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간: 2017년 4월 9일까지
2. 당첨자 발표: 4월 11일(당첨자는 <당첨자 발표>에 게시합니다)
3. 모집인원: 5명
4. 참여방법:
   알라딘의 『슈퍼인간의 탄생』 책정보에서 기대평을 써주신 후
   아래의 서평단 지원을 클릭하신 후 작성하여 제출하시면 됩니다.
5. 당첨이 되신 분은 책을 받으신 후, 서평을 쓰시고

   <당첨자 발표>에 스크랩url을 메일이나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보내실 곳: bookview@sechangp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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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110층에서 내려다본 시선은 도시의 모든 곳을 다 볼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의 시선이며 그것은 관음증적인 신의 시선이다.

철학자 박영욱 교수가 ‘필로 아키텍처‘에 인용한 프랑스 철학자 미셀 세르토의 말이다. 흥미를 자극하는 논쟁적인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철학자가 건축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책에서 신을 관음증적인 존재로 묘사한 내용을 만나는 것은 희귀한 일이다.
신을 관음증적인 존재로 단언하기는 어렵겠지만 문학평론가 도정일 교수가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에서 한 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시각 쾌락의 원칙은 태초부터 하느님의 것이다. 하느님이 자신의 이미지를 따서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을 때 그가 거둔 첫번째 성과는 시각적 즐거움(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두 남녀가 추락하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거적때기로 알몸을 가렸을 때 하느님이 진노한 이유는 그의 시뮬레이션에 발생한 변화가 그의 시각적 즐거움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이 박탈은 인간 추방의 충분한 사유가 된다.(‘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199 페이지)

관음증은 오래 전부터 미술, 문학, 정신분석 등의 주요 소재가 되어왔다. 그 관련 자료들을 충분히 둘러본다 해도 신이 관음증적인 존재인지를 해명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다만 슬퍼하고 진노도 하고 후회도 하는 희로애락의 존재인 신을 관음증적인 존재로 볼 여지는 충분할 것이다. 어떤 분야의 어떤 책들을 읽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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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일화 가운데 씨 뿌리는 비유가 인상적이다.
붓다는 자신을 신앙이라는 씨앗을 뿌려 이해라는 쟁기와 부드러움이라는 채찍으로 밭을 가꾸어 불생불사의 열매를 맺게 하는 농부에 비유했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우리나라 정치는 심경(深耕)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심경은 땅을 깊이 갈아 엎은 뒤 해야 하는 것일 테다.

같은 맥락에서 책 읽는 것은 씨 뿌리는 것에 비유될 수 있고 글 쓰는 것은 수확에 비유될 수 있다.

씨를 잘 뿌린다고 해서 수확이 반드시 좋다고 할 수 없지만 씨를 잘 뿌리지 못하면 절대 만족스러운 수확을 얻을 수 없다.

지금은 계절로도 봄이고 나 개인적으로도 많은 의미 있는 것들을 수행해야 하는 때이다.

정권교체를 넘어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이뤄내기에도 적격인 때이기에 정치적으로도 봄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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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보수(保守) 세력은 도적 집단이자 파시스트라는 글을 읽었다. 한 심리학자의 책에서이다.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특기할 사실은 자신의 계급을 배반하는 정치적 선호 및 투표가 일어나는 원인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자기 혐오라는 글이다.

자신의 가난과 무능을 혐오하기에 장차 자신이 되기를 원하는 부자 및 상층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 또는 파시스트 같은 우파 정당을 지지한다는 말이다.

옥스퍼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로저 스크러튼은 보수주의자는 드물지 않지만 지적 보수주의자는 드물다는 말을 한다.(‘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 10 페이지)

스크러튼은 우리 정치 생활의 최우선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탁월하고 진귀한 유산을 고이 간수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이 선호하고 지지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부끄럼 없이 떳떳하게 물려줄 만한 것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대체로 그릇되고 비뚤어진 정치적 선호는 비정상적이고 부정적인 부모 - 아이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견해를 공유한다.

스크러튼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는 말을 한다. 그에 따르면 가정이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남녀의 실존적 헌신을 통해 성장할 때 내재적 선 즉 모든 구성원들이 각자 뜻을 이루고 서로 돕는 결사로서 성장할 것이다.

스크러튼은 국가의 역할이 있다면 그런 식의 결합이 이뤄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보호하는 것이라 말한다.(23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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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시작한 이래 늘 그렇듯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아인슈타인이고, 철학자 스피노자는 스피노자라는 생각으로 지내왔다.

아니 그들 사상의 공명 가능성 여부조차 까마득하게 생각하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떻든 그런 암흑시대 후 아인슈타인이 자신은 존재의 질서정연한 조화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을 뿐 인간의 운명과 행동에 관여하는 신은 믿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두 사람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이론에 엄격한 결정론을 적용하고 확률의 그 어떤 근본적 역할도 거부한 것은 스피노자의 우주적 질서 개념에 대한 믿음이 작용했고 어쩌면 그가 받은 뉴턴 물리학도 한몫 했을 것(폴 핼펀 지음 ‘아인슈타인의 주사위와 슈뢰딩거의 고양이‘ 164 페이지)이란 글을 읽기 전까지 알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아인슈타인의 결정론적 사고 체계와 무한하고 완벽하고 영원한 신 즉 자연이라는 스피노자의 사상이 관련된다는 생각이다.

스피노자의 엄격한 결정론적 사고 체계에 대해서는 기꺼이 지지를 보냈지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불편하게 여겨온 것도 사실이다.

폴 핼펀에 따르면 슈뢰딩거는 우리가 만일 스피노자가 주장한 것처럼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의 한 조각 또는 그 존재의 한 측면이나 변형이라면 당신은 그 가운데 어느 부분, 어느 측면이며 그것을 객관적으로 다른 것들과 구분해주는 것은 무언이란 말인가?란 말을 했다.

과학자에 대해서든 철학자에 대해서든 핼펀처럼 온전히 두 학자의 삶과 사상에 비교 분석의 메스를 댄 사례는 흔하지 않을 듯 싶다.

더구나 재미는 덤이고 더불어 고급 과학 지식까지 배울 수 있게 배려했으니 두고 두고 읽을 만한 책을 만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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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7-03-30 2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인슈타인의 주사위와 슈뢰딩거의 고양이‘ - 저도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즐거운 독서하시기 바랍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3-30 20:53   좋아요 0 | URL
네... 그러시군요... 감사합니다... 읽을 만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