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와 사직 - 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 규장각 인문강좌 1
강문식.이현진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조선의 국가 제사 체계에서 가장 격이 높고 중요한 대상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에 따라 배치되었다. 여기서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군주남면(君主南面)이다. 사직은 토지 신인 와 곡식 신인 으로 구성된 말이다.

 

사람은 토지가 없으면 살 곳이 없고 곡식이 없으면 먹을 수 없다. 종묘와 사직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위상이 높을까? 사직이다. 이는 조선에만 있었던 특징이다. 중국에서는 종묘, 사직 외에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제단인 환구(圜丘), 땅에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제단인 방택(方澤)이 더 있었다.

 

중국의 경우 환구, 방택, 사직, 종묘의 순서로 위상이 매겨져 있었다. 사직은 조선이 제후국이었던 관계로 하지 못했던 환구와 방택을 실질적으로 담당했던 제사이다. 토지와 곡식은 전통 시대 국가 경제의 기본이었다. 반면 종묘 제사는 국왕과 혈연적으로 연결된 왕실 선조들을 대상으로 한 사적(私的)인 것이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종묘 제사가 사직 제사보다 더 중시되었다. 좌묘우사는 주례(周禮)’의 원칙이다. 반면 천자(天子) 7(), 제후(諸侯) 5()예기(禮記)’의 원칙이다. 조선은 불천지주(不遷之主)를 적절히 활용하여 오묘 제도를 유지했다. 불천지주(不遷之主)란 친진(親盡: 제사 지내는 대의 수가 다 되는 것)에 이른 국왕의 공덕을 평가한 뒤 공덕이 높아 영원히 옮기지 않기로 결정한 신주(神主)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에는 조상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가묘(家廟)가 있었다. 이를 문소전(文昭殿)이라 한다. 가묘적 성격의 사당인 문소전에서도 왕위에 즉위했던 국왕을 봉안한다는 점에서 종묘와 동일했지만 왕위 계승상의 관계보다 혈연 관계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종묘와 달랐다.

 

문소전은 임진왜란때 불에 탄 뒤 중건되지 않았다. 조선 왕실의 신주(神主)는 두 가지였다.(신주는 혼이 기대고 의지하는 곳이다.) 우주(虞主)와 연주(練主)이다. 우주는 뽕나무, 연주는 밤나무로 만든다. 우주와 연주의 모양은 차이가 없다. 글을 쓰는 방식이 달랐다.

 

종묘는 공덕이 뛰어난 불천지주들을 모신 정전(正殿)과 그렇지 않은 신주들을 모신 영녕전(永寧殿)으로 나뉜다. 불천(不遷)의 반대는 조천(祧遷)이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됨에 따라 국가의 모든 체제나 의례가 황제국 제도로 격상되었다. 종묘 제도는 오묘가 아닌 칠묘가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 이를 신혼체백(神魂體魄)이라 한다. 신혼(神魂)은 사당에 모셔지고 체백은 능()과 묘()에 모셔진다. 조선시대 국가 의례는 제사 대상에 따라 명칭을 달리 했다. 천신(天神)에게 지내는 것을 사(), 지기(地氣)에게 지내는 것을 제(), 인귀(人鬼)에게 지내는 것을 향(), 문선왕(공자)에게 지내는 것을 석전(釋奠)이라 했다.

 

종묘는 국왕의 선조를 모시는 것이므로 그곳에서의 제사를 향이라 일컫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지만 석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개 제사 또는 제향 등으로 불렀다. 궁궐의 건물명에는 전(殿), (), (), () 등이 있다. 정전과 영녕전은 전을 쓰고 공신당과 칠사당은 당을 쓴다.

 

배향당이라 불리기도 한 공신당은 해당 국왕과 함께 모신 공신을 위한 집이다. 13949월 한양이 조선의 새 수도로 확정된 후 태조는 같은 해 1025일 한양 천도를 단행했다. 이어 태조는 112일에 직접 종묘와 사직이 들어설 터를 점검한 뒤 다음 날 종묘와 사직단 등의 건립을 담당할 공작국을 설치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세종대에 집현전(集賢殿)이 설치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제(古制)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사직 제도 역시 한층 더 유교적인 예의 원칙에 부합되도록 정비되었다. 1426(세종 8) 6월에 사직의 관리를 전담하는 사직서(社稷署)가 설치되었다.

 

1897년 대한 제국 선포로 사직단도 황제국의 제도에 맞도록 격상되었다. 대한 제국의 출범과 그에 따른 국가 의식의 정비는 외형적인 면에서는 사직의 격을 높여주었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그 위상의 하락을 초래했다.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원구단(환구단의 다른 이름)이 설치되었고 이로써 사직이 담당했던 하늘 제사의 기능이 원구단으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187 페이지)

 

일제는 1909년 사직을 사직공원으로 개조하면서 부속 건물들을 철거하고 영역을 크게 축소했다. 사직단 역시 왜란과 호란 등으로 수난을 당했다. 사직단 구역이 조선 전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직단과 신실(神室) 등에 대한 지속적 수리, 보수 작업 덕이다.

 

종묘 제사에서 익힌 고기를 바치는 의식을 궤식(饋食)이라 하는 반면 사직 제사에서는 익힌 음식을 바치는 것을 진숙(進熟)이라 한다. 희생(犧牲)은 종묘나 사직에서 함께 쓰인 말이다. 희생은 산 짐승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사직 제사에서도 종묘에서처럼 일무(佾舞)가 거행되었다. 일무에는 문무(文舞), 무무(武舞)가 있다. 조선의 사직 제사에서는 6일무가 거행되었다. 조선 시대 형법 기준서인 대명률(大明律)’에 의하면 사직이나 종묘 등 대사로 규정된 국가 제사에 관련된 물건을 훔치는 자는 반역자로 처벌하는 법률을 적용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255 페이지)

 

사직단에서 희생 소가 난동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인조대의 홍서봉은 이 사건을 국왕이 정치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과 북방 오랑캐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우연이겠지만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약 110 개월만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사직에 도둑도 들었다.

 

사직서에 도둑이 든 사건은 순조대 이후의 위상 변화를 반영한다. 숙종 정조대를 거치면서 의례와 제도의 정비 및 국왕 친제(親祭)의 증가 등으로 크게 강화되었던 사직의 위상은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왕권이 크게 약해지면서 숙종 이전으로 돌아갔다. 일반인들에게도 사직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곳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