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책읽기와 글쓰기’를 다시 본다. 삼문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1994년 버전의 책이다.

이 책에서 사르트르는 “내게는 초자아(超自我)가 없다는 어떤 유명한 심리 분석학자의 판단에” “기꺼이 동의하겠다.”는 말을 한다.

훌륭한 아버지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인간 자체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자 관계라는 것이 원래 썩어빠진 것이라 말하며 사르트르는 아버지의 죽음을 일러 “다행히도 그는 일찍 죽었다.”는 말을 더한다.

수많은 프랑스 작가들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거나 알지 못한 채 자랐다. 샤를르 페기, 기욤 아폴리네르, 앙드레 지드, 몽테를랑, 앙드레 말로, 루이 아라공, 사르트르, 카뮈...(김화영 지음 ‘프랑스 문학 산책’ 288 페이지)

이렇게 사르트르를 이야기한 것은 한 유명 심리학자의 책 때문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회상한 아버지 이야기가 들어있다.

저자는 친일파에 공산당이라는 의심을 받아 식구들이 몰살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아버지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열여섯의 나이에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았나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사막에서 고생하실 때 자신은 중고교와 대학교를 다녔다고 말한다.

특히 유신 독재 타도를 외치다가 매 맞고 끌려가는 대학 동급생들의 모습을 보고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자본주의의 폐해와 군부 독재의 부당함에 대해 떠드는 딸의 논리를 들으시던 아버지의 복잡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하는 저자는 당신 덕에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딸이 일제 청산이니 노동 운동이니 독재 타도니 민주화 투쟁이니 하는 단어들을 떠들었으니 그 말들이 얼마나 공허하게, 아니 얼마나 가슴 아프게 들렸을까 싶기도 하다는 말을 더한다.

나는 이념의 덫에 빠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남들에게 보이는 가면 즉 페르소나에 대한 집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라는 저자의 말에, 그리고 이념도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잘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자 도구일 뿐이라는 저자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 우리는 어떤 경우에 일제 청산, 노동 운동, 독재 타도 등을 위해 나설 수 있는가?

제논의 역설이 물리적 차원의 운동은 불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던지듯 전기한 심리학자 저자의 글은 우리 사회를 좀 더 살만한 세상으로 만드는 운동(투쟁)은 불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