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위의 손
이기성 지음 / 케포이북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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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시인들의 시를 자신의 감각으로 읽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한 척의 배에 비유될 수 있다. 그 문학적 항해는 길을 잘못 들 수도 있고 좌절해 중도에 항구로 돌아갈 수도 있는 힘들고 고독한 작업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누구나 나름의 비결들에 의지하게 된다. 시 강좌를 듣기도 하고 하나의 시를 불교 선사의 화두(話頭)처럼 오래 잡고 있기도 한다. 나의 경우 시를 읽기 위해 평론가들의 읽기를 등대처럼 활용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내 것으로 착각한 때이기도 하다. 이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독자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신의 힘으로 글을 읽고 쓰는 일이다. 자신만의 안목을 중심으로 읽어야 비판이든 찬사든 의미가 생길 수 밖에 없다 

 

현재 문학평론은 지나치게 이론에 의존하거나 비판정신이 없는 공허한 주례사 같은 글이라는 비판을 받는 장르가 된 지 오래이다. 이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도 나쁘지만 더 나쁜 것은 비판정신이 없는 평론을 쓰는 행위이다. 비판 작업은 독자들로 하여금 바른 안목을 갖게 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비판 없는 평론을 쓰는 일은 기존의 가치관을 되풀이하는 작업 이상이 되지 못한다.

 

평론이 외면받는 현실을 반영하듯 한 평론가는 평론의 무용함에 대한 확인과 절감이 생존의 문제로 다가온다는 글을 쓴 바 있다. 이는 평론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라는 말이다. 이 이후 나에게는 글만 쓰는 평론가들이 교수가 되기를 바라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기본적으로 시가 읽히는 만큼 시 평론도 읽히기를 바란다. 시가 읽힘으로써 평론이 읽히고 평론이 시를 찾아 읽게 하는 선순환은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하지만 과거의 관심을 무색하게 나는 시도 잊고 시평론도 잊고 지내왔다. 그러다가 다시 그들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이는 시도 쓰고 문학평론도 하는 분들에 관심이 생긴 까닭이다. 시를 쓸 때는 인식하지 못하다가 평론가의 입장으로 자신의 시를 보면 부끄럽고 어색하다고 말하는 분들이 꽤 있다. 나는 그런 분들의 균형 감각과 자성적 시각을 높이 산다. ()는 절제된 언어의 축제이다. 이 점을 받아들이면 시인/ 문학평론가들의 그런 자성적 시각은 바람직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평론가들은 시를 정의하는 고유의 안목들을 가지고 있다. 시 쓰기와 평론 작업을 함께 하는 이기성 평론가는 '백지 위의 손' 이전의 책인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에서 시인을 사전꾼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 분이 말하는 사전이란 개인이 만든 가짜 돈을 뜻하는 사전(私錢)이다. 이 분은 시적(詩的) 언어를 시장의 질서를 교란하고 확신의 체계를 누수 시키는 위조화폐로 보았는가 하면 시인들을 견고한 의미의 성벽을 내파(內破)하는 사전꾼들로 보았다. 이 말은 시인은 남다른 감수성과 독특한 창의성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백지 위의 손에서 시를 보는 저자의 시각은 어떻게 드러날까? 저자는 우리의 시가 무감(無感)한 일상을 감염시키기를 바란다. 우리 사회의 무감(無感)과 무각(無覺)이 시가 읽히지 않는 것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시인들은 소리 없이 최선을 다한다. 그 말 없음은 조용한 성실을 의미하기도 하고 시가 위축된 현실을 마주하는 시인들의 침울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저자는 백지 위의 손을 말한다. 이는 손은 백지 위에서 한없이 떨리지만 맞서야 할 현실의 정치적 폐허 앞에서 대담해져간다는 의미로 저자가 한 말이다. 첫 문장에서 저자는 시 쓰기를 사전(私錢)을 만드는 작업에 비유한 이전 작의 문제 의식을 이어 시 쓰기를 관습화된 미학의 영토로부터 보이지 않는 출구를 찾아내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는 언어의 도정(道程)에 비유한다. 나는 이로부터 새로움과 낯선 언어는 변함 없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백지 위의 손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저자가 지난 2009년 용산 참사에 즈음해 쓰인 여러 문인들의 시들 가운데 의미 있는 작품들을 호출해 나름의 시각을 덧붙여 설명한 대목이다. 서정시의 저자로 익숙한 시인들이 참사를 고발하는 시를 쓴 것도 보인다.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시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장르이기에 서정시를 쓰던 분들이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한 시를 쓴 사실이 놀랄 일은 아니다 

 

그곳에서, 그곳에서, 종일 연기가 피어올랐다./ 철거용역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여자들 몇이 쓰러지고/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어른들의 뒤에 숨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사람이 죽지는 않았다...큰 도시가 생겨날 때마다 전쟁은 계속되었다./ 큰 희망과 작은 희망이 벌이는 전쟁,/ 높은 지붕이 낮은 지붕을 삼키는 전쟁/ 망루 끝에 매달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내는 전쟁”(나희덕 시인의 신정 6-1 지구에서 용산 4지구까지중에서) 

 

이 시를 소개하며 저자는 이 시에서 그려지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장면은 어떤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용산의 시체는 권력에 짓밟힌 광주의 훼손된 육체와 겹쳐진다.”고 말한다.(37 페이지) 또한 이영광 시인의 유령 3’을 소개하며 용산의 죽음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중임을 보여준다고 말한다.(47 페이지 

 

저자는 미학의 최전선은 죽음에 대한 예의라 말한다. 실존적 죽음과 사회적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간 우리는 너무 서정시 대 정치시 등으로 시를 나누어 왔다는 생각이 든다. 표제작인 백지 위의 손의 한 구절이 큰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세계 안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타자(他者)와 마주치고 접촉하면서 존재한다.”는 구절이다. 그 타자에 죽음도, 정치권력도 포함된다 

 

시인은 남다른 안목으로 미세한 불편과 환희, 다른 사람들은 둔감하게 보내는 고통을 감지해내는 사람들이고 평론가는 그들의 그런 점을 알아내 시와는 또 다른 정제된 언어로 그 낯선 감각의 언어들을 알리는 사람들이다. 때로 시인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을 평론가가 감지해 내기도 한다. 그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 단서는 평론가의 언어 안에 있다 

 

나는 평론의 단정적 언어가 좋다. 평론은 선언 같고 판결 같은 글이다. 평론에 관심을 두는 일은 시인들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런 내가 평론에서 관심을 두는 미덕은 단호함, 그리고 이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평론가들의 내공이다. 저자가 말했듯 시 쓰기는 타자를 환대하는 일, 원고지의 백색의 공포를 견디는 일이다. 언젠가 나도 타자를 환대하는 대열에 설 수 있기를 바라며 백지 위의 손을 덮는다. 오래도록 동반자로 삼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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