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이글턴의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오래지 않다.

최근 읽은 그의 책은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이다.
이 책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에 이어 내가 두번째로 완독한 그의 책이다.

‘낙관하지 않는 희망‘을 읽다가 중도에 그만둔 난감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 같다.

물론 완독에 큰 의미가 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내가 책의 핵심을 바로 이해했는지도 자신할 수 없다.

여러 부분을 말할 수 있는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에서 내 관심을 가장 많이 끈 부분은 니체에 대한 지적 부분이다.

이글턴은 니체의 초인을 언급하는데 그에 의하면 전능한 신처럼 초인도 오로지 자신에게 의지하는 바 퇴행적으로 신학을 훔쳐보지 않으면서 자율성이나 자기생산을 말할 수는 없다.

이글턴은 니체는 문제가 되는 것은 신의 죽음이라기보다 인간의 불신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258 페이지)

이동용 교수는 자기 삶이 미로라면 들어서야 한다고 말한다.(‘망각 교실‘ 7 페이지) 미로 같은 니체 철학에 들어서야 한다는 의미이다.

들어서야 할 뿐 아니라 목숨 걸고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글턴의 세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이제 이글턴의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위하여‘나 ‘인생의 의미‘ 중 한 권은 어떨지?

이글턴 읽기에도 순서 또는 로드맵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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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오경(五經)의 하나인 신명기에 모세가 죽은 후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신명기 34장 5, 6절)

이 만남 이후 구조주의와 기호학에 대해 관심을 갖다가 ‘성서의 구조인류학‘이란 책을 알게 되었다. 저자인 에드먼드 리치에 의하면 모세와 예수는 구조적으로 같은 존재이다.

성경이 구조주의적 관점으로 독해 가능하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모세와 예수는 히브리인으로 태어난 뒤 신에게 지도자로 선택되었다. 모세는 백성들이 파라오의 압제에 시달릴 때 태어났고, 예수는 백성들이 헤롯의 압제에 시달릴 때 태어났다.

모세와 예수 모두 압제자들이 아기들을 죽이려 하자 이집트로 몸을 숨겼다. 모세가 물을 피로 변하게 했다면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했다. 모세와 예수 모두 언덕에서 죽었다.

모세와 예수 모두 산상에서 40일 금식을 하며 영적 위기를 맞았었다. 모세는 유월절 어린 양을 언급했고, 예수는 비유적 의미의 어린 양이 되었다.

모세는 양치기였고, 예수는 비유적 의미의 양치기였다. 모세는 (예수라는) 새 예언자의 출현을 예언했고, 예수는 성령의 도래를 예언했다.

모세의 미션은 백성들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구하는 것이었고, 예수의 미션은 인류를 죄의 예속에서 구하는 것이었다....

오늘 모세 신드롬이 있는가 싶어 검색해 보았다. 그런 개념이 없으면 새로 만들려 했는데 회의주의자 사전에 그런 신드롬이 기록되어 약간 허탈했다.

사람들을 아름다움과 젊음, 부와 권력, 마음의 평온, 행복 등의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준다고 약속하는 무비평적 신념 즉 망상이나 신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존재로 선택했다고 믿는 망상적 믿음이 모세 신드롬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인물이다. 정작 자신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비극적이기까지 한 인물이다.

그런 이름을 망상자(妄想者)들을 표현하는 데 쓰는 것은 잘못이다. 나에게는 무엇보다 자신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백성들이 들어갈 수 있게 희생한 모세의 비운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만일 모세 신드롬이란 용어를 만들었다면 추종자들에게 결정적 도움을 베풀었음에도 자신은 그 열매를 누리지 못한 것으로 개념을 정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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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의 ‘아마빛 머리의 소녀‘를 들을 때도 그랬지만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를 들을 때는 더욱 지금이 봄이 아니라 겨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을 유난히 어렵게 보내기 때문에 갖게 되는 ‘겨울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지금이 겨울인 것 같다는 생각으로 드러난 것일까?

겨울 뿐 아니라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계절을 느끼게 하는 곡이 따로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음악이 아닌 표제음악이라 해도.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도 다르게 듣고 느낄 수 있다.

전통 그대로 휘몰아치는 겨울 한풍을 묘사한 것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한 비발디의 ‘겨울‘도 격정을 표현하거나 긴박한 상황을 묘사한 음악으로 들을 수 있다.

물론 플룻 연주로 듣는 멘델스존의 ‘무언가‘처럼 가볍고 작고 사랑스러운 곡에 다르게 들을 여지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행동경제학이 있는 것처럼 행동음악학이란 학문도 있을 법하다. 행동경제학이 말하는 인간은 온전히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심리학은 오늘 내가 두 음악을 들으며 보인 마음의 움직임을 무엇이라 정의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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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O 2017-03-26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개 바이올린 소나타/소곡이나 실내악은 가을에 어울린다고들 하는데, 파형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이에 따라 인간이 반응하는 정도의 경계를 나름 수치화해서 보여줄 수 있다면 (20년 내로는 될 겁니다) 확실히 계절에 맞는 음악을 알 텐데요. 재밌는 주제입니다.

비발디가 유명하지만 비슷한 표제로 차이콥스키의 소곡집을 빼놓을 수 없죠. 차이콥스키의 사계는 러시아가 늦게까지 쓰던 율리우스력을 고려해도 어쩐지 잘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러시아를 다녀오면 달라지려나, 모르겠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3-26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생각거리를 주시는 댓글 감사합니다. 빛과 소리가 상이한 듯 하지만 파동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계절에 맞는 파장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MIO 2017-03-27 14:36   좋아요 1 | URL
음! 계절별 체광량이나 심지어 산란량에 따른 하늘 색 같은 것도 다르니 빛과 소리가 또 그리 엮일 수도 있겠군요. 재밌네요. 기분좋은 의외성을 찾게 됐습니다. :)

벤투의스케치북 2017-03-27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 개국에서 노벨상까지 150년의 발자취
고토 히데키 지음, 허태성 옮김 / 부키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과학 분야에서 일본의 노벨상 수상 업적은 대단하다.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등 분야도 고르다. 원자핵 공학을 공부한 뒤 신경 생리학을 전공한 독특한 이력의 연구자인 고토 히데키의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는 노벨상 수상자를 중심으로 일본 과학의 위상과 저력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되는 책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일본 과학의 위상에 감탄하는 수준을 넘어 그들이 뿌리고 거둔 과학 발전의 실상을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과학의 여명, 전쟁과 과학자, 패배로 빛나다, 의사 대 과학자, 일본인과 노벨상 등으로 이루어진 구성도 시사적이다.

책의 앞 부분에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등장한다. 물리를 통해 서양 사고를 공부하게 한 의사 출신의 지식인으로 이상주의자보다 현실주의자의 길을 간 선구자이다. 그가 서양 학문에 주목한 것은 부국 강병 차원이었다. 일본은 개국에 즈음해 서양 기술과 학문을 배우며 인프라를 갖추기 위해 혼신을 다했는데 이는 주변 국가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메이지 신정부는 법률, 어학, 광산학, 건축, 야금학, 화학, 축산, 의학,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신지식을 맹렬한 속도로 받아들였다. 국위와 국력과 직결되는 것들이었다. 아드레날린을 발견한 다카미네 조키치, 각기병에 효과를 내는 오리자닌(Oryzanin)이란 쌀겨 추출물을 만들어냈지만 노벨상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한 스즈키 우메타로 등의 이야기도 읽을 만하다.

‘벽암록’에 출처를 둔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이 있듯 과학 발전에도 사제 관계는 중요하다. 줄탁동기란 알 안에서 쪼는 줄의 시간과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알을 깨트리는 탁의 시간이 같아야 온전한 병아리가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의미의 말이다.

저자는 사제 관계를 방목형과 군대형으로 나눈다. 방목형은 소수파이지만 제자에게 원하는 연구로 자유롭게 하는데 의외로 제자가 크게 성장하는 경우가 있다. 방목형의 대표는 일본 최초(1949년)의 노벨상(물리학)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와 2008년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난부 요이치로 등이다.

군대형은 제자를 엄격하게 단련시키고 제자를 통해 업적을 쌓는다. 물리학자 나가오카 한타로가 대표적이다. 유카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하이젠베르크와 폴 디랙을 평가한 부분도 흥미 있게 읽힌다. 하이젠베르크는 열정적인 엘리트가 예상되었지만 밝은 스포츠맨 유형이고 디랙은 과묵하고 항상 생각이 많은 철학자 유형이었다고 한다.

유카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치로 등 노벨상 수상자들을 길러낸 "일본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 니시나 요시오는 원자핵이 플러스인 양성자와 전기를 띠지 않는 중성자가 모여 있기에 같은 플러스 전하끼리 반발해 흩어지겠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것을 보고 새로운 소립자를 가정했다. 이것이 중간자(meson)의 시초이다.

히틀러의 적대(敵對) 정책으로 독일에서 쫓겨난 유대인 과학자들이 미국에 거주하며 우라늄 농축에 성공한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일본은 이 점에서 생각을 잘못한 것이었다. 만주 731 부대에 파견되어 아이들을 상대로 동상(凍傷) 실험을 해 물의를 일으킨 요시무라 히사토 이야기도 나온다.

당시 한 대학에서 “의과는 병과(兵科)여야 한다. 사람 죽이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말도 나왔었다. 731 부대에서는 물만 마시고 얼마나 살 수 있는지도 실험했다. 포로들인 마루타는 수도물의 경우 45일을 살았지만 미네랄이 없는 증류수로는 33일만에 사망했다. 어떤 군인은 유행성 출혈열에 걸린 환자의 혈액을 중국인에게 접종해 병에 감염되게 했다. 의사 뿐 아니라 과학자 대부분이 군 연구에 종사하고 있던 시대였다.

유카와 히데키는 공부에 몰두하면 중얼중얼하면서 몇 시간이나 연구실 안을 곰처럼 어슬렁거렸다. 이 버릇이 시작되면 도모나가는 도서관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유카와 히데키는 오카와 히데키였다. 그런 그가 유카와 히데키가 된 것은 유카와 집안의 데릴 사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히데키의 아내인 스미(スミ)가 일본인은 노벨상을 받을 수 없냐고 묻자 히데키는 자신이 노벨상을 받을 계획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을 했다. 스미는 집안일을 전부 할 테니까 당신은 노벨상을 꼭 받아 주세요란 말을 했다.

일본은 레이더, 원폭, 페니실린 등 전쟁의 국면을 좌우하는 개발 경쟁에서 미국에 모두 패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관계에 의하면 힘이 미치는 범위가 넓을수록 그것을 중개하는 입자는 가벼워 먼 거리를 재빨리 날아간다. 전기적인 힘의 경우 두 전하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약하지만 서로 당긴다. 전기력은 가장 멀리까지 작용하는 힘이다. 그에 부합해 광자는 무게가 없다.(203 페이지)

유카와 히데키는 첫 논문을 쓸 때 군더더기를 싫어해 문장을 계속 간결하게 수정했다. 심지어 문장에 적합한 단어는 단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해 단어 선택에 극도로 신중을 기했다. 유카와는 시퍼렇게 간 칼날 같은 날카로운 문장을 썼다. 유카와는 이론은 관계가 있는 모든 현상을 설명해야 하며, 아름다워야 하며,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실험을 논문에서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8년 유카와는 미국 동부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초청을 받아 일본을 떠났다. 저자는 이를 두뇌 유출(brain drain)이라 말한다. 유카와 부부를 보고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원리(질량 에너지 등가이론)를 발표했기 때문에 원폭이 개발되어 당신 나라의 두 곳에서 많은 살상자가 발생했다며 자신의 책임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유카와는 원자핵에서 매력적인 문제를 발견했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모여 있기 때문에 플러스라는 같은 전하를 가진 양성자들의 반발 작용으로 흩어져야 하는데 결합되어 있다. 유카와는 전자기력, 중력 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이 있다고 생각한 뒤 그것을 해명하고자 했다. 유카와는 불확정성 관계에 의거해 핵력을 중개하는 새로운 입자의 무게까지 산출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동양인이 양자역학의 핵심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카와는 이론만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첫 물리학자이다. 유카와의 이론은 당시까지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어 계산만으로 소립자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류에게 명확하게 제시했다.(225 페이지)

도모나가 신이치로에게 늘 뒤져있던 유카와가 상황을 역전시킨 것은 중간자 이론 발표로 인해서이다. 1965년 도모나가는 노벨상을 수상했다. 슈윙거, 파인만과 함께. 물론 두 미국인은 도모나가에게 경의를 표하며 공식 수상 기록에 도모나가의 이름을 첫 번째로 올렸다. 훨씬 앞서 이론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수상하는 것은 드물지 않았지만 일각에서 의학생리학상은 무리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런데 1987년 도네가와 스스무가 그 상을 탔다. 200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시모무라 오사무는 제약회사 면접에서 당신은 회사에 맞지 않습니다란 말을 들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물리 연구는 이론과 실험으로 나뉜다. 유카와는 손재주가 없었고 도모나가는 손재주가 좋았다. 볼프강 파울리는 이론 물리학자 동료들이 무서워할 정도로 머리 회전이 빨랐다. 실험을 하지 않더라도 조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결과를 예측할 수 있어서 귀찮은 실험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손재주는 너무 없었다. 극단적인 기계치였다.

문제에 착수할 때 이론물리학자들은 영향이 작은 것을 전부 없앤다. 그런 미미한 요소를 식에 포함시켜 풀어보면 복잡해질 뿐이고 결론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모델을 만들어 대략적인 풀이를 생각하는 것을 정성적(定性的) 연구라 한다. 이 정성적 연구에는 고도의 이론적 감각이 필요하다. 이론 물리학자에게는 수식보다 아이디어가 중요했다.

특수 상대성이론의 수식 자체는 고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것은 아인슈타인 한 사람이다. 유카와의 중간자 이론도 수식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중간자를 설정해서 그것의 주고받음으로 힘이 발생한다는 아이디어가 훌륭했던 것이다.

양자(量子)라는 아이디어는 아인슈타인이 제안했다. 그는 빛이 광자라는 입자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후 양자에 확률 해석을 가해 양자역학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 확률 해석에 동의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양자역학에 반대했다. 난부 요이치로는 끈이론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초끈이론의 시초가 되었다.

난부는 대칭의 세계(물질과 반물질의)라면 빅뱅 당시 에너지로부터 같은 수로 탄생한 입자와 반입자가 합쳐져 전부 사라져야 하는데 한쪽의 세계만이 현재 남아 있다는 것은 자발적인 대칭 깨짐(spontaneous symmetry breaking)이 없으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현대의 서양 기술은 그 밑바탕에 있는 생각을 배우지 않는 한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적의를 드러내며 세계를 멸망시킬 것이라 말한다. 이익의 논리에서 이치의 논리로 중심을 옮겨 직시하지 않으면 비극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377, 378 페이지)

후쿠자와 유키치(19 세기 일본의 계몽 사상가, 교육자)는 일본이 외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을 때 유형의 학문 가운데 물리를 특히 중시했다. 하지만 그 마음의 밑바탕에는 학생들에게 무형의 사상성을 키우려는 생각이 있었다. 저자는 유카와 히데키를 동경해 이론 물리학을 공부했다. 흥미와, 그 이상의 의미와 교훈을 주는 책으로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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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3-26 0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인들이 과학기술에서 뛰어난 것은 어떤 원인(까닭)에서일까요?

일본 아니메가 전세계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까지도)을 사로잡고 있죠. 아이들의 속성은 순진무구함, 순수함, 꿈, 미지에 대한 동경, 왕성한 호기심, 청순발랄함, 끊임없이 샘솟는 희망스런 존재, 등등이랄 수 있죠. 이런 속성을 일본 아니메가 가장 잘 표현해내기 때문에 전세계 아이들을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는 문화적 코드가 됐다고 봅니다.

과학기술력, 공학력, 극도로 섬세하고 정밀한 제조력, 인간 심성의 뿌리를 자극하는 동심의 아니메력, 원본보다 더 원본스러운 복제본을 만들어낼 수 있는 모방력,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장단점의 모든 능력을 파악해 최대한 뽑아낼 수 있는 자기파악력 · 지피지기력 · 자기운용력, 제3자적 관점력, 이 모든 것을 결합해 폭발적 시너지로 창출하는 막강한 정책력 · 경제력 ― 이런 것들이 일본의 힘의 원천이라고 봅니다.

저런 능력들은 결국은 (단순화하는 것이긴 하지만) 감각의 능력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봅니다. 감각의 능력이란 다름 아닌 뇌의 능력이죠. 일본인들의 감각 능력은 그 예민함, 섬세함, 정밀함, 날카로움에서 인류 최강 수준이랄 수 있죠. 그건 일본인들이 처한 환경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라고 봅니다. 뇌는 뇌가 처한 환경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죠. 환경이 감각을 키우고 뇌를 키우는 제1의 요소 · 기제 · 조건이기 때문이죠. 일본인들은 지구 인류가 처한 그 어떤 환경보다 뇌 자극적인 환경에 진화역사적으로 처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지구적 환경은 뇌 발달한테는 최상의 환경이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본인들한테는 치명적인 약점 혹은 원천적 결함 혹은 근원적 한계가 있죠. 이 약점 · 결함 · 한계 때문에 일본은 결코 마지막 승리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처럼 국가적 단위에서, 다시 말해 전국민적 단위에서, 악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몇몇밖에 없(었)습니다. 아니메의 나라, 동심의 나라, 순진무구하고 청순발랄한 아니메의 나라, 그러나 국가적 단위로 악의 모의하는 반인류성의 나라 ― 일본의 지독한 뿌리깊은 원천적 모순이자 비극의 씨앗이죠.

이런 상극이 서로 통하는 일본적 원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왜 일본은 결국은 파멸 혹은 자멸할 수밖에 없을까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03-26 0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게 써주셨군요... 생각해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저자가 과학자여서 그런지 과학 외의 분야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합니다. 관심이 아니라 내공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말씀해주신 부분은 참으로 많은 분야를 관련지어 생각할 문제라 생각합니다.
 

실험물리학자/ 입자물리학자인 리언 레더먼은 과학의 전 분야를 일렬로 세워서 피라미드를 쌓는 것은 다소 무례한 행동이라고 말하면서도 수학과 물리학에 관한 선배들의 격언을 한 마디 덧붙인다.
“물리학자는 오직 수학자에게만 경의를 표하고 수학자는 신에게만 경의를 표한다.”는.(‘신(神)의 입자(粒子)’ 38 페이지)

하이젠베르크는 최대의 난관은 수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학이 어느 점에서 자연에 연결이 되어야 하는가에 있었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따지고 보면 결국 자연을 설명하자는 것이지 수학을 하자는 것이 아니잖는가?란 말을 한다.(‘입자, 인간, 자연에 대한 단상’ 77 페이지)

물리학자 폴 핼펀은 “두 사람(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 모두 수학에 열정이 있었지만 수학 그 자체를 사랑했다기보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는 도구로서 사랑했다.”고 말한다.(‘아인슈타인의 주사위와 슈뢰딩거의 고양이’ 52 페이지)

일본의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는 이런 말을 했다. “역시 수학자가 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디까지나 사고가 비약하는 데서 가장 큰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이었다. 물 샐틈 없는 논리로 문제를 좁혀 들어가는 방법은 나의 기본적인 관심사가 아니었다˝(김범성 지음 ‘나가오카 & 유카와 : 아시아에서 과학하기’ 105, 106 페이지)

리언 레더먼, 하이젠베르크, 폴 핼펀, 유카와 히데키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모두 물리학자다.

수학자의 말을 들어 보아야겠지만 가장 크게 관심을 끄는 것은 유카와 히데키의 말이다.

유카와가 말한 비약이란 유카와가 중간자(中間子: meson: 전자보다 무겁고 양성자보다 가벼운 소립자)의 존재를 예견한 것과 관련된 말이다.

유카와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전자를 주고받는다는 가정하에 핵력을 설명하려 했었던 하이젠베르크로부터 양자역학의 핵심을 유럽의 어느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토 히데키 지음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224 페이지)

최근 클래식 피아노 곡을 완벽하게 연주한 한 한국인 연주자가 현지(독일이었던가?) 언론으로부터 독일인보다 더 독일의 정서를 잘 이해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음악과 과학은 그 청출어람(?)의 면모에서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궁금하다.

음악 연주도 블라인드 테스트를 거쳐야 하는가?

나는 각 민족이나 국가의 고유 정서가 있고 그것은 그 민족이나 국가의 구성원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갖는 공통의 정서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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