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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8
김수영 지음 / 돌베개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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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시 ''을 김수영의 수필 '해동(解凍)'에 근거해 푼 김혜순 시인의 책('김수영 - 세계의 개진과 자유의 여행')을 보고 읽게 된 책이 '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08번 김수영'이다. 철학자 김상환의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공자의 생활난' 등 두 권의 김수영론을 읽지 못한 아쉬움 속에 읽게 된 책이다.

 

일방적 매혹(魅惑)도 근거 없는 염오(厭惡)도 아닌 균형감각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읽는다. 수필이야말로 김수영을, 그리고 김수영의 시를 이해할 단서가 되리라 생각한다. 김수영은 자신을 동물적인 본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동물적인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 소개한다.

 

김수영은 사람이 돈을 따라서는 아니 된다는 처세의 지혜도 인용하고 여러 날을 두고 저녁때만 되면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 필시 정신 이상의 전조가 아닌가 겁을 먹었다는 이야기, 무허가 이발소의 딱딱한 평상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처럼 평화로운 때는 없다는 이야기들을 더한다.

 

김수영은 시()를 논하는 것은 신()을 논하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라는 일본의 시인 니시카와 준사부로의 말을, 자유를 논하는 것은 신()을 논하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라 바꾸고 사랑이 아닌 자유는 방종이며 사랑은 호흡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김수영은 또한 자신에게 술을 마신다는 것은 사랑을 마신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김수영은 문학 하는 이에게 술을 권한다. 그런, 그리고 술을 좋아하는 김수영은 글을 쓰는 집을 성스러운 직장으로 여겨 집 안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김수영은 흥미로운 말을 한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릴케는 소녀 릴케는 많았지만 깡패적인 릴케의 일면을 살려서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없었던 것 같다는 것이다. 김수영은 영화 배우 장동휘가 갱 영화에 쓰고 나오는 모자를 이야기 하고 아동문학가 마해송(1905 - 1966)을 사진을 가장 멋있게 찍을 줄 아는 윤백남(극작가, 1888 - 1954) 부류로 분류하면서도 작위(作爲)를 보이지 않는데는 실패했다고 평을 하는가 하면 자신이 찍은 소록도 사진을 보고 "이 사진 소독했소?"라 물은 한 문인을 이야기하며 현대 소설을 쓰는 사람이면 나균(癩菌)이 태양빛 아래서는 부지(扶持)하지 못한다는 것쯤 알고 있어야 할 것이라 말한다.

 

김수영은 동물은 어떤 것이든 직업적으로 기르게 되면 애정은 거의 전멸한다고 말한다. 김수영은 8년간 닭 100 마리 정도를 길렀다. 마포(麻浦 서강(西江) 가에서. 김수영은 구공탄 냄새는 완연히 코에 맡아질 때는 이미 늦는다는 말을 한다. 서울 서민의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들이 김수영 글들에는 많다.

 

김수영은 타고르의 시를 칭찬한다. 쉬운 말로 고운 시를 쓸 수 있는 타고르의 면모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나는 나의 가냘픈 쪽배로 욕망의 대해를 건너려고 애를 쓴다. / 리고 자기도 역시 유희(遊戲)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 어버리고 만다."

 

김수영은 사회 비평이나 문명 비평도 좀 더 이렇게 따뜻하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김수영은 시의 경험이 낮은 시기에는 시를 찾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수가 많으나 시의 어느 정도의 훈련과 지혜를 갖게 되면 시를 기다리는 자세로 성숙해진다는 말을 한다. 시인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이 말은 김수영이 너무 많은 실재성은 현기증이, 체증이 될 수 있다는 미국 시인 데오도어 뢰스케의 시를 보고 한 말이기도 하다.

 

김수영은 너무 욕심을 많이 부리면 도리어 역효과가 나는 수가 많으니 제반사에 너무 밀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한다.(이남호 교수의 '남김의 미학'을 읽는 듯 하다. '남김의 미학'은 우리 시대는 철저함과 완전함과 효율성의 신화에 갇혀 있다고 말하는 책이다. 이남호 교수는 최선을 다하고 완벽을 기하는 것은 좀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가능성을 소진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김수영은 슬퍼하되 상처를 입지 말고, 즐거워하되 음탕에 흐르지 말라는 말을 인용한다. 김수영은 이를 공자인가 맹자인가의 글의 한 구절이 생각나 인용한다고 말하는데 공자의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공자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엇이든 해보려고 시도한 사람(신정근 지음 '공자의 인생 강의' 참고)이었다는 점이고 김수영은 시 쓰기는 온몸으로 하는 것, 밀고나가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는 점이다.

 

김수영은 일을 하자고 일기에 썼다. 번역이라도 부지런히 해서 과학 서적과 기타 진지한 서적을 사서 읽자고 썼다. 그리고 읽은 책은 그전처럼 서푼에 팔아서 술을 마셔버리는 일하지 말자고 썼다. 이제는 책을 사야 한다고, 피로써 읽어야 한다고, 무기로서 쌓아 두어야 한다고 썼다. 책을 쌓아 두어도 조금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떳떳이 앉아 있을 수 있다고 썼다.

 

김수영은 시고 소설이고 모든 창작 활동은 감정과 꿈을 다루는 것이고 이 감정과 꿈은 현실상의 척도나 규범을 넘어선 것이라 말한다. 김수영은 이어령의 '에비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조선일보 게재 칼럼에 대해 우리나라 문화인의 무지각과 타성을 매우 따끔하게 꼬집어 준 재미있는 글이었지만 창조의 자유가 억압되는 원인을 지나치게 문화인 자신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 같은 감을 주어 불쾌하다고 썼다.

 

김수영은 제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란 말을 제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로 바꾸어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한다. 김수영은 신동엽(1930 - 1969)'4월은 갈아 엎는 달'을 예시하며 사회참여적 정신과 최소한의 예술성을 갖춘 작품이라 칭찬한다.

 

사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사월의 승리여.

강산(江山)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 엎었으며

이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 엎었으면

갈아 엎은 한강 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 칠, 아 푸른 보리밭.

 

김수영은 김재원의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를 제정신을 가지고 쓴 시라 평한다. 김수영은 알맹이는 다 이북 가고 여기 남은 것은 다 찌꺼끼뿐이라는 말을 소개하며 이북 작가들의 작품이 한국에서 출판되고 연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김수영은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 말한다, 김수영은 시에 있어서의 모험이란 세계의 개진(開陳), 하이데거가 말한 대지의 은폐(隱閉)의 반대어라 말한다.

 

김수영은 시인이 자기의 시인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울이 아닌 자기의 육안(肉眼)으로 사람이 자기의 전신을 바라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말한다, 김수영은 애써 책을 읽지 않으려 한다며 책이 선두가 아니라 작품이 선두라고 덧붙인다. 어떤 고생을 하든지 시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책이 그 뒤의 정리를 하고 나의 시의 위치를 선사해준다고 말한다.

 

김수영은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시에 적용해 사람은 자기 스타일을 가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로 바꾼다. 그런 김수영이 칭찬한 작품이 김현승(金顯昇: 1913 - 1975)파도(波濤)’이다. “이 정도의 작품이면 죽음을 디디고 일어선 자기의 스타일을 가진 강인한 정신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잇발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바다의 글라스여.

 

,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 여기 누가

()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이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종횡무진, 고투(苦鬪),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 치열함 등의 말이 떠오른다. 조금 더 김수영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이 추천(?)한 시들을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시론(詩論)들도 많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스타일을 가져야 한다는 점, 치열해야 한다는 점 등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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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문학의 이해와 감상 47
김혜순 / 건국대학교출판부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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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론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김혜순 시인의 김수영론은 다른 김수영론들과는 차별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혜순 시인의 '김수영 - 세계의 개진과 자유의 여행'(건국대학교 출판부)은 단호한 문체가 눈에 띈다.

 

'윤동주 - 신념의 길과 수난의 인간상'을 읽으며 느낀 바이지만 건국대학교 출판부의 문학의 이해와 감상 시리즈는 꽤 알차다. 우리 나라 문인들과 외국 문인들이, 시인과 소설가가 함께 포함된 것이 이 시리즈의 특징이다.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괴테에 이르기까지 100 권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110 페이지 내외의 분량으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물들은 얇은 지면에 많은 내용을 담은 까닭에 글자 크기가 작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출간 당시인 1990년대의 시대적 조류를 그대로 따른 것이라고. 글자 크기를 작게 한 것이 당시의 대세였다. '윤동주 - 신념의 길과 수난의 인간상'도 그렇지만 생애와 작품, 문학세계, 작품 해설, 문학적 평가, 참고문헌, 작가 및 작품 연보 등의 구성이 기본 틀인 듯 하다.

 

저자인 김혜순 시인은 김수영에 관한 논문을 많이 썼다. 박사 논문에서는 김수영의 시들이 어떻게 서로 기대고 교통하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텍스트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 썼다.

 

저자는 김수영의 시를 읽을 때마다 그의 새로운 사상을 발견하는 기쁨을 느낀다는 말을, 김수영 만큼 자신의 시업에 영향을 끼친 시인은 없었다는 말을 한다.

 

생애와 작품편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김수영이 신문사를 그만 두고 택한 양계가 출판사나 신문사, 통역 등의 일보다 "아주 크나큰 일이었는지" 그 시기에 '', '폭포', '', '봄밤', '초봄의 뜰 안에', '', '사치(奢侈)', '', '동맥(冬麥)' 등의 많은 시를 발표했고 시인협회가 주는 제1회 시협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아주 크나큰 일이었는지"란 표현이 흥미로운 것이다. 김혜순 시인의 김수영론 특히 생애와 작품론의 특징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체계적이다. 눈여겨볼 사항은 김수영이 48세의 나이로 교통사고사를 당한 안타까움에 '북간도'의 안수길(1911 - 1977) 작가가 애도사를 썼다는 점이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안수길 작가에게 '동맥(冬麥)'이라는 미완성 소설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애도사 가운데서는 "수영은 아직 더 살았어야 할 시인이다. 그것은 수영의 일은 이제부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쓴다고 해서 그의 지금까지의 업적을 과소평가하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높이 평가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기를 바란다."는 글과 "이제 울적하면 전화라도 걸어 보고 싶은 친구 하나가 없어진 것이 나로선 더욱 슬프다."는 글이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그것대로'란 표현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대로에 이어 그러기를(높이 평가되기를) 바란다는 말이 생각을 유도한다. 바람이 실현되지 못하는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세상에 대처하는, 그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눈에 선하다.

 

이를 두고 김혜순은 안수길이 김수영의 삶 속에서 귀족적인 풍모와 시 속에서의 전위적 자세에 대해 애도했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지어 말할 부분이 김수영의 주위에 있었던 두 명의 박씨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수영은 화가 박일영을 존경한 반면 시인 박인환을 가장 경멸했다. 김수영은 '박인환'이란 글에서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다는 말을 했다. 그 때문에 김수영은 박인환을 가장 경멸했다.

 

김현경 여사도 박인환을 철저하게 무시했다는 말을 했다. 일본 시인 무라노 시로의 시를 박인환이 일본어로 낭송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음독이 너무 많이 틀려서였다고 한다.('김수영의 연인' 158 페이지.)

 

지난 2005년 계간 '시인세계'에서 조사된 바 김수영 시인은 과대평가된 시인 가운데 한 명으로, 박인환은 과소평가된 시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이 밖에 과대평가된 시인은 기형도, 서정주, 윤동주 등이고 과소평가된 시인은 박목월, 김종삼, 전봉건 등이다. 김수영이 박인환을 경멸한 것은 시샘의 왜곡된 표현이다. 그런 한편 김수영은 '마리서사(茉莉書舍)'란 글에서 박인환이 자신이 가장 좋아한 박일영에게서 시를 얻지 못하고 코스츔만 얻었다고 말했다.(말리茉莉는 목서과의 늘푸른 떨기나무이다.)

 

그런데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김수영은 자신이 박인환처럼 철저한 은자(隱者)가 되지 못한 점에서는 인환과 마찬가지로 박일영의 부실한 제자에 불과하다고 말한 부분이다.

 

김수영의 시는 세 시기로 나뉜다. 모더니즘적 세계관으로 출발하여 6.25를 거치며 인간의 삶의 문제와 그에 대응하는 개인적 정서에 초점을 맞춘 시기, 4.19 기간의 감격과 좌절을 표현한 시기, 소시민적 삶의 비애와 존재의 문제를 탐구하면서 사회적 삶의 조건을 내면화한 시기..(31 페이지)

 

김수영 뿐 아니겠지만 관념적, 추상적 세계 인식이 물질적, 구체적 인식으로 전이할 때 난해함 또는 생경함의 시어들이 많이 완화된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하겠다. 김수영은 모더니즘의 시세계를 보였는데 모더니즘의 시세계에 대해서 우리는 도시인, 소시민 등의 삶의 자리를 지키는 태도라 말할 수 있다. 김수영의 설움은 귀족적, 우월적 태도의 산물이다.(38 페이지)

 

김수영이 일상어와 비속어 등으로 시를 쓴 것은 혁명적인 일이었다. 김수영의 시에서 말해진 자유는 4.19 직후의 시를 빼면 모두 정신적 지향에 관한 것이다.(50 페이지) 김수영이 생각한 자유는 진보적, 낭만적, 정치적 자유이기보다 실존적 의미의 자유이다.(56 페이지)

김수영에게 자유는 환희어(歡喜語)가 아닌 피가 묻어 있는 공포어(恐怖語)로 체험되는 것이다.

 

김수영 시의 핵심 어휘소는 자유이다.(66 페이지) ''은 여러 논자들에 의해 김수영 문학의 극점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런 평가를 내린 이유는 제각각이다.(70 페이지)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인간 군상의 생명력, 존재의 자유(김종철), 어둠 속에 자신을 열어 놓고 흔들리고 있는 풀잎의 부드러운 힘, 마음의 기운, 내적 자유에 이른 공간(정현종), 행복한 시간의 우연(유종호), 시인 자신을 표현한 것(김주연), 정신 편력의 한 극점(김현), 민중을 감춘 실존적 성장의 의미(김준오), 김수영 생애의 한 귀결이었으며 새로운 삶을 위한 절대적 긴장(정과리)...

 

김수영은 을 쓰기 전 해동(解凍)’이란 수필을 썼다. 이 수필 안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 봄의 과제 앞에서 나는 나를 잊어버린다. 제일 먼저 녹는 얼음이고 싶고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철이고 싶다. 제일 먼저 녹는 철이고 싶고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얼음이고 싶다.”(73 페이지)

 

저자는 해동(解凍)’에 의거해 을 시간 변화에 기대지 않는(“바람보다 먼저”, “바람보다 늦게”) 자의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구현한 것이라 풀이한다. 즉 스스로의 변화성(울고, 일어나고, 울고, 웃는)으로 타물(他物: ‘이란 시에서는 바람)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성을 발현한 존재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바람보다 먼저‘, ‘바람보다 늦게는 시적 언어이고 바람과 상관 없이는 일상어이다.)

 

저자는 을 장자(莊子)에 기대어 자화(自化)하는 존재, 독화(獨化)하는 존재로 풀이한다. 설득력 높은 해석이다. 선입관을 배제한 채 이뤄낸 성과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폭포(瀑布)’는 다른 시를 통해 해석하는데 이를 보면 여러 시를 충분히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해동(解凍)’이란 산문을 통해 이란 시를 풀이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시인의 다른 장르의 글들을 다양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저자는 김수영 시가 사후 몇 십년간 독자를 잃지 않는 것을, 그의 시적 담론 구조가 남달리 열린 구조를 가지고 독자와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으로 풀이한다.(106 페이지) 저자는 많은 평자들이 김수영 시 세계의 핵심적 주제를 자유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김수영 시의 텍스트 연구 안에서 이끌어낸 결론이기보다 자유의 이행(현실 참여)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진 결과라고 지적한다.(107 페이지)

 

김수영 연구에서 눈에 띄는 글은 서우석 교수가 시와 리듬에서 개진한 김수영 시의 규칙적 운율 구조 분석이다. 이 책에서 서우석 교수는 김수영 뿐 아니라 김소월, 김영랑, 윤동주, 한용운, 이상, 유치환, 서정주, 김춘수, 박재삼, 김종삼, 황동규, 정현종 등의 시를 리듬에 초점을 두고 분석했다.

 

저자는 김수영 시인을 시어의 혁명성을 이룬 시인으로 파악한다. 이는 김수영 시인이 일상어투와 비속어를 시에 포함시킨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한편 저자는 김수영 시인을 산문을 통하여 시의 이론과 시의 실천이 하나임을 개진한 시인으로 파악한다. 김수영은 시의 사상성과 예술성을 하나로 결합한 시인이기도 하다. 얇지만 포스가 강한 책, ‘김수영 세계의 개진과 자유의 이행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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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 외롭고孤 높고高 쓸쓸한寒
몽우 조셉킴(Joseph Kim) 지음 / 미다스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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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말부터 현재까지 1900, 1910, 1920년대에 태어난 문인들에 대한 글(문인들의 글이 아닌)을 많이 읽고 있다. 정지용, 김기림(이상 1900년대), 윤동주, 백석, 한무숙(이상 1910년대), 김수영, 김춘수(이상 1920년대)..

 

백석의 시는 고향인 평북 정주(定州)의 풍속을 재현한 시들,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하여 유랑하던 시기를 그린 시들, 해방 이후 북한에 정착해 살며 쓴 작품들로 나눌 수 있다. 문인들에 대한 글 가운데 평전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은 백석 평전을 읽는다.

 

저자 몽우 조셉 킴(夢友 Joseph Kim: 김영진)은 화가이다. 1부 백석 평전을 위한 서정적 서설, 2부 화가가 쓴 시인 백석 평전 - 외롭고 높고 쓸쓸한, 3부 백석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 4부 백석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 5부 백석이 사랑한 세계 등 다섯 부로 이루어진 평전에서 그림과 글을 적절히 안배해 드라마틱하고 자유로운 상상력과 견해를 드러내보인 책이 백성 평전이다.

 

저자는 인생에서나 화가로서의 삶에서나 남다른 모습으로 힘든 시간을 살아왔다. 저자가 백석 시를 처음 본 것은 2005(저자 나이 30세 때)이었다. 백석 시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는 저자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장욱진과 같은 유명 화가들이 백석 시로부터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는 말을 한다.

 

저자는 어릴 적 왼손 잡이 화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눈에 보이는 것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망치로 왼손을 내려쳐 못 쓰게 만들고 대신 오른손 잡이 화가가 되었다. 그런 저자는 백석 시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백석 시를 보면서 구상과 추상의 경계가 없어졌다고 하는 저자. 그는 백석 시를 읽으며 한국 말이 아름다운지를 처음 알았다. 저자는 백혈병으로 고생도 했다. 얼마 못 산다는 진단을 받은 상태로 저자는 백석 시를 만났다.

 

그의 시를 보자마자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고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아예 잊고 그림에 빠졌다. 저자는 그 이후 5년이 더 지난 현재(책이 나왔을 무렵)까지 병원 진단과 달리 잘 살고 있다. 저자는 백석 시를 읽으면 하나의 그림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저자의 아버지 김정대씨는 가수 배호를 초기에 키우고 배호가 부른 수많은 노래를 작사, 작곡한 분이다.

 

저자의 아버지는 저자가 백석 시를 사랑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저자는 우리 나라 주요 가요들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며 그 곡들이 백석 시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것이라 말한다. 저자의 책을 통해 우리는 백석 시어들이 이상한(어처구니 없는) 기준으로 군사 정부로부터 금지당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의 아버지에 의하면 백석은 정치적으로 완전한 중립을 유지하려고 애쓴 시인이다. 시인 백석은 고독과 외로움과 슬픔과 서글픔을 겪었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갈매나무와 같이 굳고 정한정결하고 순결한 존재로 자신의 미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백석 시인은 자신을 푸른 갈매나무로 묘사했다. 저자는 슬픔은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도 하고 성공을 주기도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슬픔이 오면 하늘이 나를 가장 귀히 여기고 사랑하기 때문에 성공의 기회를 준 것이라 생각하면서 슬픔 속에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백석 시를 읽으면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행복해지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일을 할 때 결과에 집착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과정에 올인하라고 말한다. 백석은 시 낭송을 할 때 노래하듯 했다고 한다. 높낮이를 두고 리듬에 맞추어서.

 

백석은 세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제자 강소천(姜小泉) 아동문학가에게 그 나라 말을 오래 보존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그 나라 문학을 높은 수준에 올리는 것이고 우리나라의 말을 후세에 이어가게 하는 방법은 좋은 아동문학 작품을 남기는 길이라 말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 로 시작되는 스승의 은혜가 강소천 님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백석을 염두에 두고 지은 작품이다. 백석은 19(1930)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그 모()와 아들이란 소설 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다. 윤동주, 김기림, 노천명, 신경림 등이 백석의 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백석은 고고한 시인이자 민족 정신을 이어받은 오산학교 출신이고 고당 조만식 선생의 제자이다. 그는 독립운동가들 및 여러 세력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기방(妓房)에 출입했다. 백석의 유일한 시집인 사슴에는 33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이는 3.1 독립운동에 서명한 민족 대표의 수와 같다. 의도적으로 33편의 시를 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백석의 제자 강소천도 스승의 정신을 이어받아 호박꽃 초롱33편으로 구성했다. 백석의 시 멧새 소리에는 멧새가 나오지 않고 명태가 나오는 바닷가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멧새가 바닷가를 돌면서 본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백석은 백석(白石), 백석(白奭), 백정(白汀) 등의 필명을 썼다.(물가 정자이다.) 백정은 하얀 달이 물가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백석과 김영한(자야라는 이름으로 유명한)의 사랑은 유명하다. 자야(子夜)는 백석이 김영한 여사에게 지어준 애칭이다. 자야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유래했다. 자야오가는 홀로 된 여인이 남자를 그리워 하는 노래이다.

 

저자는 김영한 여사가 법정 스님을 존경해 길상사를 시주한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백정의 ㅂ ㅈ과 법정의 ㅂ ㅈ의 일치 때문에라고. 저자는 백정(白汀)을 흰 강물에 우뚝 쌓이는 모래로, 법정(法頂)을 물을 건너는 것을 해태가 지키며 우뚝 서 있는 것으로 풀이한다. 백정과 법정의 공통 글자는 고무래 정()이다.

 

권번(券番) 출신의 기녀였던 김영한 여사는 궁녀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발음오행, 수리오행에 능통했고 운명학과 한학 등에도 능통했다. 백석은 오산학교 선배인 김소월(1902 1934)을 매우 선망했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영어에 소질을 보였다.

 

백석이란 이름은 흰 옷을 입은 한민족이 돌과 같이 굳건한 반석 위에 서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백석은 일본에서 유학했는데 거주지는 동경 길상사(吉祥寺) 1875 번지이다. 자야가 이 이름을 성북동의 실상사로 쓴 것이다.

 

김기림(1908 - ?) 시인 이야기도 중요하다. 김기림은 모더니즘 시인이었다. 그는 정지용(1902 1950)을 최초의 모더니스트라 칭한 시인이다. 김기림은 토속적인 시를 쓴 백석의 시도 좋아했다. 절제와 묘사의 멋, 음률과 감정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백석은 친구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 가 시 백 편을 가지고  오리라는 다짐을 하고 만주로 향했다.

 

백석이 그리는 가족적 사상은 민족이 겪는 분열과 이별의 아픔에서 시작한다. 백석의 시에는 헤어짐 후의 눈물과 그리움을 그린 시가 많으며 고향을 떠나 유랑하며 느낀 고향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시들이 많다. 소월(素月)은 흰 달이란 의미이고 백석(白石)은 하얀 돌이란 의미이다.

 

저자는 소월은 다소 자신의 슬픔의 감정에 머무르려 했고 백석은 자신의 슬픔과 민족의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한 독특한 관점이 있다고 말한다. 백석은 미르스키의 논문을 번역한 것을 계기로 소설가에서 시인으로 변신했다.(백석의 출발은 소설가로서였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은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의 영향을 받았다. 윤동주의 병원은 백석의 시기의 바다의 영향을 받았다. 이중섭(1916 1956)은 백석의 시를 좋아하여 시인이 되고 싶어했다.

 

시인은 어디든 구애받지 않고 시를 쓸 수 있지만 화가는 여러 도구가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중섭이 생각해낸 것이 은지화이다. 백석은 캄캄한 밤에 내리는 비를 캄캄한 비라는 함축어로 표현했다. 백석은 모국어를 사랑했고 민족을 사랑했다. 백석은 인간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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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왕릉조성 조선왕실의 의례와 문화 3
신병주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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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천릉(遷陵)이 빈번했다. 풍수상의 이유를 표방했지만 정치적 상황이 더 큰 원인이었다. 왕실의 광(; 뫼 구덩이)의 깊이는 10(3미터), 일반 사대부의 경우는 5 - 6(1.5 1.8미터)이다.

 

태조의 능(건원릉)은 개성의 신의왕후나 정릉의 신덕왕후의 무덤 곁에 조성되지 못했다. 개성은 새 왕조 조선의 첫 왕이 묻힐 곳으로는 부적합했고 신덕왕후 옆에 능이 조성되는 것은 태종에 의해 거부되었다. 건원릉이 구리에 조성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태조의 무덤에는 석실(石室)이 만들어졌다. 현실(玄室; 주검이 안치된 무덤 속 방)을 석실로 할지 회격묘(灰隔墓)로 할지는 동전 던지기로 정했다. 태종이 세자를 종묘에 보내 동전을 던지게 했다. 세조는 석실이 아닌 회격묘로 왕릉을 조성할 것을 유언했다.

 

신의왕후는 처음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가졌었다. 후에 신의왕후로 호칭이 변경된 것이다. 조선 초기 왕릉을 특징짓는 기념비적 조형물은 신도비였다. 조선 초기 왕릉에는 고려 말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능인 현, 정릉에 정릉사를 세운 전례에 따라 능침사찰을 조성했다.

 

태종은 유교 국가로서 기틀을 잡아가야 하는 과정에서 능침에 사찰을 두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 인식했다. 신의왕후의 제릉(齊陵: 개성 판문군 지동)은 여말, 선초 왕릉의 양식으로서 건원릉을 조성할 때 선례가 되었으며 현존 조선 왕릉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오늘날 조선 왕릉의 전범을 확립하는 데 획기적인 왕릉으로 평가받고 있다.

 

능침사찰을 원찰(願刹)이라 한다. 세종은 워낙 효심이 깊은 왕으로 자신이 죽으면 부모 능 가까이 묻어줄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래서 아버지 태종의 헌릉(獻陵: 서초구 내곡동) 서쪽에 능 자리를 정해 놓았다. 수릉(壽陵)을 설정한 것이다. 수릉은 임금이 죽기 전 미리 만들어 두는 무덤을 말한다.

 

세종 당대에도 세종의 무덤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다. 길지(吉地)가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급기야 물길이 흘러나오는 등 풍수지리적으로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예종 때 여주로 옮겼다. 살아 있는 사람의 상하 질서는 좌상우하이고 사자(死者)의 경우 우상좌하이다.(좌우는 당사자가 기준이고, 동서는 보는 사람이 기준이다.)

 

문종의 능인 현릉(顯陵)에 자리한 문인석과 무인석은 모두 미소를 띄고 있다. 아랫사람에게 온화하게 대했다는 문종 시대의 정치 분위기를 반영한 듯 하다. 현릉부터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왕의 치적은 국사(國史)에 실리기에 굳이 사대부처럼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논리에 따라서이다.

 

세종의 영릉(英陵)을 여주를 옮긴 후에도 비를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神道碑)는 사자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말한다. 단종의 장릉(莊陵)은 한양의 궁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능이다. 우상좌하의 원칙을 어기고 남편의 오른쪽에 조성된 능이 소혜왕후 한씨(성종의 모후, 연산군의 할머니)의 능인 경릉(敬陵)이다.

 

소혜왕후의 정치적 비중이 컸음을 반영한다. 큰 영향력을 행사한 왕후로 문정왕후(중종의 두번째 비)를 빼놓을 수 없다.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길 원했다. 그래서 장경왕후(중종의 첫째 비)의 능 옆에 있었던 정릉(靖陵)은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으니 성종의 선릉(宣陵) 옆으로 가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봉은사가 왕릉의 원찰로 기능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작용했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정릉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나 문정왕후는 결국 그 자리에 묻히지 못했다. 문정왕후의 능은 서울시 공릉동의 태릉(泰陵)이다.

 

중종의 능은 원래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희릉(禧陵)이었다. 중종은 먼저 승하한 첫번째 비인 장경왕후의 희릉 옆에 묻혔다. 중종의 능은 처음 희릉으로 불렸으나 대왕이 후비(后妃)의 능호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문제라 하여 정릉으로 명칭 변경했다.

 

문제는 정릉은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다는 문정왕후의 의견을 따라 옮겼는데 그 옆의 희릉은 그대로 두었다는 점이다.(희릉과 정릉은 같은 영역에 있었다. 중종의 능을 정릉이라 이름하기 전에 희릉이라 했던 것은 두 능이 같은 영역에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게 하마비가 있는 능이 세조의 광릉(光陵)이다. 광릉은 금천교가 없는 능이기도 하다. 천릉(遷陵) 또는 천장(遷葬)은 조선 왕릉만이 가졌던 특수한 현상이다. 천릉이란 용어는 조선시대 이전에 없었고 중국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용어이다. 조선시대에는 풍수적 길흉과 함께 추숭(追崇), 복위(復位)와 같 정치적 이유로 천릉이 주로 이루어졌다.

 

왕릉을 조성하기 전 반드시 풍수사(風水師) 또는 상지관(相地官)이 대신과 함께 봉심(奉審; 임금의 명을 받들어 능소나 묘우를 보살핌)하여 능지의 길흉을 판단한 것은 왕릉 조성에서 풍수가 중요 요인이었음을 보여준다.(상지; 땅의 모습을 보고 길흉을 판단하는 일)

 

조선시대에 왕릉을 조성한 후에는 의궤(儀軌)를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전기에 제작한 의궤들은 현재 한 건도 남아 있지 않다. 현존 의궤의 최초의 것은 1600년에 제작한 선조의 비 의인왕후의 장례 관련 의궤들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릉, 정릉과 더불어 태릉(泰陵)과 강릉(康陵: 노원구 소재의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의 경역도 왜적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강릉과 태릉의 경우 왜적이 도굴을 시도했지만 회격묘인 내부 구조로 인해 도굴 위협에서 벗어났다.

 

천릉(遷陵)은 이장(移葬), 개장(改葬), 개묘(改墓) 등의 용어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반묘의 이동은 천장(遷葬)이나 이장(移葬)이란 용어로 굳어지고 왕실의 능원에 대해서는 천릉(遷陵), 천봉(遷奉), 천원(遷園)이란 용어가 일반화되었다.(197 페이지)

 

조선 후기 왕릉 조성 역사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정조가 거행한 사도 세자의 현륭원(顯隆園)으로의 천장, 익종의 수릉(綏陵)의 천릉 등을 통해 알 수 있듯 천릉 양상이 전대보다 비중이 커졌다는 점이 눈에 띈다.(229 페이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永祐園)은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 뒷산)에 있었다.

 

조선 후기 왕릉 조성 역사는 대부분 의궤 기록으로 정리되었고 대부분의 의궤가 현존하고 있다. 왕릉 조성에 관한 역사(役事)는 산릉도감(山陵都監)에서 주관하였고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혼전도감(魂殿都監)과 긴밀한 업무 협조를 통해 진행했다. 산릉도감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침 조성을 관장하였던 임시 관서이다.

 

국장도감은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의 국장에 관한 모든 것을 담당한 기관이다. 빈전도감은 왕의 옥체를 모신 빈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을 총괄했다. 혼전도감은 임금이나 왕비의 국상 중 장사를 마치고 종묘(宗廟)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곳인 혼전의 일을 담당함 기관이다.

 

조선 역사상 왕이 생부와 생모의 무덤을 함께 조성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세종이 태종과 원경왕후의 무덤을 조성한 이래 처음으로 숙종이 부모의 무덤을 모두 조성했다.(230 페이지) 왕이 두 왕비의 무덤을 재위 기간에 조성한 사례는 숙종이 유일하다. 숙종은 세자빈의 신분이었던 경종의 정비 단의왕후 심씨가 1718년 승하하자 경기도 양주에 혜릉을 조성하였는데 이는 현재 동구릉 경역이다.(숙종의 재위 기간은 46년이다.)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는 재능이 비상하고 성격이 과격했다. 명성왕후는 정비로서 세자빈, 왕비, 대비의 세 과정을 모두 거친 유일한 왕비이다. 효종대에 세자빈, 현종의 왕비, 아들 숙종이 왕이 된 후 대비가 된 것이다.(235 페이지)

 

현종(顯宗)과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숭릉(崇陵: 숙종 부모의 능)은 높은 언덕 위에 조성되었고 현재의 동구릉 능역 중 가장 왼쪽 호젓한 곳에 있다. 쌍릉이며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정자각에 팔작지붕을 했다. 성리학이 절정을 이루며 중국화 바람이 불던 시대에 조성된 능이기에 전래의 맞배지붕 정자각에서 벗어나 중국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237 페이지)

 

숙종은 재위 시절에 어머니와 2명의 왕비를 잃은 데 이어 세자빈까지 잃은 아픔을 겪었다. 경종의 빈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가 승하한 것이다.(240 페이지)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에는 유언에 따라 예기시경을 넣었다.(264 페이지)

 

1800628일 정조가 오랜 투병 끝에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했다. 순조가 7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했고 정조의 왕릉인 건릉을 조성하였다. 정조의 묘호는 정종(正宗), 전호(殿號)는 효령(孝寧)으로, 능호는 건릉(健陵)으로 정해졌다. 순조는 재위 기간 중 효명세자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세도정치가 정점을 이루던 철종 대에는 왕과 왕후의 능을 조성하고 천릉하는 일에 대한 첨예한 의논은 보이지 않았으며 대체적으로 왕이나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한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여 국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던 세도정치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313 페이지)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로 격상되면서 왕릉 조성에도 변화가 있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살해된 후 명성왕후의 능은 왕비의 예에 의거해 조성되었지만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명성왕후가 명성황후로 추존되면서 능에도 황후의 위상에 맞는 의례와 양식이 적용되었다.(320 페이지)

 

1910년 조선이 멸망한 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조선 왕실에서는 세 차례 왕과 왕비의 장례식이 있었고 왕릉이 조성되었다. 일제 강점에 의해 국가가 없어지고 황실의 격이 낮아졌다. 따라서 국장 대신에 어장(御葬)이라 불렸고 국가가 없어진 관계로 도감(都監)을 설치하지 못하였다. 이왕직 산하에 몇 개의 주감(主監)을 두어 장례를 주관했다.(325 페이지)

 

왕릉은 유교적 의례와 정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풍수지리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사례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왕릉은 추존 문제와도 연관된다. 추존은 왕위의 정통성 및 왕권 강화와도 관련되어 많은 이야기거리를 낳았다. ‘조선왕실의 왕릉조성은 조선 왕실의 왕릉들을 왕을 중심으로 한 시대별로 정리한 체계적인 책이다. 내게는 관련 책들을 찾아 읽을 필요를 느끼게 한 의미 있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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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 - 일본근대문학과의 비교고찰
시나다 히로코 지음 / 역락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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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히로코(眞田博子: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은 정지용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가 만들어놓은 권위 있는 통념에 구애받지 않고 문헌연구와 작품분석을 통해 나름대로 평가를 내리려고 시도한 책이다.(이 책은 인하대학 박사 논문을 수정, 봉환한 것이다.)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이란 표현은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기림(金起林: 1908 - ?)이 정지용(鄭芝溶: 1902 - 1950)에 대해 한 최초의 모더니스트라는 정의에서 비롯되었다. 정지용은 일본 교토에 유학한 존재로 도시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윤동주가 도시샤 대학을 선택한 것은 그가 스승으로 삼은 정지용이 다닌 학교였기 때문이다. 정지용은 일본에서 대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1885 1942)의 큰 영향을 받았다. 하쿠슈는 다이쇼 말기에 동시(童詩)라는 말을 썼고 정지용이 최초기에 발표한 작품 중에서 동시 개념에 잘 맞는 게 많다.

 

지용 시 어디선가 하쿠슈 냄새가 풍기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하쿠슈가 애용했던 시어나 이미지가 지용 작품에 산견(散見)되기 때문이다.(51 페이지) 하쿠슈와 정지용 작품에 공통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화자(話者)의 존재가 시 뒤에 숨어 전경(前景)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지용의 향수슬픈 인상화를 봐도 거기서 묘사되는 풍경과 화자와의 사이에 어쩔 수 없는 거리가 있어 마치 화자가 풍경 속으로 들어가지 못해 슬픈 눈으로 멀리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56 페이지) 하쿠슈가 일본에서 사상성, 사회비판성을 결여한 시인이라는 평을 받은 것처럼 정지용도 한국에서 비슷한 평을 받았다.(57 페이지)

 

하쿠슈가 형안(炯眼)으로 정지용을 뽑아 추천했듯 정지용은 공평하고 엄격한 전형으로 숨어 있는 신선한 재능을 발굴하려 했다.(58 페이지) 하쿠슈가 그가 편집한 문예 잡지인 근대 풍경의 투고 작품에 지나치게 하쿠슈 냄새가 풍긴다는 비판을 받은 것처럼 정지용은 양주동에 의해 지용의 시풍이 시단을 풍미하는 나머지 많은 신인 시인이 지용의 모방이 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58, 59 페이지)

 

정지용은 자신보다 앞선 한국 근대 시인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61 페이지) 저자는 정지용, 주요한, 김소월 등이 일본어로 시를 쓴 것은 불가피하게 거쳐야 했던 과정이라 말한다.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당연한 것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한국어 구어문체는 개척자들의 외로운 분투 끝에 얻어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63 페이지)

 

저자는 고아는커녕 조혼한 정지용이 일본에서 고아의 꿈이란 시를 쓴 이유를 식민지 청년으로서 문화마저 크게 다른 일본에서 문화적 고아의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 말한다.(73 페이지) 정지용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본명을 그대로 쓸 수 있었지만 발음은 일본 식으로 데이 시요라 했다.

 

같은 도시샤 대학이라 해도 태평양 전쟁 말기라는 억압이 가장 혹독한 시기에 유학 간 윤동주의 어렵고 고독한 상황과는 여러 면에서 큰 차이가 난다.(74 페이지) 정지용의 도시샤 대학 유학은 1923년에서 1929년 사이에 있었다.(윤동주의 경우는 1942년에서 1943년까지이다.)

 

정지용은 일제 강점기 조선민예 연구가로 광화문 철거를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 - 1961의 제자였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윌리엄 블레이크연구자로 유명했다.(저자는 일본에서 블레이크의 선구적 연구자로 알려진 사람은 뜻 밖에도 야나기 무네요시라 말한다.: 116 페이지)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화(民畵)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다. 저자는 정지용을 모더니스트로 본 김기림의 말과 모더니즘은 이마지슴이라는 등식을 삼단논법으로 활용해 정지용 = 이마지스트로 본 이상한 논법이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91 페이지)

 

에즈라 파운드가 만든 이마지슴 3원칙을 보자. 1)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취급할 것, 2) 제시(presentation)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은 절대 쓰지 말 것, 3) 리듬에 관해서는 메트로놈에 의거하지 말고(틀에 박힌 운율을 쓰지 말고) 음악의 악구(樂句: phrase) 같은 흐름으로 시를 지을 것 등이다.

 

저자는 향수‘, ’카페 프란스등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이 시에는 종려나무, 장명등, 루바쉬카, 보헤미안 넥타이, 페이브먼트, 울금향, 대리석(大理石) 이국종 등의 시어가 등장한다. 이 가운데 울금향은 무엇일까? 울금은 향신료이지만 울금(鬱金)향은 튤립이다. 저자의 야나기 무네요시(유종렬; 柳宗悅; 1889 - 1961) 언급은 정지용이 도시샤 대학 시절 야나기 무네요시의 강의를 들었다는 사실이 증언된 것과도 관련지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저자는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해 일본에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선구적 연구자는 뜻 밖에도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말을 한다.(116 페이지) 이 말만으로 부족했는지 사나다 히로코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나 의외로운, 그러나 낯익은 이름에 부딪힌다는 말을 한다.(154 페이지)

 

이는 영문학 전공자가 아닌 야나기 무네요시가 스물 다섯의 나이에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선구적 연구로 큰 화제를 낳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무네요시의 파격은 뜻 밖이란 말, 너무도 의외롭다는 말로 설명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지용은 "'백록담'을 내놓은 시절이 내가 가장 정신이나 육체로 피폐한 때다.. 친일도 배일도 못한 나는 산수에 숨지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다."는 말을 했다.(197 페이지) 당시 친일 강요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뿐 아니라 조선인 문사배(文士輩)들로부터도 있었다.(197 페이지)

 

저자는 조선의 민중예술에 관심이 깊었던 무네요시가 시인 지망생인 정지용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또 정지용이 야나기 교수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그것에 관해서는 남겨진 글이 없어서 수수께끼로 남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20년대 초기시에서 지용이 현실적 사회문제를 직접 묘사하지 않는 작품에 있어서도 사회적 문제를 개인화하고 내면화한 근대인의 고뇌라는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현실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178 페이지)

 

저자는 우주의 질서를 카톨릭이라는 정연한 체계로 이해한다는 것은 암울한 시대에 시인이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며 서양문명의 하나인 카톨릭을 믿는다는 것은 서양에 대한 절망이나 적의를 가질 계기를 없애고 서양제국의 식민지 상태에서 아시아를 해방한다는 대동아전쟁의 허무한 이론에 현혹당해서 친일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 말한다.(179 페이지)

 

해방 후 정지용의 심경은 참으로 참담한 것이었다. 해방 전 '문장'지가 폐간될 때까지는 혹독한 검열 아래에서 그래도 그는 훌륭한 작품을 써서 발표했는데 막상 광복을 맞이하고 나니까 어찌된 일인지 시를 쓸 능력이 다 고갈해 버린 것처럼 도무지 시를 쓰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222 페이지)

 

저자는 정지용의 좌경을 현실을 분석하고 작품에 반영시킴으로써 문학으로 사회현실에 개입하는 의도의 결과로 분석한다.(22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지용의 정치사상은 소박, 온건한 것이었다.(227 페이지)

 

정지용은 시작 활동을 시작했을 당초부터 문학에 사회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다만 그것을 직접 나타내는 것보다 개인적 차원으로 전환시켜서 시적으로 표현하는 게 적당하다고 믿었던 것이다.(229 페이지) 저자는 정지용과 같은 유명인사가 친일행위를 거절한다는 것만 해도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한다.(230 페이지)

 

정지용에게 뚜렷한 친일 작품이 없었다면 그가 그런 대로 저항했었다고 평가해도 될 것이다.(230 페이지) 여태까지 감각 밖에 없는 시로 간주되어 온 작품도 선입견을 버리고 작품 자체를 보면 어떤 때는 강한 사회성을 읽을 수가 있으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현실과 고투하는 자아를 찾을 수가 있다.(231 페이지)

 

1920년대 전반에 일본의 근대적 기제 속에 들어간 지용으로서는 새로운 언어를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낡은 언어로는 근대 도시에 사는 자의 생활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스승 하쿠슈에게서 배운 것은 작품상의 기법만이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삶 전체 즉 새로운 언어를 개척하는 단독자의 자세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지용에게 외국 문학의 영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할 이유는 아무데도 없다. 그는 근대인의 감정을 구어 한국어에 담을 길을 거의 혼자서 개척했다.(231 페이지)

 

정지용 작품에 이르러서야 처음 한국인은 자기 감정의 구석구석까지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얻었다. 민족이라는 것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은 이미 상식으로 되어 있지만 민족의 개념을 확고히 해서 민족의식을 가지기 위해서는 민족고유의 언어라는 것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저자는 자기들의 사상이나 감정을 자유롭게 표할 수 있을 만큼 언어가 성숙해지면 사람들은 마치 먼 옛날부터 그런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해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고 말한다.(232 페이지)

 

감각적 표현이라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하면 근대인 또는 도시인의 생활감정이나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를 처음으로 남김없이 표현했을 뿐 아니라 근대인의 심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창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인 정지용은 한국 문학이 근대로 들어갈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35 페이지)

 

정지용은 문학조류의 하나인 협의의 모더니즘을 도입했을 뿐 아니라 문학의 근대화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김기림의 말대로 최초의 모더니스트라 할 수 있다.

 

사나다 히로코의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은 설득력 높은 책이다. 일본인 연구자의 정지용 분석은 정교한 만큼 신선하다. 야나기하라 야스코란 이름을 윤동주와 관련하여 알게 된 이래 다시 한 사람의 참신하고 신뢰할 만한 연구자를 알게 되어 다행이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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