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꽃피는 아몬드 나무‘와 요하네스 페르메르(얀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에 공통으로 사용된 색이 있다.

청금석(靑金石)이라 불리는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라는 광석을 가루내어 만든 울트라 마린이란 안료에서 유래한 청색이다.

작년 7월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황금 유물전에서 라피스 라줄리를 알았다.

그리고 그 해 8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에서 미세하게 차이나는 몇몇 청색의 다채로움을 보았다.

이중섭이 사용한 이런 저런 청색들 가운데 청금석에서 유래한 안료(인공 합성)로 그린 것이 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흐와 이중섭이 모두 불우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흥을 깨는 것인지 모르지만 울트라 마린이란 이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바다를 통해 이탈리아로 안료가 수입된 까닭에 바다 너머를 의미하는 라틴어 울트라마리누스에서 유래했다.

고흐의 삶은 blue와 yellow, 그리고 플레임(flame) 이란 말 없이 설명하기 어렵다.

우울(블루)했지만 또는 우울했기에 희망의 노란색 그림들을 많이 그렸고 불꽃처럼 사라진 사람. 내게 배정된 라피스 블루(lapis blue)란 색을 보며 떠올리게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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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박이문 교수께서 향년 88세로 유명을 달리 하셨다고 하네요. ‘다시 찾은 빠리 수첩‘, ‘현상학과 분석철학‘, ‘하나만의 선택‘ 등 제가 읽은 책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가운데 ‘다시 찾은 빠리 수첩‘은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란 점 말고 인상적인 글 때문에 자주 펴보는 책입니다.

다름 아닌 자신을 ‘늙은 열등생‘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공감하고 또 공감하는 문구입니다. 이 말은 지금도 저를 표현하는 말인 듯 여겨집니다.

시인이기도 한 이 분의 말 가운데 ˝아무리 서정적 시라도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그러할 때에 비로소 논리를 초월한 시적 가치를 체험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는 말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애써야 하리란 생각을 합니다.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몆 권 있으니 이제 그 책들을 읽어야겠습니다.

그 분의 ‘노장(老莊)철학‘을 읽느라 애쓰던 때가 30년 가까이 된 것 같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그 분의 폭넓은 사유와 성실하고 진지한 태도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음을 고백합니다... 직접 그 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타계가 마치 가족의 일인 듯 허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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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3-27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이문 교수님을 잘 알지 못했는데 많은 분들께서 애도하시는 것을 보면서 교수님의 사상에 눈이 가네요..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3-27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바람직한 지식인의 표상 같은 분이셨죠... 고인의 명복을 비시는 따뜻한 마음, 감사합니다.
 

테리 이글턴의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오래지 않다.

최근 읽은 그의 책은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이다.
이 책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에 이어 내가 두번째로 완독한 그의 책이다.

‘낙관하지 않는 희망‘을 읽다가 중도에 그만둔 난감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 같다.

물론 완독에 큰 의미가 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내가 책의 핵심을 바로 이해했는지도 자신할 수 없다.

여러 부분을 말할 수 있는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에서 내 관심을 가장 많이 끈 부분은 니체에 대한 지적 부분이다.

이글턴은 니체의 초인을 언급하는데 그에 의하면 전능한 신처럼 초인도 오로지 자신에게 의지하는 바 퇴행적으로 신학을 훔쳐보지 않으면서 자율성이나 자기생산을 말할 수는 없다.

이글턴은 니체는 문제가 되는 것은 신의 죽음이라기보다 인간의 불신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258 페이지)

이동용 교수는 자기 삶이 미로라면 들어서야 한다고 말한다.(‘망각 교실‘ 7 페이지) 미로 같은 니체 철학에 들어서야 한다는 의미이다.

들어서야 할 뿐 아니라 목숨 걸고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글턴의 세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이제 이글턴의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위하여‘나 ‘인생의 의미‘ 중 한 권은 어떨지?

이글턴 읽기에도 순서 또는 로드맵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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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오경(五經)의 하나인 신명기에 모세가 죽은 후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신명기 34장 5, 6절)

이 만남 이후 구조주의와 기호학에 대해 관심을 갖다가 ‘성서의 구조인류학‘이란 책을 알게 되었다. 저자인 에드먼드 리치에 의하면 모세와 예수는 구조적으로 같은 존재이다.

성경이 구조주의적 관점으로 독해 가능하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모세와 예수는 히브리인으로 태어난 뒤 신에게 지도자로 선택되었다. 모세는 백성들이 파라오의 압제에 시달릴 때 태어났고, 예수는 백성들이 헤롯의 압제에 시달릴 때 태어났다.

모세와 예수 모두 압제자들이 아기들을 죽이려 하자 이집트로 몸을 숨겼다. 모세가 물을 피로 변하게 했다면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했다. 모세와 예수 모두 언덕에서 죽었다.

모세와 예수 모두 산상에서 40일 금식을 하며 영적 위기를 맞았었다. 모세는 유월절 어린 양을 언급했고, 예수는 비유적 의미의 어린 양이 되었다.

모세는 양치기였고, 예수는 비유적 의미의 양치기였다. 모세는 (예수라는) 새 예언자의 출현을 예언했고, 예수는 성령의 도래를 예언했다.

모세의 미션은 백성들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구하는 것이었고, 예수의 미션은 인류를 죄의 예속에서 구하는 것이었다....

오늘 모세 신드롬이 있는가 싶어 검색해 보았다. 그런 개념이 없으면 새로 만들려 했는데 회의주의자 사전에 그런 신드롬이 기록되어 약간 허탈했다.

사람들을 아름다움과 젊음, 부와 권력, 마음의 평온, 행복 등의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준다고 약속하는 무비평적 신념 즉 망상이나 신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존재로 선택했다고 믿는 망상적 믿음이 모세 신드롬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인물이다. 정작 자신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비극적이기까지 한 인물이다.

그런 이름을 망상자(妄想者)들을 표현하는 데 쓰는 것은 잘못이다. 나에게는 무엇보다 자신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백성들이 들어갈 수 있게 희생한 모세의 비운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만일 모세 신드롬이란 용어를 만들었다면 추종자들에게 결정적 도움을 베풀었음에도 자신은 그 열매를 누리지 못한 것으로 개념을 정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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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의 ‘아마빛 머리의 소녀‘를 들을 때도 그랬지만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를 들을 때는 더욱 지금이 봄이 아니라 겨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을 유난히 어렵게 보내기 때문에 갖게 되는 ‘겨울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지금이 겨울인 것 같다는 생각으로 드러난 것일까?

겨울 뿐 아니라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계절을 느끼게 하는 곡이 따로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음악이 아닌 표제음악이라 해도.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도 다르게 듣고 느낄 수 있다.

전통 그대로 휘몰아치는 겨울 한풍을 묘사한 것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한 비발디의 ‘겨울‘도 격정을 표현하거나 긴박한 상황을 묘사한 음악으로 들을 수 있다.

물론 플룻 연주로 듣는 멘델스존의 ‘무언가‘처럼 가볍고 작고 사랑스러운 곡에 다르게 들을 여지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행동경제학이 있는 것처럼 행동음악학이란 학문도 있을 법하다. 행동경제학이 말하는 인간은 온전히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심리학은 오늘 내가 두 음악을 들으며 보인 마음의 움직임을 무엇이라 정의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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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O 2017-03-26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개 바이올린 소나타/소곡이나 실내악은 가을에 어울린다고들 하는데, 파형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이에 따라 인간이 반응하는 정도의 경계를 나름 수치화해서 보여줄 수 있다면 (20년 내로는 될 겁니다) 확실히 계절에 맞는 음악을 알 텐데요. 재밌는 주제입니다.

비발디가 유명하지만 비슷한 표제로 차이콥스키의 소곡집을 빼놓을 수 없죠. 차이콥스키의 사계는 러시아가 늦게까지 쓰던 율리우스력을 고려해도 어쩐지 잘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러시아를 다녀오면 달라지려나, 모르겠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3-26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생각거리를 주시는 댓글 감사합니다. 빛과 소리가 상이한 듯 하지만 파동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계절에 맞는 파장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MIO 2017-03-27 14:36   좋아요 1 | URL
음! 계절별 체광량이나 심지어 산란량에 따른 하늘 색 같은 것도 다르니 빛과 소리가 또 그리 엮일 수도 있겠군요. 재밌네요. 기분좋은 의외성을 찾게 됐습니다. :)

벤투의스케치북 2017-03-27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