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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자 기대승 프로이트를 만나다
김용신 지음 / 예문서원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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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박사 김용신의 '성리학자 기대승 프로이트를 만나다'는 퇴계(退溪)와 사칠리기(四七理氣) 논쟁(15991566)을 벌인 유명한 학자 고봉(高峯) 기대승의 사상과 프로이트 이론을 비교한 책이다. 퇴계와 고봉의 논쟁을 퇴고논쟁이라고도 한다. 물론 이때의 퇴고는 완성된 글을 다시 읽어 고치고 다듬는 것을 의미하는 推敲가 아니다. 하지만 退高 논쟁을 推敲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논의를 거쳐 진리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대승은 성리학자이다. 성리학은 세상사를 이()와 기()로 나누어 설명하는 학문이다. ()와 기()11세기 송()의 철학자 장재(張載)가 고안한 개념이다. 성리학은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주자(朱子) 즉 주희(朱熹)12세기 남송의 철학자이다. 주희가 대단한 것은 여러 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장재의 이()와 기(), 주돈이(周敦頤)의 태극, 정호의 천리(天理) 등의 개념을 하나로 통합해 자신의 철학 체계를 세웠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주희는 형이상학적인 것은 형체도 그림자도 없는 것 즉 리()라 표현했고 형이하학적인 것은 정()과 형태를 가진 것으로 기()라고 설명했다. ()가 먼저이고 기()가 나중이다.(이선기후理先氣後) ()는 만고불변의 원리이기에 다를 수 없고 기()는 형상을 위해 수없이 변할 수 있기에 같을 수 없다.(이동기이理同氣理) ()와 기()는 섞이지 않는다.(이기불상잡), 기는 이에 의해 활동한다.(이생기理生氣)

 

()는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에이도스)과 비교된다. 기는 질료(質料)와 비교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세계 저 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사물 자체 내에 존재하는 것 즉 이 세계의 힘을 구성하는 동적인 원리로 보았다. 이것이 형상이다.

 

사칠리기(四七理氣) 논쟁이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의 해석을 둘러싸고 벌인 논쟁을 말한다. ()에 근거한 측은지심(惻隱之心), ()에 근거한 수오지심(羞惡之心), ()에 근거한 사양지심(辭讓之心), ()에 근거한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네 개의 실마리 즉 사단이라 한다. 7정은 희(), (), (), (), (), (), ()을 가리킨다.

 

본연지성인 4단은 인간의 선() 추구를 위한 도덕적 개념이다. 기질지성인 7정은 도덕적 개념이 아니기에 악도 존재할 수 있다. 이와 기는 현상론적인 면에서는 분리될 수 없다.(이기불상리理氣不相理), 또한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없다.(이기무선후理氣無先後), 그리고 이는 같을 수 없고 기가 서로 비슷하다.(기상근리부동氣相近理不同)

 

주자학에서 인간의 수양을 강조하는 것은 기()가 이()에 의해 생기지만 생겨나면 이는 기를 완전히 관리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32 페이지) 플라톤이 말한 영혼(靈魂)은 성() 즉 리()에 해당한다. 성즉리란 도덕의 근원은 형이상학적 이법이라는 의미이다.(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129 페이지)

 

육체는 감성을 포함하는 것 즉 정(: passion) 즉 기()에 해당한다. 모든 사물이 이와 기로 이루어졌듯 인간의 심은 성()과 정()으로 구성된다.(28 페이지) 본체론적인 면과 현상론적인 면으로 나누는 것은 합리(合離)의 철학 즉 합해서 보고 나누어서 보는 것이다. “그의 사유는 분리해서 보면.. 합해서 보면...이란 구조를 가진다. 분리해서 보면 이()는 기()에 선행한다. 합해서 보면 理氣는 동시적이다. 분리해서 보면 성()은 완전하다. 정과 합해서 보면 성은 불완전하다.”(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131 페이지)

 

우리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나 이이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대해서는 많이 알아도 기대승의 이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기대승은 4단은 모두 선()이며 7정에는 선악이 있다는 이황의 입장에 불만을 가졌다. 기대승은 사단이란 결국 칠정이 발현(發現)하여 도덕성에 맞아떨어진 것이지 사단이 칠정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기대승의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연상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인간의 형상이 자체적으로 있고 A라는 사람이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A라는 생명체의 구성과 운동 자체가 인간이라는 형상의 표현(이정우 지음 가로지르기’ 192 페이지)이라는 말로 요약 가능하다.

 

기대승은 이황에게 성()도 이기가 있고 정()도 이기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왜 굳이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로 나누려고만 하는가 묻는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대설적(對說的: 좌우 관계)으로 보았고 이황은 인설적(因說的: 상하 관계)으로 보았다. 기대승과 이이의 이기묘합(理氣妙合) 이론은 기를 중시하는 특징을 드러냄으로써 이황의 이론과 함께 조선 성리학을 주리론과 주기론으로 양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아가 그것은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를 구별짓는 근거를 마련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기호학파는 기대승과 이이의 설을 이어받아 기발리승설(氣發理乘說)을 따랐고 영남학파에서는 이황의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따랐다. 정치적으로는 영남학파는 남인(南人)의 입장이었고 기호학파는 서인 특히 노론(老論)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58 페이지)

 

기대승을 필두로 한 주기론적 입장은 기호학파를 형성하면서 결국은 실사구시 학파들의 주장과 연결된다.(62 페이지)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심성은 덕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욕망에서 다른 하나의 욕망으로 가는 단순한 동물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66 페이지)

 

마키아벨리는 덕을 강조한 고대 철학적 전통을 비판한 최초의 근대철학자이다. 홉스는 근대 철학의 시조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사고의 근원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가 아니라 감각일 뿐이며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목적이 아닌 원인라는 이론을 도출해냈다. 이 때 원인이란 동물적 속성을 가진 인간의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니체는 홉스처럼 이성을 부정하면서 인간 행동의 기본 동기를 감성에 두었다. 니체는 이 세상에는 영원한 무엇은 없으며 영원한 진리도 없고 오직 변화만이 있다고 보았다.(71 페이지) 니체에게 불변의 도덕적 현상이란 없고 오직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니체는 무의식을 발견하였다. 니체에게 있어서 육체는 그 자체로 자아이며 이성은 인간성 내에서 아무런 작동을 하지 못한다.(72, 73 페이지) 니체는 자기 보존을 위해 설립된 문명 사회의 보이는 힘에 의해 억압받는 욕망을 지적한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 실현이다.

 

저자는 서양 철학에 있어서 인간성 이해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프로이트야말로 철학적 논의에서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될 확실한 철학자라 강조한다.(74 페이지) 프로이트는 이데아나 원형의 개념을 부정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감성 자체이다. 프로이트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때는 사랑의 본능(eros), 어떤 때는 죽음의 본능이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본능이 하나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는 곧 본능이란 것이 외부 충격과 관계가 있다는 의미이다. 정신분석학은 이를 대상(對象)이라 부른다. 물론 프로이트 이론에서는 대상이 본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이 대상을 결정한다. 저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지나치게 인간의 본능을 강조한 이론이라 설명하며 외부적 조건으로서 심리 현상에 대한 문화적 영향을 강조하는 대인(interpersonal) 정신분석학을 언급한다.

 

외부의 영향이 자아에 미치는 관계를 내사(內射; introjection)라 하는데 대인 정신분석학은 이 내사적 요인을 강조한다.(86 페이지) 물론 중요한 점은 내사 뿐 아니라 본능이 환경을 향해 쏘는 투사(投射; projection)의 영향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멜라니 클라인의 대상관계이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클라인은 사랑과 미움을 본능이라 보는 대신 대상과의 감성적 관계에서 생겨나는 인간 감성의 핵심적 요소로 보았다.(89 페이지) 멜라니 클라인은 내사와 투사를 통해 한 인간의 감성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또한 자아의 형성이 꼭 외적 대상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자아 자체의 내적 요소와의 관계로부터도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89 페이지)

 

멜라니 클라인은 내적 이미지를 통해 자체 내에서 희열(phantasy)이나 염려(anxiety) 등의 감정을 맛보게 될 수도 있다는 주장도 했다. 클라인 이후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의 본능 이론과 설리번의 외적 영향의 강조를 모두 뛰어넘어 자아의 외적 대상과 내적 대상 사이의 내사와 투사를 동시에 연구하는 쪽으로 그 비중을 옮기게 되었다.

 

현대 정신분석학의 주류적 입장은 자아가 외부를 향해 분출하는 힘과 외부의 환경이 자아로 유입되는 힘, 그리고 그 상호 관계를 연구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철학적으로 보면 자아는 외부의 영향을 받는 동시에 새로운 외부 조건을 창조해 가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즉 자아는 결정적이고 창조적인 요소를 동시에 지니는 것이다.(90 페이지)

 

이황은 사단은 순전히 선한 것이고 칠정은 선과 악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기대승은 정이 발현할 때 절도에 맞으면 사단이지 사단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기대승은 사단도 칠정도 모두 리와 기의 혼합체인 마음에서 나오는 바 이와 기를 겸하지 않은 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93 페이지) 절도는 시대의 도덕률이 아닐지?(102 페이지)

 

기대승에게 마음이란 리와 기가 함께 있는 정()의 작용이다.(97 페이지) 기대승의 마음 분석을 정 중심적 분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프로이트와 다를 것이 없다.(97 페이지)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이성이 아닌 정적(情的) 교감의 원리를 찾아 규명하려 한 사람이다. 프로이트의 사랑과 죽음이라는 두 개의 본능은 기대승의 칠정을 축약한 것이다.(98 페이지)

 

물론 기대승에게 성은 순수한 선 자체이지만 프로이트에게 성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가진다. 기대승에게 무조건 선이 되는 것은 없다. 만고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의미이다. 프로이트는 선과 악을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병 등으로 대체한다. 사랑도 너무 많으면 비정상 또는 병이 되고 죽음 또는 파괴 본능도 적절히 표현되면 정상 또는 건강한 정신 상태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103 페이지)

 

프로이트가 치료를 통해 비정상이 정상으로 돌려질 수 있다고 보았듯 기대승은 수양을 통해 작성작현(作聖作賢)이 가능하다고 보았다.(107 페이지) 이황에게 있어서 정()이란 외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선한 행위를 위해서는 환경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황은 불변의 성()으로 사단(四端)의 소종래(所從來: 지내 온 내력)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단이 외부 환경에 따라 변화무쌍해지는 칠정(七情)을 다스릴 수 있을 때에만 선()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강조했다.(111 페이지)

 

기대승은 이황이 주장한 것처럼 형기(形氣)가 단순히 외물(外物)에 감응되는 것이 정이 아니라 외물이 심중에 감동을 줄 때 정()이 주도적으로 발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멜라니 클라인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대상의 객관적 실체보다는 대상에 대한 자아의 느낌(감동) 여부에 따라 수많은 정(passion)이 생성된다고 보았다. 자아가 대상을 향해 쏘아대는 투사를 정의 중요한 형성 요소로 간주하는 것이다.(115 페이지)

 

기대승이 강조하는 것은 경()이다. 인간의 마음이 외물과 접하여 발현될 때 나타나는 모든 정()이 선()만일 수 없기에 악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에는 경이라는 요소가 있어 이 경의 역할로 인해 인간은 발현된 정의 의미를 선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이때 경이란 성선설(性善說)을 뒷받침해주는 개념으로서 본질적인 성()을 따르려는 의미는 지닌다. 경은 공경한다는 의미보다 삼가다는 의미이다.(118, 119 페이지)

 

기대승의 경()과 프로이트의 초자아는 매우 흡사하다. 이황도 기()가 강하기에 이()에서 비롯된 기가 현실의 악이 생긴다고 보았지만 사단은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와 기()의 관계를 초자아와 자아 이상(理想)의 관계로 보면 성리학적 해석과 정신분석학적 해석에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된다.(131 페이지)

 

기대승의 칠포사(七包四: 사단과 칠정의 관계) 이론이 조선 성리학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성리학의 논리는 이 세상 만물은 이와 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인간성을 논함에 있어서도 이와 기의 개념을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대승은 우주를 논하는 태극설에서는 이와 기의 개념을 인간성 이해에서처럼 사용하지 않았다. 기대승은 태극에서 이는 이 자체로 존재한다고 보았다.(150 페이지)

 

많은 학자들이 프로이트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신화를 오독했다고 비판한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왕뿐 아니라 안티고네’, ‘콜로노스에서의 오이디푸스라는 두 개의 이야기도 썼는데 이 이야기들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내용이 있다.(165 페이지..‘오이디푸스왕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다.)

 

에리히 프롬은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신화를 일방적으로 해석했다고 비판했다. 프롬에 의하면 그 신화들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프로이트가 말한 것과 같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싶은 근친상간의 욕망과 아무 관련이 없다.(167 페이지)

 

또한 많은 학자들은 근친상간의 경우 부모가 잔에게 먼저 성적 요구를 하며(특히 아버지와 딸 사이에서) 때로는 강제성까지 띤다는 임상학적 자료를 제시하면서 어린이가 부모에게 느끼는 성적 욕망이 인간 최초의 성적 욕망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비판한다.

 

저자는 오이디푸스왕에 대한 이야기만 가지고 보면 프로이트를 비판한 사람들이야말로 오이디푸스 신화를 잘못 이해했다고 말한다.(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이 프로이트를 비판한 사람들의 논리이다.) 저자는 라이오스가 아들을 죽이려 한 것은 자식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공포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프로이트가 말한 자식이 부모에 대해 갖는 적대감이 먼저라는 말이 타당하다고 말한다.(171, 172 페이지)

 

그런데 정말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려 했을까?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를 죽이려 한 것은 예언가의 말을 듣고서이다. 예언가는 아들(오이디푸스)이 장차 아버지(라이오스)를 죽이게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이 예언은 말 그대로 예언이다. 맞는지 장담할 수 없는. 물론 프로이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예시한 소포클레스의 두 신화(‘안티고네’, ‘콜로노스에서의 오이디푸스’)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은 무의식적인 적대감이 아니다.

 

프로이트 비판(‘오이디푸스왕이야기를 잘못 읽었다는 비판) 가운데 한스 요하임 마즈의 것이 설득력이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병리적인 가정에서나 발생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들뢰즈의 오이디푸스 가족 삼각형‘(에 국한된 것이라는) 비판도 새길 만하다.

 

결론이야 어떻든 성리학자 기대승 프로이트를 만나다는 매우 적절하고 중요한 책이다. 180여 페이지의 얇은 책에 어려운 논의를 실었고 결론적으로 멜라니 클라인의 논의에 대한 관심을 더욱 촉발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대상 관계이론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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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 외면당한 역사의 진실
이희근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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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 궁궐이 다섯 개나 되는 곳은 서울 뿐이라며 이를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 님의 글을 읽고 민중적 관점의 책이 뭐 없을까 찾다가 이희근 박사의 '백정, 외면당한 역사의 진실'을 발견했다. 4년 전 나온 이 책이 이제 내 관심의 대상이 되다니...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를 깰 때가 되었다는 저자는 백정을 북방 유목민의 후예로 정의하며 백정의 비율이 평민의 1/4에서 1/3에 이른다고 전한 '성종실록'을 언급한다. 저자에 의하면 구한말 고종의 고문으로 왕실에 머물렀던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는 자신의 눈에 비친 조선은 단일민족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샌즈는 한반도에 끊임없이 대륙 및 해양 계통의 인종들이 유입되었다고 보았다. 조선은 유교의 명분과 질서, 엄격한 위계와 혈통을 중시한 숨막힐 듯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백정들이 차별을 받았으리란 점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당시 성인 남자들보다 훨씬 키가 크고 장대한 데다가 눈의 색도 확연히 달랐다.

사냥에 탁월했던 그들은 갖바치(가죽 장인: 匠人), 도한(도축업자) 등으로 세분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백정은 이류(異類), 이종(異種), 호종(胡種), 별종(別種) 등으로 불렸다. 왕조 초기부터 위정자만이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화척 등의 부류를 별종 즉 이방인으로 취급했다. 조선에서 백정은 평민조차도 상종하지 않는 집단이었다.

백정은 일상생활의 모든 구석에서도 심한 차별을 받았다. 백정들은 명주옷은 말할 것도 없고 양인의 평상복인 소매 넓은 겉옷조차 입을 수 없었고 심지어 어린아이들에게조차 늘 머리를 숙이고 자신을 소인이라 불렀을 정도로 굴욕적인 차별을 받았다. 저자는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진짜 서울 토박이는 한반도 재래 거주민이 아니라 깊은 산에 둘러싸인 곳에서 호랑이, 표범, 멧돼지와 조류를 사냥하며 살았던 거란족의 후예라고 보는 게 옳다고 말한다.(66 페이지)

예종 무렵 고려의 남경은 지금의 서울이다. 당시 왕의 행차를 맞이하기 위해 거란족이 동원되었다. 당시 거란족 출신이 상당수였다. 당시(11세기 초) 고려인과 거란인은 서로 포로로 잡혀가거나 자발적으로 상대국으로 도망하는 일이 빈번했다.(72 페이지) 수만 명의 거란군이 포로로 잡혀왔다.(75 페이지) 고려는 그렇게 한반도에 정착한 거란족을 양수척이라 불렀다.

고려의 관료들은 평소 사냥으로 단련된 양수척(화척, 재인)의 전투능력을 알고 그들을 원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는 인력으로 썼다.(81 페이지) 꽤 많은 몽골족이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제주인도 몽골 출신인 것이다. 우리 역사는 그 역사적 풍상(風霜) 못지 않게 다양한 이족들이 왕성하게 넘나들었던 곳이다.(85 페이지)

'세종실록'에 평안도와 황해도에 몽골족의 후예가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다.(88 페이지) 고려에 정착한 몽골족은 육식 문화 보급의 주역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소고기를 많이 먹지 않았다. 살생을 죄악시하는 불교 탓이기도 하지만 소는 사람 대신 땅을 갈아 곡식을 심게 해주고 무거운 짐을 운반해주는 동물이기에 식용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104 페이지)

조선 왕조에 이르러 소고기 소비량이 증가했다. 소는 유교식 제례에서 성인인 공자나 천자의 제상에 올리는 희생(犧牲)이었다. 세종은 유독 우금령(牛禁令)을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농업보호정책 차원이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고기 반찬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했다.(117 페이지) 소를 잡지 못하게 하니 고기 뿐 아니라 가죽 값이 상승했다. 가죽 소비량이 증가해 밀도살이 부추겨졌다.

왕조의 개국과 함께 조정의 지속적인 도살 금지 조치로 백정은 생계수단을 잃고 생계형 범죄행위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도축(屠畜)과 사냥이 백정의 일이었다. 당시에 호환(虎患)이 심했다. 호환은 일상적이었다. 능침(陵寢)도 그런 피해를 입었다. 호랑이의 소굴이 되기까지 했다.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인 광릉이 대표적이었다.(133 페이지)

왕조는 개창 직후부터 소나무 벌채를 금지하는 금송령(禁松令)을 내렸다. 특히 서울을 지킨다는 북 현무(玄武)인 백악, 남 주작(朱雀)인 목멱, 좌 청룡(靑龍)인 낙산, 우 백호(白虎)인 인왕산 등에서는 소나무 벌채를 일제 금했다. 이 때문에 도성 근처는 소나무가 울창했다. 호랑이의 최적의 서식 또는 은신처가 된 것이다.

백정들은 발군의 호랑이 사냥꾼이었다. 개국 직후인 태조 이성계 때부터 호환은 위정자들의 최대 고민이었다. 세종때의 재상(宰相) 최윤덕(崔潤德)이 평안도 안주 목사로 있을 때 수만 그루의 버드나무를 고을 남쪽에 심어 수해를 막고, 고을 사람을 해친 호랑이를 잡아 죽여 민원을 해결해 칭송이 자자했다.

이는 어린 시절의 경험 덕이다. 어머니가 죽자 이웃의 백정 집에 맡겨져 자란 것이다. 백정은 위정자들에게 자주 징발(徵發)되었다. 유랑민들인 백정은 조선에서 농민 되기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왕조의 개국과 함께 조정의 지속적인 도살 금지 조치로 백정은 생계수단을 잃고 생계형 범죄행위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백정을 호적에 올리고 토지에 안착시켜 농사를 짓도록 하고 만일 도축을 하거나 농사를 짓지 않고 유랑할 경우에는 범죄로 간주해 처벌하는 것을 제민화(齊民化) 정책이라 한다.(제민의 제는 가지런 할 제이다) 행장(行狀)은 조선 시대의 여행 증명서를 말한다. 백정은 행장 없이 여행할 수 없었다.

조선은 개국과 더불어 백정을 제민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했다. 물론 이는 왕국 구성원들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백정들은 유랑 금지 및 도축 금지로 이중의 어려움에 당면하게 되었다. 농상(農商)만을 천직으로 여긴 조선의 위정자들은 소 사육을 장려하는 정책을 생각하지 못했다.(218 페이지)

우의정 맹사성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관리들은 평민이 가죽신을 신지 못하게 하는 등의 금지령만을 양산했다. 특권의식의 발로이자 단견(농상 외의 것을 생각해내지 못하는)이었다. 백정들이 범죄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도축 금지와 유랑 금지(= 사냥 금지)때문이었다. 백정들은 자기들끼리의 혼인과 소고기와 소 가죽 수요 증가 등으로 번성했다.

인구 증가로 그들의 범죄율이 늘었다. 관군에 대적할 정도였다. 왕국의 교화사업이 실패했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백정 출신 도둑떼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경기도 양주 출신의 임꺽정이었다. 임꺽정은 명종 때 3년간 활약했다. 사실 백성들은 임꺽정 무리의 보복(신고에 대한)을 두려워 했는데 그보다는 자신들의 재산만 약탈하지 않는다면 굳이 이들을 고발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도적이 성행했던 주 원인은 수령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재상들의 탐오(貪汚)였다. 임꺽정이 의적(義賊)이라는 관념이 생겨난 것은 명종실록 사관의 기술 및 분석 때문이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守令)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라는 분석, 윤원형(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동생)과 심통원은 외척의 명문거족으로 물욕을 한 없이 부려 백성의 이익을 빼앗는 데에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큰 도적이 조정에 도사리고 있는 셈이라는 기술(255 페이지)을 보라.

백정은 한반도 주민들의 정주(定住), 정착(定着), 고정(固定)의 생활 유형에 충격을 준 그룹이다.(257 페이지) 백정은 결국 원래의 정착민과 통혼을 거치면서 한반도 정착민의 일부로 뿌리를 내려갔다. 그들은 조선 후기에는 왕조의 수호자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대로부터 조선을 지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백정들은 천부적인 전사였다.(261 페이지) 그들은 여진족 토벌 등에 동원되기도 했다. 노비나 다름 없던 백정들에게는 전쟁이,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267 페이지) 백정, 천인들이 임진왜란 와중에 전공을 세워 고위직에 오르자 사대부들은 반발했다.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는 자신의 책 '극동회상사기(極東回想私記)'에서 두 차례의 양요때 백정 출신 사냥꾼의 영웅적 행위를 묘사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대에 맞서 싸운 주력군은 백정 출신 사냥꾼이었다. 그들은 전력 열세 속에서영웅적으로 싸웠다. 그들은 프랑스, 미국의 병사들에 강렬히 저항했다.(309 페이지) 조선시대에 남자 어른은 상투를 틀고 갓을 썼지만 백정은 보통 사람들이 부모상을 당했을 때 죄인이라며 쓰고 다닌 패랭이를 썼다. 늘 죄인 취급을 받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331 페이지)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1896년 백정의 갓 착용이 허용되었지만 차별과 박해는 여전했다. 그런 백정들이 당당한 신민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관민공동회로 인해서이다. 조선시대에 백정이 받은 차별과 박해를 보면 외국에서 온 결혼이민자나 노동자들을 멸시하고 차별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 겹쳐진다. '백정, 외면당한 역사의 진실'은 우리가 단일민족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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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
벨 훅스 지음, 윤은진 옮김 / 모티브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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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가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원서 출간: 1994)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자신에게 글쓰기는 진지한 작업인 반면 가르치는 일은 그리 진지하지는 않지만 생계를 꾸리려면 해야 하는 작업이었다고. 물론 훅스는 후에 흑인 초등학교에서 혁명으로서의 학습을 경험한 것 등을 통해 교육에 대한 진전된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훅스에 의하면 그 이후 교육은 정보 자체만으로 국한되어 버렸다. 삶의 지침이나 방향과는 무관한 내용이 된 것이다. 훅스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정보를 외우고 그것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은행 저금식 교육이라는 것이다. 훅스는 비판적인 사상가가 되려 했다.

 

훅스는 해방으로서의 교육을 제시한 파울로 프레이리에게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그를 서슴 없이 비판하기도 했다.(12 페이지.) 훅스는 자신의 두 스승으로 파울로 프레이리와 베트남 승려 틱낫한을 든다. 프레이리의 공동 노동이란 개념은 틱낫한의 참여 불교에서 주장된 것으로 묵상과 실천을 함께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훅스는 자신의 교육 실천은 반식민주의적, 비판적, 페미니스트 교육학이 계몽적으로 상호 작용함으로써 발생했다고 말한다. 훅스에 의하면 경계 넘기는 교육을 자유의 실천으로 이끄는 움직임이다. 훅스가 비판하는 것은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학업을 통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다면 똑똑한 사람으로 인정되는 현실이다.

 

훅스는 몸, 마음, 정신의 분리가 아닌 통합을 강조하는 철학적 관점으로 학습에 접근하자 대부분의 교수들이 절대 반대하거나 경멸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전한다.(27 페이지) 훅스는 교육이 자유의 실천이라고 한다면 학생에게만 참여하고 고백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을 기억할 부분이다. 교사가 학생에게 가르치면서 함께 성장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것은 바람직한 내용을 통한 성장이어야 한다. 순종이 아닌 자유를 실천하는 방법을 배우는 교육이어야 하는 것이다. 훅스의 청소년기는 인종 차별이 폐지되었지만 적개심, 갈등, 분노, 패배로 가득찬 시대였다.

 

그런 와중에 훅스는 백인 남학생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인종 간의 경계를 넘는 우정은 문제이고 더욱 남녀간의 우정은 전례가 없는 위험한 일이었다. 훅스가 맞서 싸우는 것은 백인과 흑인,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사회, 경제적 차별이다.

 

훅스는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관점에 인종, , 계급에 대한 인식을 포함시키려 하지 않는 이유는 교실을 통제하지 못하고 학생들의 감정과 열정을 자제시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51 페이지) 이에 반해 훅스는 자신이 학생들의 목소리를 존중해주는 교실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그 점이 학생들의 무한히 많은 피드백을 유도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훅스가 행하는 교육은 인종과 성, 계급을 아우르는 교육이다. 어린 시절부터 열렬한 독자로 살아온 훅스는 상처 때문에 이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며 테리 이글턴의 말을 인용한다. 어린이들은 아직 사회의 관습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 받지 않았기에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 강력한 질문을 제기하려 한다는 것이다.(76, 77 페이지)

 

훅스는 이론화 즉 우리의 살아 있는 경험이 자기 회복 및 집단 해방의 과정과 근본적으로 연계되었을 때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78, 79 페이지) 훅스는 인종과 젠더에 초점을 맞춘 페미니스트 학문에 문제가 존재한다고 말한다.(98 페이지) 훅스는 토론이 개인의 경험과 연관됨으로써 열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활성화 된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학생들도 있음을 지적한다.(109 페이지)

 

인종 차별이 폐지되었지만 적개심, 갈등, 분노, 패배감 등으로 가득찬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말한 훅스는 노예제가 폐지되었어도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 간의 관계가 긍정적으로 변하지는 않았다고 지적한다.(121 페이지) 훅스는 백인 여성들은 흑인 여성을 연구하는 작업 즉 한때 무의미하다며 폐기했던 연구에 의존하여 다시 학문에서 하녀 - 주인 패러다임을 재생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129 페이지)

 

훅스는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이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을 끊임 없이 표현만 하고 이런 감정을 넘어 새로운 차원에서 접촉을 모색하려 하지 않는다면 포용적인 페미니스트 운동을 구축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실패할 것이라고 말한다.(136 페이지) 훅스는 우리가 차이와 복잡성을 존중해줄 수 있는 여성의 공간을 만든다면 정치적 연대에 기반을 둔 자매애가 생겨날 것이라 말한다.(137 페이지)

 

훅스는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관여하고 흑인 해방 투쟁에 참여하기에 인종과 젠더의 이슈를 흑인의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사람들에게 어려운 질문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적절한 방법을 안내해주어야 하며 그 질문에 의미 있는 답변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139 페이지)

 

훅스는 인상적인 말을 한다. 살아남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를 우리의 존재 및 육체에 익숙해지지 않는 체계 안에 존재하는 몸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165 페이지)

 

훅스는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로, 비주류이자 억압받는 집단의 일원으로, 관행화된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와 계급 엘리트주의의 희생자로 인식한 자신이 가르치는 태도가 억압하는 자의 위계를 강화시킬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공포에 짓눌려 있다고 말한다.(173 페이지) 새겨들어야 할 언급이다.

 

훅스는 진보적인 교육을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소리가 있으면 교수들은 변화 즉 새로운 전략을 시도하기를 두려워하게 된다는 말을 한다.(174 페이지) 훅스는 자신이 좋은 교수가 아닐까봐 걱정하는 때가 있지만 좋은/ 나쁜이라는 이분법을 버리려고 분투하고 있다고 말한다. 교실에서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는 진보적 교수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유익한다는 것이 훅스의 첨언이다.(191 페이지)

 

훅스는 대학 1년 때 애드리언 리치(Adrienne Rich)의 시 아이들 대신 책을 태우다(The burning of paper instead of Children)’을 읽은 기억을 전한다. 생명체에 대한 정치적 학대와 그에 따른 고통을 멈추게 하는 문제가 검열이나 분서(焚書)보다 더욱 중대한 이슈임을 생생하게 묘사한 이 시에서 훅스는 절대 잊히지 않는 구절로 이것은 억압자의 언어이지만 당신에게 말을 건네려면 이 언어가 필요하다.”는 구절을 든다.(201 페이지)

 

훅스는 열정을 경험하는 일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고 감정을 깊이 느끼는 것은 열등하다고 믿게 하는 이 사회에서는 언어를 통해 교감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특히 어려울 것이라 말한다.(210 페이지)

 

훅스는 우리는 경계를 넘는 방법을 창의적으로 창조해내야 한다고 말한다.(217 페이지) 훅스는 에로스를 우리가 전면적으로 노력하여 자기실현을 하도록 북돋워주는 힘이며 지식을 추구하는 방법에 영향을 주는 인식론적인 기반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자고 제안한다.(231 페이지)

 

훅스는 선택한 것 이상의 것을 하도록 자신을 자극하는 스승을 자신의 인생 모든 곳에서 찾으려 했으며 그런 자극을 받음으로써 진정으로 선택의 자유를 얻어 제한 없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완전히 개방된 공간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훅스는 학교는 유토피아가 아니지만 배운다는 것은 유토피아가 만들어질 수 있는 장이라는 말을 한다.(244 페이지) 훅스에 의하면 교실은 그 자체로 한계가 많지만 가능성을 지닌 장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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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고수들의 숨겨진 노하우를 훔쳐라 - 포커스 라이팅
박성후 지음 / 오디세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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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斬新)을 참신하게 해석한 것이 눈에 띈다. 하늘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전제 하에 나온 말이다. 참신의 참은 벨 참자이다. 신은 새로울 신이고. 모든 분야의 대가들은 어디에선가 재료를 가져와(나무를 베듯 가져와) 새롭게 만드는 작업의 명수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되고 자기다워야 한다. 자기만의 색깔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창작(지음)의 비밀이다.

 

짓는다는 말은 서로 다른 재료들을 섞거나 연결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다. 저자는 글은 사람이라 표현한다. 글에는 저자의 정신과 삶에 대한 가치관과 인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좋은 글의 요건은 이렇다. 본질적인 주제에 충실하고, 독창적이되 타당성과 설득력을 가져야 하고, 정확하고 명료해서 과장되지 않아야 하며, 최소의 말로 최대의 효과를 만드는 간결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확성(correct), 명료성(clear), 간결성(concise)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茶山)은 공부란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과정이자 어려운 것을 쉽게 풀이하는 절차라 말했다.(133 페이지) 다산은 복잡한 것을 갈래로 나누고 무리를 지어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종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산은 언제나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정말 큰 문제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공부는 따지는 데서 시작해서 따지는 것으로 끝난다. 선명한 길이 뚜렷이 드러날 때까지 따지고 또 따져라.”란 말을 했다.(225 페이지)

 

책을 쓰는 사람들은 목차를 정리하고 나면 책의 절반은 완성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 만큼 목차는 중요하다.(136 페이지) 고수들의 책은 아무리 두꺼워도 키워드가 그리 많지 않다. 저자는 말한다. 물려받은 재능이 없는 사람이 문학적 글을 제대로 쓰려면 오랜 시간의 뼈를 깎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반면 실용적 글쓰기는 주제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논리적 구조 세우기가 우선되어야 한다.

 

저자는 중()의 특성을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삼각형의 정점과 같은 최선의 시너지를 도출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74 페이지) 이것은 윈윈 전략이기도 하다. 함께 이기는, 소통을 의미한다. 글쓰기의 목적은 소통임을, 서로 바람직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지식 창조를 염두에 두지 않는 배움은 허무한 것이며 글쓰기를 생각하지 않는 책읽기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103 페이지) 상당한 자극이 되는 말이다. 물론 글쓰기와 책쓰기는 차원이 다르다.

 

칸트는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는 말을 했다. 또한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하지 못한다. 감각은 아무것도 사유하지 못한다. 오직 양자의 결합을 통해서만 지식이 태어난다.”는 말도 했다.(320 페이지) 각 개인에게는 서로 다른 주관적 형식인 선험적 사고의 틀이 있지만 반면 공통적 사고의 틀도 있다. 글쓰기는 이 두 사고의 틀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다.(105 페이지)

 

책은 천천히 한 번 읽는 것보다 핵심 중심으로 빠르게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것이 더 활용 가치가 높다.(129 페이지) 전략적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저자는 논리적인 구조 안에 스토리텔링이 담긴다면 가장 효과적인 설득 방법이 될 것이라 말한다.(172 페이지)

 

고수들은 실패의 대가들이다. 가장 많이 실패한 사람들이 고수가 될 자격이 있다.(198 페이지) 베케트는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말을 했다. 세종대왕은 백독백습(百讀百習)으로 유명하다.(208 페이지) 한 권의 책을 백 번 읽고 백 번 필사(筆寫)한 것이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주제를 정하라.(232 페이지) 첫 문장이 중요하다. 계속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첫 문단 또는 첫 문장에서 거의 결정된다.(252 페이지) 요점을 세 개 이상 만들면 그것은 이미 요점이 아니다.(255 페이지) 헤드라인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나 대답해야 할 의문을 제시한다. 이어 3개의 핵심 메시지를 설정한다. 결론부에서 구체적인 행동을 위한 지시나 명령, 제안, 단정 등을 제시한다.(255 페이지)

 

소설이 아닌 실용문에서 연역적 방식으로 논리를 정연하게 펼치기는 어렵다. 연역법은 결론을 나중에 제시하는 수사법이다. 또한 특수한 사실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다. 귀납법은 반대이다. 결론이나 핵심을 먼저 제시하고 그 증거나 이유들을 나열하는 방식이다.(270 페이지) 귀납법적 사고를 하려면 여러 가지 복잡한 사실들 중에서 핵심을 포착하는 안목과 공통 분모를 찾아내는 능력이 중요하다.(272 페이지)

 

논리적인 글쓰기에서 필수적인 것은 단 하나의 포인트를 잡아내는 것이다.(292 페이지) 에토스와 파토스 위에 로고스를 세워야 한다.(147 페이지) 로고스는 논리, 이성을 말한다. 파토스는 청중분석을 바탕으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사용하는 감성적 어필을 말한다. 에토스는 화자가 전하는 메시지에 대한 신뢰를 말한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주장과 근거를 내세워야 한다.(합리성) 글쓴이의 주체적인 색깔이 선명해야 한다.(주체성).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목적성) 저자는 상식적인 생각으로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비상식적인 관점으로 다르게 구상해 볼 것을 권한다.(306 페이지) 소통과 융합을 추구하되 다른 사람의 생각에 끌려다니지 말고 내면에서 끌리는 대로 질문을 마구 던질 필요가 있다.(32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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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와 사직 - 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 규장각 인문강좌 1
강문식.이현진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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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선의 국가 제사 체계에서 가장 격이 높고 중요한 대상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에 따라 배치되었다. 여기서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군주남면(君主南面)이다. 사직은 토지 신인 와 곡식 신인 으로 구성된 말이다.

 

사람은 토지가 없으면 살 곳이 없고 곡식이 없으면 먹을 수 없다. 종묘와 사직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위상이 높을까? 사직이다. 이는 조선에만 있었던 특징이다. 중국에서는 종묘, 사직 외에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제단인 환구(圜丘), 땅에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제단인 방택(方澤)이 더 있었다.

 

중국의 경우 환구, 방택, 사직, 종묘의 순서로 위상이 매겨져 있었다. 사직은 조선이 제후국이었던 관계로 하지 못했던 환구와 방택을 실질적으로 담당했던 제사이다. 토지와 곡식은 전통 시대 국가 경제의 기본이었다. 반면 종묘 제사는 국왕과 혈연적으로 연결된 왕실 선조들을 대상으로 한 사적(私的)인 것이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종묘 제사가 사직 제사보다 더 중시되었다. 좌묘우사는 주례(周禮)’의 원칙이다. 반면 천자(天子) 7(), 제후(諸侯) 5()예기(禮記)’의 원칙이다. 조선은 불천지주(不遷之主)를 적절히 활용하여 오묘 제도를 유지했다. 불천지주(不遷之主)란 친진(親盡: 제사 지내는 대의 수가 다 되는 것)에 이른 국왕의 공덕을 평가한 뒤 공덕이 높아 영원히 옮기지 않기로 결정한 신주(神主)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에는 조상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가묘(家廟)가 있었다. 이를 문소전(文昭殿)이라 한다. 가묘적 성격의 사당인 문소전에서도 왕위에 즉위했던 국왕을 봉안한다는 점에서 종묘와 동일했지만 왕위 계승상의 관계보다 혈연 관계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종묘와 달랐다.

 

문소전은 임진왜란때 불에 탄 뒤 중건되지 않았다. 조선 왕실의 신주(神主)는 두 가지였다.(신주는 혼이 기대고 의지하는 곳이다.) 우주(虞主)와 연주(練主)이다. 우주는 뽕나무, 연주는 밤나무로 만든다. 우주와 연주의 모양은 차이가 없다. 글을 쓰는 방식이 달랐다.

 

종묘는 공덕이 뛰어난 불천지주들을 모신 정전(正殿)과 그렇지 않은 신주들을 모신 영녕전(永寧殿)으로 나뉜다. 불천(不遷)의 반대는 조천(祧遷)이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됨에 따라 국가의 모든 체제나 의례가 황제국 제도로 격상되었다. 종묘 제도는 오묘가 아닌 칠묘가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 이를 신혼체백(神魂體魄)이라 한다. 신혼(神魂)은 사당에 모셔지고 체백은 능()과 묘()에 모셔진다. 조선시대 국가 의례는 제사 대상에 따라 명칭을 달리 했다. 천신(天神)에게 지내는 것을 사(), 지기(地氣)에게 지내는 것을 제(), 인귀(人鬼)에게 지내는 것을 향(), 문선왕(공자)에게 지내는 것을 석전(釋奠)이라 했다.

 

종묘는 국왕의 선조를 모시는 것이므로 그곳에서의 제사를 향이라 일컫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지만 석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개 제사 또는 제향 등으로 불렀다. 궁궐의 건물명에는 전(殿), (), (), () 등이 있다. 정전과 영녕전은 전을 쓰고 공신당과 칠사당은 당을 쓴다.

 

배향당이라 불리기도 한 공신당은 해당 국왕과 함께 모신 공신을 위한 집이다. 13949월 한양이 조선의 새 수도로 확정된 후 태조는 같은 해 1025일 한양 천도를 단행했다. 이어 태조는 112일에 직접 종묘와 사직이 들어설 터를 점검한 뒤 다음 날 종묘와 사직단 등의 건립을 담당할 공작국을 설치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세종대에 집현전(集賢殿)이 설치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제(古制)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사직 제도 역시 한층 더 유교적인 예의 원칙에 부합되도록 정비되었다. 1426(세종 8) 6월에 사직의 관리를 전담하는 사직서(社稷署)가 설치되었다.

 

1897년 대한 제국 선포로 사직단도 황제국의 제도에 맞도록 격상되었다. 대한 제국의 출범과 그에 따른 국가 의식의 정비는 외형적인 면에서는 사직의 격을 높여주었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그 위상의 하락을 초래했다.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원구단(환구단의 다른 이름)이 설치되었고 이로써 사직이 담당했던 하늘 제사의 기능이 원구단으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187 페이지)

 

일제는 1909년 사직을 사직공원으로 개조하면서 부속 건물들을 철거하고 영역을 크게 축소했다. 사직단 역시 왜란과 호란 등으로 수난을 당했다. 사직단 구역이 조선 전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직단과 신실(神室) 등에 대한 지속적 수리, 보수 작업 덕이다.

 

종묘 제사에서 익힌 고기를 바치는 의식을 궤식(饋食)이라 하는 반면 사직 제사에서는 익힌 음식을 바치는 것을 진숙(進熟)이라 한다. 희생(犧牲)은 종묘나 사직에서 함께 쓰인 말이다. 희생은 산 짐승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사직 제사에서도 종묘에서처럼 일무(佾舞)가 거행되었다. 일무에는 문무(文舞), 무무(武舞)가 있다. 조선의 사직 제사에서는 6일무가 거행되었다. 조선 시대 형법 기준서인 대명률(大明律)’에 의하면 사직이나 종묘 등 대사로 규정된 국가 제사에 관련된 물건을 훔치는 자는 반역자로 처벌하는 법률을 적용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255 페이지)

 

사직단에서 희생 소가 난동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인조대의 홍서봉은 이 사건을 국왕이 정치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과 북방 오랑캐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우연이겠지만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약 110 개월만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사직에 도둑도 들었다.

 

사직서에 도둑이 든 사건은 순조대 이후의 위상 변화를 반영한다. 숙종 정조대를 거치면서 의례와 제도의 정비 및 국왕 친제(親祭)의 증가 등으로 크게 강화되었던 사직의 위상은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왕권이 크게 약해지면서 숙종 이전으로 돌아갔다. 일반인들에게도 사직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곳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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