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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
도재기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문화재는 문화 활동에 의해 창조된 가치가 뛰어난 사물이다. 국보는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 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이다. 도재기 기자의 '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는 국보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망라한 흥미롭고 유익한 책이다. 국보로 지정되었다가 취소되는 경우도 있다. 가짜로 밝혀질 경우 그렇다. 거북선 총통이 대표적이다.
도난, 도굴은 국보와 관련해 단골로 등장하는 이슈이다. 우리 나라 국보 1호는 숭례문이다.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서 결정된 것이지만 나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국보 1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훈민정음 해례본은 국보 70호이다.) 외국처럼 관리 편의를 위해 고유번호를 당국이 내부적으로 갖고 있되 공식적으로는 지정 번호를 없애자는 안(案)이 힘을 얻고 있다. 국보 지정번호를 매기는 나라는 한국과 북한 등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47 페이지)
328건의 국보 가운데 석기시대의 유일한 국보이자 제작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은 285호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이다.(75 페이지) 신석기시대부터 제작되어 청동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는 아니지만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귀하고도 흥미로운 유물은 보물 1823호인 농경문 청동기이다.
국내의 고구려 유물들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은 단 4건이다. 신라와 백제의 국보가 20여건이 넘는 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삼국 시대 국보의 일부는 삼국 중 어느 한 나라의 유물로 특정할 수 없어 삼국시대라 표기한다.(135 페이지) 국보 205호인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는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 비석이다. 이 비석 외의 나머지 세 개의 국내 고구려 국보는 모두 불상이다.
국보 118호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유일한 고구려 시대 반가사유상이다.(139 페이지) 한국사에 있어 불교 문화재는 양적으로나 질적 수준에 있어 엄청난 비중을 차지한다.(141 페이지) 삼국시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북한 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물과 유적, 남한의 백제와 신라 및 가야 유물 및 유적들과의 비교 분석이 필수적이다.(151 페이지)
서울 풍납토성(사적 11호)은 초기 백제(한성 백제)를 알 수 있게 하는 열쇠이다. 아직 전체 면적 중 8.7%만 발굴, 조사된 상황이다. 보존과 개발로 첨예한 대립이 벌어지고 있다. 국립문화재와 학계는 풍납토성을 초기 백제의 왕성(王城)으로 보고 있다. 반면 일부 주민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풍납토성이 왕성일 가능성이 약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12종 17건에 이르는 국보가 나온 백제 무령왕릉은 도굴 같은 발굴이 이루어진 사적(史蹟)이다.(사적 13호) 108종 4,600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무령왕릉 발굴은 최소 6개월, 길면 수년이 걸릴 수도 있는 있었는데 단 이틀만에 완료되었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국보 287호로 부여시대를 상징한다.
국보 9호인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에는 나당연합군의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점령한 것을 기념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186 페이지) 삼국 가운데 신라 시대 국보가 가장 많다. 삼국 경쟁에서 최종 승리자가 되면서 다른 나라에 비해 유물 및 유적이 잘 보존된 데다가 학자들의 연구도 집중되었기 때문이다.(217 페이지)
신라의 순금 금관은 국내는 물론 해외 관람객들도 늘 감탄하는 대표적인 한국문화유산이다. 현재 신라 금관의 용도, 사용자, 형태가 지닌 상징성 등을 놓고 학설들이 엇갈리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순금 금관은 모두 여덟 점으로 여섯 점이 모두 5세기에서 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경주 시내 고분들에서 출토되었다. 신라 금관은 7세기 이후에는 단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233 페이지)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가야를 포함시켜 사국시대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가야는 신라에 통합되었지만 이후 신라의 삼국통일 그리고 문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을 받는다. 우륵과 김유신이 가야 출신이다. 가야는 일제 식민사관의 하나인 임나일본부설의 무대이기도 하다.
왜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 가야 영역인 한반도 남부 지역을 지배했고 원활한 통치를 위해 임나일본부라는 식민통치기구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역사 왜곡이다. 고대부터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으니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민사관의 핵심 논리이다. 물론 지금은 일본 주류 학계에서조차 임나일본부설을 허구로 보고 있다.(297 페이지)
신라의 경주 외의 지역에서 금관이 발견된 곳은 가야가 유일하다. 가야 시대의 금관은 국보 138호를 포함 단 2점만이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국보는 청자,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안동 봉정사 극락전,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직지심경(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 소장) 등이다.
상감 기법은 세계 유일의 기법이다. 표면을 파낸 후 다른 색깔의 안료 등을 넣어 문양을 표현하고 유약을 발라 다시 구운 것이다. 국보 청자 가운데서도 교과서 등을 통해 잘 알려진 대표적인 문화재가 청자 상감 운학무늬 매병이다.(국보 68호..간송미술관)
토기, 도기, 자기는 기본 재료인 흙의 종류, 굽는 온도, 표면에 바르는 유약 등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으로 토기보다 도기, 도기보다 자기가 더 수준이 높다. 세계 기록유산과 국보로 지정된 것은 대장경판을 종이로 찍어낸 인쇄물(판본)이 아니라 경판 그 자체이다. 현재 전해지는 대장경판 인쇄본은 조선 후기인 19세기에 찍은 것들이다. 지금 해인사에 남아 있는 팔만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이 아니라 재조대장경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정사인 '삼국사기'는 보물이고 야사인 '삼국유사'는 국보이다. '삼국유사'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국보이고 '삼국사기'는 다른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일부 있어 보물이다. 국보 111호인 안향 초상(소수서원)은 한국 최초의 주자학자인 안향을 그린 초상화이다.
소수서원은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소수는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는 뜻의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紹而修之)에서 유래했다.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은 경북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이다.(383 페이지)
배흘림 기둥으로 유명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국보 18호이다. 무량수전은 내부에 불상을 옆면으로 모신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의 국보들 중 유명한 것들은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218호), 훈민정음 해례본(70호), 창경궁 자격루(229호), 영주 흑석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및 복장 유물(282호), 양상 통도사 대웅전(209호), 구례 화엄사 각황전(67호), 세한도(180호), 경복궁 근정전(223호), 경회루(224호), 창덕궁 인정전(225호) 등이다.
경복궁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은 근정전과 경회루이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이다. 경복궁 근정전처럼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등 궁궐에는 정전이 있다.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 경희궁 숭정전 등 정전에는 정(政)자가 들어가는데 덕수궁은 예외이다. 덕수궁의 정전은 중화전이다. 다른 궁궐과 달리 애초 궁궐로 지어진 건축물이 아니라 관료의 대저택이었는데 임금이 머물면서 궁궐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418 페이지)
궁궐 건물의 서열은 전(殿)당(堂)합(閤)각(閣)재(齋)헌(軒)루(樓)정(亭) 등으로 나뉜다. 창덕궁에서 국보 건축물은 인정전이다.(225호) 창경궁의 국보 건축물은 정전인 명정전(226호)이다. 창경궁은 숙종때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곳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이다.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 70호)은 훈민정음 원본, 간송본 훈민정음 등으로 불린다. 지난 2008년 경북 상주에서 또 다른 ‘훈민정음‘이 발견되었다. 상주본 해례본이다. 조선의 기록문화 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 일기‘, ’일성록’, ‘비변사 등록’ 모두 국보이다.
조선 시대 과학 유물 가운데 국보는 고지도 1점과 물시계(자격루), 천문시계, 천문도 등 모두 4건이 있다. 물시계는 창경궁 자격루가 국보이다.(229호) 해시계는 국보가 없이 보물로만 지정되었다. 하회탈과 병산탈도 국보이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천문시계 가운데 1시가 국보인데 공식 명칭은 혼천의 및 혼천시계(230호.. 고려대 박물관)이다. 1669년 송이영이 만든 것으로 다목적 천문시계이다.
한국도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약탈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전시, 연구 등을 하는 중앙아시아 유물들이다. 오타니 컬렉션이다. 이는 일본의 승려 오타니 고즈이가 중앙아시아 일대, 지금의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투루판 등에서 약탈한 것들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오타니 컬렉션을 소장하게 된 것은 일제가 패망하면서 1945년 조선총독부가 기증받은 오타니 컬렉션을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해 한국에 남았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재의 유출은 일제 강점기에 절정에 달했다. 일제는 문화재 수집과 유출에 활용할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모두 동원했다. 조선총독부 같은 공공기관이 나서거나 학자와 도굴꾼, 골동품상 등 민간인들이 계획적이자 조직적으로 유출에 관여했다.(580 페이지)
최근 가루베 지온(김태식 지음 ‘직설 무령왕릉’, 도재기 지음 ‘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 참고)‘과 오타니 고즈이(도재기 지음 ‘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 참고)라는 도굴꾼의 만행을 접한 부작용인지 일본인들이 모두 도굴꾼처럼 보인다. 그래도 이병철(1910 – 1987: 컬렉션을 바탕으로 호암 미술관 개설), 전형필(1906 – 1962: 간송미술관 개설) 같은 분이 있어 희망을 갖는다.
사립박물관은 문화재의 사유화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하지만 개인이 막대한 사재를 털어 높은 안목으로 수집한 소장품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환원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한 실천 형태라 할 수 있다.(610 페이지)
간송미술관은 1년에 봄, 가을 단 두 번의 기획전으로 유명하다. 현재(4월 3일 – 10월 12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훈민정음(간송본)과 난중일기 展: 다시, 바라보다'가 열리고 있다. 우리 것들을 더 알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이다.(개인적으로 훈민정음과 난중일기 전(展)도 좋지만 그 이전에 이충렬의 ‘간송 전형필’ 같은 책을 더 읽고 싶다. 아직 읽지 못한 부끄러움...) 꼭 가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