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대 시인의 ‘앵두꽃을 찾아서’에 “소주이거나 항주이거나”란 표현이 있다.

소주(蘇州)와 항주(杭州)는 중국의 명승지(名勝地)인데 소주이거나 항주이거나란 표현은 모두 아름다운 곳이니 차이가 없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인접(隣接)한 곳이기에 차이가 없다는 의미인지?
어제 사전 예약을 거쳐 경회루 2층 누각에 올라 높은 시야 즉 왕의 시선으로 경복궁 사방 풍경을 보았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감회가 느껴졌는데 내게는 서쪽 방향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낙양각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 펼쳐진 푸른 초목과 하늘 등의 풍경이 마치 액자 속의 절경을 보는 듯 했기 때문이다.

창덕궁 후원에 비견할 곳이 경복궁에는 무엇이 있는가, 란 의문을 가졌었는데 이제 경회루 2층 누(樓)에서 보는 낙양각 기둥과 기둥 사이의 풍경이라 말하고 싶다.

경복궁 (전체)이거나 경회루이거나란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열린 마당의 경우 계단을 올라 보면 남산 풍경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마치 액자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안양루(安養樓) 아래에서 보는 위쪽 풍경이 액자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부석사(浮石寺)도 생각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설계자는 바로 이 영주 부석사(浮石寺)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기록을 보니 부석사가 세워진 것은 676년이고 1580년과 1740년 중건되었다.

경복궁은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다. 부석사(중건된 해는 1740년)가 경복궁(중건된 해는 1867년)보다 먼저 지어졌으니 경복궁 경회루의 액자 풍경이 부석사 안양루의 액자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연출된 것이라 볼 여지가 있다.

물론 우연의 산물일 수도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아니 경회루의 경우든 안양루의 경우든 국립중앙박물관 열린 마당의 경우든 의도의 산물인지 우연의 산물인지가 사실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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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 의하면 동물과 스노비즘은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동물은 소비자의 필요를 그대로 충족시키는 상품에 둘러 싸인 채 살아가는 존재, 미디어의 논리에 따라 바뀌는 모드(mode)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존재이다.

반면 스노비즘은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아무 것도 없음에도 형식화된 가치에 입각해 그것을 부정하는 행동양식을 말한다.

코제브가 스노비즘이라 부른 세계에 대한 태도는 후에 슬라보예 지젝에 의해 냉소주의로 불리게 된다.

알렉산더 코제브는 거대한 이야기가 사라지고 나서 사람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동물과 스노비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히로키는 ‘냉소주의 = 스노비즘’의 시대는 유효성을 잃었고 대신 독자나 시청자를 일정 시간 동안 지루하지 않게 하고 적당히 감동시키며 적당히 생각하게 하는 잘 만들어진 이야기에 대한 욕구가 높아진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어떻든 스노비즘일지 모르지만 나는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불편해 한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어 감동을 주지만 어느 정도 사기성(詐欺性)이 있는 것은 아닌지?

어떻든 나는 특히 감동할 거리와 생각할 거리가 적당히 섞인 이야기를 불편해 한다. 히로키는 스노비즘은 갔다고 말하지만 나는 내 비판적 시선들이 스노비즘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나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문화를 명품 소비하듯 또는 허영심으로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라깡의 루브르’(백상현), ‘미술관이라는 환상’(캐롤 던컨), ‘비참한 대학생활’(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총학생회),

‘동물원이 된 미술관’(니콜레 체프터), ‘동물화화는 포스트모던’(아즈마 히로키), ‘구경꾼의 탄생’(바네샤 슈와르츠)은 나의 그런 문제의식에 따라 선택한 책들이다.

자꾸 낯선 곳에서 엉뚱한 생각들과 씨름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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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권(墓券)은 죽은 사람이 묻힐 땅을 구입했음을 증거하는 문서이다. 부장품(副葬品)이다.

‘직설 무령왕릉‘에서 김태식은 묘권을 무령왕이 지하세계의 신들과 토지매매 계약을 한 증거물로 설명한다.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 내의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고분들 중 거의 유일하게 조성 시기는 물론 누구의 것인지가 밝혀진 능이다.

<무령왕릉은 한국인들보다 일본인들이 더 많이 찾는 능이다.>(재외동포신문 2016년 9월 22일 ‘백제 무령왕 이야기‘) 흥미로운 일이다.

백제는 한성 시대를 거쳐 웅진 시대, 사비 시대로 나아갔다. 한성 백제가 고구려적이었다면 웅진 및 사비 백제는 세련되고 우아했다.

(지난 4월 11일 한성백제 박물관에 갔었는데 국립공주박물관의 웅진백제실, 사비백제실도 가보고 싶다.)

김태식은 묘권과 돈을 부장한 것은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신의 동티 즉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 말한다. 망자의 노자(路資)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승에서 왕으로 살았던 사람도 지하세계에서는 불청객일 수 밖에 없다.(여담이지만 능에 묻은 묘권 및 돈은 면역억제제에 비유될 수 있을까?)

무령왕릉은 이야기거리가 많다. 세련된 문화, ˝도굴을 방불케 하는 졸속 발굴˝, 중국 천자(天子)에게만 썼다는 붕(崩)자가 발견된 묘지석 등으로 백제에 대한 관심이 솟아난다.

지난 2월 한국학 중앙연구원 김일권 교수(역사천문학)의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강의가 한성백제 박물관에서 있었다.

(나는 강의를 들은 동기로부터 핵심 부분들을 전해들었다. 안타까운 것은 김일권 교수의 책들이 아직 우리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구려가 조선과는 다른 자주적 우주관을 가졌음을 천문학으로 입증한 부분이 흥미로웠는데 ‘직설 무령왕릉‘에도 김일권 교수 이야기가 나온다.
무령왕 시대의 백제가 사용한 책력이 원가력(元嘉曆)이 아닌 대명력(大明曆)이라는, 오타니 미쓰오나 이은성 등 책력 전문가의 아성에 도전하는 경천동지할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김일권 교수의 견해를 수용한다.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강의 대신 그의 저서를 읽고 하게 된 생각은 김일권 교수는 숨은 실력자라는 사실이다.
지난 2월 9일과 4월 11일의 한성백제박물관이 통합되어 우리 동기들이 함께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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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일 임석재 교수의 K - MOOC 강의( ‘건축으로 읽는 사회문화’)가 시작되었다. 종강일이 6월 16일이니 중간 참여가 가능하다면 도전해볼까?

고대 근동과 이집트의 건축, 그리스의 건축, 로마의 건축, 초기 기독교 및 비잔틴 건축, 로마네스크 건축, 고딕 건축, 르네상스 건축, 바로크 건축 등을 만날 수 있는 강의이다.

내 자의적인 선별이지만 임석재 교수 하면 경복궁, 한옥, 골목길, 간이역, 돌, 담, 길, 창, 문 공간, 꽃살, 기둥, 누각, 지붕, 선 등의 보이는 것은 물론 사상, 도덕, 공간, 시간 등 추상적인 것까지 두루 생각난다.(사상은 ‘한국 전통 건축과 동양사상’, 도덕은 ‘한국 건축과 도덕 정신’, 공간은 ‘한국의 전통 공간’, 시간은 ‘시간의 힘’ 등을 참고)

건축가로서 드물게 90여권의 책을 쓴 다작 작가인 임석재 교수의 많은 책들 가운데 나는 ‘예로 지은 경복궁’, ‘서울, 골목길 풍경’, ‘한국의 간이역’ 등에서 특별한 인상을 받았다.(물론 ‘한국 전통 건축과 동양사상’, ‘한국 건축과 도덕 정신’, ‘한국의 전통 공간’, ‘시간의 힘’ 등으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았다.

덧붙이자면 ‘예로 지은 경복궁’도 추상적인 것을 다룬 책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 명사로 가야할 것이다. 물론 회귀는 자유롭다.) 경복궁은 문화해설과 관련해 내가 마음을 기울인 첫 사랑의 궁이고 골목길은 내가 참 좋아하는 기호(記號)이자 장소이다.

임석재 교수는 경복궁을 ‘주례(周禮)‘, ‘논어‘, ‘맹자‘, ‘순자‘, ‘춘추좌전‘, ‘국어‘, ‘시경‘, ‘서경‘, ‘주역‘, ‘관자‘, ‘한비자‘, ‘문심조룡‘ 등 동아시아의 거의 모든 고전이 총망라되어 반영된 공간으로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간이역은 낭만과 수탈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건축물로 설명했다.

간이역에서 우리는 추억, 낭만, 여행 등을 떠올리지만 일제가 한국으로부터 수탈한 곡물과 자원 등을 자국으로 실어가기 위해 임시로 세운 기지(基地)였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경복궁은 영원(?)하겠지만 골목길과 간이역은 변해가고 있다.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물론 감소 쪽으로. 아쉬운 일이다.

건축물이라는 가시(可視)의 공간 vs 추상 명사, 역사 vs 낭만, 거대 vs 소박 등의 긴장이 좋다. 바람이 있다면 임석재 교수가 종묘(宗廟)에 대한 책도 쓴다면 좋겠다는 것이다.

공부 거리가 참 많다. 이 공부 거리들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고 내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지렛대(지렛대 효과의)를 제 몸처럼 여겨서도 안 되며 강을 건넌 후 뗏목(부처가 강을 건넌 후에는 버리라고 한)을 계속 이고 가서도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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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 어디서 오는가 밝은 사람들 총서 8
정준영 외 지음 / 운주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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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선종(禪宗), 서양철학, 진화심리학, 심리학 전공자 등이 괴로움을 논했다. 괴로움 없는 행복한 세상을 위해. '괴로움, 어디서 오는가'는 그 결과물이다. 초기불교의 정준영은 사성제를 토대로 범부의 괴로움과 원인, 아라한의 경험에 한정해 괴로움을 논한다. 필자에 의하면 초기 경전 안에서 괴로움을 의미하는 두카는 고성제(苦聖諦)의 것, 삼법인의 것, 느낌의 괴로움 등으로 나뉜다. 필자는 두카를 단순히 고(苦), suffering, 괴로움 등으로 번역하여 모든 것이 괴롭다고 설명한다면 잘못이라 말한다.(49 페이지)

월폴리 라훌라는 많은 사람들이 두카의 의미를 잘못 번역하여 사용함으로 인해 불교를 염세주의라고 오해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물론 두카는 고통을 의미하지만 불완전성, 무상함, 비어 있음, 실체 없음 등의 의미도 포함한다. 두카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는 것이 의미있다. 붓다는 괴로움을 설명했지만 삶의 행복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붓다는 재가와 출가에 대한 구분 없이 여러 형태의 육체적, 정신적 즐거움에 대해 설했다.

초기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재가의 즐거움, 출가의 즐거움, 애착의 즐거움, 정신적인 즐거움, 육체적인 즐거움 모두 두카이다. 수행을 통해 얻는 선정의 상태, 높은 수행 단계 역시 두카이다.(50 페이지) 두카는 일상적인 의미의 괴로움이 아니라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즐거움이나 행복도 무상한 것이라면 불만족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어 두카이다.

아라한은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아라한은 깨달음을 이룬 초기 불교의 최고 성자이다.) 경전에 따르면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은 육체적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아라한은 육근(六根)을 통해 들어오는 대상에 마음을 사로잡히지 않고 혼란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다.(74 페이지) 아라한의 경우 필요에 의해 대상과 선택적인 접촉을 이룰 수 있으며 이런 접촉은 범부와 다른 환경에서 일어난다.

범부는 시각, 시각 의식, 형상이 있을 때 접촉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느낌이 일어난다. 자동반사적이다. 같은 대상이라도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다른 것이다. 여실지견하는 지혜로운 주의를 가지고 있는 아라한에게는 접촉이 일어나지 않는다.(76 페이지) 아라한이 육체적인 괴로움을 경험한다고 해도 그 괴로움은 범부의 괴로움과 다르다. 일반 범부는 육체적인 괴로움이 일어나면 괴로움을 괴로운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근심을 섞어 괴로움을 크고 강하게 확장시킨다.

아라한에게는 오온을 통한 육체적인 느낌들만이 있을 뿐 이에 정신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다.(81 페이지) 결국 두카는 마음의 문제이다.(82 페이지) 초기불교의 괴로움은 단지 통증이나 슬픔의 문제가 아니라 무상함 및 자아 관념 등의 번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87 페이지) 초기 불교의 핵심은 두카와, 두카로부터 벗어나는 길에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89 페이지) 선종 역시 번뇌 즉 보리라는 깨달음에 주안점을 두기에 번뇌 그 자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92 페이지) 달마는 수행하는 사람이 고통이 따를 때 다겁생래의 무수겁 동안 근본인 진여본성을 버리고 지말인 번뇌망념을 따라 사생육도에 윤회하면서 원한과 미움을 일으켜 다른 이를 괴롭힘이 한량없었음을 성찰하라고 가르쳤다.(95 페이지)

서양 철학의 입장에서 박승찬은 고통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라 말한다.(141 페이지) 니체는 인간은 고통 자체보다 고통의 무의미함 때문에 더 고통받는다는 말을 했다.(142 페이지) 빅터 프랭클은 의미 있는 고통은 이미 고통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143 페이지) 박승찬은 고통을 보다 폭 넓은 지평에서 바라보며 모든 이들과 함께 성찰하기 위해서 서양철학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새로운 방식으로 고통의 의미를 찾는다. 필자에 의하면 이런 작업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라도 위로나 도움이 될 수 있다.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요 관심사는 고통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가였다.(147 페이지) 스토아학파는 고통에 대한 무관심,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태도, 부동심(apatheia)을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148 페이지)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을 영혼의 평정심(ataraxia)과 육체의 건강으로 규정했다. 물론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직접적인 감각의 쾌락에서 찾지 않았다. 에피쿠로스학파에 따르면 고통은 악이지만 나중에 다가올 더 큰 쾌락을 위해 받아들여야 할 것이기에 항상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148 페이지)

고대 그리스의 경우 철학보다 신화, 서사시, 비극 등에서 고통을 깊이 있게 논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중세철학이 발생하면서 고통에 대한 완전히 다른 표상과 문제의식이 서구사상에 들어왔다.(150 페이지) 고통은 죄에 대한 벌로 여겨졌다. 개인의 죄와 벌 사이의 관계는 점차 공동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선조들의 잘못으로 후손들이 형벌을 받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원죄설도 이로부터 기인한 것이다.(152 페이지)

이는 명백한 개인적 잘못을 발견하기 힘듦에도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경우를 해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응보의 논리의 문제점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죄없는 희생자가 아닌 범죄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고통이 가중되는 것이다. 초기의 순교 체험에서 강한 영감을 받은 그리스도교는 악과 고통을 악신의 탓으로 돌려 무조건 피하려는 영지주의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을 강조하는 스토아학파에 대항해서 고통을 더욱 긍정적으로 보려는 해석을 발전시켰다.

이 해석에 따르면 고통은 구원의 필수적인 사전 단계처럼 보이고 이로써 그리스도의 제자임이 확인되는 것으로 간주된다.(156 페이지) 라이프니츠의 이론 안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은 신이 절대적으로가 아니라 단지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해 부차적으로 욕구하는 것일 뿐이다.(170 페이지) 영지주의와 스토아학파에 대항해 고통을 긍정적인 것으로 본 그리스도교의 지향점과 구조적으로 같음을 알 수 있다.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은 칸트에 의해 강하게 비판받는다. 칸트는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을 비판은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고통에 합목적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라이프니츠 등이 주장하는 철학적 변신론이나 칸트식의 비판이 지닌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전체의 이름으로 개인의 고통을 정당화함으로써 고통당하는 이를 근본적으로 소외시킨다는 것이다.(172 페이지)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은 윤리적인 악조차도 궁극적으로 형이상학적 악으로 설명해 버리므로 신의 윤리적 책임에 대해서만 변명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서도 그 책임을 회피할 이론적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모든 악과 그에 대한 고통은 존재론적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아무도 그에 대해서 도덕적 책임을 필요 없게 만든 것이다.(172, 173 페이지) 이성의 간지(list der vernunft)에 따라 발전하는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긍정적인 것에 대한 부정 즉 부차적인 것으로 본 헤겔의 이론은 라이프니츠 변신론의 역사철학적 버전이다.(174 페이지) 니체에게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 없음이 저주로 받아들여졌다. 삶에 무의미한 고통 역시 본래 무의미한 것이지만 니체는 그런 고통의 극단적 무의미성으로서 운명마저 긍정하고 사랑하라고 말한다.(amor fati) 이런 고통의 무의미성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니체가 제안하는 것은 광기이다.

아도르노는 고통은 하나의 질적 계기 즉 개념과 동일시하여 일치될 수도 없고 보편성 아래에 포섭될 수도 없는 사유의 계기를 제공한다고 보았다.(183 페이지) 고통의 문제와 관련해 현대 철학자들 중 가장 주목을 받는 학자는 엠마누엘 레비나스(1906 - 1995)이다. 그는 칸트보다 더 철저하게, 더 드러내놓고 변신론의 종말을 주장한다. 레비나스는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도, 어떤 형이상학적 목적론도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고 부조리할 뿐인 고통의 실재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레비나스는 자신의 철학을 통해 신과 도덕성의 이념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인간의 고통을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했는데 그것은 고통 받는 타인의 얼굴을 직면했을 때 얻게 되는 책임과 관련된다.(185 페이지)

레비나스는 자주 나의 고통이나 타자의 고통 자체는 쓸모 없고 무의미하며 타자의 고통을 위한 나의 고통 즉 대속적인 고통만이 의미있다고 주장했다.(186 페이지) 모든 고상한 사랑에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전제되어 모든 희생은 크고 작은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에 고통은 사랑을 실천하는 중요한 방식이다.(189 페이지) 제이미 메이어펠트(Jamie Mayerfeld)가 말했듯 고통이 우리를 개선시켜 주기 때문에 도구적으로 좋다고 해서 고통 그 자체가 좋은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191 페이지) 필자는 고통의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하여 이것을 무조건 없애버리려 해서도 안 되고 고통의 유용성만을 강조하여 이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타인에게 강요해서는 절대 안 되며(191 페이지) 미래의 행복을 근거로 인간의 모든 고통을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191 페이지)

인간의 이기심, 무관심, 악의로 인해 빚어지는 고통은 지양될 수 있고 지양되어야 한다.(192 페이지)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갈 아무런 희망이 없었을 때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한다.는 니체의 말을 되새기며 위기를 견뎌냈다고 한다.(193 페이지) 필자는 인간은 자신이나 타인이 겪는 고통과의 싸움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인 위대함과 영적인 성숙을 드러내라는 초대를 받는다고 말한다.

필자는 인간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초래하는 것과 끝까지 싸워나갈 때에야 비로소 고통의 의미에 관한 깊은 깨달음으로서 인간의 진정한 성숙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194 페이지) 진화심리학의 입장에서 전중환은 자연은 본질적으로 악하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고 무관심하다고 말한다.(197 페이지) 자연은 냉담하고 맹목적이다. 필자는 인간이 삶에서 겪는 괴로움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불행만이 아닌 행복도 설계해낸 자연 선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필자에 의하면 진화심리학은 마음의 한 측면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닌 심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이다. 필자에 의하면 진화심리학자들은 마음이 변천해온 과정 그 자체보다 마음이 진화의 산물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한다.(199 페이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일어나려면 다음의 세 가지 선결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개체군 내의 개체들 사이에 선결 조건이 필요하다, 둘째) 그 변이가 부모에서 자식으로 유전된다, 셋째) 이러한 유전적 형질들이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영향을 미친다. 즉 세대가 지남에 따라 여러 형질들 가운데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는 형질이 개체군 내에 더 흔해진다.

다윈주의는 크고 건강하고 힘센 개체가 항상 선택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어떤 형질이든지 개체군이 처한 특정한 생태적 환경하에서 번식 가능성을 높여주는 형질이라면 무조건 선택된다. 우리의 머릿 속에는 무엇이든 잘 해결해내는 만능 공구 하나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기능에 전문화된 연장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영역 특수적; domain - specific: 204 페이지)

약 11,000년 전 시작된 농경 사회나 200년도 채 되지 않는 현대 산업 사회는 우리의 신경계에 유의미한 진화적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요컨대 현대인의 두개골에는 여전히 석기 시대의 마음이 들어 있다.(206 페이지) 부정적 정서는 우리를 괴롭히지만 우리 유전자에는 유용했기에 인간 본성의 일부가 되었다. 열이나 기침, 통증처럼 몇몇 불쾌한 신체 증상들이 우리 몸을 지켜주듯 분노, 질투, 불안,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정서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는 유용한 방어로서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되었다.

최근 연구는 우울증도 특정 기능을 잘 수행하도록 설계된 심리적 적응이라는 관점을 지지한다. 우울증은 다른 외부 사건들에 흐트러지지 않으면서 여러 정신적, 신체적 변화를 조정하고 이끄는 기능을 한다.(217 페이지) 자연선택은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설계하지 않았다. 자연선택은 서로 경쟁하는 대립유전자들 가운데 후대에 복제본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남기는 유전자를 맹목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이다. 인간에게 행복은 목표인지 몰라도 자연선택에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232 페이지)

권석만은 심리학의 입장에서 삶이 괴롭고 고달픈 이유를 논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괴로움은 매우 보편적인 경험이다.(251 페이지) 인간은 행복감보다 불행감에 더 민감하다. 인간은 부정 편향성으로 인해 행복감을 느끼기보다 불행감을 느끼기 쉬운 존재이다.(255 페이지) 필자는 한국 사회를 삼독(三毒)에 물든 사회로 본다. 탐진치(貪嗔癡) 즉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물든 사회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흠뻑 젖어 있다. 이로부터 숱한 문제점들이 생긴다.

모든 인간이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라고 모두 괴롭고 고달픈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 생활 사건에 대한 부정적 의미 부여, 생활 사건의 의미를 왜곡하는 인지적 오류 등이 문제이다. 인지 오류의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흑백논리, 과잉일반화, 정신적 여과, 개인화, 잘못된 명명 등이다. 필자는 심리학의 입장에서 우리 삶이 괴롭고 고달픈 이유를 두 개의 공업(公業)과 하나의 사업(私業)으로 설명한다.

엔트로피 증대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이 세상에서 그런 법칙에 역행하여 살아야 하는 인류의 공업, 물질에 집착함으로써 지나치게 경쟁적인 삶에 매몰된 한국인의 공업, 성장 과정에서 겪은 나름의 고통스러운 경험과 상처 즉 개인의 사업 등이다. 자신의 고통을 여의고 안락을 얻으려는 이고득락(離苦得樂),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주는 발고여락(拔苦與樂)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심리학(특히 임상심리학, 상담심리학)은 공통적이다.

특히 고통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물질적인 경제적 여건이나 신과 같은 외부적 요인에서 찾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서 찾는 내향적 접근을 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심리학은 유사하다.(280 페이지) 나는 개인적으로 불교 수행에 많은 신뢰를 보낸다. 위빠사나에 참여했었지만 선 수행은 어렵다는 생각에 선뜻 참여하지 못하겠다. 유식 불교에 이론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실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은유와 마음 수행에도 관심이 있다. 카렌 호나이의 책들을 읽어야겠다. '괴로움, 어디서 오는가'는 주목할 책이다. 시리즈의 세번 째 책인 '마음,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아울러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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