받았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런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

사실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나조차 원서를 찾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을 만큼 우리 나라 번역서들의 수준은 문제가 있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구절을 보며 내 문해(文解) 능력을 탓하기도 했고 해당 책을 쉽게 해설한 책을 찾아 읽기도 했고 내공이 쌓이고 읽으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며 나를 다독거리기도 했다.

물론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 실력을 자랑하는 전문 번역가의 책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잘 된 번역서와 엉터리 번역서의 비율이 문제는 아니다. 번역이 잘못된 단 한 권의 책만으로도 문제는 충분하다.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겠다. 그 문제 많은 번역본을 술술 잘 읽었다는 경우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는 경우로.

다만 진도가 나가지 않아 힘들었다는 사람들 가운데는 잘 된 번역본으로 읽어도 이해력 자체가 떨어져 읽기에 어려움을 드러낼 부류들도 있을 것이다.

’괴델, 에셔, 바흐‘는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그림,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캐논을 관통하는 ‘이상한 고리‘를 통해서 우리의 의식이라는 신비를 파헤치는 책이다.

이제 읽다가 그만 두었던 첫 번역본의 기억은 버리고 새 번역본을 읽어야겠다. 내 현주소를 확인할 기회이다. 괴델, 에셔, 바흐 모두 경탄할 만한 인물들이기에 기대 만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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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와 사직 - 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 규장각 인문강좌 1
강문식.이현진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조선의 국가 제사 체계에서 가장 격이 높고 중요한 대상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에 따라 배치되었다. 여기서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군주남면(君主南面)이다. 사직은 토지 신인 와 곡식 신인 으로 구성된 말이다.

 

사람은 토지가 없으면 살 곳이 없고 곡식이 없으면 먹을 수 없다. 종묘와 사직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위상이 높을까? 사직이다. 이는 조선에만 있었던 특징이다. 중국에서는 종묘, 사직 외에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제단인 환구(圜丘), 땅에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제단인 방택(方澤)이 더 있었다.

 

중국의 경우 환구, 방택, 사직, 종묘의 순서로 위상이 매겨져 있었다. 사직은 조선이 제후국이었던 관계로 하지 못했던 환구와 방택을 실질적으로 담당했던 제사이다. 토지와 곡식은 전통 시대 국가 경제의 기본이었다. 반면 종묘 제사는 국왕과 혈연적으로 연결된 왕실 선조들을 대상으로 한 사적(私的)인 것이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종묘 제사가 사직 제사보다 더 중시되었다. 좌묘우사는 주례(周禮)’의 원칙이다. 반면 천자(天子) 7(), 제후(諸侯) 5()예기(禮記)’의 원칙이다. 조선은 불천지주(不遷之主)를 적절히 활용하여 오묘 제도를 유지했다. 불천지주(不遷之主)란 친진(親盡: 제사 지내는 대의 수가 다 되는 것)에 이른 국왕의 공덕을 평가한 뒤 공덕이 높아 영원히 옮기지 않기로 결정한 신주(神主)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에는 조상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가묘(家廟)가 있었다. 이를 문소전(文昭殿)이라 한다. 가묘적 성격의 사당인 문소전에서도 왕위에 즉위했던 국왕을 봉안한다는 점에서 종묘와 동일했지만 왕위 계승상의 관계보다 혈연 관계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종묘와 달랐다.

 

문소전은 임진왜란때 불에 탄 뒤 중건되지 않았다. 조선 왕실의 신주(神主)는 두 가지였다.(신주는 혼이 기대고 의지하는 곳이다.) 우주(虞主)와 연주(練主)이다. 우주는 뽕나무, 연주는 밤나무로 만든다. 우주와 연주의 모양은 차이가 없다. 글을 쓰는 방식이 달랐다.

 

종묘는 공덕이 뛰어난 불천지주들을 모신 정전(正殿)과 그렇지 않은 신주들을 모신 영녕전(永寧殿)으로 나뉜다. 불천(不遷)의 반대는 조천(祧遷)이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됨에 따라 국가의 모든 체제나 의례가 황제국 제도로 격상되었다. 종묘 제도는 오묘가 아닌 칠묘가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 이를 신혼체백(神魂體魄)이라 한다. 신혼(神魂)은 사당에 모셔지고 체백은 능()과 묘()에 모셔진다. 조선시대 국가 의례는 제사 대상에 따라 명칭을 달리 했다. 천신(天神)에게 지내는 것을 사(), 지기(地氣)에게 지내는 것을 제(), 인귀(人鬼)에게 지내는 것을 향(), 문선왕(공자)에게 지내는 것을 석전(釋奠)이라 했다.

 

종묘는 국왕의 선조를 모시는 것이므로 그곳에서의 제사를 향이라 일컫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지만 석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개 제사 또는 제향 등으로 불렀다. 궁궐의 건물명에는 전(殿), (), (), () 등이 있다. 정전과 영녕전은 전을 쓰고 공신당과 칠사당은 당을 쓴다.

 

배향당이라 불리기도 한 공신당은 해당 국왕과 함께 모신 공신을 위한 집이다. 13949월 한양이 조선의 새 수도로 확정된 후 태조는 같은 해 1025일 한양 천도를 단행했다. 이어 태조는 112일에 직접 종묘와 사직이 들어설 터를 점검한 뒤 다음 날 종묘와 사직단 등의 건립을 담당할 공작국을 설치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세종대에 집현전(集賢殿)이 설치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제(古制)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사직 제도 역시 한층 더 유교적인 예의 원칙에 부합되도록 정비되었다. 1426(세종 8) 6월에 사직의 관리를 전담하는 사직서(社稷署)가 설치되었다.

 

1897년 대한 제국 선포로 사직단도 황제국의 제도에 맞도록 격상되었다. 대한 제국의 출범과 그에 따른 국가 의식의 정비는 외형적인 면에서는 사직의 격을 높여주었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그 위상의 하락을 초래했다.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원구단(환구단의 다른 이름)이 설치되었고 이로써 사직이 담당했던 하늘 제사의 기능이 원구단으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187 페이지)

 

일제는 1909년 사직을 사직공원으로 개조하면서 부속 건물들을 철거하고 영역을 크게 축소했다. 사직단 역시 왜란과 호란 등으로 수난을 당했다. 사직단 구역이 조선 전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직단과 신실(神室) 등에 대한 지속적 수리, 보수 작업 덕이다.

 

종묘 제사에서 익힌 고기를 바치는 의식을 궤식(饋食)이라 하는 반면 사직 제사에서는 익힌 음식을 바치는 것을 진숙(進熟)이라 한다. 희생(犧牲)은 종묘나 사직에서 함께 쓰인 말이다. 희생은 산 짐승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사직 제사에서도 종묘에서처럼 일무(佾舞)가 거행되었다. 일무에는 문무(文舞), 무무(武舞)가 있다. 조선의 사직 제사에서는 6일무가 거행되었다. 조선 시대 형법 기준서인 대명률(大明律)’에 의하면 사직이나 종묘 등 대사로 규정된 국가 제사에 관련된 물건을 훔치는 자는 반역자로 처벌하는 법률을 적용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255 페이지)

 

사직단에서 희생 소가 난동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인조대의 홍서봉은 이 사건을 국왕이 정치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과 북방 오랑캐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우연이겠지만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약 110 개월만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사직에 도둑도 들었다.

 

사직서에 도둑이 든 사건은 순조대 이후의 위상 변화를 반영한다. 숙종 정조대를 거치면서 의례와 제도의 정비 및 국왕 친제(親祭)의 증가 등으로 크게 강화되었던 사직의 위상은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왕권이 크게 약해지면서 숙종 이전으로 돌아갔다. 일반인들에게도 사직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곳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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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책읽기와 글쓰기’를 다시 본다. 삼문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1994년 버전의 책이다.

이 책에서 사르트르는 “내게는 초자아(超自我)가 없다는 어떤 유명한 심리 분석학자의 판단에” “기꺼이 동의하겠다.”는 말을 한다.

훌륭한 아버지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인간 자체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자 관계라는 것이 원래 썩어빠진 것이라 말하며 사르트르는 아버지의 죽음을 일러 “다행히도 그는 일찍 죽었다.”는 말을 더한다.

수많은 프랑스 작가들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거나 알지 못한 채 자랐다. 샤를르 페기, 기욤 아폴리네르, 앙드레 지드, 몽테를랑, 앙드레 말로, 루이 아라공, 사르트르, 카뮈...(김화영 지음 ‘프랑스 문학 산책’ 288 페이지)

이렇게 사르트르를 이야기한 것은 한 유명 심리학자의 책 때문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회상한 아버지 이야기가 들어있다.

저자는 친일파에 공산당이라는 의심을 받아 식구들이 몰살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아버지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열여섯의 나이에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았나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사막에서 고생하실 때 자신은 중고교와 대학교를 다녔다고 말한다.

특히 유신 독재 타도를 외치다가 매 맞고 끌려가는 대학 동급생들의 모습을 보고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자본주의의 폐해와 군부 독재의 부당함에 대해 떠드는 딸의 논리를 들으시던 아버지의 복잡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하는 저자는 당신 덕에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딸이 일제 청산이니 노동 운동이니 독재 타도니 민주화 투쟁이니 하는 단어들을 떠들었으니 그 말들이 얼마나 공허하게, 아니 얼마나 가슴 아프게 들렸을까 싶기도 하다는 말을 더한다.

나는 이념의 덫에 빠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남들에게 보이는 가면 즉 페르소나에 대한 집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라는 저자의 말에, 그리고 이념도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잘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자 도구일 뿐이라는 저자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 우리는 어떤 경우에 일제 청산, 노동 운동, 독재 타도 등을 위해 나설 수 있는가?

제논의 역설이 물리적 차원의 운동은 불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던지듯 전기한 심리학자 저자의 글은 우리 사회를 좀 더 살만한 세상으로 만드는 운동(투쟁)은 불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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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避書)라는 말을 기억하는데 한 인터넷 서점에서 피서(披書)라는 말을 썼다.

피서(避書)는 책에 지친 사람에게 잠시 책을 떠나라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일찍이 김영민(철학자)은 책을 읽다 싫증나면 계속해서 책을 읽으라는 말을 전했다.(‘공부론‘ 165 페이지) 각나간서 즉차간서(覺懶看書 則且看書)라는 말이다.

피서(披書)는 책을 나눈다는 말이다. 그제 나는 피서 입서 소한 소한(避暑 入書 消汗 逍閑)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문법적으로 맞는지 장담할 수 없지만 ’더위를 피해 책의 세계로, 땀을 식히고 한가하게 노니는‘이란 의미가 담겼다.

힘들기에 책을 피하는 피서(避書)의 세계에서 힘들어도 거듭 책을 읽는 세계를 만드는 입서(入書)로 변화했으되 한가하게 노닐기를 바라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찜통 더위가 연일 가동되는 것을 보며 마음으로라도 그런 세계를 상상하려고 지은 것이다.

경회루 연못을 만들 때 파낸 흙으로 만든 가산(假山)인 경복궁 아미산(峨眉山)에는 두 개의 연못이 있다.

하나는 노을이 내려앉은 연못이라는 뜻의 낙하담(落霞潭), 다른 하나는 달을 머금은 연못이라는 뜻의 함월지(涵月池)이다.

그런데 이 연못들은 아름답고 시적인 비경을 상상하라는 뜻으로 돌에 이름을 새긴 가상의 연못들이다.

낙하담과 함월지처럼 나도 더위를 피해 책 속에서 한가하게 노니는 것을 상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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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고 또는 육가陸賈는 한 고조 유방劉邦에게 이런 말을 했다. “말 위에서 권력은 얻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

그런가 하면 ‘금강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나의 가르침은 뗏목과 같다. 법조차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非法)이겠느냐?”

이 말들은 모두 탈 것(vehicle)으로 세상사를 비유한 말들이다.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을 나누는 불교 자체가 탈 것과 친숙한 종교이다.

다만 남방불교도들은 스스로를 소승이라 칭하지 않는다.

매너리즘에 빠져 답이 보이지 않을 때 지금껏 자신이 의거(依據)해온 중요한 지침이나 원칙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 같다.

나는 “말 위에서 권력은 얻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말을, 부지런한 성실함으로 글을 잘 쓸 수는 있어도 책을 쓰는 것은 별개라는 말로 듣는다.

그리고 “나의 가르침은 뗏목과 같다. 법조차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非法)이겠느냐?”는 석가모니의 말씀은 변화에 맞추어 지체하지 않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는 말로 듣는다.

잘 나가면 단점이 잘 드러나지 않기 마련이다. 드러난다 해도 문제라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세상은 고정불변하는 것 즉 비생물체가 아니어서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물론 원칙을 지키는 한도 안에서 그래야 하리라. 그러나 위기가 도리어 기회인 경우로 만드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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