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실록으로 읽다 실록으로 읽는 우리 문화재 3
최동군 지음 / 도서출판 담디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창경궁은 성종이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세조 비), 작은 어머니 안순왕후 한씨(예종 비),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의경세자 비) 등 세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세종이 자신에게 양위(讓位)한 아버지 태종을 위해 창덕궁 낙선재 가까운 곳에 지은 수강궁을 리모델링해 지은 이 궁궐은 다른 궁궐들과 달리 왕이 아닌 대비를 위해 지은 동향의 궁궐이다.

창경궁이 여성을 위한 공간이었음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 왕의 빈전(殯殿)은 창덕궁에, 왕비의 빈전은 창경궁에 세우는 전통이 있었음을 통해 알 수 있다.(85 페이지) 창경궁은 다른 궁궐과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 정전에 이르기까지 세 개의 문을 거치게 되어 있는 다른 궁궐들과 달리 창경궁은 두 개의 문을 거치게 되어 있는 궁궐이다.

성종이 창덕궁에 대비전을 새로 짓지 않고 궁궐을 새로 지은 것은 건물의 주인공들이 세 분이었는데다가 단독으로 지어지지 않는 궁궐 건축의 특성 때문이었다. 건축물의 주인들을 보좌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부속 건물도 함께 지어야 했다는 의미이다.

최동군의 '창경궁 실록으로 읽다'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창경궁의 기록들 가운데 중요한 부분들을 선별, 정리한 책이다. 창경궁은 오랜 세월 창경원으로 불렸었다. 순종 4년인 1914년 4월 26일의 일이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물러난 고종을 이어 즉위한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구실로 창덕궁에 붙어 있던 창경궁의 전각을 헐고 그곳을 동, 식물원으로 만들고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었다.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이름이 정상 환원된 것은 1983년이다.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이다. 그런데 원래 홍화문은 한양도성의 8대문 중 하나였다가 1484년 새로 지은 창경궁의 정문을 홍화문으로 정함에 따라 원래의 홍화문을 혜화문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1644년 1월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귀국했다.

소현세자는 홍화문을 통해 입궐했다. 인조 23년(1645) 6월 27일 실록에는 소현세자가 온 몸이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고 적혀 있다. 홍화문 남쪽의 선인문(宣仁門)은 희빈 장씨가 죽어서 나간 문이다. 희빈 장씨는 역대 조선 왕비들 중 유일하게 후궁으로 강등된 경우이다.

희빈 장씨가 후궁이 된 것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한때 폐비되었던 인현왕후가 중전으로 복위되었기 때문이다. 왕비가 두 명이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숨을 거둔 곳이 선인문 마당이다. 사도세자의 시신은 양주 배봉산에 묻혔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를 완전히 복권시키고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렸다.

고종 때 사도세자는 장조(莊祖)로 추존(追尊)되었다. 그의 능은 조선의 정식 능으로 인정받았다. 융릉(隆陵)이 그의 능이다. 정조의 능은 건릉(健陵)이다. 두 능을 아울러 융건릉(隆健陵)이라 한다. 창경궁의 북문인 집춘문(集春門)은 성균관으로 통하는 문이다. 임금이 문묘(文廟)를 참배할 때나 성균관에 갈 일이 있으면 이 문을 이용했다.

역대 왕들은 이 문을 통해 불시에 성균관을 방문해 시험을 실시해 포상을 하거나 후의 과거시험에서 가산점을 주었다. 중종 38년(1543년) 10월 5일 상(上: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무신의 사예(射藝)를 관열(觀閱)하였는데 세자가 입시(入侍: 임금을 알현하고 모심)하였다. 한홍제가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가자(加資: 품계를 가진 사람이 등과하여 품계가 올라가는 것)를 주라고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창경궁의 금천교(禁川橋)는 옥천교(玉川橋)이다. 청경궁에서 가장 오래된 구조물이다. 창경궁은 중문(中門)이 없기 때문에 궁궐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의 정문인 명정문(明政門)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창덕궁 선정전(宣政殿)과 창경궁 문정전(文政殿)은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으로 자주 활용되었다.

두 전각에는 천랑(穿廊)이 있는데 선정전 앞 천랑은 개방되어 있고 문정전 앞 천랑은 복도의 양쪽 벽이 막혀 있다. 이는 왕의 궁궐은 천랑을 개방시키고 왕비의 궁궐은 천랑을 폐쇄형으로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음양의 원리에 따른 결과이다. 종묘 정전의 익랑(翼廊)도 동쪽(양陽)은 개방 구조, 서쪽(음陰)은 폐쇄형이다.(85 페이지)

저자는 선조를 재평가(?)한다. 역대 최하점의 왕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존재가 선조이다. 임진왜란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고 건국 후 200년간 전란이 전혀 없었고 글공부만 하고 자란 임금임을 감안하면 임진왜란 때 그가 보인 실망스런 점은 이해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선조 주변에는 유성룡, 이항복, 이덕형, 이이, 이황, 정철, 권율, 이순신, 한석봉 등 인재들이 많았고(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했고) 특히 한낱 무명 장수였던 이순신을 사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1년 전에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라며 하루 만에 8계급을 특진시킨 것은 놀랍기까지 하다.(100, 101 페이지)

선조의 즉위는 조선 역사상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庶子)가 즉위한 첫 사례이다. 흥미롭다기보다 안타까운 사례는 국장 기간에 대한 것이다. 인조는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귀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을 죽음을 당한 아들(장자) 소현세자의 상을 3년상이 아닌 1년상으로 치렀다.

더구나 실제 국상 기간도 한 달을 하루로 계산하는 역월제(易月制)를 적용해 1년이 아닌 12일만 상복을 입도록 한 데다가 그것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실제로는 7일만에 상복을 벗어버렸다고 한다.(42 페이지) 반면 선조의 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의 상은 통상 국상 기간이 5개월이었음에도 7개월이나 걸렸다.

왕릉 자리를 잡지 못한 탓이다. 대신들이 왕릉 후보지 선정을 이런 저런 사유로 미루었는데 이는 왕릉이 조성되면 그 주변(대략 24만평)의 백성들은 이사(移徙)하고 무덤들은 이장(移葬)해야 하는 실질적인 어려움 때문이지만 서자 출신의 임금인 선조에 대한 노골적 무시가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문정전(文政殿)은 사도세자의 비극(임오화변壬午禍變)이 시작된 곳이다. 임오화변 당시의 전각 명칭은 문정전이 아니라 휘령전(徽寧殿)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국상이 발생했을 때 시신을 안치하던 빈전(殯殿)이나 위패를 모셔두던 혼전(魂殿)으로 사용되는 전각은 용도에 맞게 이름을 잠시 바꾸었다. 임오화변이 일어났을 때 문정전은 영조의 정비였던 정성왕후 서씨의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되고 있던 때였다.

사도세자를 죽게 한 결정적 역할은 생모인 영빈 이씨가 맡았다. 영빈 이씨가 고변을 했는데 그것은 사도세자가 무고한 궁녀, 내시, 나인들 100명을 죽였고 이유도 없이 궁인들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수도 없이 범했고 자신에게 아첨하는 내수사관원들에게는 재물을 나눠주어 충성하게 만들었고 몰래 밖으로 월담해서 밤낮으로 많은 기생들이나 비구니들과 음란한 행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궁궐 후원에 이상한 무덤을 만들고 기이한 의식도 치렀으며 불측한 짓과 흉측한 짓거리를 많이 행했다는 것이다. 영빈 이씨는 왜 자신의 친자식인 사도세자를 죽이기 위해 결정적인 밀고를 했을까? 그것은 사도세자의 당시 행실로 보건대 조만간 부인인 혜경궁 홍씨와 세손(정조)의 목숨까지도 위험하게 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27 페이지)

함인정(涵仁亭)은 인조가 지은 건물이다. 인왕산 아래의 인경궁의 함인당을 옮겨 지어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함인정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과 절차를 익힌 곳이다. 혜경궁 홍씨는 정조의 어머니였지만 정조가 효장 세자의 호적에 입적됨으로써 생모였을 뿐 법적인 어머니가 아니었다.

영조가 산(蒜)을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 세자의 호적에 올린 것은 유교 국가에서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역모죄를 썼다. 혜경궁은 아버지 홍봉한의 청지기였던 성윤우의 딸 성덕임을 궁녀로 거두어 직접 길렀다. 덕임은 후에 의빈 성씨가 된다. 덕임은 정조를 두 번씩이나 거절했다. 정조는 15년을 기다린 끝에 덕임을 의빈으로 맞았고 그녀로부터 문효 세자를 얻었다.

경춘전(景春殿)에서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성종의 생모, 연산군의 친할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정조가 태어났다. 소혜왕후의 사저(私邸)는 후에 경운궁(덕수궁)이 된다. 소혜왕후 사저, 월산대군(소혜왕후의 큰 아들, 성종의 형) 사저, 정릉동 행궁, 경운궁, 덕수궁의 순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환경전(歡慶殿)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전 중에서도 임금의 침전(寢殿) 즉 대전(大殿) 용도로 만들어졌다.(일부에서는 통명전을 대전으로 보기도 한다.) 환경전은 국상이 발생했을 때 혼전 또는 빈전으로 활용된 사례가 매우 많다. 경춘전에 산실청(産室廳)이 설치된 것과 대조적이다. 경춘전 뒤쪽에는 산줄기가 연결되어 생기로 충만한 지맥선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만 환경전은 건물 뒤쪽에 연결되는 지맥선이 없다.(164 페이지)

실록에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고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는 내용이 있다. 양화당은 통명전을 보조하는 건물이다. 인조는 청나라에 항복하던 날 임금의 옷인 곤룡포(袞龍袍)도 입지 못하고 남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고 나갔다. 일체의 의전이나 의장도 없었고 일국의 왕으로서의 위엄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190 페이지)

인조는 그 치욕 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인조는 청나라에 굴복한 사실을 가리킬 때 절대 항복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고 성에서 나온다는 뜻의 하성(下城)이란 말을 썼으며 신하들에게도 이를 강요했다.(195 페이지)

집복헌(集福軒)에서 사도세자와 순조가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왕비가 아닌 후궁으로부터 태어났다.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은 후궁들의 처소였을 것이다.(202 페이지) 춘당지(春塘池)는 조선의 임금들이 친경(親耕)을 하던 곳이었다. 춘당대(春塘臺)는 춘당지 옆에 쌓았던 석대(石臺)다. 화살을 쏘던 곳이다. 오늘날은 궁궐 관리를 위해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담을 쌓고 별도 관리를 하지만 조선시대에 창덕궁과 창경궁은 하나의 공간이었다.(214 페이지)

춘당대(春塘臺)는 정조(正祖)와 정약용(丁若鏞)의 일화가 있는 곳이다. 1791년(정조 15년) 9월 정조가 규장각 신하들과 창경궁 춘당대(春塘臺)에서 활쏘기를 했는데 평소 활쏘기를 즐겼던 정조는 50발 중 49발을 명중시켰고 정약용은 50발 중 4발 이하를 명중시켰다. 정조는 “문장은 아름답게 꾸밀 줄 알면서 활을 쏠 줄을 모르는 것은 문무(文武)를 갖춘 재목이 아니”라는 말로 정약용에게 강한 군사 훈련을 시켰다.

지난 9월 마지막 일요일 역사와 함께 하는 창경궁 숲 이야기 해설을 들었다. 여성적인 공간이고 사연이 많은 곳인 창경궁에서 들은 숲 해설은 나무를 잘 모르고 궁궐 일화를 더 알아야 하는 나에게 참 유익했다. 지난 4월 1일 시작된 이 해설은 오는 10월 29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 열리는 숲 해설이다.

한겨울에는 궁궐을 거의 찾지 않는데 나무들도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그 시기에는 나뭇잎들을 떨구고 겨울을 나게 될 것이다. 그 사이에는 현장에 직접 가는 궁궐 공부도 잠시 그치게 될 것이고 숲 해설사들도 잠시 휴지기를 가지며 내년 봄을 준비할 것이다. 경복궁, 창덕궁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창경궁을 다시 찾을 날을 위해 역사와 전각 공부를 충분히 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