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만난 인물들 가운데 두 명의 도굴꾼을 빼놓을 수 없다. 가루베 지온과 오타니 고즈이이다. 가루베는 교사(敎師)의 탈을 쓴 일제시대의 도굴꾼, 오타니 역시 같은 일제시대의 승려 도굴꾼으로 불린다.

물론 직접 만난 것이 아니다. 가루베 지온은 1970년에, 오타니 고즈이는 1948년에 각각 죽었다. 그러니 나와 그들의 만남은 책을 통한 간접적인 조우(遭遇)인 셈이다.

싹쓸이 도굴꾼이었던 가루베가 공주 송산리 7호분인 무령왕릉을, 6호분을 보호하기 위한 배총(陪塚)으로 여겨 도굴하지 않은 것은 유명하다.

가루베의 도굴 행각은 조선총독부조차 유적 연구가 아닌 유적 파괴라고 말했을 정도로 심했다.
우리나라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약탈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전시, 연구 하는 중앙아시아 유물들이다. 오타니 컬렉션이다.

일본의 승려 오타니 고즈이가 중앙아시아 일대, 지금의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투루판 등에서 약탈한 것들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오타니 컬렉션을 소장하게 된 것은 일제가 패망하면서 1945년 조선총독부가 기증받은 오타니 컬렉션을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한국에 남은 것이다.(김태식 지음 ‘직설 무령왕릉’, 도재기 지음 ‘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 참고)

오구라 타케노스케도 도굴꾼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아, 부작용인가? 일본인들이 모두 도굴꾼처럼 보이는 것은.

그래도 이병철(1910 – 1987: 컬렉션을 바탕으로 호암 미술관 개설), 전형필(1906 – 1962: 간송미술관 개설) 같은 분을 보고 희망을 갖는다.

사립박물관은 문화재의 사유화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하지만 개인이 막대한 사재를 털어 높은 안목으로 수집한 소장품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환원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한 실천 형태라 할 수 있다.(도재기 지음 ‘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 610 페이지)

간송미술관은 1년에 봄, 가을 단 두 번의 기획전을 여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4월 3일 – 10월 12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훈민정음과 난중일기 展: 다시, 바라보다‘가 열리고 있다.

우리 것들을 더 알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이다.

개인적으로 훈민정음과 난중일기 전(展)도 좋지만 그 이전에 이충렬의 ‘간송 전형필’ 같은 책을 더 읽고 싶다. (아직 읽지 못한 부끄러움...) 꼭 가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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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
도재기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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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는 문화 활동에 의해 창조된 가치가 뛰어난 사물이다. 국보는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 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이다. 도재기 기자의 '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는 국보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망라한 흥미롭고 유익한 책이다. 국보로 지정되었다가 취소되는 경우도 있다. 가짜로 밝혀질 경우 그렇다. 거북선 총통이 대표적이다.

 

도난, 도굴은 국보와 관련해 단골로 등장하는 이슈이다. 우리 나라 국보 1호는 숭례문이다.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서 결정된 것이지만 나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국보 1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훈민정음 해례본은 국보 70호이다.) 외국처럼 관리 편의를 위해 고유번호를 당국이 내부적으로 갖고 있되 공식적으로는 지정 번호를 없애자는 안()이 힘을 얻고 있다. 국보 지정번호를 매기는 나라는 한국과 북한 등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47 페이지)

 

328건의 국보 가운데 석기시대의 유일한 국보이자 제작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은 285호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이다.(75 페이지) 신석기시대부터 제작되어 청동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는 아니지만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귀하고도 흥미로운 유물은 보물 1823호인 농경문 청동기이다.

 

국내의 고구려 유물들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은 단 4건이다. 신라와 백제의 국보가 20여건이 넘는 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삼국 시대 국보의 일부는 삼국 중 어느 한 나라의 유물로 특정할 수 없어 삼국시대라 표기한다.(135 페이지) 국보 205호인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는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 비석이다. 이 비석 외의 나머지 세 개의 국내 고구려 국보는 모두 불상이다.

 

국보 118호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유일한 고구려 시대 반가사유상이다.(139 페이지) 한국사에 있어 불교 문화재는 양적으로나 질적 수준에 있어 엄청난 비중을 차지한다.(141 페이지) 삼국시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북한 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물과 유적, 남한의 백제와 신라 및 가야 유물 및 유적들과의 비교 분석이 필수적이다.(151 페이지)

 

서울 풍납토성(사적 11)은 초기 백제(한성 백제)를 알 수 있게 하는 열쇠이다. 아직 전체 면적 중 8.7%만 발굴, 조사된 상황이다. 보존과 개발로 첨예한 대립이 벌어지고 있다. 국립문화재와 학계는 풍납토성을 초기 백제의 왕성(王城)으로 보고 있다. 반면 일부 주민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풍납토성이 왕성일 가능성이 약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1217건에 이르는 국보가 나온 백제 무령왕릉은 도굴 같은 발굴이 이루어진 사적(史蹟)이다.(사적 13) 1084,600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무령왕릉 발굴은 최소 6개월, 길면 수년이 걸릴 수도 있는 있었는데 단 이틀만에 완료되었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국보 287호로 부여시대를 상징한다.

 

국보 9호인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에는 나당연합군의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점령한 것을 기념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186 페이지) 삼국 가운데 신라 시대 국보가 가장 많다. 삼국 경쟁에서 최종 승리자가 되면서 다른 나라에 비해 유물 및 유적이 잘 보존된 데다가 학자들의 연구도 집중되었기 때문이다.(217 페이지)

 

신라의 순금 금관은 국내는 물론 해외 관람객들도 늘 감탄하는 대표적인 한국문화유산이다. 현재 신라 금관의 용도, 사용자, 형태가 지닌 상징성 등을 놓고 학설들이 엇갈리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순금 금관은 모두 여덟 점으로 여섯 점이 모두 5세기에서 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경주 시내 고분들에서 출토되었다. 신라 금관은 7세기 이후에는 단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233 페이지)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가야를 포함시켜 사국시대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가야는 신라에 통합되었지만 이후 신라의 삼국통일 그리고 문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을 받는다. 우륵과 김유신이 가야 출신이다. 가야는 일제 식민사관의 하나인 임나일본부설의 무대이기도 하다.

 

왜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 가야 영역인 한반도 남부 지역을 지배했고 원활한 통치를 위해 임나일본부라는 식민통치기구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역사 왜곡이다. 고대부터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으니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민사관의 핵심 논리이다. 물론 지금은 일본 주류 학계에서조차 임나일본부설을 허구로 보고 있다.(297 페이지)

 

신라의 경주 외의 지역에서 금관이 발견된 곳은 가야가 유일하다. 가야 시대의 금관은 국보 138호를 포함 단 2점만이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국보는 청자,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안동 봉정사 극락전,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직지심경(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 소장) 등이다.

 

상감 기법은 세계 유일의 기법이다. 표면을 파낸 후 다른 색깔의 안료 등을 넣어 문양을 표현하고 유약을 발라 다시 구운 것이다. 국보 청자 가운데서도 교과서 등을 통해 잘 알려진 대표적인 문화재가 청자 상감 운학무늬 매병이다.(국보 68..간송미술관)

 

토기, 도기, 자기는 기본 재료인 흙의 종류, 굽는 온도, 표면에 바르는 유약 등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으로 토기보다 도기, 도기보다 자기가 더 수준이 높다. 세계 기록유산과 국보로 지정된 것은 대장경판을 종이로 찍어낸 인쇄물(판본)이 아니라 경판 그 자체이다. 현재 전해지는 대장경판 인쇄본은 조선 후기인 19세기에 찍은 것들이다. 지금 해인사에 남아 있는 팔만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이 아니라 재조대장경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정사인 '삼국사기'는 보물이고 야사인 '삼국유사'는 국보이다. '삼국유사'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국보이고 '삼국사기'는 다른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일부 있어 보물이다. 국보 111호인 안향 초상(소수서원)은 한국 최초의 주자학자인 안향을 그린 초상화이다.

 

소수서원은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소수는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는 뜻의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紹而修之)에서 유래했다.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은 경북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이다.(383 페이지)

 

배흘림 기둥으로 유명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국보 18호이다. 무량수전은 내부에 불상을 옆면으로 모신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의 국보들 중 유명한 것들은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218), 훈민정음 해례본(70), 창경궁 자격루(229), 영주 흑석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및 복장 유물(282), 양상 통도사 대웅전(209), 구례 화엄사 각황전(67), 세한도(180), 경복궁 근정전(223), 경회루(224), 창덕궁 인정전(225) 등이다.

 

경복궁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은 근정전과 경회루이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이다. 경복궁 근정전처럼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등 궁궐에는 정전이 있다.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 경희궁 숭정전 등 정전에는 정()자가 들어가는데 덕수궁은 예외이다. 덕수궁의 정전은 중화전이다. 다른 궁궐과 달리 애초 궁궐로 지어진 건축물이 아니라 관료의 대저택이었는데 임금이 머물면서 궁궐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418 페이지)

 

궁궐 건물의 서열은 전(殿)()()()()()()() 등으로 나뉜다. 창덕궁에서 국보 건축물은 인정전이다.(225) 창경궁의 국보 건축물은 정전인 명정전(226)이다. 창경궁은 숙종때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곳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이다.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 70)은 훈민정음 원본, 간송본 훈민정음 등으로 불린다. 지난 2008년 경북 상주에서 또 다른 훈민정음이 발견되었다. 상주본 해례본이다. 조선의 기록문화 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 일기‘, ’일성록’, ‘비변사 등록모두 국보이다.

 

조선 시대 과학 유물 가운데 국보는 고지도 1점과 물시계(자격루), 천문시계, 천문도 등 모두 4건이 있다. 물시계는 창경궁 자격루가 국보이다.(229) 해시계는 국보가 없이 보물로만 지정되었다. 하회탈과 병산탈도 국보이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천문시계 가운데 1시가 국보인데 공식 명칭은 혼천의 및 혼천시계(230.. 고려대 박물관)이다. 1669년 송이영이 만든 것으로 다목적 천문시계이다.

 

한국도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약탈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전시, 연구 등을 하는 중앙아시아 유물들이다. 오타니 컬렉션이다. 이는 일본의 승려 오타니 고즈이가 중앙아시아 일대, 지금의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투루판 등에서 약탈한 것들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오타니 컬렉션을 소장하게 된 것은 일제가 패망하면서 1945년 조선총독부가 기증받은 오타니 컬렉션을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해 한국에 남았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재의 유출은 일제 강점기에 절정에 달했다. 일제는 문화재 수집과 유출에 활용할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모두 동원했다. 조선총독부 같은 공공기관이 나서거나 학자와 도굴꾼, 골동품상 등 민간인들이 계획적이자 조직적으로 유출에 관여했다.(580 페이지)

 

최근 가루베 지온(김태식 지음 직설 무령왕릉’, 도재기 지음 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참고)‘과 오타니 고즈이(도재기 지음 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참고)라는 도굴꾼의 만행을 접한 부작용인지 일본인들이 모두 도굴꾼처럼 보인다. 그래도 이병철(1910 1987: 컬렉션을 바탕으로 호암 미술관 개설), 전형필(1906 1962: 간송미술관 개설) 같은 분이 있어 희망을 갖는다.

 

사립박물관은 문화재의 사유화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하지만 개인이 막대한 사재를 털어 높은 안목으로 수집한 소장품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환원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한 실천 형태라 할 수 있다.(610 페이지)

 

간송미술관은 1년에 봄, 가을 단 두 번의 기획전으로 유명하다. 현재(431012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훈민정음(간송본)과 난중일기 : 다시, 바라보다'가 열리고 있다. 우리 것들을 더 알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이다.(개인적으로 훈민정음과 난중일기 전()도 좋지만 그 이전에 이충렬의 간송 전형필같은 책을 더 읽고 싶다. 아직 읽지 못한 부끄러움...) 꼭 가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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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그리모(Helene Grimaud)의 내한 피아노 연주회와 종묘 대제(宗廟 大祭)가 오늘(5월 7일) 열린다.

그리모가 연주할 곡은 클로드 드뷔시의 ‘물속에 잠긴 성당‘, 루치아노 베리오의 ‘바서 클라비어‘, 가브리엘 포레의 ‘뱃노래 5번‘, 모리스 라벨의 ‘물의 유희‘, 레오시 야나체크의 ‘안개 속에서 1번‘ 등 물을 주제로 한 피아노 작품들이다.(5시 예술의 전당)

종묘대제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오후 2시)
나는 어떤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을까? 종묘 대제는 엄숙하고, 흔히 볼 수 없는 이벤트이고, 음을 들으면 색을 느낀다는 그리모의 연주는 세련된 미모를 자랑하는 연주자의 서정과 힘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이다.

종로에서 종묘 대제를 보고 그리모 연주회를 듣기 위해 예술의 전당으로 이동한다면 나는 강북에서 강남으로, 우리의 전통 왕실 문화제에서 서양 고전 음악회로 이동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생각을 하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예매 또는 예약 여부를 떠나 오늘은 근무일이다. 한참 생각하고 이리 저리 궁리했는데 일정이 잡혀 있는 것을 뒤늦게 안 것이 아니라 일정이 잡혀 있는데도 어떤 것을 선택할지를 공상한 것이다. 허무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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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5-08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를 키운다던 그녀, 엘렌 그리모가 왔었군요.
잘 모르지만 그녀의 야나체크는 강렬했어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05-08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야나체크 음악도 들어야 하는데 관심이 덜 갑니다. 늑대 양육 자격증을 가진 분이라지요. 인상적인 분입니다...

양철나무꾼 2017-05-08 10:07   좋아요 1 | URL
헤헷~, 늑대였군요.
전에 그녀가 쓴 자서전인지 수필집을 읽어놓고도 이리 되었네요.
비로 잡아주셔서 감사~^^

벤투의스케치북 2017-05-08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맙습니다...
 
직설 무령왕릉 - 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
김태식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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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무령왕릉'은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 - 1970)이라는 교육자를 가장한 도굴꾼, 고고학자를 중심으로 권력과 고고학의 관계와 무령왕릉을 계기로 드러난 민족주의적 레토릭(rhetoric; 수사修辭; 특정 이념을 주입시키려는 수단)을 파헤친 책이다. 가루베는 공주를 떠난 1940년 무렵 자신이 조사한 백제 고분이 1천기를 돌파했다고 떠벌였을 정도로 큰 도굴꾼이었다.

 

가루베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문화유적을 파괴하고 수탈한 장본인이다. 저자 김태식은 무령왕릉에 대한 레토릭(중국의 천자에게나 쓴다는 붕이란 글자를 보고 무령왕을 민족주체성을 선지해준 분으로 열렬히 선전)이 이후 전개된 경주 지역 신라 왕릉 발굴로 이어져 굉음을 내게 되었다고 말한다.

 

무령왕릉에 대해 논하려면 공주 송산리 고분군(古墳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송산리 고분군은 충남 공주에 자리한 웅진 도읍기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일곱 기의 무덤으로 무령왕릉이 대표적이다. 송산리 고분이란 이름은 가루베가 처음 쓴 것이다. 무령왕릉 외에 누구의 능인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은 도굴이 워낙 심한 까닭이다.(34 페이지)

 

무령왕릉은 배수로 공사를 하던 김영일(현장소장)에 의해 발견되었다. 송산리 고분군에 대한 초창기의 고고학적 기록은 대부분 가루베의 자료를 출처로 한다. 일본 학자들이 인정하듯 1920, 1930년대 일본은 고고학 인력을 전부 평양과 경주에 쏟아부었다. 이 바람에 공주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가루베는 공주를 틈새 시장으로 삼은 것이다.(53 페이지) 물론 당시 일본 총독부는 모든 고적조사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한편 각종 법령으로 유적과 유물 보존 정책을 표방했었다.(52 페이지) 마타도어 같은 도굴꾼 가루베가 무령왕릉을 놓친 것은 무령왕릉을 6호분 보호를 위해 인공적으로 쌓은 주산(主山) 또는 배총(陪冢)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다.(56, 57 페이지)

 

저자는 가루베의 범죄적 실체를 부각시키면서도 그가 수행한 역할을 일정 부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백제 붐을 조성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산하 공주분관은 무령왕릉 발견으로 폐쇄 위기를 넘기고 국립박물관 산하의 다른 지방 분관과 함께 공주박물관으로 지위가 격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77 페이지)

 

충남 역사문화관으로 변모한 이 건물은 무령왕릉 발굴 이전 230점 정도였던 수장 유물이 발굴 이후 8,365점으로 늘었다. 저자는 무령왕릉이 졸속 발굴되었다고 주장한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의 5, 6호분으로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한 배수로 준설 공사 도중 발견되었다.

 

책에는 새 왕릉을 짐작케 하는 상황에서 계속 배수로를 파내려가자는 쪽과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해야 한다는 쪽의 가벼운 다툼은 물론 무령왕릉 발견 공을 차지하기 위한 분투 또는 책략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졸속을 무마하려는 사후 변명에 대한 기록 역시 생생하다.

 

무령왕릉 입구를 파헤치자 천둥 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떨어졌다는 과장된 소문이 돌았다. 이 릉 이후 천마총, 황남대총 등 경주 지역 발굴 때 가뭄도 왕릉 탓, 폭우도 왕릉 탓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제주, 하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잠들지 않는 남도'라는 곡이 생각난다. 저자는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아무리 고고학자라도 사자(死者)가 잠들어 있는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이 인간이 할 짓인가?라고 말한다.(111 페이지) 본문이 말하듯 죽은 사람이 묻힐 땅을 (토지신에게서) 구입했음을 증거하는 문서인 묘권(墓券)이란 것도 있다.

 

제주 4. 3이 죽임의 폭력과 관계된 것이라면 고고학자의 작업은 문화를 위한 것이다. 참고할 것은 지진제(地鎭祭)이다. 1938415일 국립중앙박물관 공주분관 기공식때 지진제(地鎭祭)가 드려졌다. 일종의 위령제이다.(118 페이지..위령제는 한국고고학계의 관례이다.) 공사가 무사히 진행되도록 땅의 신에게 지내는 고사이다.(25 페이지)

 

무령왕릉은 공개적으로 발굴된 최초이자 마지막 유적이다.(117 페이지) 일반인에게까지 공개된 것이다. 무령왕릉임을 확신케 한 문구는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란 문구였다.

 

저자는 "손 하나 대지 않은 완전한 백제 왕릉, 그것도 백제 중흥의 대왕 무령왕의 능이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고고학 하는 사람으로서 누가 가슴 떨리지 않겠는가."란 김원용의 말에 졸속 발굴(하룻 밤에 발굴을 해치운)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지는 않았을까, 란 말을 한다.(127, 128 페이지)

 

졸속 발굴은 유물의 파손을 초래한다. 김원용은 보도진이나 구경꾼들과의 마찰과 사고 방지를 명분으로 도굴꾼이 아니면 생각하지도 못할 한밤중 발굴을 결정했다.(143 페이지) 졸속 발굴 때문에 실측도도 부실했고 사진 자료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147 페이지)

 

저자는 고구마 감자 캐듯 이루어진 유적 파괴라는 말을 한다. 저자는 고고학자의 합법적 발굴이라도 경험 부족, 지식 부족, 성의 부족 등으로 얻어내야 할 정보를 일부분 밖에 얻어내지 못하거나 기록화가 미비, 불충분하여서 다른 사람이 유적의 원상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면 그도 또한 결과적으로 유적의 파괴자요 도굴자란 글을 언급한다.(163 페이지)

 

"그러나 어쩌랴. 이런 글을 남긴 주인공은 바로 무령왕릉을 고구마나 감자 캐듯 파헤친 김원용이었다."는 저자의 글(164 페이지)은 의미심장하다. 저자에 의하면 김원용은 분명히 고고학 발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몸에 배어 있었지만 분위기에 휩싸여 기본을 잊고 무령왕릉을 졸속 발굴하고 말았다.(16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무령왕릉은 졸속 공개되었다가 급기야 영구 폐쇄된다.(177 페이지) 저자는 일반 공개가 무덤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충분히 예상됨에도 무리하게 공개한 것은 무령왕릉을 통해 관광 수익을 올리려는 당국의 얄팍한 계산 때문이라 말한다. 무령왕릉은 발견 당시 이미 허물어져 원형을 알 수 없는 왕릉 봉분을 무리하게 만들어 올림으로써 신라 고분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봉분이 우람, 장대하다.

 

이는 백제 왕릉이 크기면에서 신라 왕릉만은 해야 한다는 경쟁심의 발로일 수 있다. 저자는 무령왕릉 졸속 발굴에 청와대가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무령왕릉 발굴 완료 시점과 출토 유물의 청와대 나들이 시점에 주목한다. 저자에 의하면 무령왕릉 발굴을 계기로 박정희는 고고학 발굴을 민족주체성 회복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 선전에 마음껏 활용했다.

 

저자는 무령왕릉에서의 실패(홍보 자료로 만들지 못한) 이후 경주 발굴은 전 과정을 홍보용 영화로 만들었다는 점을 들어 무령왕릉이 고고학과 권력이 결합하는 단초를 마련했다고 말한다.(215 페이지) 무령왕릉은 유물 처리와 보고서 발간도 졸속이었다.(223 페이지) 고의인지 실수인지 유물 누락도 있었다.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티격태격하는 불상사도 있었다. 무령왕릉 보고서 작성은 일본에 의해 주도되었다. 일본 학계는 예나 지금이나 백제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더구나 무령왕릉에서 쏟아진 많은 유물이 일본 각지에서 출토된 것과 비교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무령왕릉에 대해 보인 각별한 관심은 이해가 간다.

 

한국 정부 차원에서는 무령왕릉을 선전용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238 페이지) 저자는 일본 학계 주도의 무령왕릉 연구의 문제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무령왕 또는 무령왕릉을 오직 중국이나 일본 중심의 대외관계로만 보게 되었고 백제사를 전체사의 맥락에서 접근하지 못하고 무령왕이 재위하고 무령왕릉이 만들어진 웅진 도읍기라는 극히 짪은 시기로 따로 떼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241, 242 페이지)

 

무령왕은 일본 열도 어느 섬에서 태어났지만 곧바로 귀국해 한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성 도읍기와 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성왕 때 도읍을 사비로 옮겼다. 사비시대와도 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일본 학계가 무령왕릉 연구를 주도하고 거기에 국내 학계가 종속되는 것은 문제이다.(243 페이지)

 

저자는 한글판과 거의 동시에 발간된 김원용의 일본어판 무령왕릉 단행본을 일본에 간도 배알도 다 내준 것으로 본다.(243 페이지) 무령왕릉은 삼국 시대의 고분 중 거의 유일하게 시기는 물론 주인공이 밝혀진 고분이다.(흥덕왕릉과 태종무열왕릉도 무덤 주인공이 밝혀졌다.) 무덤의 주인공이 토지신에게서 땅을 구입했음을 증빙하는 서류인 묘권(墓券)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묘권 즉 매지권과 오수전(五銖錢)이라는 돈 꾸러미는 무령왕릉이 살아 있을 때 이 세상의 주인이었으나 지하세계에서는 불청객일 뿐임을 증명한다. 묘권과 오수전을 함께 묻은 것은 지하세계의 동티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무령왕릉보다 더 많은 유물이 출토된 경주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주인공이 밝혀지지 않아 연구가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송산리 6호분이 무령왕릉의 가묘라는 설을 제시한다. 저자는 고고학 발굴에 광범위한 자연과학적 방법을 도임해야 함은 무령왕릉 부부 관재(棺材)에 대한 목재조직학의 분석 결과로도 잘 드러난다고 말한다.(351페이지) 저자는 우리나라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했다고 해서 대한제국을 대단한 나라로 착각하지 말라고 한다.

 

저자는 주()나라 천자가 죽음에 붕을 쓰고 팔일무라는 특권 춤을 추었으며 죽어 빈() 기간이 7개월이나 되는 특권을 누렸다 해서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라고 말한다. 패권은 제후국 왕인 제나라 환공, ()나라 문공, 초나라 장공, 오나라 부차, 월나라 구천이라는 다섯 패자(霸者)에게 갔는데 천자라는 허울만 뒤집어쓴 채 맞이한 죽음이 붕이든 훙이든 졸이든 무슨 차이가 있으랴, 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럼에도 무령왕릉 지석에서 중국 천자에게나 쓴다는 붕()자를 발견한 학계에서는 이 글자 하나로 백제가 민족주체성을 견지한 왕조였노라고 호들갑을 떨었고 아직도 이런 미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373 페이지)

 

자를 보고 호들갑을 떤 사람들에게 고민거리가 있었다. 붕이란 글자가 들어 있는 매지권에서 중국 양나라가 무령왕에게 내린 영동대장군이란 봉작이 그대로 쓰였다는 것이다. 또한 무령왕릉은 구조부터 중국적인 색채가 농후하고 출토 유물도 중국 수입품이 아주 많다는 심각한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답은 주체의식에 불리한 증거는 백제의 진취적인 기상이라 하며 넘어가고 주체의식이 뚜렷해 보이는 것은 과대포장한 것이다. 저자는 무령왕릉은 중국인들이 만든 것임을 강력 주장한다. 저자는 무덤은 결코 보수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쉽게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닌, 한바탕 불고 지나는 유행품일 뿐이라 말한다. 무덤은 입었다 버리는 옷과 같다는 것이다.(411 페이지)

 

저자는 중국식 무덤을 썼다고 중국이 백제를 지배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 말한다. 저자는 박정희의 경주 개발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언급한다. 박정희는 경주개발을 기폭제로 삼아 국민정서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개조하며 유신(維新)하고자 했다.(449 페이지) 박정희는 경주개발을 통해 정서를 순화해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국민, 철두철미 반공으로 무장한 국민을 만들고자 했다.(450 페이지)

 

저자는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얼마 전까지도 유일하게 고고학 발굴현장을 직접 찾은 인물이다.(453 페이지) 고고학과 정권의 밀착은 전두환으로 이어졌다. 정권 기반이 박정희보다 더 취약했던 서울 올림픽 공원 조성 지구에 포함된 몽촌토성 발굴을 고리로 고고학계와 연결되었다.

 

"고고학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학문이다. 땅속에서 캐내는 모든 것이 새로울 수 밖에 없고 그 하나하나가 옛 문화의 새로운 면을 부활케 한다. 유물 대부분은 군주시대에 정점을 이루었던 왕과 관계가 있다. 이런 유물을 통해 관람객은 무의식적으로 위대한 왕이 구가했을 왕국을 떠올리게 되고 나아가 현세의 독재자 출현에 대한 갈망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아울러 독재자는 흔히 극단적인 국수주의 성향을 지니며 이를 위해 과거 어느 때인가의 영광을 재현하려 한다. 민족주체성, 전통문화 부활을 부르짖은 박정희가 좋은 예다. 여기서 고고학과 독재정권은 접점을 이루며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454 페이지)

 

절묘한 말이다. 김윈용은 유적 발굴에 고도의 정치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았다. 저자는 무령왕릉을 땅 속에서 파내는 민족주체성의 뿌리로 정의한다. 하고 싶은 말은 많다. 저자의 노고가 돋보인다는 말부터 무령왕릉을 둘러싼 고고학과 정권의 공생, 역사에 대한 숙고 등등....

 

나는 물론 저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독재정권이 고고학과 유물 등을 이용해 국민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하고 통제하려 한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경주 개발과 같은 선물이 주어진 것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가 국민의 무의식적 동화 또는 갈망을 이야기했기에 대응논리가 미비하지만 요즘 국민들은 그런 이데올로기적 술수를 헤아릴 줄 알지 않을지?란 말을 하고 싶다. 저자로부터 많이 배웠다. 개인적으로는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 개발과 관련해 삼불 김원용 선생이 공과 별개로 무령왕릉 졸속 발굴은 물론 실증사학, 친일사학 등의 혐의를 지닌 것을 알게 되었다. 균형 있게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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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보고 이 이후의 예술은 모두 데카당스란 말을 한 사람은 화가 피카소이다. 그는 동굴벽화의 독창성과 추상성에 깊은 찬사를 보냈다. 원시 혈거인(穴居人)들이 (들소 등의) 벽화를 그린 이유에 대해 많은 설이 제기되었다. 사냥설, 유희설, 모방설, 파괴설 등..

 

그런데 남아메리카공화국의 인지고고학자인 루이스 윌리엄스(David Lewis Williams; 1934 - )가 획기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동굴 속 어둠에 대응하기 위해 뇌가 일으킨 단순 환각을 벽에 옮긴 것이 동굴벽화에 산재하는 추상적인 문양이라는 것이다.

 

빛이 전혀 없는 어둠 속에서 눈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 중 하나가 환각이다. 깜깜한 상태이기에 눈은 실상 아무 것도 보지 못하지만 무언가가 보이는 것은 깨어 있는 한 눈을 통해 바깥세계를 이해하고 위험 요인을 감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뇌의 작용 때문이다.

 

단순 환각이 지속되면서 뇌는 그림의 요소들을 가지고 구체적인 형태를 그려내는데 이것이 바로 복합 환각이다. 관건은 환각과, 그것을 동굴에 옮기는 것은 다른 차원이라는 점이다. 영화 이론가이자 평론가인 앙드레 바쟁은 소중한 존재나 동경의 대상을 영원히 간직하려는 심리적 충동을 그림의 동기로 보았다.(조주연 지음 현대미술 강의참고)

 

내가 환각설을 지지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사냥설, 유희설, 모방설, 파괴설 등은 각기 한계가 있다. 어떻든 나는 원시 혈거인들이 어떻게 동굴 벽화를 그렸는지를 통해 무엇을 하려는가.(*)

 

* 루이스 윌리엄스는 그들이 왜 그림을 그렸는지를 논하기 전에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를 논했다. 어떻게는 루이스 윌리엄스가, 왜는 앙드레 바쟁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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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5-06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아~ 상당히 흥미롭고 아주 깊은 암시를 주는 글이네요. 그리고 벤투 님 덕분에 David Lewis-Williams의 해당 책을 아마존에서 찾아봤네요. 인간 의식(consciousness)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 나오는데 함 읽어봐야겠네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Lewis-Williams, David (Nov 2002/Paperback, Apr 2004). The Mind in the Cave: Consciousness and the Origins of Art. London & New York: Thames & Hudson. [320 pages]

[처음 댓글 올린 시각 : 2017-05-06 15:48]
[탈자 수정해 다시 올린 시각 : 2017-05-06 19:44]

벤투의스케치북 2017-05-06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 읽으시고 관련 페이퍼 쓰시길 바랍니다... (부담 갖지 마시기를... 바라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