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실비아 플라스, 스테판 츠바이크, 발터 벤야민, 로맹 가리, 프리모 레비, 미시마 유키오, 마크 로스크,

빈센트 반 고흐, 루드비히 볼츠만, 질 들뢰즈, 아서 쾨슬러, 스콧 니어링, 오토 바이닝거, 쿠르트 괴델...

이 분들은 자살로 삶을 마친 유명 문인, 화가, 철학자, 사상가 들이다. 우울증 자료를 찾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아서 쾨슬러(작가), 스콧 니어링 등의 자살은 의외이고 음식에 누가 독을 넣었다는 생각에 아내가 만들어준 음식만을 먹다가 아내가 입원하자 음식을 먹지 않아 아사(餓死)한 쿠르트 괴델의 죽음을 자살로 보아도 되는지는 논란 거리이다.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을 찾다 보니 어느 사이 그냥(?) 자살자와 섞여 뒤죽박죽이 되었다.

사실 우울증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의 원인을 확정하는 데에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이다.

우울증을 보는 시각에 몇 가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 표현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이런 표현은 우울증이 흔한 것이라는 주장이 담긴 것이지만 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다 보니 심각성을 환기시키지 못하거나 가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우울증 증상이 나타나면 당장 눈에 보이는 환경적 요인에서 원인을 찾는 것의 문제점은 크리스티앙 스파돈(정신과 의사)이 지적했다.

가장 심각한 사건이 반드시 우울증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잔을 넘치게 하는 것처럼 이전에 일어난 일들이 풀리지 않고 쌓여 있는 상태에 아주 사소한 사건이 더해져 우울증이 생길 수도 있다.(‘우울증을 어떻게 이길까?‘ 21 페이지)

라캉주의 정신분석가 대니언 리더는 우울증이 우울증을 앓는 사람 만큼이나 복합적이고 다양하다는 주장을 한다.

리더는 무감각, 불면증, 식욕상실과 같은 표면 현상들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존재하고 이런 상태를 발생시키는 근본 문제들은 대개 우리의 의식적 자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한다.(‘우리는 왜 우울할까‘ 25 페이지)

우울증을 은유로 표현하라면 안개 같은 병이라 말하고 싶다. 삶에서 명확한 정리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여러 요인을 고려하고 길게, 끈기 있게 보는 것도 필요하다.

어떤 종류의 우울이든 사회적이라는 평론가 강계숙 님의 견해에 동의한다.

‘우울의 빛‘이란 평론집에서 여느 작가, 시인 못지 않게 절절하게 우울증을 고백한 강계숙 님의 근황이 궁금하다. 우울에도 빛이 있다는 그의 주장을 듣고 많은 분들이 힘을 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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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곡괭이로 땅 파뒤집어놓고 남해 간다”는 한 시인의 글을 읽고 부러운 마음에 잠시 허공을 쳐다 보았다.

보리암, 남해 금산, 물건리(勿巾里)에서 미조(彌助)항까지의 물미(勿彌) 해안...

시의 소재가 된 절경이 즐비한 곳. 미(彌)란 글자 때문에, 그리고 비슷한 위치 때문에 미륵도(彌勒島)가 있는 통영과 비교하게 되지만 어디까지나 마음 속의 그것이니 공허하다.

대안으로 나는 조용미 시인의 시 ‘마량 간다’를 펴본다.

“..나는 늙은 푸조나무도, 밤나방처럼 가만히 붙어 몇백/ 년이라도 꽃살문을 떠메고 있으려는 커다란 나비경첩이/ 주는 무거움도 내려놓고 꽃살문 앞 떠난다 마량 간다 까/ 막섬 간다”는 구절로 끝나는 시.

마량은 강진의 마량(馬良)이다. 무거움을 내려놓는다는 말을 음미하게 된다.

나는 오늘 날이 밝으면 사직단(社稷壇)에 간다. 거기서 접선하듯 한 분을 만나 무언가를 건네 받은 뒤 책을 고르기 위해 교보에 갔다가 심리 상담을 받으러 성수동으로 간 뒤 저녁에는 정독(正讀)에 가서 강의를 듣는다.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떠안기 위해 가는 길이지만 심정적, 공간적으로 좁은 지경(地境)을 벗어나니 좋다.

다만 비가 내릴 것이라니 더 추워질 날씨가 걱정이지만 모두 잘 풀릴 것이라 짐짓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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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는 뜻의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란 말이 있는 의상 대사의 ‘법성게(法性偈)’.

이 텍스트에는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이란 구절도 있다.

진리는 비처럼 쏟아지는데 중생은 자기 그릇만큼만 가져간다는 말이다.

이처럼 진리를 본 경우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신비 체험을 보고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20년 전 황룡사지에서 신내림에 가까운 현상을 체험한 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문화해설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최동군 작가 같은 경우.

어떤 체험인가? 황룡사지 그 빈 절터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황룡사지가 복원되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일어날 상황이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법으로 머리 속에 떠오르는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이 생각난다.

물론 황룡사지에서 하게 된 체험은 원한다고 얻을 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박문호 박사는 우리는 단지 시선을 엉뚱한 데 두고 있었을 뿐, 위대한 자연의 신비는 절대 감춰지지 않았다는 말을 한다.(’유니버설 랭귀지’ 428 페이지)

자료를 위해 3년 전 읽은 ‘유니버설 랭귀지’를 다시 읽었다. 다행이다.

이 책은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과 뇌과학을 다시 공부하고 싶게 하는 책,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7대 3의 비율로 설정해 50대가 될 때까지 3천권 정도의 책을 집요하게 읽다 보면 정보가 서로 링크되어 양이 질로 바뀌게 된다고 말하는 책, 동물은 감각에, 사물은 중력에, 인간은 의미에 구속된다고 말하는 책, 뇌과학에 들어가려면 100개 정도의 용어를 염불하듯 암송하면 된다고 말하는 책, 외우지 않으면 평생 해도 내 것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책, 중요한 수식은 그대로 암기하면 반복 학습을 통해 언젠가는 이해된다고 가르치는 책이다.

황룡사, 하면 강석경 작가를 빼놓을 수 없다. 구원이라는 화두를 들고 헤매다니다가 돌아오게 된 거대한 알 같은 고분(古墳)들이 널려 있는 경주를 이야기하며 황룡사에 대해 말하는 작가.

그런데 이 분이 우주생성에서 생명, 인간의 의식까지를 아우르는 자연과학 프레임과 대학교과서를 지식의 근간으로 하며 자연과학에 기반한 과학적 사고와 세계관을 체득하고 과학 학술, 연구, 교육, 교류, 문화운동을 활동내용으로 하는 모임 회원이다.

내 이상(理想)인 분이다. 박문호 박사를 알게 되면서 과학적 사고 방식을 요구하는 독서로 인식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고 말하는 작가, 우주의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시인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작가..(‘저 절로 가는 마음’ 211, 227 페이지)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은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박문호 박사의 지론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내가 가야 할 길, 아니 가기를 소망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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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필가이자 소설가 윌리엄 스타이런. 적나라하고 진실된 우울증 고백서인 그의 대표작 ‘보이는 어둠(Darkness Visible)’은 희망을 주는 책으로 부족함이 없다.

강연 원고를 보완해 만든 이 책에서 저자는 몇 곡의 음악 이야기를 한다. 베토벤, 슈만, 말러의 음악에 고통의 여운이 배어 있으며 바흐의 우울한 칸타타에도 어김 없이 우울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우울하거나 슬플 때 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 2악장(농담이란 뜻을 가진 스케르초 악장),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3악장,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3악장 등 경쾌한 곡들을 듣는 나도 사실 이 곡들이 진정 밝은 곡인지 장담하지 못한다.

스타이런이 이야기한 작곡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나는 슈만 첼로 협주곡의 잔잔한 슬픔과 우울이 좋고, 말러 교향곡들의 깊은 슬픔이 좋다.

스타이런은 브람스의 ‘알토 랩소디’를 듣고 즐거움이 범람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실 브람스의 곡들은 환희와 밝음보다 우울과 슬픔에 더 가깝다. 그의 곡들을 듣기 좋은 시기가 따로 있지는 않지만 시월이 가기 전에 그의 교향곡 4번을 들어야겠다.

지난 6개월 사이에 거의 듣지 못했지만 이 곡을 매일 듣던 때가 있었다.

우울감을 충전한다면 이상하겠지만 힘이 되는 슬픔을 위해서 곡을 들은 것이라 하면 오해의 소지가 없겠다. 잠시 음악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할 것 같은 시월의 마지막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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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한 숲 해설사 선생님과 대화를 할 기회를 가졌다. 이 대화를 통해 내가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평소 시(詩)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나무에 관한 문학작품을 찾아 시의 영역으로도 찾아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는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나오는 나희덕 시인의 ‘해미읍성에 가시거든’을 아는지 물은 결과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미읍성에 가시거든’에는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 말 천주교 신자들을 죽이는데 쓰인 회화나무와, 사람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느티나무를 대비시킨 이 시는 구별하기 어려운 데다 괴(槐)라는 글자를 함께 쓰는 두 나무가 우연히(?) 배치된 작품이어서 눈길을 끈다.
몸을 베푼다는 말을 다시 기억하며 찾게 된 시가 김수우 시인의 ‘단풍든다는 것은’이다.

숲 해설에 자료로 쓰기 위해 검색하는 분들은 검색창에 나무 또는 특정 나무를 칠 것이다. 단풍이란 말을 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을 것 같다.

시인은 단풍든다는 것은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과 마주 앉는 일, 물든다는 건 모든 삐걱이는 슬픔에게 저벅저벅 돌아가는 일이라는 말을 한다.

단풍든다는 것은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라고 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 궁금하다.

단풍도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과 마주 앉는 일이라 말하든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라 말하든 분명한 것은 단풍을 슬픔과 연결지었다는 점이다.

단풍은 아름답기에 상실(喪失)의 슬픔을 망각하게 하는지도 모르는 것일까?

그렇기보다 그런 내력은 다 알지만 모른 척 하는 것이리라.

아니 차옥혜 시인처럼 단풍을 곱다고, 반짝인다고 말한뒤 마지막 부분에서 ˝단풍 든 목숨의 빛이/ 찬란하고 아프다˝(‘숲 거울‘ 수록 ‘단풍 든 목숨의 빛‘에서)고 말하기 위해 숨을 고르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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