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우울증 거듭나기
David H. Rosen 지음, 이도희 옮김 / 학지사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C. G Jung) 학파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데이비드 로젠(David Rosen)'우울증 거듭나기'는 병리적 우울증 환자들이 저자의 인도를 따라 자아 죽이기를 통한 상징적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자살 위험에서 벗어난 과정을 담은 인상적인 치료 사례집이다.

 

저자 데이빗 로젠은 우울증을 앓았던 남다른 이력을 가진 분이어서 주목을 받는다. 저자의 우울증은 부모의 이혼과 낯설기만 한 곳으로의 이사 등 급격한 외적 사건이 겹친 결과였다. 그런 저자에게 빛처럼 다가온 분이 있었다. 새 친구 댄의 아버지 밀트였다.

 

밀트는 로젠을 각별히 보살피는 것은 물론 지지를 보내지만 충격적이게도 로젠에게 자살 소식을 안겨주는 존재가 되고 만다. 로젠은 이 사건은 물론 그 후 겪게 된 아내의 외도로 인한 충격으로부터 생각의 전환점을 얻는다.

 

전자는 로젠에게 누구든 자살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고, 후자는 로젠으로 하여금 떠나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게 한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사태가 준 충격과 증상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정신과 상담이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로젠은 정신과 의사로부터 결정적인 말을 듣는다. 당신은 인생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결혼 생활에서 실패한 것이라는 말이다. 부분의 실패나 좌절을 전체의 실패나 좌절로 확대해 좌절하고 실의에 빠지기를 잘 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맞춤 처방이 아닐 수 없는 말이다.

 

중요한 점은 자살은 가해자와 희생자가 같은 존재인 사건이고 계획된 살인이라는 진단이다. 저자는 상징적인 죽음을 결정적 처방으로 제시한다. 이는 우울증 환자들이 상징적으로 자신 및 생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부정적 생각을 죽이고 내면의 죽음과 생명력, 부정적인 자아와 자기 사이의 분열을 초월하게 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저자가 제시한 처방은 자아 죽이기와 거듭나기를 활성화시킴으로써 부정적이기만 한 우울증을 극복하고 우울증이 촉발하는 자살을 줄이는 데 합당하다. 그리고 그런 처방들이 집대성된 우울증 거듭나기는 우울증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확보할 여지를 주는 책이다.

 

여기서 주의할 개념은 자아와 자기라는 개념이다. 자아와 자기는 융 학파의 고유 개념이다. 자아는 의식의 주체이고, 자기는 무의식과 전 인격의 주체이다. 물론 자기도 양면성을 지닌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는 것이다. 모든 원형이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상징적인 차원의 자아 죽이기가 가진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그런데 상징은 다각도로 궁구할 필요가 있는 개념이다. 잠시 이 글을 읽어보자. “..상징제의는 현실을 개조하지 않고도 무언가 중요한 개조가 이루어진 듯한 만족감을 공급하고 불안을 일시적으로 해소하며 현실모순의 현실적 해결을 연기할 수 있게 한다.(도정일 지음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279 페이지)

 

상징이 가진 다양한 함의를 볼 필요가 있다. 융 학파의 관념성이 자주 지적된다는 사실을 환기할 여지는 충분하다. 자살은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지만 사회적인 차원으로 인한 그것과 개인적인 차원으로 인한 그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와 개인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자살 위험도는 아주 높다. 이러한 때에 자살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 새 삶을 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우울증 거듭나기'의 출간은 의미가 깊다.

 

한 문학평론가의 말을 들어보자. "한 개인의 내적 심리도 개별 현상에 그치지 않으며 시대적 징후로 분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강계숙 지음 '우울의 빛' 9 페이지)

 

'우울증 거듭나기'를 통해 우울증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얻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란다. 돋보이는 점은 치료자와 내담자가 신뢰하고 지지하는 가운데 오랜 기간을 통해 희망적인 사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고 저자를 융의 개념인 상처받은 치유자(wound ed healer)로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지 위의 손
이기성 지음 / 케포이북스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성 시인들의 시를 자신의 감각으로 읽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한 척의 배에 비유될 수 있다. 그 문학적 항해는 길을 잘못 들 수도 있고 좌절해 중도에 항구로 돌아갈 수도 있는 힘들고 고독한 작업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누구나 나름의 비결들에 의지하게 된다. 시 강좌를 듣기도 하고 하나의 시를 불교 선사의 화두(話頭)처럼 오래 잡고 있기도 한다. 나의 경우 시를 읽기 위해 평론가들의 읽기를 등대처럼 활용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내 것으로 착각한 때이기도 하다. 이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독자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신의 힘으로 글을 읽고 쓰는 일이다. 자신만의 안목을 중심으로 읽어야 비판이든 찬사든 의미가 생길 수 밖에 없다 

 

현재 문학평론은 지나치게 이론에 의존하거나 비판정신이 없는 공허한 주례사 같은 글이라는 비판을 받는 장르가 된 지 오래이다. 이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도 나쁘지만 더 나쁜 것은 비판정신이 없는 평론을 쓰는 행위이다. 비판 작업은 독자들로 하여금 바른 안목을 갖게 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비판 없는 평론을 쓰는 일은 기존의 가치관을 되풀이하는 작업 이상이 되지 못한다.

 

평론이 외면받는 현실을 반영하듯 한 평론가는 평론의 무용함에 대한 확인과 절감이 생존의 문제로 다가온다는 글을 쓴 바 있다. 이는 평론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라는 말이다. 이 이후 나에게는 글만 쓰는 평론가들이 교수가 되기를 바라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기본적으로 시가 읽히는 만큼 시 평론도 읽히기를 바란다. 시가 읽힘으로써 평론이 읽히고 평론이 시를 찾아 읽게 하는 선순환은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하지만 과거의 관심을 무색하게 나는 시도 잊고 시평론도 잊고 지내왔다. 그러다가 다시 그들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이는 시도 쓰고 문학평론도 하는 분들에 관심이 생긴 까닭이다. 시를 쓸 때는 인식하지 못하다가 평론가의 입장으로 자신의 시를 보면 부끄럽고 어색하다고 말하는 분들이 꽤 있다. 나는 그런 분들의 균형 감각과 자성적 시각을 높이 산다. ()는 절제된 언어의 축제이다. 이 점을 받아들이면 시인/ 문학평론가들의 그런 자성적 시각은 바람직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평론가들은 시를 정의하는 고유의 안목들을 가지고 있다. 시 쓰기와 평론 작업을 함께 하는 이기성 평론가는 '백지 위의 손' 이전의 책인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에서 시인을 사전꾼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 분이 말하는 사전이란 개인이 만든 가짜 돈을 뜻하는 사전(私錢)이다. 이 분은 시적(詩的) 언어를 시장의 질서를 교란하고 확신의 체계를 누수 시키는 위조화폐로 보았는가 하면 시인들을 견고한 의미의 성벽을 내파(內破)하는 사전꾼들로 보았다. 이 말은 시인은 남다른 감수성과 독특한 창의성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백지 위의 손에서 시를 보는 저자의 시각은 어떻게 드러날까? 저자는 우리의 시가 무감(無感)한 일상을 감염시키기를 바란다. 우리 사회의 무감(無感)과 무각(無覺)이 시가 읽히지 않는 것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시인들은 소리 없이 최선을 다한다. 그 말 없음은 조용한 성실을 의미하기도 하고 시가 위축된 현실을 마주하는 시인들의 침울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저자는 백지 위의 손을 말한다. 이는 손은 백지 위에서 한없이 떨리지만 맞서야 할 현실의 정치적 폐허 앞에서 대담해져간다는 의미로 저자가 한 말이다. 첫 문장에서 저자는 시 쓰기를 사전(私錢)을 만드는 작업에 비유한 이전 작의 문제 의식을 이어 시 쓰기를 관습화된 미학의 영토로부터 보이지 않는 출구를 찾아내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는 언어의 도정(道程)에 비유한다. 나는 이로부터 새로움과 낯선 언어는 변함 없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백지 위의 손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저자가 지난 2009년 용산 참사에 즈음해 쓰인 여러 문인들의 시들 가운데 의미 있는 작품들을 호출해 나름의 시각을 덧붙여 설명한 대목이다. 서정시의 저자로 익숙한 시인들이 참사를 고발하는 시를 쓴 것도 보인다.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시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장르이기에 서정시를 쓰던 분들이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한 시를 쓴 사실이 놀랄 일은 아니다 

 

그곳에서, 그곳에서, 종일 연기가 피어올랐다./ 철거용역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여자들 몇이 쓰러지고/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어른들의 뒤에 숨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사람이 죽지는 않았다...큰 도시가 생겨날 때마다 전쟁은 계속되었다./ 큰 희망과 작은 희망이 벌이는 전쟁,/ 높은 지붕이 낮은 지붕을 삼키는 전쟁/ 망루 끝에 매달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내는 전쟁”(나희덕 시인의 신정 6-1 지구에서 용산 4지구까지중에서) 

 

이 시를 소개하며 저자는 이 시에서 그려지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장면은 어떤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용산의 시체는 권력에 짓밟힌 광주의 훼손된 육체와 겹쳐진다.”고 말한다.(37 페이지) 또한 이영광 시인의 유령 3’을 소개하며 용산의 죽음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중임을 보여준다고 말한다.(47 페이지 

 

저자는 미학의 최전선은 죽음에 대한 예의라 말한다. 실존적 죽음과 사회적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간 우리는 너무 서정시 대 정치시 등으로 시를 나누어 왔다는 생각이 든다. 표제작인 백지 위의 손의 한 구절이 큰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세계 안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타자(他者)와 마주치고 접촉하면서 존재한다.”는 구절이다. 그 타자에 죽음도, 정치권력도 포함된다 

 

시인은 남다른 안목으로 미세한 불편과 환희, 다른 사람들은 둔감하게 보내는 고통을 감지해내는 사람들이고 평론가는 그들의 그런 점을 알아내 시와는 또 다른 정제된 언어로 그 낯선 감각의 언어들을 알리는 사람들이다. 때로 시인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을 평론가가 감지해 내기도 한다. 그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 단서는 평론가의 언어 안에 있다 

 

나는 평론의 단정적 언어가 좋다. 평론은 선언 같고 판결 같은 글이다. 평론에 관심을 두는 일은 시인들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런 내가 평론에서 관심을 두는 미덕은 단호함, 그리고 이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평론가들의 내공이다. 저자가 말했듯 시 쓰기는 타자를 환대하는 일, 원고지의 백색의 공포를 견디는 일이다. 언젠가 나도 타자를 환대하는 대열에 설 수 있기를 바라며 백지 위의 손을 덮는다. 오래도록 동반자로 삼을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경궁 실록으로 읽다 실록으로 읽는 우리 문화재 3
최동군 지음 / 도서출판 담디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창경궁은 성종이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세조 비), 작은 어머니 안순왕후 한씨(예종 비),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의경세자 비) 등 세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세종이 자신에게 양위(讓位)한 아버지 태종을 위해 창덕궁 낙선재 가까운 곳에 지은 수강궁을 리모델링해 지은 이 궁궐은 다른 궁궐들과 달리 왕이 아닌 대비를 위해 지은 동향의 궁궐이다.

창경궁이 여성을 위한 공간이었음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 왕의 빈전(殯殿)은 창덕궁에, 왕비의 빈전은 창경궁에 세우는 전통이 있었음을 통해 알 수 있다.(85 페이지) 창경궁은 다른 궁궐과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 정전에 이르기까지 세 개의 문을 거치게 되어 있는 다른 궁궐들과 달리 창경궁은 두 개의 문을 거치게 되어 있는 궁궐이다.

성종이 창덕궁에 대비전을 새로 짓지 않고 궁궐을 새로 지은 것은 건물의 주인공들이 세 분이었는데다가 단독으로 지어지지 않는 궁궐 건축의 특성 때문이었다. 건축물의 주인들을 보좌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부속 건물도 함께 지어야 했다는 의미이다.

최동군의 '창경궁 실록으로 읽다'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창경궁의 기록들 가운데 중요한 부분들을 선별, 정리한 책이다. 창경궁은 오랜 세월 창경원으로 불렸었다. 순종 4년인 1914년 4월 26일의 일이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물러난 고종을 이어 즉위한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구실로 창덕궁에 붙어 있던 창경궁의 전각을 헐고 그곳을 동, 식물원으로 만들고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었다.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이름이 정상 환원된 것은 1983년이다.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이다. 그런데 원래 홍화문은 한양도성의 8대문 중 하나였다가 1484년 새로 지은 창경궁의 정문을 홍화문으로 정함에 따라 원래의 홍화문을 혜화문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1644년 1월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귀국했다.

소현세자는 홍화문을 통해 입궐했다. 인조 23년(1645) 6월 27일 실록에는 소현세자가 온 몸이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고 적혀 있다. 홍화문 남쪽의 선인문(宣仁門)은 희빈 장씨가 죽어서 나간 문이다. 희빈 장씨는 역대 조선 왕비들 중 유일하게 후궁으로 강등된 경우이다.

희빈 장씨가 후궁이 된 것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한때 폐비되었던 인현왕후가 중전으로 복위되었기 때문이다. 왕비가 두 명이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숨을 거둔 곳이 선인문 마당이다. 사도세자의 시신은 양주 배봉산에 묻혔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를 완전히 복권시키고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렸다.

고종 때 사도세자는 장조(莊祖)로 추존(追尊)되었다. 그의 능은 조선의 정식 능으로 인정받았다. 융릉(隆陵)이 그의 능이다. 정조의 능은 건릉(健陵)이다. 두 능을 아울러 융건릉(隆健陵)이라 한다. 창경궁의 북문인 집춘문(集春門)은 성균관으로 통하는 문이다. 임금이 문묘(文廟)를 참배할 때나 성균관에 갈 일이 있으면 이 문을 이용했다.

역대 왕들은 이 문을 통해 불시에 성균관을 방문해 시험을 실시해 포상을 하거나 후의 과거시험에서 가산점을 주었다. 중종 38년(1543년) 10월 5일 상(上: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무신의 사예(射藝)를 관열(觀閱)하였는데 세자가 입시(入侍: 임금을 알현하고 모심)하였다. 한홍제가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가자(加資: 품계를 가진 사람이 등과하여 품계가 올라가는 것)를 주라고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창경궁의 금천교(禁川橋)는 옥천교(玉川橋)이다. 청경궁에서 가장 오래된 구조물이다. 창경궁은 중문(中門)이 없기 때문에 궁궐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의 정문인 명정문(明政門)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창덕궁 선정전(宣政殿)과 창경궁 문정전(文政殿)은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으로 자주 활용되었다.

두 전각에는 천랑(穿廊)이 있는데 선정전 앞 천랑은 개방되어 있고 문정전 앞 천랑은 복도의 양쪽 벽이 막혀 있다. 이는 왕의 궁궐은 천랑을 개방시키고 왕비의 궁궐은 천랑을 폐쇄형으로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음양의 원리에 따른 결과이다. 종묘 정전의 익랑(翼廊)도 동쪽(양陽)은 개방 구조, 서쪽(음陰)은 폐쇄형이다.(85 페이지)

저자는 선조를 재평가(?)한다. 역대 최하점의 왕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존재가 선조이다. 임진왜란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고 건국 후 200년간 전란이 전혀 없었고 글공부만 하고 자란 임금임을 감안하면 임진왜란 때 그가 보인 실망스런 점은 이해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선조 주변에는 유성룡, 이항복, 이덕형, 이이, 이황, 정철, 권율, 이순신, 한석봉 등 인재들이 많았고(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했고) 특히 한낱 무명 장수였던 이순신을 사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1년 전에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라며 하루 만에 8계급을 특진시킨 것은 놀랍기까지 하다.(100, 101 페이지)

선조의 즉위는 조선 역사상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庶子)가 즉위한 첫 사례이다. 흥미롭다기보다 안타까운 사례는 국장 기간에 대한 것이다. 인조는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귀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을 죽음을 당한 아들(장자) 소현세자의 상을 3년상이 아닌 1년상으로 치렀다.

더구나 실제 국상 기간도 한 달을 하루로 계산하는 역월제(易月制)를 적용해 1년이 아닌 12일만 상복을 입도록 한 데다가 그것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실제로는 7일만에 상복을 벗어버렸다고 한다.(42 페이지) 반면 선조의 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의 상은 통상 국상 기간이 5개월이었음에도 7개월이나 걸렸다.

왕릉 자리를 잡지 못한 탓이다. 대신들이 왕릉 후보지 선정을 이런 저런 사유로 미루었는데 이는 왕릉이 조성되면 그 주변(대략 24만평)의 백성들은 이사(移徙)하고 무덤들은 이장(移葬)해야 하는 실질적인 어려움 때문이지만 서자 출신의 임금인 선조에 대한 노골적 무시가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문정전(文政殿)은 사도세자의 비극(임오화변壬午禍變)이 시작된 곳이다. 임오화변 당시의 전각 명칭은 문정전이 아니라 휘령전(徽寧殿)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국상이 발생했을 때 시신을 안치하던 빈전(殯殿)이나 위패를 모셔두던 혼전(魂殿)으로 사용되는 전각은 용도에 맞게 이름을 잠시 바꾸었다. 임오화변이 일어났을 때 문정전은 영조의 정비였던 정성왕후 서씨의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되고 있던 때였다.

사도세자를 죽게 한 결정적 역할은 생모인 영빈 이씨가 맡았다. 영빈 이씨가 고변을 했는데 그것은 사도세자가 무고한 궁녀, 내시, 나인들 100명을 죽였고 이유도 없이 궁인들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수도 없이 범했고 자신에게 아첨하는 내수사관원들에게는 재물을 나눠주어 충성하게 만들었고 몰래 밖으로 월담해서 밤낮으로 많은 기생들이나 비구니들과 음란한 행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궁궐 후원에 이상한 무덤을 만들고 기이한 의식도 치렀으며 불측한 짓과 흉측한 짓거리를 많이 행했다는 것이다. 영빈 이씨는 왜 자신의 친자식인 사도세자를 죽이기 위해 결정적인 밀고를 했을까? 그것은 사도세자의 당시 행실로 보건대 조만간 부인인 혜경궁 홍씨와 세손(정조)의 목숨까지도 위험하게 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27 페이지)

함인정(涵仁亭)은 인조가 지은 건물이다. 인왕산 아래의 인경궁의 함인당을 옮겨 지어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함인정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과 절차를 익힌 곳이다. 혜경궁 홍씨는 정조의 어머니였지만 정조가 효장 세자의 호적에 입적됨으로써 생모였을 뿐 법적인 어머니가 아니었다.

영조가 산(蒜)을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 세자의 호적에 올린 것은 유교 국가에서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역모죄를 썼다. 혜경궁은 아버지 홍봉한의 청지기였던 성윤우의 딸 성덕임을 궁녀로 거두어 직접 길렀다. 덕임은 후에 의빈 성씨가 된다. 덕임은 정조를 두 번씩이나 거절했다. 정조는 15년을 기다린 끝에 덕임을 의빈으로 맞았고 그녀로부터 문효 세자를 얻었다.

경춘전(景春殿)에서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성종의 생모, 연산군의 친할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정조가 태어났다. 소혜왕후의 사저(私邸)는 후에 경운궁(덕수궁)이 된다. 소혜왕후 사저, 월산대군(소혜왕후의 큰 아들, 성종의 형) 사저, 정릉동 행궁, 경운궁, 덕수궁의 순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환경전(歡慶殿)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전 중에서도 임금의 침전(寢殿) 즉 대전(大殿) 용도로 만들어졌다.(일부에서는 통명전을 대전으로 보기도 한다.) 환경전은 국상이 발생했을 때 혼전 또는 빈전으로 활용된 사례가 매우 많다. 경춘전에 산실청(産室廳)이 설치된 것과 대조적이다. 경춘전 뒤쪽에는 산줄기가 연결되어 생기로 충만한 지맥선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만 환경전은 건물 뒤쪽에 연결되는 지맥선이 없다.(164 페이지)

실록에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고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는 내용이 있다. 양화당은 통명전을 보조하는 건물이다. 인조는 청나라에 항복하던 날 임금의 옷인 곤룡포(袞龍袍)도 입지 못하고 남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고 나갔다. 일체의 의전이나 의장도 없었고 일국의 왕으로서의 위엄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190 페이지)

인조는 그 치욕 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인조는 청나라에 굴복한 사실을 가리킬 때 절대 항복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고 성에서 나온다는 뜻의 하성(下城)이란 말을 썼으며 신하들에게도 이를 강요했다.(195 페이지)

집복헌(集福軒)에서 사도세자와 순조가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왕비가 아닌 후궁으로부터 태어났다.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은 후궁들의 처소였을 것이다.(202 페이지) 춘당지(春塘池)는 조선의 임금들이 친경(親耕)을 하던 곳이었다. 춘당대(春塘臺)는 춘당지 옆에 쌓았던 석대(石臺)다. 화살을 쏘던 곳이다. 오늘날은 궁궐 관리를 위해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담을 쌓고 별도 관리를 하지만 조선시대에 창덕궁과 창경궁은 하나의 공간이었다.(214 페이지)

춘당대(春塘臺)는 정조(正祖)와 정약용(丁若鏞)의 일화가 있는 곳이다. 1791년(정조 15년) 9월 정조가 규장각 신하들과 창경궁 춘당대(春塘臺)에서 활쏘기를 했는데 평소 활쏘기를 즐겼던 정조는 50발 중 49발을 명중시켰고 정약용은 50발 중 4발 이하를 명중시켰다. 정조는 “문장은 아름답게 꾸밀 줄 알면서 활을 쏠 줄을 모르는 것은 문무(文武)를 갖춘 재목이 아니”라는 말로 정약용에게 강한 군사 훈련을 시켰다.

지난 9월 마지막 일요일 역사와 함께 하는 창경궁 숲 이야기 해설을 들었다. 여성적인 공간이고 사연이 많은 곳인 창경궁에서 들은 숲 해설은 나무를 잘 모르고 궁궐 일화를 더 알아야 하는 나에게 참 유익했다. 지난 4월 1일 시작된 이 해설은 오는 10월 29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 열리는 숲 해설이다.

한겨울에는 궁궐을 거의 찾지 않는데 나무들도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그 시기에는 나뭇잎들을 떨구고 겨울을 나게 될 것이다. 그 사이에는 현장에 직접 가는 궁궐 공부도 잠시 그치게 될 것이고 숲 해설사들도 잠시 휴지기를 가지며 내년 봄을 준비할 것이다. 경복궁, 창덕궁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창경궁을 다시 찾을 날을 위해 역사와 전각 공부를 충분히 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조와 정조 이후 - 정조시대와 19세기의 연속과 단절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지음 / 역사비평사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의 인물은 상반된 평가를 받곤 한다. 더구나 어떤 인물의 생전과 사후 세상이 극적으로 달라졌다면 더욱 그렇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바로 정조(正祖)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조 뿐 아니라 역사의 인물은 기본적으로 지금 우리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용도로 호출되곤 한다. 탕평 군주 vs 세도 정치를 초래한 인물, 개혁 군주 vs 주자(朱子)와 송시열의 학문을 정학(正學)으로 존숭(尊崇)한 철저한 주자학자 등...

 

정조는 극단의 평가를 받는 군주이다. 이런 가운데 여러 필자가 쓴 정조와 정조 이후가 나왔다. 이 책은 계간지 역사 비평’ 115 117호의 연속 기획에서 비롯된 책으로 이 필자들이 공동 연구를 한 것도 아니고 따로 학술회의를 하지도 않았고 책의 출간을 예상하지도 못했기에 맞춤형 논문을 강제하기 어려웠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책에는 일관성이 없는 대신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자유로운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경구는 서장(序章)에서 연구자는 (사람들이) 정조를 손쉽게 호출할 때의 위험을 항상 경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경구는 역사는 입맛에 맞는 결론을 보여주는 학문이 아니라 끊임 없는 반성과 성찰을 제시하며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는 학문이었다고 말한다.

 

최성환은 1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 군주 정조 읽기에서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역사 소설이라 칭한다. 최성환이 경계하는 것은 단순 구도(構圖), 소설과 역사의 경계를 오가는 사이비(似而非)한 상상력이다. 최성환은 역사는 기억이고 기억은 만들어진다는 관념이 주문처럼 되뇌어지면서 역사 인식의 상대성이 강조되지만 역사는 사실에 기반한 기억이며 사실의 조작은 기억 만들기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말한다.

 

최성환은 조선 후기 정치의 핵심으로 당쟁을 든다. 정권 투쟁을 본질로 하는 정치의 세계에서 붕당 및 당쟁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최성환의 주장이다. 당파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정국에 따라 새롭게 분화, 재편(이합집산)한다. 정조는 주자(朱子)와 송시열의 학문을 정학으로 존숭한 철저한 주자학자였다. 실학은 주자학에 반하는 학문이 아니다.(55 페이지)

 

최성환이 말하는 핵심은 정조의 탕평(蕩平)은 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설명되어야 하는 바(59 페이지) 정치를 경제, 사회, 개인, 혁명 등과 같은 비정치로 환원하면 그 결과는 파시즘, 전체주의, 개인의 수양 문제 등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60 페이지)

 

박경남은 2정조의 자연, 만물관과 공존의 정치에서 영, 정조 시대에 실학이 만개한 한편 성리학이 집대성된 상반된 모습을 조명한다. 박경남은 자연과의 교감, 만물과의 공존을 지향했던 정조의 마음이 인간사회의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의 장() 속에서는 어떻게 발휘되었는지 조명한다. 정조는 외형상 주자학의 독실한 계승자를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주자의 협소한 생각의 틀을 확장하거나 이탈하며 독창적인 자기만의 생각을 펼쳤다.(77 페이지)

 

전용훈은 3천문학사의 관점에서 정조 시대 다시 보기에서 정조 시대를 국가 천문학이 거의 완전해진 시대로 설명한다. 중요한 사실은 시간 규범의 수립과 반포는 하늘을 관찰하여 백성에게 시간을 내려준다(관상수시: 觀象授時)는 동아시아 특유의 제왕의 이념을 실천하는 일이었다는 점이다.(91 페이지)

 

정조 시대는 시헌력(時憲曆: 1653년 이후 1910년까지 한국에서 쓰인 역법)을 중심으로 국가 천문학의 운용이 완전해진 시기이다.(98 페이지) 그런데 필자는 전통시대 천문학은 국가천문학이란 말을 한다.(91 페이지) 이를 보면 국가천문학이란 말은 불필요한 말이다. 전용훈은 술수(術手)를 당대인들의 심리와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으로 소개하는 최근 국외 학계의 동향을 소개한다.(100, 101 페이지)

 

나는 지난 번 풍수지리를 논하는 역사 강사에게 풍수지리를 같은 차원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정조대에는 선택(選擇)의 수요가 폭증했다. 선택이란 어떤 일을 수행할 때 길()을 꾀하고 흉()을 피하는(추길피흉趨吉避凶하는) 시간과 방향을 얻는 것이다. 선택의 수요가 폭증하고 그 역할 증대는 국가 의례의 정비 및 체계화와 병진(竝進)한다.(103 페이지)

 

전용훈은 천문학에 국한해도 정조 시대의 성취는 그의 사후 단절은커녕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고 말한다.(107 페이지) 조선 후기의 천문학은 자유로운 개인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학문이 아니라 국가의 인가를 얻은 제한된 관료들이 국정 운영을 위해 수행한 학문이었고 자연 자체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성인됨을 목적으로 하는 최고의 학문인 경학(經學)에 복무하는 보조적인 학문이었다.(108 페이지)

 

노대환은 5‘19세기에 드리운 정조의 잔영과 그에 대한 기억에서 정조가 기억되는 대체적 양상을 살펴본다. 정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순조 초반의 상황이었다.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정조의 권위를 이용해야 했다.(138 페이지) 벽파(僻派)와 시파(時派)는 각기 자신들이 정조의 뜻을 계승한다고 표방했다.

 

하지만 표방과 달리 정조의 이념이나 정책은 파기되었다. 우선 벽파의 집권 방식 자체가 정조가 힘들게 추구해온 탕평책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40 페이지) 노대환은 세도정치의 전개에 정조의 책임도 적지 않지만 정조는 무릇 척리에 관계되면 이 척리이건 저 척리이건 막론하고 꺾어 눌러야 한다는 것이 나의 고심이라 할 만큼 척신의 정치 개입에 비판적이었다고 말한다.

 

시파가 집권함으로써 세도정국이 형성되었고 정조가 중시했던 우현좌척(右賢左戚) 원칙도 무너졌다. 정조 사후 사람들이 정조를 기억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국왕과 신하들의 입장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국왕을 비롯하여 각 정치 세력은 필요에 따라 정조를 기억했다.(151 페이지)

 

노대환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통치자로서 정조는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한다. 정조는 망각되거나(우현좌척 이념) 단절되거나(노비제 개혁) 왜곡되거나(천주교 정책) 답습되었다.(헌종과 고종의 장용영 설치) 중요한 점은 규장각이 경화거족(京華巨族: 서울의 번화한 곳에 살면서 대대로 번영을 누리는 집안)들에 의해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정조가 각신(閣臣)들에게 부여한 권위를 누리는 등 규장각을 사적으로 이용했을 뿐이었다.(157 페이지)

 

규장각은 문벌 기구의 성격을 탈피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갑신정변 때 혁파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정조에 대한 일종의 신화는 그 신화를 필요로 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국왕들은 정조의 왕권 강화책을 기억하고자 했고 신료들은 정조를 학문을 열심히 닦고 주변 이야기를 경청하는 임금으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각 정치 세력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조를 기억했다.(158 페이지)

 

노대환은 정조는 완벽한 국왕도 아니었고 정조 통치기는 성세(盛世)도 아니었다고 말한다.(159 페이지) 오수창은 6오늘날의 역사학, 정조 연간 탕평정치, 그리고 19세기 세도정치의 삼각 대화에서 경제, 사회, 개인, 혁명을 비정치 또는 비정치의 영역으로 규정한 최성환의 연구를 오류라 지적한다. 오수창은 정치는 경제, 사회와 같은 정치적 상황, 정치 활동의 주체인 정치적 인간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165 페이지)

 

오수창은 갈등 조정 그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경제, 사회, 개인, 혁명을 비정치로 보고 갈등의 조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우선적이고 적절한 연구 시각인가, 라는 것이다. 예컨대 오수창이 말하는 바는 당사자 간의 갈등 조정 방식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많다는 것이다. 가령 민주의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불법은 조정해야 할 것이 아니라 추상 같이 처벌해야 할 것이다.

 

오수창은 붕당(朋黨)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그런 집단적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조직하고 제도화하여 개인의 권력욕을 생산적인 사회적 에너지로 동원하는 것이라 말한다.(174, 175 페이지) 오수창은 영조와 정조가 사용한 민국이라는 말은 백성의 삶과 나라의 살림살이라는 국정 운영의 대상을 가리키며 정조대까지 국왕이 민을 정치의 주체 또는 동반자로 인식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25년이라는 짧지 않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사망하자마자 그가 수립하려던 군주 중심의 정치 질서가 일거에 무너졌다. 오수창은 군주가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국정을 직접 치밀하게 이끌었던 정조의 정치는 자신과 같은 역량의 군주에 의해서만 또는 시대적 모순이 점점 커짐에 따라 자신보다 더 큰 역량을 지닌 군주에 의해서만 지속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말한다.(177 페이지)

 

오수창은 정조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갖추었고 군주의 입장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따라 최선을 다했지만(175 페이지) 전체적으로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틀 안에서 주자학의 원리에 입각해 추진되었고 시대구분이 적용될 만한 변혁을 지향하거나 수행한 것은 아니라 말한다.(178 페이지)

 

오수창은 탕평정치와 세도정치 사이에는 급격한 단절이 있지만 세도정치가 빚어진 정치구조를 감안하면 그 둘 사이에 단절만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182 페이지) 19세기 권세가들이 측근인 고위 관원들과 함께 권력을 독점하던 구조는 재상권 강화 정책에 연결되고 이런 가운데 언론 기능은 퇴조했다. 세도 정치의 빌미가 된 것이다.

 

오수창은 자신과 동료들은 정조의 책임을 물은 바 없다고 말한다. 다만 정조의 정치가 세도정치와 어떻게 구조적으로 연결되는가를 설명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185 페이지) 오수창은 자신과 동료들의 논지는 책임 소재를 밝힌 것이 아니라 말한다. 오수창은 조선 후기 정치사 연구자는 전통시대의 역사학처럼 포폄(褒貶)을 가하고 교훈을 얻는 데서 벗어나 구조와 사건들 사이의 인과관계에 입각해 시대에 따른 정치 변화를 논해야 한다고 말한다.(186, 187 페이지)

 

오수창은 잘잘못을 따지고 책임을 묻는 것은 중세 사학에서 하던 일일 뿐 근대 역사학의 본령은 아니라 말한다.(188 페이지) 오수창은 조선 후기에 정조의 탕평정치를 거쳐 19세기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계기성의 의미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조선의 통치체계가 수명을 다해 붕괴되어가고 있음을 생생하게 확인시켜준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188 폐이지)

 

조성산은 8'19세기 조선의 지식인 지형'에서 역동성과 경화(硬化)라는 모순되는 두 가지 요소들이 융합하면서 19세기 조선의 사상계가 형성되었음을 밝힌다. 정조는 청나라에서 유입된 고증학, 소품체 문학 등으로부터 조선의 주자학적 문예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217 페이지)

 

물론 정조는 강력한 척사(斥邪)보다는 정학(正學)을 북돋음으로써 이단(異端)을 자연스럽게 소멸시키는 전략을 모색했다. 박지원의 다음 세대인 홍길주(洪吉周: 1786 1841)는 모든 사물의 원리 질서를 보편적인 태극 관념으로만 설명하려고 하는 주자성리학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하늘에는 하늘의 이치가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이치가 있으며 곤충과 초목에게는 곤충과 초목의 이치가 있고 물과 불과 흙과 돌에는 물과 불과 흙과 돌의 이치가 있다고 하면서 이가 갖는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성격보다 각각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이()의 개별성을 강조했다.(219 페이지)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를 연상하게 한다.

 

플라톤은 우주의 만물이 이데아의 논리적 체계 속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사물 자체 내에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 파악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이다. 19세기에도 주자학은 주류였지만 인식론 비판, 종교적 심성 강조 등의 도전에 직면했다.(223 페이지)

 

정조를 비판하든 지지하든 관건은 정치사를 개인사로 환원하지 않는 일이다. 이경구가 서장에서 말한 부분이 특별히 과제이자 위안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상쾌한 결론이 없는, 때로는 고통스럽고 지겨울 정도로 느릿느릿한 (역사 공부) 과정을 통해 현재의 전망을 이끌어내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는 말이다. 느릿느릿함이 치열함으로 채워진 것이 되어야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운몽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2
김만중 지음, 송성욱 옮김 / 민음사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숙종(肅宗) 15년인 1689년 쓴 구운몽(九雲夢)‘은 불후의 소설이다. ’구운몽을 불후의 작품으로 보는 이유는 1) 저자의 문장이 세련되었고, 2) 주인공 성진(性眞)의 천상계에서 인간계로의 여정, 인간계에서 다시 천상계로의 여정이 리얼하게 그려졌기 때문이고, 3) 유교, 불교, 도교의 가치관을 적절히 혼합해낸 솜씨가 정묘(精妙)하기 때문이고, 4) 인생무상의 진리를 자연스럽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또한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점, 귀양지에서 어머니의 병환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소설이라는 점, 저자의 학식이 잘 드러난 소설이라는 점 등의 특징을 가진 작품이다. 구운이란 아홉(주인공 성진 + 8선녀)개의 구름을 뜻한다. 구름 같은 꿈이라는 의미로 성진과 8선녀의 허망한 세상사를 꿈으로 표현한 것이다.

 

천상계의 성진은 용왕에게 사례하고 올 사람을 찾는 스승 육관대사의 부름에 자청해 응한다. 용왕을 만난 성진은 그가 권하는 술 석 잔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남악(南岳)의 위부인이 대사에게 보낸 8선녀를 만나 꽃을 꺾어 던져 명주(明紬)로 만드는 등의 희롱을 하다가 염라(閻邏國)을 거쳐 지상으로 유배된다.

 

8선녀 역시 유배되는데 유배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숙종이 장희빈을 왕후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유배당한 저자의 생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티벳 사자(死者)의 서()’에는 중음신이 자신이 태어날 어머니를 골라 그의 태()에 드는 장면이 있다. 성진은 유()씨 부인의 태로 들어가 남자 아이로 태어난다.

 

()처사(處士)가 아버지인데 그는 아들이 분명 하늘 사람이었다고 확신하고 성진에게 소유(少遊)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자신은 소임을 다했다며 하늘로 돌아간다. 소유란 천상계에서 지상계로 오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8선녀 역시 인간으로 태어난다. 진채봉, 계섬월, 정경패, 난양공주, 가춘운, 적경홍, 백릉파, 심요연 등으로 태어난 8선녀는 결국 인간계에서 소유의 여자들이 된다.

 

소유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할 일을 다하고 말년에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하룻밤 꿈 같은 것이었다는 인식이다. ‘구운몽이 일부다처의 문제점을 환기시킨 작품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교묘히 그런 점을 합리화하는 작품이라는 말도 있다.

 

소설의 말미에 8선녀가 관음보살께 한 낭군(郎君)을 모시게 되었음을 아뢰며 백년해로 후에 함께 극락으로 가게 해달라고 비는 장면이 나오는데 8선녀들은 소설에서 일부다처제도를 불편해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함께 백년해로하고 극락으로 가게 해달라고 빌기까지 하니 소설이 일부다처제도를 합리화하는 것이라 볼 여지가 충분하다.

 

구운몽이 한국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지 300년 정도가 지난 영, 정조대에 이르러 소설이 널리 유행했다. 처음 한글이 창제되었을 당시 문자를 조합하는 원리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었으니 문장으로 표현되고 소설에 쓰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상상할 만하다.

 

소유와 8선녀는 말년까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인생은 허망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극락으로 간다. 제목이 같지만 시대 차이가 300년 정도 나는 최인훈의 구운몽과 비교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한문 소설을 쓰지 않고 한글 소설을 쓴 김만중은 우리 것을 사랑하고 우리 것의 진정성을 높이 산 진정한 한글 전도사라 할 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