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왕릉조성 조선왕실의 의례와 문화 3
신병주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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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천릉(遷陵)이 빈번했다. 풍수상의 이유를 표방했지만 정치적 상황이 더 큰 원인이었다. 왕실의 광(; 뫼 구덩이)의 깊이는 10(3미터), 일반 사대부의 경우는 5 - 6(1.5 1.8미터)이다.

 

태조의 능(건원릉)은 개성의 신의왕후나 정릉의 신덕왕후의 무덤 곁에 조성되지 못했다. 개성은 새 왕조 조선의 첫 왕이 묻힐 곳으로는 부적합했고 신덕왕후 옆에 능이 조성되는 것은 태종에 의해 거부되었다. 건원릉이 구리에 조성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태조의 무덤에는 석실(石室)이 만들어졌다. 현실(玄室; 주검이 안치된 무덤 속 방)을 석실로 할지 회격묘(灰隔墓)로 할지는 동전 던지기로 정했다. 태종이 세자를 종묘에 보내 동전을 던지게 했다. 세조는 석실이 아닌 회격묘로 왕릉을 조성할 것을 유언했다.

 

신의왕후는 처음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가졌었다. 후에 신의왕후로 호칭이 변경된 것이다. 조선 초기 왕릉을 특징짓는 기념비적 조형물은 신도비였다. 조선 초기 왕릉에는 고려 말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능인 현, 정릉에 정릉사를 세운 전례에 따라 능침사찰을 조성했다.

 

태종은 유교 국가로서 기틀을 잡아가야 하는 과정에서 능침에 사찰을 두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 인식했다. 신의왕후의 제릉(齊陵: 개성 판문군 지동)은 여말, 선초 왕릉의 양식으로서 건원릉을 조성할 때 선례가 되었으며 현존 조선 왕릉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오늘날 조선 왕릉의 전범을 확립하는 데 획기적인 왕릉으로 평가받고 있다.

 

능침사찰을 원찰(願刹)이라 한다. 세종은 워낙 효심이 깊은 왕으로 자신이 죽으면 부모 능 가까이 묻어줄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래서 아버지 태종의 헌릉(獻陵: 서초구 내곡동) 서쪽에 능 자리를 정해 놓았다. 수릉(壽陵)을 설정한 것이다. 수릉은 임금이 죽기 전 미리 만들어 두는 무덤을 말한다.

 

세종 당대에도 세종의 무덤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다. 길지(吉地)가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급기야 물길이 흘러나오는 등 풍수지리적으로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예종 때 여주로 옮겼다. 살아 있는 사람의 상하 질서는 좌상우하이고 사자(死者)의 경우 우상좌하이다.(좌우는 당사자가 기준이고, 동서는 보는 사람이 기준이다.)

 

문종의 능인 현릉(顯陵)에 자리한 문인석과 무인석은 모두 미소를 띄고 있다. 아랫사람에게 온화하게 대했다는 문종 시대의 정치 분위기를 반영한 듯 하다. 현릉부터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왕의 치적은 국사(國史)에 실리기에 굳이 사대부처럼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논리에 따라서이다.

 

세종의 영릉(英陵)을 여주를 옮긴 후에도 비를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神道碑)는 사자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말한다. 단종의 장릉(莊陵)은 한양의 궁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능이다. 우상좌하의 원칙을 어기고 남편의 오른쪽에 조성된 능이 소혜왕후 한씨(성종의 모후, 연산군의 할머니)의 능인 경릉(敬陵)이다.

 

소혜왕후의 정치적 비중이 컸음을 반영한다. 큰 영향력을 행사한 왕후로 문정왕후(중종의 두번째 비)를 빼놓을 수 없다.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길 원했다. 그래서 장경왕후(중종의 첫째 비)의 능 옆에 있었던 정릉(靖陵)은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으니 성종의 선릉(宣陵) 옆으로 가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봉은사가 왕릉의 원찰로 기능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작용했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정릉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나 문정왕후는 결국 그 자리에 묻히지 못했다. 문정왕후의 능은 서울시 공릉동의 태릉(泰陵)이다.

 

중종의 능은 원래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희릉(禧陵)이었다. 중종은 먼저 승하한 첫번째 비인 장경왕후의 희릉 옆에 묻혔다. 중종의 능은 처음 희릉으로 불렸으나 대왕이 후비(后妃)의 능호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문제라 하여 정릉으로 명칭 변경했다.

 

문제는 정릉은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다는 문정왕후의 의견을 따라 옮겼는데 그 옆의 희릉은 그대로 두었다는 점이다.(희릉과 정릉은 같은 영역에 있었다. 중종의 능을 정릉이라 이름하기 전에 희릉이라 했던 것은 두 능이 같은 영역에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게 하마비가 있는 능이 세조의 광릉(光陵)이다. 광릉은 금천교가 없는 능이기도 하다. 천릉(遷陵) 또는 천장(遷葬)은 조선 왕릉만이 가졌던 특수한 현상이다. 천릉이란 용어는 조선시대 이전에 없었고 중국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용어이다. 조선시대에는 풍수적 길흉과 함께 추숭(追崇), 복위(復位)와 같 정치적 이유로 천릉이 주로 이루어졌다.

 

왕릉을 조성하기 전 반드시 풍수사(風水師) 또는 상지관(相地官)이 대신과 함께 봉심(奉審; 임금의 명을 받들어 능소나 묘우를 보살핌)하여 능지의 길흉을 판단한 것은 왕릉 조성에서 풍수가 중요 요인이었음을 보여준다.(상지; 땅의 모습을 보고 길흉을 판단하는 일)

 

조선시대에 왕릉을 조성한 후에는 의궤(儀軌)를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전기에 제작한 의궤들은 현재 한 건도 남아 있지 않다. 현존 의궤의 최초의 것은 1600년에 제작한 선조의 비 의인왕후의 장례 관련 의궤들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릉, 정릉과 더불어 태릉(泰陵)과 강릉(康陵: 노원구 소재의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의 경역도 왜적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강릉과 태릉의 경우 왜적이 도굴을 시도했지만 회격묘인 내부 구조로 인해 도굴 위협에서 벗어났다.

 

천릉(遷陵)은 이장(移葬), 개장(改葬), 개묘(改墓) 등의 용어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반묘의 이동은 천장(遷葬)이나 이장(移葬)이란 용어로 굳어지고 왕실의 능원에 대해서는 천릉(遷陵), 천봉(遷奉), 천원(遷園)이란 용어가 일반화되었다.(197 페이지)

 

조선 후기 왕릉 조성 역사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정조가 거행한 사도 세자의 현륭원(顯隆園)으로의 천장, 익종의 수릉(綏陵)의 천릉 등을 통해 알 수 있듯 천릉 양상이 전대보다 비중이 커졌다는 점이 눈에 띈다.(229 페이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永祐園)은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 뒷산)에 있었다.

 

조선 후기 왕릉 조성 역사는 대부분 의궤 기록으로 정리되었고 대부분의 의궤가 현존하고 있다. 왕릉 조성에 관한 역사(役事)는 산릉도감(山陵都監)에서 주관하였고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혼전도감(魂殿都監)과 긴밀한 업무 협조를 통해 진행했다. 산릉도감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침 조성을 관장하였던 임시 관서이다.

 

국장도감은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의 국장에 관한 모든 것을 담당한 기관이다. 빈전도감은 왕의 옥체를 모신 빈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을 총괄했다. 혼전도감은 임금이나 왕비의 국상 중 장사를 마치고 종묘(宗廟)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곳인 혼전의 일을 담당함 기관이다.

 

조선 역사상 왕이 생부와 생모의 무덤을 함께 조성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세종이 태종과 원경왕후의 무덤을 조성한 이래 처음으로 숙종이 부모의 무덤을 모두 조성했다.(230 페이지) 왕이 두 왕비의 무덤을 재위 기간에 조성한 사례는 숙종이 유일하다. 숙종은 세자빈의 신분이었던 경종의 정비 단의왕후 심씨가 1718년 승하하자 경기도 양주에 혜릉을 조성하였는데 이는 현재 동구릉 경역이다.(숙종의 재위 기간은 46년이다.)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는 재능이 비상하고 성격이 과격했다. 명성왕후는 정비로서 세자빈, 왕비, 대비의 세 과정을 모두 거친 유일한 왕비이다. 효종대에 세자빈, 현종의 왕비, 아들 숙종이 왕이 된 후 대비가 된 것이다.(235 페이지)

 

현종(顯宗)과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숭릉(崇陵: 숙종 부모의 능)은 높은 언덕 위에 조성되었고 현재의 동구릉 능역 중 가장 왼쪽 호젓한 곳에 있다. 쌍릉이며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정자각에 팔작지붕을 했다. 성리학이 절정을 이루며 중국화 바람이 불던 시대에 조성된 능이기에 전래의 맞배지붕 정자각에서 벗어나 중국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237 페이지)

 

숙종은 재위 시절에 어머니와 2명의 왕비를 잃은 데 이어 세자빈까지 잃은 아픔을 겪었다. 경종의 빈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가 승하한 것이다.(240 페이지)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에는 유언에 따라 예기시경을 넣었다.(264 페이지)

 

1800628일 정조가 오랜 투병 끝에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했다. 순조가 7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했고 정조의 왕릉인 건릉을 조성하였다. 정조의 묘호는 정종(正宗), 전호(殿號)는 효령(孝寧)으로, 능호는 건릉(健陵)으로 정해졌다. 순조는 재위 기간 중 효명세자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세도정치가 정점을 이루던 철종 대에는 왕과 왕후의 능을 조성하고 천릉하는 일에 대한 첨예한 의논은 보이지 않았으며 대체적으로 왕이나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한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여 국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던 세도정치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313 페이지)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로 격상되면서 왕릉 조성에도 변화가 있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살해된 후 명성왕후의 능은 왕비의 예에 의거해 조성되었지만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명성왕후가 명성황후로 추존되면서 능에도 황후의 위상에 맞는 의례와 양식이 적용되었다.(320 페이지)

 

1910년 조선이 멸망한 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조선 왕실에서는 세 차례 왕과 왕비의 장례식이 있었고 왕릉이 조성되었다. 일제 강점에 의해 국가가 없어지고 황실의 격이 낮아졌다. 따라서 국장 대신에 어장(御葬)이라 불렸고 국가가 없어진 관계로 도감(都監)을 설치하지 못하였다. 이왕직 산하에 몇 개의 주감(主監)을 두어 장례를 주관했다.(325 페이지)

 

왕릉은 유교적 의례와 정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풍수지리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사례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왕릉은 추존 문제와도 연관된다. 추존은 왕위의 정통성 및 왕권 강화와도 관련되어 많은 이야기거리를 낳았다. ‘조선왕실의 왕릉조성은 조선 왕실의 왕릉들을 왕을 중심으로 한 시대별로 정리한 체계적인 책이다. 내게는 관련 책들을 찾아 읽을 필요를 느끼게 한 의미 있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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