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몇 지인들과 함께 시 쓰고 평론도 하는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별한 것은 없고 시인의 입장과 평론가의 입장을 또는 시인의 시각과 평론가의 시각을 어떻게 안배(按排)하는가, 란 관심에 따라 한 말이었다.

 

지난 2013년 비평가의 정체성을, 땡볕에 시든 채소를 뒤적이며 오지 않는 손님을 마냥 기다리는 하루벌이 장사꾼의 초조(焦燥)에 빗댄 한 평론가가 생각난다. 그는 고학력 논문 제조자들의 메마른 어깨와 숙인 고개가 보이며 비평의 무용함에 대한 확인과 절감은 생존의 문제로 다가온다는 말을 했다.

 

논문을 제조한다는 말은 시니컬하게 들리지만 특별히 덧붙일 말은 없고 다만 논문이라는 형식에 그가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는 말 정도를 하고 싶다. 나는 그를 비롯 비평이 외면받는 현실에서 (달리 대안이 없어서이겠지만) 열심히 읽고 쓰는 평론가들에게 대단하다는 말로 응원의 말을 건네고 싶다.

 

물론 이런 사정과 별도로 평론가들에게 대단하다는 말을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싫어하는 글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꼭 평론가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싫어하는 작가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으면 누구든 거절하지 못하는 이상 읽고 써야 하지만 평론가는 그 정도가 일반 필자를 능가한다.

 

프랑스 문학자 김화영 교수의 바람을 담는 집에 소개된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저자가 프랑스 유학 시절 만난 교수 이야기인데 그는 어떤 학자의 논리가 옳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 한 페이지 분량은 족히 되는 내용을 줄줄 외워서 인용했다고 한다. 대단한 분이다. 지금의 나는 그럴 필요가 없지만 내가 그와 같은 입장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도 같다.

 

작가 김훈의 문체가 싫은 나는 그의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아니 펴보지도 않았다. 이 말에서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정조(正祖)의 말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읽지 않은 것은 소설이 아니라 김훈 또는 김훈류()의 소설이다.

 

어떻든 그러면 어떻게 그의 문체가 싫은지 알았는지 묻는다면 그의 소설들을 읽고 쓴 리뷰를 읽으면 알 수 있다고 답할 것이다. 어떤 문체가 마음에 안 드는가, 묻는다면 짧은 문체가 그렇다고 답하겠다. 김훈의 글에 많은 비판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순신의 어머니가 작고한 지 두 달만인 어느 날 밤 이순신이 혼자 술에 취했을 때 차가운 늦가을 비가 내렸다는 김훈의 문장은, 이순신의 어머니가 작고한 지 두 달 후는 6월이기에 늦가을일 수 없다는 점에서 오류이다란 비판(국어학자 이익섭),

 

무협소설에 열광하는 독자와 전쟁 소재 역사소설에 열광하는 독자의 의식에는 유사한 측면이 존재하고 더욱 그 독자층이 30~50대 도시 중산층 남자라고 했을 때 전쟁소설이나 무협소설을 소비하는 맥락은 흡사하다는 비판(문학평론가 오창은) 등이다.

 

내가 무협 소설을 한 편도 읽지 않은, 아니 아예 펴보지도 않은 것과 김훈의 소설을 본능적으로 불편해 하고 싫어한 것에는 필연의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현 평론가는 중산층의 불안, 초조, 회의가 무협소설을 탐닉하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김훈의 소설이 (역사) 허무주의적인 것과 중산층의 불안, 초조, 회의는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짧은 문체와 허무주의 역시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 짧은 문체 자체가 아니라 그런 작위적인 문체가 싫다. 나는 여전히 중요한 것은 역사의 1차 자료이지 자료의 빈틈을 메운다는 이유로 상상력을 발휘하는 장르 즉 소설 또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것이 허무주의로 채색된 것이라면 더욱 문제다.

 

역사 소설을 즐기는 심리는 기본적으로 오락지향적이다. 오락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오락에 그치는 것이 나쁘고, 역사 오락물을 접하고 역사에 관심을 두는 것은 좋지만 사실(史實)과 가상 또는 허구를 혼동하는 것이 문제이다. 김훈은 2000시사저널편집장으로 일하던 당시 경쟁지인 한겨레21‘의 인터뷰 요청에 응해 이런 말을 했다.

 

'여자들은 화초와 같다', '조선일보가 최고다', '내가 전두환 찬양 기사 다 썼다'는 등.. 이 말들을 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사직서를 내고 지금 우리가 아는 전업 소설가가 되었다. 그의 글들을 안 읽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거듭 든다.(바쁜데 이런 글이나 쓰고 있는 나도 김화영 교수가 말한 프랑스 유학 시절 만난 교수과()가 아닌가 우려된다.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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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10-11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사저널과의 대담은 정말.. 김훈의 생각을 읽기에 좋은 자료였죠. 저도 읽으면서 경악했던...
그래도 < 칼의 노래 > 는 좋았습니다..ㅎㅎ

벤투의스케치북 2017-10-11 21:45   좋아요 0 | URL
네. 충격이었지요.. ^^
 

스트레스 슬리퍼(stress sleeper)란 스트레스를 잠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이다. 나도 스트레스 슬리퍼일까? 현대는 거듭 전문 용어가 새로 생겨나는 시대인 듯 하다.

늦은 오후 비염 때문에 병원을 다녀올 때 빗방울을 맞았다. 배낭에 우산이 들어 있었지만 귀찮아 꺼내지 않았다. 날이 추워 웅크린 자세로 버스도 탔었다. 어두운 밤 거리가 이상하게 싫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여덟시 무렵 춥고 쓸쓸하고 피로해 쪽잠을 잔다는 생각으로 누윘다. 이럴 때 나에게는 잠이 최고이다. 어느 정도는 슬픔도 정리되고 피로도 풀리고 의지도 생긴다.

나는 예민한 편이지만 잠을 자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다만 일찍 일어나 어디에 가야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새벽 두, 세시까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인다.

스트레스를 측정하는 객관적 지표 같은 것이 있을까? 아니면 스트레스인지 아닌지는 사람마다 다른 주관적인 것일까?

조금 힘든데 큰 스트레스라도 되는 듯 많이 힘들다고 하며 잠을 자가처방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밤 여덟시 무렵 내가 잔 잠은 내일 이후 열흘 정도 이어질 바쁜 상황을 대비한 체력을 세이브하려는 의미의 잠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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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사람이 새 작품을 쓸 능력이나 의욕을 잃은 상태를 의미하는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이란 용어가 있지만 작가가 아닌 나에게 쓸 말은 아니다.

다만 글쓰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미적거리다가 마감 날짜에 임박해 글을 쓰는데 그렇게 시작하면 무언가 알 수 없는 힘 같은 것이 휘몰아치듯 글을 쓰게 한다는 한 페친의 글은 음미할 만하다.

예열 없이 바로 시작하지 못하는 습관은 나에게도 해당한다. 슬럼프 시기를 건널 때 놀랍게도 내공이 놀라운 분들이 페친을 신청해온다.

‘좋아요’도 누르고 댓글도 달지만 대개 신청만 하고 묵묵부답이다. 물론 이는 탓할 일이 아니다. 자신의 글을 읽으라는 초대장이라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초대장을 받고 그의 타임라인에 가서 실마리를 얻곤 하는 것이 나다. 감사한 일이다.

오늘 내게 초대장을 보낸 사람이 아닌 내가 팔로우하는 시인의 글을 읽었다. 뜻 밖에도 마르크스의 ‘자본‘을 번역한 이야기이다.

지난 86년 봄부터 겨울까지 일주일에 한 두번 과천의 그 시인(물론 당시는 서울대생이었다.) 소유의 아파트에 모여 일어판 ‘자본‘을 나눠 가져간 뒤 국역한 원고를 독일어 원전과 비교하던, 서울대 80 학번 다섯 사람의 이야기이다. 시인은 그 다섯 사람들 중 하나였다.

사연이 풍부하고 이야기거리로서는 극적이기에 멋진 글이 될 수 있었지만 시인의 재주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많은 문장론 책들이 거의 다라고 해도 좋을 만큼 모든 훌륭한 문장들은 거듭 고치고 다듬은 결과라는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내가 접하는 멋진 글들은 모두 막힘 없이 술술 써내려간 글들인 듯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 그럴까?

어떻든 아지트, 가명, ‘자본‘ 등의 말을 들으며 나는 최윤 작가의 ‘회색 눈사람‘을 생각했다.

중요한 사실은 이제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다. 절판이 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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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3/4이 지났다. 바쁘게 보낸 시간들이었지만 많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바쁘게 보냈다는 사실이 시간을 잘 활용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인문학 중심의 읽기를 하는 나는 예년만 못 하지만 여전히 자연과학으로부터도 실마리를 얻으려 애쓰고 있다.

작년 이즈음에 비해 올해는 책을 읽은 양이 반 정도에 불과하다. 머리가 아파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읽기와 쓰기에 변화를 주려한 결과이다.

나이가 들면 관심 영역을 좁히게 된다는 말이 실감난다. 인문학 공부는 글쓰기로 마무리되어야 의미가 있기에 글쓰기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최근 한 천문학자가 이론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그는 이론을 세계에 관한 검증 가능하고 예측 능력이 있는 모형들을 기술하는 대체로 수학적인 구성물로 정의했다.(데이비드 헬펀드 지음 ‘생각한다면 과학자처럼’ 282 페이지)

나는 이 말을 이론이 현실을 완전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읽었다. 유연한 눈으로 학문과 세상의 관계를 볼 필요가 있다.

한 사회학자의 생자공(生自共)이라는 표현을 흥미 있게 읽었다.

필자는 마르크스를 ‘생존’(생산 양식) 전문가, 베버를 ‘자존’(특히 종교사회학) 전문가, 뒤르케임을 ‘공존’(유기적 연대-기계적 연대 등) 전문가로 정의했다.

물론 세 사상가 모두 각각의 전공 영역에서는 탁월한 업적을 남겼지만 어느 누구도 세 영역의 유기적 - 체계적 상호작용과 연계상황을 충분히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교수신문 2017년 9월 13일)

이런 글은 학문간 또는 사상가간 관계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하지만 공부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도 한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뜻의 소년이로학난성(少年而老學難成)이라는 주희의 말이 와닿는 시간들이다.

물론 주희는 짧은 시간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라는 말을 처방으로 제시했고 자극도 되고 격려도 되는 말도 했다.

섬돌 앞 오동나무 잎 가을 소리를 낸다는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이란 낭만적인 구절이 그것이다. 여전히 ‘지금‘은 공부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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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히지 않는 쉬운 책도 있고,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어려운 책도 있다.

내게는 잘 읽히지 않는 쉬운 책 중 하나가 2015년 겨울(12월) 월동 준비라도 하듯 사 서가(書架)에 꽂아둔 뒤 이듬해 봄(5월) 박물관 나들이시 손에 들고 다닌 ‘꽃으로 세상을 보는 법’이었다.

이 책은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가 하나의 주제를 각자의 설명 방식으로 풀어낸 책이다.

가령 자연과학자는 연리목은 몸의 공유를 택한 경우로, 혼인목은 공간의 공유를 택한 경우로 설명하고 인문학자는 배려의 최고봉은 뿌리도 둘이고 몸도 둘이지만 두 나무가 하나처럼 사는 혼인목이라 풀어낸다.

어떻든 나는 250여 페이지 정도에 시집만한 크기를 가진 ‘꽃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다 읽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최근 나무에 대해 다시 생긴 관심으로 그 책을 펴보게 되었다. 분명 같은 책이지만 이전과 다른 분위기, 다른 뉘앙스를 가진 책으로 느껴지는 것이 신기하다.

이 뿐 아니라 나는 그 낯선 새로움에 편승해 시인들이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한 나무 시들을 찾아 읽었다.

리기다 소나무의 제법 굵은 삭정이가 자신의 걸음 앞에 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무가 썩어가는 제 팔 하나를 스스로 잘라내가면서 말을 건넨 것으로 표현하는 시(엄원태 시인의 ‘나무가 말을 건네다‘).

꽃피는 열기에 봄비가 휘어져 내리는 목련 부근을 이야기하는 시(고옥주 시인의 ‘다시 목련’).

엄원태 시인의 시는 오래도록 병을 앓고 있는 시인의 감정이 이입된 시로, 고옥주 시인의 시는 공간을 휘게 하는 중력장(重力場)을 연상하게 하는 시로 나는 읽었다.

이 두 생각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천문학자는 진정한 과학자들의 한 가지 공통점으로 호기심을 들었다.

그에 의하면 절대적 진리는 인간의 큰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고 진리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발명품이다.(데이비드 헬펀드 지음 ‘생각한다면 과학자처럼’ 36 페이지)

물론 헬펀드가 말한 진리 구성의 주체는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지성이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없이 집단지성은 있을 수 없다.

호기심과 진리 구성(構成), 이것이 가장 중요한 기본이리라. 당연히 나무를 보는 데에도 적용될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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